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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란 무엇인가? - 두 번째 강의
1998,10,26 이근호 (이명호 씀)
[ 죄란 무엇인가? 2 ]
* 죄로부터 시작하지 않은 것은 복음이 아니다. 죄를 모르면 어떤 해석도 자기 위주로 해석을 해 버린다. 죄를 모르게 되면 결국 자기긍정으로 넘어가고 만다. 자기 긍정은 결국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 되고 만다.
* 물리학에서 어떤 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그 빠진 사람이 운동화 끈을 잡아 당겨서 자기를 구원할 수가 없다. 안 된다. 자아의 죄를 모르게 되면 자아가 자기를 구원하는 식이 되 버린다. 죄를 알게되면 구원을 포기하게 된다.
* 어떤 구원을?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구원법을 포기하게 된다. 그런데 그 포기하는 그것이 또한 방법이 된다고 구원되는 것 또한 아니다. '포기했으니 착하구나' 라고 해서 구원해 주는 법은 없다. 그것은 아직 포기를 덜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포기하는 척만 했을 따름이다. 포기를 통해서 포기를 안하고 있는 것이다.
* 현대 교인들이 교회 오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 항의 방문단 파견하는 것과 같다. 왜 하필 나를 힘들게 했습니까? 이런 모습인데 그 모습은 찬양과 감사와 헌금으로서 토해 내고 있다.
* '죄로부터 시작을 했다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하는 말은 나와서는 안되고, 결국은 구원이라는 문제에서 떠나 버려야 된다. 인간이 구원문제에서 떠나 버리면, 오직 하나님 하실 일만 남아 있다. 이것을 구속사라 한다. 말씀이 앞서가는 것을 구속사라 한다.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 구속사 - 개인의 구원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 여기에만 관심 두는 것이 구속사다. 자기 죄를 알게 되면 출 14:14처럼, "그냥 가만히 있어라!" 이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인간은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이 말씀을 두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을 실시하려고 한다.
* 마치 어떤 노처녀가 시집 갈려고 기도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가만히 있어라 했다. 그 처녀가 가만히 있음을 실시했다. 그런데 아직 시집을 못 갔다. 여기에 대해 그 처녀가 하는 말은 - '가만히 있었는데 왜 아직 시집 못 갑니까!' - 이 상황이 벌어진다. 그러나 출애굽기 14장14절의 말씀, "가만히 있어라" 라는 그 말씀이 어디 그냥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인가? 그 말씀의 뜻은 다른 것이 아니다.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 이 말씀의 뜻은,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예, 주여 죄인입니다.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막달라 마리아 같은 반응을 기대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나는 죄인이니까 가만히 있겠어!' - 이렇게 나오는 이것은 자기 죄에 대한 자기 죄를 커버하는 식으로 써먹을 가능성이 있다. '네 죄를 알렸다' 하고, '나, 가만히 있었습니다' 하?것하고는 말이 다르다. 태도가 다른 태도이다.
* 내주를 가까이 라는 찬송을 부를 때 다같이 찬송을 불러도, 막달라 마리아 같은 마음과 그렇지 않고 반항하는 식의 찬송은 다르다. 당신 마음대로 해라는 식의 찬송과는 다르다. 어떤 노래를 불러도 두 가지 뉘앙스가 나온다.
* 우리는 우리를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은 우리 죄를 지적하기를 원한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내 때문에 죽어야 되는가, 그 정도로 내가 나쁜 놈인가 하는 그런 관점에서 자기를 바라보지를 않고, 그래 주님께 내가 감사할게 하는 이런 식의 자기 위치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아직도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이다.
◈ 그래서 목회학이란, 한 평생 자기 죄를 아는 작업을 이제 서서히 발벗고 한번 시작하는 것이다.
* 여러 형제와의 만남과 혹은 설교나 전도를 통해서 내 죄가 무엇인지 공부를 통해서 내 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여기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아가 자아를 파악하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은, 아직도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이다. 다음 그림을 통해서 죄가 무엇인지 파악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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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크 라캉의 무의식의 공시적 구조 ▣
※ 자크 라캉이라는 사람이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연구하기를 인간의 모든 사회적 행동은 성경에서 말하는 행위,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라는 점에 대해서 연구하기를,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서 나오게 된다. 그런데 그 무의식 속을 들여다보게 되니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자. 라캉은 정신 분석학자이고 프로이드의 영향을 받았지만 프로이드보다는 더 진척된 사람이다. 무의식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자.
