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봉산 푸른 숲길을 걷다 고개를 드니 흰바위산(백암산·622.6m)이 눈부시다. 이 길은 최치원 산책로. 고운 선생의 자취를 훑다가 비운의 왕자 묘를 만났다.
세종의 아들 한남군의 묘. 무덤을 지키는 문인석의 표정은 도무지 읽을 수 없다. 백암산 꼭대기는 함양 아홉 고을은 물론 지리산 능선과 백두대간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곳. 찾아간 날은 운무 속에 잠자리 떼가 날았다. 구름 속을 거닐다 내려오니 상림은 푸른 세상. 물레방아 도는 이유는 아마 세월도 그렇게 유장하게 구르는 탓일 게다.
최치원 산책로·가족 숲길…
5시간 20분 원점회귀 코스
짙은 숲, 산과 길의 멋진 조화
함양 아홉 고을 발아래 둔 명산
지리산 능선·백두대간 눈앞에
■여기는 필봉 사랑의 길 경남 함양 읍내에서 시작하는 백암산 산행은 최치원 산책로를 만나 가치가 높아졌다. 황계복 산행대장은 백암산을 소개하고 싶었으나 왕복 2시간가량 걸리는 짧은 코스 때문에 망설였다고 했다. 최근에 조성한 필봉산 가족숲길과 기존의 최치원 산책로를 곁들이니 멋진 코스가 나왔다고 했다. 함양 백운산 산행은 그렇게 산과 길의 컬래버레이션이다.
코스는 상림공원 주차장~필봉산~한남군 묘~두산저수지 갈림길~두산저수지~교산육교~영양 천씨 묘~백암산~헬기장 갈림길~막고개 과수원~두산저수지 갈림길~산불감시초소~상림·대병저수지 갈림길~물레방앗간~역사인물공원~상림공원 주차장까지 9.6㎞를 5시간 20분으로 원점회귀다.
상림공원 주차장에서 함양 캐릭터 물레동자와 산삼을 든 신비낭자 조형물을 뒤로하고 '최치원 산책로' 입구로 올라선다. 최치원 산책로는 대부분 코스가 '필봉산 가족숲길'과 일치한다. 해충 기피제 자동 분사기가 설치돼 등산화에 골고루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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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에 한 번 핀다고 알려진 고구마꽃. |
식당 사이로 난 길에 올라서니 짙은 숲이다. 길도 잘 정비돼 쾌적하다. 필봉산은 해발고도 233m로 야트막한 야산인데 숲이 제법 짙다. 필봉산 가족숲길 안내도를 따라 대병저수지 방면으로 간다.
필봉산을 벗어나자 논밭 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산줄기가 뻗은 자리에 한남군 묘가 있다. 한남군은 세종의 12번째 아들로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돼 함양 휴천계곡 새우섬에 유배되었다가 3년 만에 죽었다. 나이 고작 서른. 사후 156년이나 지나 숙종 때 예를 갖춰 무덤을 단장했다고 한다.
필봉 가족숲길은 어머니의 평온함, 아버지의 인자함, 모두가 함께 사랑하는 박애를 느낄 수 있는 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필봉 사랑길'로 여기면 되겠다. 고구마꽃을 보고 냉큼 달려가 사진을 찍었다. 100년 만에 핀다는 고구마꽃을 봤으니 행운이 올 것 같다.
■흰바위 위에 올라 앉아 고구마밭을 지나 대병저수지·두산저수지 갈림길 이정표가 있는 고개에 섰다. 멀리 백암산 흰바위가 보인다. 아래 두산저수지는 한창 보수 중이다. 물을 뺀 저수지를 보니 커다란 사발 같다. 공사 중이라 어수선한 저수지 둑을 지나 오른쪽 포장로로 들어선다.
두산마을로 가다가 백암산 등산로 이정표에서 방향을 바꿔 교산육교를 넘는다. 육교는 광주대구고속도로 위로 나 있다. 보통 고속도로는 굴다리를 이용해 아래로 지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백암산 자락의 마을 편의를 위해 육교를 만들어 놓았다. 등산하는 사람도 기분 좋게 고속도로를 건넌다. 백암산 등산로는 여러 갈림길이지만, 오른쪽 큰골 등산로를 따라 올랐다가 왼쪽 갈골 능선으로 내려서기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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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하게 피어 여름을 물들이는 자귀나무꽃. |
육교를 지나 오른쪽으로 가야 큰골로 가는 길이다. 고사리가 무성한 밭을 만나면 왼편 포장로를 따라 오른다. 축사를 지나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을 택하여 개들이 짓는 막사를 벗어나면 임도다. 임도에서 50m쯤 가다가 오른쪽으로 난 등산로로 진입한다.
등산로 관리를 하는지 주변 나무를 잘라 놓았다. 능선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된 숨을 한번 몰아쉬자 주변이 탁 트인다. 그 유명한 흰바위도 모습을 드러낸다. 산불이 났었는지 검게 탄 나무들이 아직 남았다.
