장편소설
因緣
<제3편 세상꽃>
⑤ 오막살이 봄꽃-15
경산이 두 번째로 서두에다가 보태는 말을 더하자, 장찬지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달력에 날자마다 양력은 큰 숫자로, 음력은 작은 숫자로 박히어있었고, 그 옆에 음력 날자와 함께 잔글씨로 일진이 곁붙어있었다.
이 일진은 간혹 요소에 쓰이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남녀의 동침에 아들딸을 가리어 배태하는데 쓰인다는 사실을 장찬지는 새삼스레 깨달을 수가 있었던 거였다.
경산이 말하였다.
“그 법은 간지(干支)와 지지(地支)가운데, 간지를 쓰는데 임일(壬日)이나, 갑일(甲日)을 택해서 동침하라는 거요.”
장찬지는 경산이 말하는 임일과 갑일을 치부책에 적어놓기는 하였으나, 도대체 그날이 실제로 어느 일진에 해당되는 날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말씀을 얼추 알아듣기는 하겠는데요, 더 자세히 일러주셔야 확실하게 알겠습니다. 임일이면 어느 날이고, 갑일이면 어느 날인지를 전, 잘 모르겠군요.”
그는 치부책에 임일과 갑일을 적었지만, 간지만으로 되어있어서 어느 지지와 만나는 날인지는 똑똑히 알 수가 없다는 거였다.
“달력에 나오는 일진 중에서 임(壬)이나 갑(甲)을 머리한 일진을 말하는 거지요. 말하자면, 임을 머리한 일진은 임자 임인 임진 임오 임신 임술 이렇게 여섯 가지밖에 없는데, 이 중에 어느 날이든 좋다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갑을 머리한 날을 택해도 좋은데, 일진은 갑자 갑인 갑진 갑오 갑신 갑술 이렇게 여섯 가지밖에 없다오. 다시 말하면 임일이란 임을 머리한 일진이고, 갑일이란 갑을 머리한 일진이니, 달력을 보면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소. 이 임일과 갑일은 여드레 만에 오고 또, 하루를 지나서 오니 열흘에 두 번씩 옵니다.”
경산이 자세하게 풀어서 말하자, 그제야 장찬지는 알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치부책에 일일이 일진을 적어놓았다.
그가 알만 하여지는 듯이 보이자, 경산이 문득 몸을 일으키었다. 그리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둘러보니 아까 골뜸댁의 말마따나 주방이 북쪽에 있는지라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자면 거꾸로 자는 게 되었다. 그것을 기준삼아 보면, 집은 동향집에 동향대문을 내었다.
경산은 안방을 둘러본 뒤에 또 다른 방들을 들어가 보다가 마침 북쪽으로 창문이 트이고, 동쪽으로 출입문이 트인 방을 들어가 보자, 이내 뒤따르는 장찬지내외에게 말하였다.
“내가 말하는 방이 바로 이 방이오. 이 방을 침실로 하는 게 좋겠소.”
마침 그 방은 다다미방으로 되어있는 데에다가 살림살이도 별로 없이 그냥 비어있는 방이라 침실로 쓰기에 알맞았다. 더욱이 창밖으로 드넓은 들녘이 한눈으로 내다보이는 게 시원스러웠다.
“서울마나님, 이 방에서 자믄 소원성취하겠어유?”
골뜸댁이 좋아라고 물었다.
“그렇소!”
경산이 명쾌히 대답하였다.
경산은 방들을 둘러본 뒤에는 또 밖으로 나왔다. 동향집에 동향대문은 맞지 않았다. 동서는 서로 상충하는 까닭에 흉하였다. 흉이란 득(得)이 없고 실(失)이 있다는 뜻이었다. 말하면 얻는 건 없고, 잃는 건만 있으니, 아들을 낳는 건 얻는 것이고, 딸을 낳는 건 잃는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울안의 정원이 넓어서 길상이었으나 득이 없는지라 딸부자가 되었다.
경산은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따라 나온 장찬지에게 말하였다.
“대문 안에 수새(樹塞)를 막아야겠소.”
“수새가 뭔가요?”
경산이 수새를 막으라고 하자 장찬지는 수새가 무언지 몰라서 또 묻는 거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채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데, 그렇지 않게 가려주는 걸 수새라고 하오. 상록수를 한 줄로 심거나 아니면, 목조나 철제로 안이 보이지 않게 칸막이를 치는 거요.”
“아!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경산의 설명을 들은 장찬지는 그제야 깨닫겠는지 또 치부책에 적었다.
“그리고 오늘 내가 할 말의 마지막 한 가지가 있소.”
경산이 말하자, 장찬지가 문득 정중한 자세로 몸을 다스리더니, 허리를 굽실거리었다.
“어려우시더라도,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경산은 나무숲으로 해가 기웃하여지는 일식주택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 창문으로 정사각형의 문살이 깔끔하게 밝아보이었다.
해방 전 천복이 태어날 무렵에 살았던 한남동 찬바람재의 양지바른 일본주택이 떠올랐다. 정읍의 덕두리에서 서울로 갈 무렵 일본군부대 군납업을 하던 맏아들 동룡이 주선하여 살게 하였던 두현 씨 가솔들의 살림집이었다.
용산에서 서빙고쪽으로 트인 강변찻길은 높다란 돌 축대와 시멘트 가이당(계단) 그 아래로 한강줄기와 함께 가로질러있었다. 그렇지만, 그 집이 이 장찬지의 집만큼 크지는 못하였다.
그 무렵 경산은 서울장안에서 구해온 석류나무 한 그루를 정원에 심었었다. 비록 삼년도 채우지 못하고 일본이 패망한 직후 양키들에게 집을 내주는 수모를 겪었지만, 심어놓은 석류나무가 살아있는 동안 정읍댁은 아들 삼형제를 낳게 된 거였다.
경산은 잠시 꿈에서 깨어나듯이 말하였다.
첫댓글 용산과 서빙고는 고교시절 날마다 지나치던 곳이라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태원 네거리에는 콜트장군의 동상이 서있었는데 요즘은 보이지 않습니다
삼각지와 한남동은 일제가 미제에게 바톤을 물려준 외국군의 아지트입니다.
도심 한 가운데서 외국군이 판치다니 지금은 철수했지만 아군이든 외국군대든 전선으로 가야하는 것 아닙니까?
(콜트 장군의 동상도 옮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