▨ 자아형성기 - 자아관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날 때부터 6개월까지는 자아가 형성되지를 않는다. 자아라는 의식이 없다. 모든 것이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내 몸이 해체되어 있다고 본다. 그런데 6개월이 지나서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게 되면서 자기는 해체된 덩어리가 아니라, 자기는 한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원숭이를 거울 앞에 세우게 되면 거울 속의 원숭이를 다른 원숭이로 보게된다. 아기가 어릴 때는 그 거울 속의 아기가 자기로 보지 않지만 6개월이 지나고 난 뒤에는 자기와 동일하다는 것을 안다. 그 때부터 자아라는 개념이 형성이 된다. 이것이 인간이 무서운 것이다. 인간이 자아관이 형성되어 버리면 모든 우주의 중심은 나로 바뀐다. 내가 우주의 신이 되고 내가 절대적인 존재가 된다. 외부에서 날라 오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도 전부 자기의 기분 전환용으로 도입을 한다. 무엇이 진리이냐, 아니냐는 내가 결정한다. - 이것이 자아관이다.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실 때, 배부른 상태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것이 아니다. 40일 굶은 상태이다. 배부른 상태라면 마귀의 돌이 떡 되게 하라는 말은 아무런 시험이 안 된다. 눈에 뵈는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보고 만약 그렇게 하라면 역시 하나님도 좋지만 물질도 좋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우선 순위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우리는 자아관이 형성되면 내가 절대자가 되기 때문에 자아에게 도움이 되면 진리가 되고 자아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괴롭게 하면 그것은 무조건 비진리가 된다. 우리가 굶었다. 그런 상태에서 마귀가 왔다. 돌이 떡 되게 해 줄게 만국영화를 네게 줄게 할 때에 우리의 판단 기준은 무엇이 기준이 되는가? 오직 자아에 도움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자아가 기준이 된다.
▨ 상상적 동일시
그러면 라캉은 여기서 남들이 알지 못했던 중요한 사실을 끄집어내었는데, 그것은 거울에 나타난 내 모습과 나를 동일시하는데 이것을 상상적 동일시라 명명했다.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거울 속에 있는 나와 나를 같이 보는 이것을 상상적 동일시라 한다. 그 이전에는 같이 보지를 아니했다. 원숭이를 보면 이 사실을 알게 된다. 6개월 이전의 아기는 거울 속의 나와 자신을 같이 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언제부터인가 거울 속에 있는 나를 나와 동일시하는 - 이것을 상상적 동일시라 하는데 거울 속에 나타난 나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자아상 - '내가 여기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 순환, 타자
그렇다면 그것이 앞으로는 어떻게 바뀌는가 하면은, 이 자아상이 앞으로는 [나]라는 자아상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새로운 자기 모습을 찾아가게 된다. 이것을 순환이라 한다. 이것이 마치 붕어빵 틀이 돌아가면서 붕어빵이 나오는 이치와 비슷하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너의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어보게 되면, 선생님이라는 답변이 나온다 치자. 그 선생님이 자기의 모습이고 싶어서이다. 그런데 중학교가서 개그맨 김국진을 보게 되면 그 개그맨이 되고 싶다. 그리고 멋있는 대학생이나 박찬호를 보게 되면 그 모습을 자기 모습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자꾸 바뀐다. 한마디로 자기 모습은 없다. 이런 현상을 미끄러져 간다라고 한다. 나의 이상이 자꾸 바뀐다. 내가 누군지 모른다. 예를 들어, 3살 때 엄마가 아기에게 아기가 거짓말을 잘하니 -' 너는 장차 유명인사가 안되더라도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돼' 라는 교훈을 들었다. 그러나 5살 때 그 아기가 얻어맞고 왔다. '절대 너는 얻어맞고 와서는 안돼' 라고 하면, 갑자기 내가 누군지 모른다. 때리고 들어 왔다. 엄마가 하는 말이 ' 너무 심하게 때려서는 안돼' .... '몸만 튼튼하여라' 또 중학교가서 공부 못하고 들어오니, '지금 몸이 문제가 공부를 잘해야지' - 이처럼 엄마에 의해 내가 누군지 모른다. 엄마는 타자다.
▨ 기호(Signifiant) → 음성(Vax)
라캉의 무의식의 공시적 구조에서 기호(Signifiant)→음성(Vax)으로 가는 그 선은 이미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기존의 인간 속에 놓여 있던 모든 개념들이고, 가치이고 의미들이다. 즉, 엄마 아빠의 세계관이고, 가치관이다.