자귀나무가 붉게 피었다. 밤에는 잎이 오므라져서 합환수라고도 부르는 나무. 부부의 금실이 좋아진다고 옛날엔 정원에도 많이 심었단다. 흰바위 위에 앉아 아래를 바라본다. 함양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필봉산도 발아래다. 왼편에는 잘 정돈된 마을이 있는데 보산행복마을이라고 한다. 전원생활을 원하는 사람을 위해 조성된 마을이다.
정상 가까운 곳에 무덤이 있다. 높은 산인데 패랭이꽃이 보여 의아했는데 무덤가에 패랭이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다. 맘씨 고운 영양 천씨 후손이 심은 것으로 짐작한다. 제법 긴 계단을 오르니 드디어 정상. 작은 운동장처럼 넓다.
■숲 그늘 아래 고운의 자취
헬기장이 있는 넓은 정상에 잠자리 떼가 극성이다. 경이로운 풍경이다. 지리산 조망 안내판은 잘 서 있지만, 날씨가 흐려 시야가 가렸다. 전망대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다. 한 줄기 바람이 산에 오르느라 뜨거워진 몸을 식혀 준다.
백암산은 함양읍을 포함, 9개 면을 조망할 수 있는 명산으로 옛날부터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라고 했다. 산 아래 두산마을은 다른 작물은 안 되고 콩밖에 심을 게 없어 이름이 그리 붙었단다. 당연히 백암은 산 중턱에 있는 흰바위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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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림공원 옆 넓은 연밭에 만발한 연꽃. |
지리산 조망은 상상으로만 하고 갈골 능선으로 내려선다. 묵은 헬기장이 있는 첫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택한다. 소나무가 좋은 길이다. 단숨에 산에서 내려오니 막고개다. 막고개엔 배농원이 있는데 농장에 서각 작품 하나가 걸렸다. 막고개는 옛날 효자가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해서 막고개로 불린단다. 농장 주인이 이곳 배는 친환경 재배로 전량 서울에 납품한다고 자랑했다. 물이 참 좋다며 찬물 한 바가지씩을 안겨줘 시원하게 마셨다.
두산저수지에서 다시 갈림길 고개로 올라 대병저수지 이정표를 보고 간다. 이번에는 '시와 함께 하는 등산로'다.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노천명의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를 꼼꼼히 읽는다. 노 시인의 시는 요새 말로 '귀농 권유가'였는데 '나는 여왕처럼 행복하겠소'란 마지막 구절이 돋보였다.
능선이 끝날 즈음 상림·대병저수지 갈림길을 만났다. 왼쪽 상림 쪽으로 내려선다. 옥수수가 제법 자란 마을을 지나 물레방앗간에 도착했다. 상림숲이 시작된다. 상림 왼쪽은 연밭. 연꽃이 한창이다. 최치원 선생의 덕을 칭송하는 문화해설사의 구수한 말소리에 끌려 잠시 걸음을 멈춘다. '선생은 중국에서 숭상받는 학자였지만, 고국인 신라에서는 지방 태수에 머물렀다.' 그 생의 아쉬움이 오히려 지금 상림에서 푸르게 빛나는 것일까. 문의:황계복 산행대장 010-3887-4155. 라이프부 051-461-4094.
글·사진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그래픽=노인호 기자 nogari@
유튜브 주소 -
https://youtu.be/td9IlFmQ-Vg 영상제작 - 장미송 대학생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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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 백암산 고도표 (※ 사진을 클릭하면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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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 백암산 구글어스 지도 (※ 사진을 클릭하면 더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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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 상림공원 주차장에서 백암산 산행을 시작한다. 들머리와 날머리가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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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반은 함양 필봉산 가족 숲길을 만끽하는 코스다. 천사 화로구이 식당 오른편에 길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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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봉산 정상을 지나 대병저수지 방면으로 가면 세종 왕자 한남군 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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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책로에서 두산저수지 쪽으로 가야 백암산 산행을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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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속도로 위로 나 있는 교산육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간다. 하산할 때는 왼쪽으로 내려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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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암산 오른편 능선 산길을 오르면 흰바위가 보인다. 바위 지나 정양 천 씨 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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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암산 정상에 서면 지리산도 잘 보이는데 장마라 날씨가 어두워 조망이 좋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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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에서 잠시 내려서면 헬기장 자리에 갈림길이 있다. 오른쪽 길로 하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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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고개 농원에서 만난 사람들. 유기농 배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시원한 지하수를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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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산저수지를 지나 고갯마루에 올라 다시 대병저수지 쪽 산책로로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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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덕리 죽장마을을 지나 상림으로 향한다. 물레방아간이 지척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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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음이 짙은 함양살림 숲길을 걷는다. 하루의 피로가 벌써 가신다.<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