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군 북면 무등산 바로 동쪽에 자리잡고 있고, “흰(白) 거위(鵝)들이 산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듯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흰 거위가 노닐었다”는 전설에 따라 “희어산”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석회암으로 된 하얗고 미끈한 바위들이 산릉에 줄지어, 혹은 산비탈을 가득 채우고 늘어서 있으며, 그 중 여러 암봉이 보기에 따라서는 흰 거위와 같은 동물의 모양을 닮았다고 할 독특한 외형을 하고 있다.
이 백아산은 봄 신록이 돋아오를 무렵 우리나라 재래종인 연분홍 철쭉이 산록을 뒤덮으며 선경(仙境)을 이룬다. 이곳의 철쭉꽃밭은 평평하게 펼쳐진 단순한 풍경보다는 여기저기 둥글게 무리지어서, 그 무리 하나마다가 또한 하나의 커다란 꽃인양 능선에 펼쳐져 있다. 철쭉 무리의 뒷 배경으로 진초록 산릉과 기암봉이 여백을 채우며 자리잡고 있어 급이 높은 철쭉 명산으로 쳐주고 있다한다. 다만 철쭉밭 규모는 작지만, 짜임새가 워낙 뛰어나 봄마다 많은 사람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여순 사건 및 한국전쟁 당시 사단급 규모의 빨치산 전남지역 총사령부가 주둔하여 부근 지역에 병기공장을 건립하고, 노치 동화석골에 진지를 구축하여 활동하다가 1년 이상이나 교전(마당바위 부근)을 치루던 끝에 오키나와 미공군 전폭기의 지원을 받은 군경합동작전에 의해 소탕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동족상잔의 아픔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매년 5월초에 열리는 백아산 철쭉제를 통해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서 희생된 수많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고 한다.
백아산의 마당바위는 조망처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서 전남 내륙의 거의 모든 산을 조망할 수 있다. 북쪽으로는 담양의 병풍산·추월산, 곡성의 괘일산·설산, 서쪽으로는 광주의 무등산, 동쪽으로는 조계산·지리산·백운산, 남서쪽으로는 모후산·옹성산, 그리고 물고기 비늘처럼 은빛 물결을 반짝이는 동복수원지가 보인다.
백아산 625 전적지
백아산은 백운산, 지리산과 함께 빨치산의 최강부대인 전남 빨치산의 본거지로 모든 빨치산 참가자들에게는 3대 성지로 추앙 받는 곳이다. 이곳은 위치상 광주, 전남의 중심지일뿐더러 산세가 조밀하여 유격활동의 최적지인데서 육이오 전쟁 이전부터 유격전의 중심지였고, 입산 투쟁이 재개된 1950년 9월 28일 이후에는 이곳 곳곳이 요새 아닌 곳이 없었으니 용곡2구 약수마을에는 빨치산의 총수인 전남도당위원장 박영발(경북 봉화출신)이, 용곡1구 용촌마을에는 전남도당부가 있었으며, 수리에는 전남유격대 총사령부가, 원리에는 광주부대와 북면당이, 송단 3구 평지마을에는 곡성군 당부가, 송단2구 강례마을에는 전남도당학교가 있었다. 이 산속 곳곳에 발동기와 연자방아를 두어 탄약과 식량의 자급조달을 하였다고 한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이후 백아산을 중심으로 공비들이 출몰 민가로부터 식량 등을 약탈해감에 따라 공비소탕을 목적으로 국군 15연대 3대대를 주둔시키고 입산자 가족을 색출하여 아산국민학교에서 약 50여명을 처형했다. 공비소탕가 공비들의 습격으로 인하여 1950년 6.25 이후 북면거주 양민들은 국군주둔지로 피난하였는데 전체 면민 2,000세대의 70%인 1,400여세대가 이서면 월산, 담양군 대덕면, 창평면, 고서면, 곡성군 오산면, 겸면으로 피난하였으며, 1950년 10월부터 1951년 4월까지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는데 밤에는 공비들이 낮에는 아군이 주민들이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을 쌍방에서 학살하였는데 약1,000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1951년 7월 20일경 안개낀 날씨를 이용 화순경찰서 2개소대와 광산경찰서 중대병력으로 죽기를 각오로 진격하여 고지를 탈환하고, 탈환한 고지를 지키기 위하여 타서 에서 동원되어온 서남지구경찰대(목포, 무안, 해남, 강진)와 노무원 480여명을 주둔시켰다. 그러나 다음날 수 많은 빨치산들이 이들을 완전포위 진격하여 480여명 전부가 전사 당하였다. 1951년 춘기공세로 이산의 진산인 마당바위가 위협을 받자 도당지휘부가 노치리 갈갱이마을로, 전남유격대 총사령부는 노치마을로 옮겨 문바위에서 보름재와 차일봉에 이르는 토산능선과 중간지점인 3각고지에서 곡성 매봉과 화순매봉에 이르는 능선과 계곡 등이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어 군경의 토벌전이 불가능했다.
51년 여름 백아산 토벌작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군경합동연합본부는 광주 미 고문단과 협조, 일본 오끼나와에 있는 미군 전폭기를 요청 공격하기로 결정을 보고, 광주 20연대 전남경찰국 1개대대, 화순 경찰부대, 담양, 곡성 경찰대 연합으로 전폭기를 앞세워 수회 반복공격과 폭격을 가하여 대다수를 섬멸하였다. 이때 백아산 유격대는 미군 제트 전폭기를 격추하는 등 막강한 전선을 형성했으나 전폭기의 피폭을 받아 다수의 병력을 잃게되자 1951년 11월 이곳에서 백운산으로 도당부를 옮겼으나 그 뒤에도 이곳이 중심 축이 되어 저항해 왔으며 2대 김선우 위원장(보성출신), 3대 박갑출 위원장(화순출신) 등을 위시한 수많은 빨치산들이 55년까지 처절한 싸움을 전개해 온데서 이산을 첫 번째 요충지로 일컫는다. 백아산 토벌작전은 3년여의 세월을 소모했고 물자와 인명의 피해가 극심했던 전투였다.
- 출처: 백아산 자연휴양림 관리사무소 -
총사업비 20억원을 들여 2012년12월20일 완공한 백아산 하늘다리는 해발 756m 지점의 마당바위와 절터바위를 연결하는 연장 66m, 폭 1.2m의 산악 현수교량이다. 최대 130명이 동시에 지나갈 수 있도록 시공되었다. 다리 중앙에 가로 40㎝, 세로 1m 크기의 강화유리 조망창 3곳이 설치돼 마치 하늘 위를 걷는듯한 스릴을 느낄 수 있다.
화순군은 사업비 20억원을 들여 지난해 12월 백아산 하늘다리를 완공했다. 이 하늘다리는 해발 756m 지점의 마당바위와 절터바위를 연결하는 연장 66m, 폭 1.2m의 산악 현수교량으로 최대 130명이 동시에 지나갈 수 있도록 시공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