쉽게 설명하면 어린아이가 자기를 어떻게 아는가? 거울을 통해 자기 상이 성립이 된다. 거울 없으면 자기 모습 모른다. 사진기 거울 없으면 자기 모습 모른다. 남이 내 모습을 알려준다. 이번 중간고사에서 35등이라면 나는 35등이다. '너 공부 잘하니?' '아니, 나는 35등이다.' 이미 이것은 타자에 의해서 성립된 나다.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축된 의미에 의해서 내가 미끄러져 간다.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구축해 놓은 가치관을 기호(Signifiant)라 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군지 모른다. 그냥 나는 하나의 신화적 존재이다. 기호(Signifiant)→음성(Vax)으로 거쳐 오다보면 나는 없고, 나는 그냥 분열된 주체로만 존재한다. 자기 것은 없다. 남의 것 속에 그냥 걸려오다 보면, 나가 생긴다. 남의 것을 슬쩍 경험하다 보면, 딱 걸리는 점이 있다 이것을 낚시점, 혹은 고정점이라 한다. 그 낚시점이 나 인 것 같이 느껴지다가 또 바뀐다. 거울상 모르고 상상적 동일시를 모르면 이 말의 뜻을 모르게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타자)이 알려주는 자아가 마치 나라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알려주는 그 다른 사람이 늘 변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도 순간적으로 변함을 경험하는데, 이러한 순환이 우리네 인간사다. 나의 갈길 다 가도록 내가 누군지 모른다. 이것이 현실인데, 이 현실 속에서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주위의 다른 사람을 붙들고 [나] 인체를 하면서 한평생 보내고 있다. 나처럼 행세하고 있다. 사람이 자기를 가리는 이유는 그것이 마치 나 인양 착각해서 자기를 가리고 있다. 돈 많고, 공부 잘하는 사람 친구로 사귀는 이유는? 돈 없고 공부 못하는 놈은 내 모습하고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자아 찾기 3만리!' 이다. 나를 알고 싶은데 도대체 내가 누군지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라고 했는데, 그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고, 너는 단지 우주 속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이지, 라캉이 의미하는 주체의식의 너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옛날 철학에서는 그런 주체의식을 언급하지 않았다. 옛날 철학은 로고스에서 고정된 철학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자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누군가 하는 주체의식의 물음은 현대 포스트모던에서의 물음이지, 옛날 철학에서는 이런 의미가 아니고 ,이미 움직이는 법적인 질서가 있다는 뜻에서 '단지 네 분수를 지키라' 라는 의미에 불과하다.
▨ 주체와 상상적 동일시
여기서 의미하는 주체가 무엇인가? 주체는 평생가도 내 주체는 없고, 남이 이야기하는 그것이 마치 내 주체인양 헤매다가, 결국은 나 자신도 모르는 체 그냥 죽어가고 있는 것이 내 주체이다. 이것을 상상적 동일시라 한다.
▨ 상징화
남의 이야기를 내 것과 일치시키는 것, 이것을 상징화라 한다. 상상화는 거울 속에 있는 것을 통해서 주체를 형성하는 것을 말하고, 상징화라는 것은 사물 등을 통해 자기화 동일시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치이타 등을 통해서, '나처럼 빠르다' 라고 하는 것이다. 즉, 직유, 은유, 환유 등을 통해 상징화하는 것을 말한다. 응축과 치환하는 것을 말한다. 치환은 바꾸는 것, 응축은 압축시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인데, 이런 것을 상징화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신 김지찬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체, 언어만 들고 주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언어만 들고 써먹기에 바쁘다. 언어라는 것은 언어를 다루는 주체가 있기 마련이다. 주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를 분석하는 공부는 하지 않고 써먹기에 바쁘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보고 죄인이라 하는데 김지찬은 죄인이라는 이것은 잘라낸 체 언어 연구하기에 급급하다. 이것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성경에서 우리를 보고 분명히 죄인이라 한다. 그 언어를 해석하는 주체가 죄인이다. 죄인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지를 못하고 성령이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통해서 일하시는 이유가 성령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형사 까제트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소녀와 강아지가 일 다했는데 까제트 자기가 다 했다고 까불고 있는 것과 같다. 성경에서 죄인을 부각시키는 이유가 그 모든 일의 주체가 죄인이 아니라, 성령이 하셨다는 것이 부각된다. 성령은 우리를 고발한다.
▨ 라캉의 무의식의 공시적 구조 - 프로이드의 무의식 사상 + 언어학
상징화해서 어떤 것을 내뱉는다만 그것은 누구의 욕망인가? 나의 의지 나의 욕망은 아니다. 나는 내 주장이라고 외쳤는데 내 주장은 하나도 들어 있지를 않고 기존에 형성된 사회적 통념이 내 욕망과 더불어서 나의 것으로 하나되어 나오는데 이것을 상징화라 하는데, 응축과 치환되어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로 여기서 누가 '아따아따라...' 라고 하면, 이런 소릴 한다면 못 알아든다. 그러나 "여러분!" 이라고 하면 좋든 싫든 이미 그 뜻을 알고 있다. 이미 통용되고 있다. 언어 개념 속에서 그래서 그것을 기호(Signifiant)라 한다. 기호가 흘러간다. 이것이 계속해서 흘러가는 것이다. 이것을 라캉은 무의식을 언어를 통해서 인간의 내부를 발췌해 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은 "프로이드의 무의식 사상+언어학" 도입하였다고 학자들은 보는 것이다. 언어에 포착된 인간의 무의식! 이것이 라캉은 정리하였다. 단지 언어라고만 표현하니 너무 좁은 개념이기에 이것을 기호(Signifiant)라 보는 것이다. 교통신호 빨간 불, 파란불도 기호이다. 원숭이에게는 의미가 없다. 우리 인간만의 약속이다.
▨ 원어(原語)가 있는가? 언어는 있지만 원어는 없다 !
