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은 백두대간의 남쪽 끝인 지리산에서 호남정맥의 동쪽 끝인 광양 백운산까지, 천리가 넘는 산줄기 안의 68개 물줄기가 모인 강이다. 이 긴 산자락 계곡 계곡이 모두 섬진강의 발원지인 셈이다.
전북 진안·임실·순창·남원, 전남 화순·장흥·보성·곡성·구례·순천·광양, 경남 하동 등 3개 도(道), 12개 지자체에 걸쳐 있는 섬진강은 유역면적(4897㎢)과 본류의 길이(225km)로 볼 때 남한에서는 한강과 낙동강, 금강에 이어 4번째로 크고 긴 강이다.
◆섬진강 물길은 직경 30cm 파이프 = 발원지 진안을 지나 조금씩 강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섬진강은 임실에서 거대한 옥정호(섬진강댐)로 흘러든다.
총저수량 4억6600만㎥, 이 거대한 호수의 물은 그러나 대부분 서해안 새만금 수계로 빠져나간다. 여름철이면 옥정호의 물은 두 개의 취수구를 통해 초당 30톤, 하루 310만톤이 동진강 수계로 빠져나간다. 칠보발전소의 발전용수, 김제평야와 계화도 간척지의 관개용수로 공급되는 것이다.
그러나 순창군 쪽으로 내려가는 섬진강 본류는 거의 시냇물 수준이다. 섬진강댐에서 하류로 방류되는 ‘하천유지용수’는 하루 3만~7만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수자원공사 섬진강댐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2006년 섬진강댐의 총 방류량 가운데 본류로 흘러간 수량은 3100만톤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모두 동진강 수계로 방류됐다.
동진강 수계로 빠져나가는 물줄기를 보려면 27번 국도에서 운암교를 건너기 전, 749번 지방도를 타고 정읍 방면으로 가면 된다. 정읍시 산외면 종산리에 가면 거친 물보라를 일으키며 관개용 수로로 내려가는 엄청난 물줄기를 만날 수 있다.
이 물줄기는 칠보발전소 발전용수와 함께 ‘징게망게’(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김제·만경 평야를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부른다) 3만헥타르의 농경지를 적신다. 섬진강에서 빠져나간 물이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의 젖줄을 이루는 것이다.
반면 섬진강 본류 수계로는 하루 최대 7만톤의 물만 공급된다. 7만톤이란 수량은 섬진강댐의 평상시 최대 방류량이다. 홍수가 나서 댐 위에 있는 수문을 여는 경우가 아니라면, 섬진강 본류로 가는 물길은 직경 30cm의 조그만 파이프밖에 없다. 방류량을 줄일 수는 있어도 더 늘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만이 ‘희망’인가, ‘문제’인가 = 이런 탓에 옥정호(섬진강댐) 하류에서 순창을 지나 곡성군 경계에 이를 때까지 섬진강은 제대로 된 강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김용택 시인이 섬진강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임실 덕치의 천담리, 구미리 적성강 구간도 수량이 너무 적어 제대로 된 강의 맛을 느끼기 힘들 정도다. 강바닥엔 미끌미끌한 물이끼가 끼어 있고, 기기묘묘한 강변 암반지대는 허옇게 말라붙은 오염물질 투성이다.
원래 강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바닥이 깎이고, 침적토가 쌓이고, 새로운 물길이 생기고, 때로는 마르기도 한다. 자연 생태계와 사람들의 문화는 이런 강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서로를 정화하며 수천년 동안 진화해왔다.
그러나 댐은 ‘홍수와 갈수(渴水)’라는 강의 변화를 통제한다. 침전물과 영양소를 가두고 물고기들을 비롯한 많은 생물들의 이동을 막아버린다. 댐은 강물의 온도와 화학적 조성을 바꾸고 침식과 퇴적과 같은 지질학적 과정까지 방해한다.
박노해 시인은 그래도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노래했지만,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곳곳에서 우리는 ‘사람만이 문제’임을 절감하게 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자원공사가 섬진강댐 재개발사업을 통해 본류 방류량을 조금 늘릴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개발사업은 총 2250억원의 공사비를 들여 직경 13.5m, 길이 650m의 비상여수로를 새로 만들고 원래 수몰예정지역 안에 있는 마을을 이주시킨 후 댐 저수량을 연간 6500만톤 정도 늘리는 것이다.
섬진강댐 관리단 관계자는 “비상여수로를 만들어 홍수조절능력을 늘리기 위한 사업”이라며 “늘어나는 저수량만큼 섬진강 본류로 내려보내는 하천유지용수량도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길 좋아진다고 삶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 사람들은 섬진강의 물만 빼앗아 간 것이 아니었다. 덕치면 천담마을의 경우, 도로공사로 강 건너 있던 ‘보지샘’(여성 성기 형상의 샘)이 사라졌고, 다리 공사 이후 마을 입구의 장승마저 감쪽같이 없어졌다.
임실군 청웅면 옥전리의 ‘할아버지 장승’은 10년 전 ‘할머니 장승’을 도둑맞아 새 장가를 들었다. 그런데 5년 전에는 이 할아버지 장승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돈을 모아 할아버지 장승까지 새로 깎아 세워야 했다.
장구목 계곡의 ‘요강바위’는 8년 전에 도난을 당해 경기도 용인까지 옮겨지는 수난을 당했다. 당시 범인들은 “마을까지 무상으로 길을 닦아주겠다”며 대형 크레인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을 낸 다음, 50톤이 넘는 요강바위를 대형 트럭에 실어 훔쳐갔다고 한다. 다행히 언론 보도와 시민 제보로 요강바위는 제자리를 찾았지만 주민들은 아직도 그 일이 바로 어제 일어난 일인 양 분노하고 있다.
요즘 섬진강 일대에는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전주에서 순창으로 가는 27번 국도 4차선 확장사업이 거의 고속도로 수준으로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