이렇게 볼 때 성경의 원어가 없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이다. 헬라어 히브리어는 있지만 원어는 없다. 그러나 언어는 있다. 원어가 없다. 대한민국의 말은 언어다. 여기서 만약 한국말로 글을 내 놓는다면 이것은 원어인가 한국말인가 그냥 한국말이다. 그 글이 미국말로 번역되어 나와도 그 말은 원래 원어가 한국말이 아니고 언어가 한국말에 불과하다. 왜? 번역한 그 쪽은 미국말이 된다. 어떤 언어를 절대화시키는 것은 나쁜 사람이다. 어떤 무식한 목사가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이 탁월한 히브리어, 헬라어 원어를 사용하여 성경을 기록하게 했다고 주장하는데, 어처구니가 없다. 히브리어보다 좋은 언어가 얼마든지 있다.
▨ 성령의 감동-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됨 - 십자가 그 자체가 복 !
실상 언어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제한된, 과학적으로 제한되어 있고, 사회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인간의 죄의 결과에 불과하다. 언어도 인간의 문화이고 문화는 인간의 죄의 결과일 따름이다. 예수님이 아람어를 쓰셨다고 해서 그 아람어가 죄의 결과 일 수가 있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 아람어 역시 죄의 결과로 나온 언어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되어 기록되었다고 해서 그 언어자체가 감동된 것이 아니다. 성령의 감동되었다는 이 뜻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되었다는 그것이 성령의 감동이다. 구조가 완벽한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영역은 따로 독립되어 있다. 십자가와 돈버는 것 십자가와 신학교 공납금 되 주는 것하고 연결을 시킬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십자가 믿으라고 했지 십자가 믿고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십자가는 별개의 독립된 완성된 영역이다. 십자가는 다른 모든 개념과 충돌하고 있는데, 어떻게 십자가 때문에 이 땅에서 복을 얻었다는, 그런 되어먹지 못한 소리가 나올 수가 있는가! 십자가는 그 자체가 이미 복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 넣기 때문이다. 죽은 놈이 무슨 다른 생각이 나올 수가 있는가? 십자가 앞에서는 할 말이 없다.
▨ 타자(a,A) : 변별성, 언어 = 통시성 + 공시성 - 소쉬르의 주장
기호(Signifiant)를 S로 표하고 있다. 소쉬르에 의하면,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기표라 하는 것은 문자 막대기, ㄱ, ㄴ, 아, 가..., 이런 것?말하고, 기의라고 하는 것은 기표가 합성되어 'ㄱ+아=가' 라는 의미가 된 것을 말하는데, 이 둘이 합쳐 진 것을 언어라 한다.
소쉬르가 왜 이렇게 나누었는가 하면은 [가]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왜? [가] 속에 아무리 분석해도 [가]라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나]라는 단어와 다르니 [가]라는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가]라는 것은 [나]라는 것과 다르니 [가]는 가라 하고, [나]는 나라 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을 변별성이라 한다. 소쉬르가 최초로 주장했다.
소쉬르의 주장은 모든 언어라는 것은 고유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다른 것과 차이남 때문에 가라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지, 언어 그 자체를 아무리 분석해도 그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COME 이라는 단어를 아무리 분석해도 '오라' 라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별성에 의해서 움직인다. 인간이 차이가 나는 관점에 따라서 의미가 주어질 따름이다. '야, 저것 Cap이다!' 이런 말은 70대 시골 할머니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다. Cap이 뭔데? Cap이라는 것은 최고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최고라는 말을 쓰지 왜, Cap이라고 해?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인데요! - 이것을 가지고 공시성이라고 한다.
자크 라캉의 공시적 구조는, 자기들끼리 만든 것이다. 말이 달라지는 이것을 가지고 통시성이라 한다. 과거에서부터 쭉 내려오면서 그 의미는 간직한 채 달라지는 이것을 통시적이라 한다. 그리고 그 시대에 통하는 언어를 공시적 구조라 한다.
그러므로 언어라는 것은 통시성과 공시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만들어 내기 나름이다. 방송인과 아나운서, 성우를 방송인이라고? 방송인이 뭔데? 개그맨을 방송인이라고? 개그맨이라면 가치 떨어지는가? 자기들끼리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왜 간호사라고 하는가? 간호원이라고 하면 가치 떨어진다고? 철도원? 철도 공무원, 혹은 기관사? 운전사? .... 이런 것들이 다 공시적인 것이다. 누가 만들어 냈는가? 타자가 만들어 냈다. 다른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함유하는 것이다.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 사회에서 함유되고 있는 것이다.
▨ 기호 = 랑거 + 빠론, 음성이 상징화되어
그래서 이것을 A가 안고 있는 것이 방향이 반대인데, 기표가 이렇게 흘러가도 기표가 나중에 목소리로 변한다.
딴 이야기이지만, 언어라는 것은 랑거가 있고 빠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랑거는 언어의 구조, 문법체제를 랑거라 하고, 빠론이라는 것은 장기 알과 같다. 랑거라는 것은 장기두는 법칙을 생각하면 된다. 언어라는 것은 언어의 법칙이 있다. 바둑은 바둑법칙이 있듯이 언어에도 법칙이 있다. 그러나 바둑 법칙 있다고 바둑 되는 것이 아니다. 바둑판과 알이 있어야 되는 이것을 빠론이라 보면 된다. 기호가 점차 자기 정체성을 잃어 간다. 기호가 점차 자기 정체성을 잃어간다. 기호가 빠론으로 점차 미끄러져 간다. 사회가 어떤 개념을 발생하더라도 인간은 개인적으로 쓰기 나름이다. '이놈아 나가 죽어라' 라는 것은, 공부 잘하라는 말이지 죽으라는 말이 아니다. 타자에 의해 아버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기호가 되어 s(A): 타자에게 방사된 메시지. 타자의 기표가 하나의 메시지화 된다.
▨ 기표 - ○ , 기호 - s : 기의, S : 기표
방향은 반대인데, 이것을 상징화한 것이다. 그럼으로 철없는 아들이 자기 아버지 죽으면, '왜 아버지 이 아들 성공한 것 못보고 왜 죽었습니까?' 라고 울부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례식에서 우는 쪽은, 아버지와 라이벌 관계이다. 아버지한테 복수하는 것이다. 아버지보다 내가 더 잘났음을 보여 주려고 한다. 성공해서 아버지한테 복수하는 것이다. 울지 않는 쪽은 아버지한테 잔소리를 듣지 않거나 성공 못한 사람이다. 친밀성이 적다. 내 놓은 자식이다. 계속 아버지 등쳐먹고 살아 온 사람이다. 아버지는 이미 죽기 전에 죽었다. 자기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용대상이었다. 쓰레기 치우는 것이 귀찮을 따름이다. 장례식이 귀찮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자기 손가락에 가시가 있으면 운다.
타자로 해서 i(A), 분열된 주체가 누구와 동일시되었는가? I: identification(동일화), 타자와 동일시 된 체로 i(A) 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그렇다면 나는 단지 타자가 바라보는 나일 뿐이지, 나는 아직도 나는 누구인지 모른다. 다른 사람이 그냥 그렇게 알아주는 데로 자기를 바라볼 뿐이다. '너는 공부 잘 한다' 라고 하면, 그냥 자기가 천재인줄 알고 있다. 자기를 모른다.
▨ 벡터, 상징화
벡터는 방향을 가진 영향력을 말한다. 지향점을 가지는 영향력을 말한다. 타자에서 나온 이것이 m(moi), 회로가 둘로 나누어진다. 위로 가는 회로가 있고 아래로 가는 회로가 있다. 타자가 상상화 되는데 이것을 거울상, 상상적 동일시, 상징화로 설명했는데...., 상징화를 자세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상상적 동일시를 방향을 세분화시킨 것이다. 세분화시킨 것이 소문자로, 상상적 동일시벡터가 있는데, 타자가 나를 평가하는데 평가하면서 어떤 말을 한다. '너는 공부 못해' 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이 위로 표현되는데 나를 향하여 표시된다. 그리고 밑에는 타자를 거치기 이전에 상상적 동일시가 된다. 이 과정은 타자는 타자대로 따로 있고 나는 나대로 따로 있는데 이것이 중복되었다는 그 뜻이다. 별개 아니다. 상징화되는 그것을 상상적 동일시로 약간 메카니즘을 세분화시킨 것이다. 왜 상상적 동일시를 집어넣느냐 하면은, 반드시 상징화 이전에는 반드시 상상적 동일시가 있어야 된다는 원리에 충실히 하기 위해서다.
▨ 욕구(생물적 소여)
그런데 이러한 말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라캉을 두고 어떤 비판을 하게 되겠는가? 당신의 그러한 생각은 이해를 하는데 그것이 실제적이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구조는 세포로 되어 있다. 세포는 물질로 되어 있다. 그런데 라캉의 이론은 형이상학적이고 그저 추상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라캉은 세포는 배고플 때 자동적으로 먹고 싶다는 이 욕구를 언급한다. 무의식과 관계가 없다. 이것을 생물적 소여(to given)라 한다.
무엇을 향하여 주어진 것, 나를 향하여 주어진 것,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나의 몸 상태이다. 여자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나를 지향한다. 내 쪽으로 주어진다. 생물학적으로 주어진다. 생물학적으로 기본적으로 주어진 것, 자고 싶고 놀고 싶고 먹고 싶은 이와 같은 것을 욕구라 한다. 그 욕구가 있기에 요구를 하게된다. '나는 저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 라는 것은, 결혼하고 싶은 것은 욕구이다. 그 욕구의 대상으로 저 여자를 요구한다. 그러나 예쁜 여자가 다 내가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구는 있지만 못 이루는 것을 가지고 욕망이라 한다. 욕구는 그저 생물학적이다. 어쩔 수가 없다. 배고픈데 어쩌란 말인가? 그런데 나는 먹고 싶다. 이것은 상상한다. 그 차이가 욕망이다. 라캉의 이론은 단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적으로 신체 세포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런 욕망이 있다.
▨ 욕구와 요구의 차이가 욕망, 욕망이 언어를 사용 : 욕망 = 욕구 - 요구
욕구와 요구의 차이가 욕망인데 라캉의 무의식을 욕망에 의한 무의식이라 보는 것이다. 이 말은 라캉은 생물학적 욕구로부터 시작을 하기 때문에, 자아가 우선이 아니라 욕망을 우선으로 보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언어가 욕망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본다. 욕망이 나를 가지고 논다. 롬7장에서 '원치 않은바' 가 나오는데, 이 원치 않은 바를 라캉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천주교 신부임을 가만 하라. 나보다 욕망이 더 강하다. 욕망이 나를 가지고 논다고 본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욕망이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다. 이미 기존의 형성된 욕망으로 보는 것이다.
▨ 타자의 욕망 안에 들어 있는 나 !
그래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타자가 욕망 하는 대로 움직이는 모습이 내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나는 어디에 가 있는가! 타자의 욕망 안에 내가 들어가 있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래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그 말을 이제는 지워도 된다. 나는 나에게서 찾을 수 없고 나는 남의 욕망 속에 내가 들어 있다!
▨ 향유(Jouissance) → 거세(Castration)
그래서 그 욕망은 향유(Jouissance)→ 거세(Castration)의 도표를 이루는데, 이것은 사람은 끊임없이 욕망이 생긴다. 주어진 신체구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소경이 눈뜨고 싶은 것과 기복신앙 등은 타고난 구조다. 욕구이고 욕망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긴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탐내지 말라' 는 그 소릴 듣는 순간 남의 물건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인간이다. 성교육을 시켜도 그것이 오히려 섹스를 땡 긴다. 어쩔 수가 없다. 그것은 법이다. 아버지 같은 엄청난 무서운 법이다.
하나님은 타자다. 왜냐하면 우리는 6개월 후에 자아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타자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자아가 형성되어 버렸다. 그 타자를 자아와 동일시하는 어쩔 수 없는 자아가 형성되어 버렸다. 그것이 양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향유한다. 끌어 오르는 욕구 때문에 향유를 하고싶어 한다. 그런데 그 향유가 제대로 되는가? 향유라는 것은 즐기기인데....,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 안되기 때문에 점점 욕망이 강해진다. 그 강해지는 욕망을 없애기 위해서 그 방법이 거세(Castration)다. 거세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욕망을 자제해 버린다. '나 안돼. 나는 일등은 안돼....' 이렇게 함으로 스스로 거세해 버린다. '세리가 5승은 불가능해 안돼....' 이렇게 거세해 버림으로 자아를 확립한다. 베트남하고 축구를 하면 봐줘라 하는데 일본하고 하면 '일본 놈 죽여라' 라고 한다.
누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가? 일본이다. 이 불안을 없애기 위해 거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인이다. 가인은 킬러가 아니다. 가인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자아가 형성되고 난 뒤에는 이유 없이 내가 즐겨야 된다. 이유 없이 내가 즐겨야 된다. 로마 시를 불태운 네로가 왜 불을 질렀는가? 시를 짓기 위해서이다. 왜 시를 지어야 하는가? 즐기기 위해서인데, 왜 즐겨야 하는데? 내가 즐기기 위해서! 햄릿이 왜 고민하는가? 자기가 고민되기 때문이다. '너, 성경도 모르는 사람이 신학교 왜 왔니?', '왔다 왜?' 내가 즐기기 위해서인 것이다. 자기 욕망이다.
▨ 욕망 (d, D)
욕망의 원천을 D라 하고, d는 그 욕망의 원천에서 파생된 것, 벡터(힘으로서의 욕망, 지향점을 가지는 영향력)이다. 상상적 동일시의 벡터는 벡터는 힘으로서의 욕망이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메카니즘을 설명하는데 동원된 것이다. 그것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상징화를 그냥 풀어주는 것이다. 이렇게 흘러갑니다만 설명한다. 있는 것은 기표가 있다.
▨ 기표 -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
기표 안에 분열된 자아가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그 욕망과 나를 일치시키는데 이것을 상상적 동일시라 되어 있다. 인간의 향유는 거세하는 쪽으로 나간다. 가인이 아벨을 거세하는 쪽으로 나간다. 그것을 죽이지 아니하면 견디지 못한다. 동생이 합격되니 자기도 합격하고 싶은데 합격시켜 주지 않으니 죽이고 싶다. 이것이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 다니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다. 항의 방문이다. 거세하고 파 한다. 하나님에 대한 항의 방문이다. 하나님 자체를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전락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아서 자아를 절대화하려고 한다. 자아가 절대화되면 자아의 욕망도 절대화된다. 이 세상 남는 것은 나뿐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만 꿈꾼다. 이것이 가인이다. 우리가 가인의 후예다. 인간이 신학교 간다고 구원받는다고? 주님은 십자가 하나로 우리의 모습을 다 보여 주었다.
사 53장의 의미를 모르면서, 자기 죄도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십자가를 알까! 십자가 앞에서 무슨 구원론이 나오는가! 주님이 온 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데, 무슨 상담학, 가정사역, 목회학, 제자훈련 등이 왜 나오는가! 그저 목사로서 자기 존재의미만 챙기고 있다. 절대적 자아만 챙긴다. 내러티브 성경해석을 통해서 자아만 챙긴다. 내가 알아서 해석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그 놈은 못 알아듣는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 욕망이 주체가 되어 흐르는 구조
s는 자아가 분열된 것을 말한다. 자아가 분열되고 보니 남아 있는 것은 내 욕망만 남아 있다. 처음 흐름은, 즉, 기호(Signifiant) → 음성(Vax)의 밑의 그 흐름은 타자가 주체가 되어 흐르는 회로이고, 위의, 향유(Jouissance) → 거세(Castration) 쪽의 흐름은 욕망이 주체가 되어 흐르는 메카니즘이다. 계속 나는 누군지 모르고 분열된 자아만 있을 뿐이다. 욕망을 상징화시키는데 어떻게 시키는가? A와 만나는데 타자와 결핍된 욕망이다.
'아!' 하고 싶다. 그런데 뭘 하고 싶은지 모른다. 그런데 그 하고 싶은 것이 자기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을 보고 그것하고 싶다라고 하는 것이다. 남의 떡이 더 크게 보인다. 그러니까 그 떡 보기 이전에 타자가 결핍되었다. 이전에 욕망 된 주체, 기표, 어떤 메시지, 타자가 결핍된 메시지이다. 이것이 욕망을 만나는데 A라는 타자의 메시지와 만나면서 분열된 나는 A타자의 영향력을 만나면서, 욕망은 고정된 타자의 메시지를 나의 욕망의 대체물로 삼는 것이다. 뭘 요구하는지 모르는데 갑자기 엄마가, '너는 대통령의 비젼을 가져라!' 하니 내 욕망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s(A)는 타자에서 방사된 메시지이다. 그리하여 제일 밑바닥에 있는 분열된 자아는, 결국은 내가 가지고 있는 욕망의 회로와 타자가 가지고 있는 회로에 의해서, 나와 타자는 욕망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나와 타자가 동일시된다.
※ 로마서 5장에 보면, 아담이 범죄함으로 우리가 죄 아래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조직신학자들이 대표원리니 전가니 하지만, 전가나 대표원리를 다 뜯어보아도 아무 것도 없다. 말을 못하니 전가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이고, 대표원리는 또 무엇인가? 대표원리와 대리와 대체가 또 어떻게 다른가 라고 물으면 무엇이라 답할까? 해명한 것이 없다. 어떻게 옛날 아담의 범죄가 나에게 왔는가하는 것이다. 조직신학자들의 답변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라캉이 분석한 무의식의 공시적 구조 속에서 릿? 내 주체는 없다. 아담의 주체만 있다. 모든 인간이 다 아담의 주체다. 최초의 인간이 아담이다. 우리는 아담 주체를 이루는 하나의 부분이고 아담주체를 확산시키는 하나의 세포에 지나지 않는다. 아담은 아담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죄짓고 난 뒤에 아담의 욕망밖에 없다. 아담의 욕망은 자기를 모른다. 죄짓고 난 뒤에 선악과 따먹고 난 뒤의 아담은 아담이 아니다. 가짜 아담이다. 범죄한 아담이다. 진짜 자기의 모습을 잊어버린 아담이다. 잊어버리니까 자아 찾기를 한다. 자아를 찾는데 선악적 구조를 통해서 자아를 찾도록 마귀가 조정하는 그 세력 하에 있다. 선악과를 보고 하나님 되고 싶은데, '선악과 따먹어라' 하는 마귀의 음성을 듣고 보니, '아하, 바로 이것이구나' 라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 보니 아벨을 죽인다.
▨ 죽어 가는 육체의 욕망 - 나는 살고 싶다 !
결국은 그냥 가린다. 수치 때문에 가리는데 자아를 모르기 때문에 가린다. 부끄러워 가린다. 내 욕망은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나의 욕망이 가리고, 안 가리고는 나의 욕망이 결정한다. 그런데 내 욕망은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이미 우리의 세포가 변질된 세포이기 때문이다. 죽어가고 맛이 가버린 세포이다. 그냥 흙이다. 하나님 떠나고 나니 그냥 육체가 되고 말았다(창6:6).
흙이란, 하나님 떠나 버림의 결과이다. 하나님 떠나고 나니 남는 것은 육체밖에 없다. 육체란 저주성이 담겨 있는 육체이다. 뱀이 저주성이 담기니 기어다니는 모습이고, 인간은 저주성이 담기니 흙이 되어 가는 죽어 가는 모습이다. 죽어가니 그 죽어 가는 육체의 욕망은, '오직 나는 살고 싶다!' 이다. 이 이야기는 라캉의 이야기가 아니다. 라캉은 이러한 죄를 모른다.
▨ 욕망의 순환구조
결국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은 나는 이유 없이 살고 싶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인간의 본질을 알 때, '아하, 나는 비로소 살 가치가 없구나!' 하는 것을 고백한다), 살고자 하는 자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은 흙이 되어 가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은 자기가 신으로서 망가져 감이 두려운 것이다) 죽을 것이요"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뜻이다.
머리 속에는 내가 죽어야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세포가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왜? 이미 생물학적인 소여(to given)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소여 된 것이기 때문이다. 40일 금식 기도한 후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가 있는 인간 없다. '40일 금식하면 하나님은 나에게 엄청난 혜택을 주시겠지' 하는 이것이 인간이다. '내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복 주겠지' 하는 이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바로 욕망의 순환 구조이다. 예를 들어, 처음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다가, 좀더 다른 욕망으로 바뀐다. '예수 이름으로 복도 받고, 좁은 길로 가니 복 주겠지' 라고 나온다. '좁은 길 자체가 복이다' 라고 가르치면, '주의 종으로 쓰시겠지' 하는 이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안 된다. 죽을 때까지 인간이 안 된다. 인간 되는 것을 포기하자. 이렇게 가르치면, '인간 되는 것을 포기하면 복 주겠지!' 하는 이것이 또한 인간이다.
▨ 인간은 안 된다. [가만히 있거라 !] 라는 말을 할 수 있기 위해 공부를 하자 !
결국 여기서 언급한 이 사실을 그대로 고백하는 것이,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오직 죄인이고 우리가 믿을 것은 십자가 피만 믿어야 됩니다' 하는 것이 복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주님이 왜 십자가에 죽어야만 했는가 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 '가만히 있거라'(출14:14) 라는 말할 수 있는 이유를 알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
▨ 인간의 모든 욕망은, 물질적 신체적 구조에서 !
근본적인 욕망은 한없이 자기 찾기이다. 아 저것이 바로 내 타입이다. 했는데 또 새로운 타입이 온다. 어떤 여자 탤런트가, '나는 다른 사람이 중매한 것이 싫더라. 우연히 전율이 일어 날 때 결혼하고 싶다' 라고 한다. 그러나 그 여자가 모르는 것이 있다. 갈수록 전율이 일어난 확율이 적다는 사실을 모른다. 왜? 젊을 때는 전부 전율이다. 낙엽이 아름답지 하면 그냥 전율이 일어나는데 나이 들어서 그런 소릴 들으면 '저놈, 사기꾼이구나' 라는 것을 안다. 전율될 가능성이 점점 더 없어진다. 눈이 높은 것이 아니고 욕망차원에서 보니 욕망의 대상이 아니 된다. 왜? 이미 자극 받은 것은 욕망의 순환구조에서 보니 흘러간 자극이다. 흘러간 욕망은 욕망의 대상이 안 된다. 왜냐하면 시시한 타자는 타자가 아니다. 옛날 보다 한 걸음이라도 더 나은 타자가 나의 새로운 자아상으로 자리 매김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흔히 삶은 감자가 맛있다라고 하지만 군에서야 맛있지. 그러나 옛날처럼 비오고 우산하나 제대로 없을 때, 이것을 '생물학적 소여' 라고 한다. 내 육체가 말이 안될 때 그 때는 삶은 감자가 그렇게 맛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욕망은 물질적 신체적 구조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라캉의 무의식의 공시적 구조가 단순히 허상이거나 상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 [ 앙띠오디프스 ]라는 책을 지은 들뢰즈라는 사람은 라캉에 대해서 전적으로 부정하고 나왔다. 라캉은 개인이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들뢰즈는 욕망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따져 보니 사회가 그 사회적 욕망을 개인에게 주입한 것으로 본다. 개인의 욕망이 사회에 주입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 그러나 죄는 '욕망' 에서 출발해서 안되고, '하나님 아들의 죽음' 에서 출발해야 !!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은 험하고 힘든 길이다. 라캉은 죄의 개념은 하나도 없다. 욕망은 그 자체가 죄가 아니다. 그냥 땅기는 것이다. 못 배워서 잔소리하는 동생 죽이는 사람이 있었다. 단순히 죄인 줄 모른다. 자기 욕망이 그렇게 하였다. 율법이 오기 전에 죄가 뭔지 모르지만 사망은 왔다. 죄라는 것은 어디서 왔는가? 라캉처럼 욕망에서 출발하면 안되고 '죽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그 죽음도 시시한 우리의 죽음에서 말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에서 죄를 찾아야 한다. 의인의 죽음,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에서 죄를 찾아보아야 한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진실하게 세상을 알아야 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몰라서 고민하는 그런 사람들의 글을 통해 우리 인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정말 자기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서 고민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대해서 고민도 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한번 성경을 우리 죄에서 출발하고 나 자신이 얼마나 죄인의 노예인 것을 깨닫고 성경을 다시 해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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