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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작소설비평회♣ 원문보기 글쓴이: cafe
그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김지희 낙타는 소리도 없이 출렁 흔들렸다. 아니다. 흔들린 것은 유리잔을 쥐고 있는 내 손목과 물, 그리고 내가 품고 있던 몇 알의 모래뿐이다. 유리로 만들어진 낙타는 단단하게 돋을새김되어 있다. 자신을 깨뜨리지 않는 한, 낙타는 한 걸음도 물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반투명의 유리잔은 팍팍한 모래사장으로 둥그렇게 휘감겨 있다. 낙타가 서 있는 반대편으로는 푸른 잎사귀를 늘어뜨린 키 높은 나무와 옴팍한 샘이 보인다. 하지만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낙타의 보이지 않는 발바닥이다. 언제 칼날처럼 등을 베고 달아날지 모르는 모래를 지그시 누르고 있는 딱딱한 발바닥. 오랫동안 무두질한 낙타의 발바닥은 오른쪽으로 느리게 움직인다. 하지만 낙타의 다리가 옮겨지는 것과 같은 속도로 물을 품은 오아시스도 유리잔의 저편으로 달아나 버린다. 언제나 같은 속도, 같은 거리다. 반대편 모래사장 위에서 하늑거리는 잎사귀들이 몸을 뒤집으며 물 위로 고개를 수그린다. 시계가 돌아가지 않는 유리잔 위에서 낙타의 지친 다리는 여전히 근육을 부풀리며 다음 걸음을 뗀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꽃씨 하나가 황갈색 육봉 사이에서 반짝 마른 빛을 낸다. 기상캐스터는 오늘부터 황사현상이 더 심해질 거라고 예보했다. 내몽고의 커얼친 사막에서 불어온다는 모래바람은 매년 조금씩 남동쪽으로 몸을 튼다. 숲과 도시를 삼키며 점점 넓어지는 그 유동사막으로 깃발을 단 사람들이 아카시아 묘목을 들고 떠나고 있다. 식수심기운동 지휘대장이 아카시아 뿌리의 번식력에 대해 설명한다.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우리 나라도 모래사막이 될 겁니다. 태풍보다 무서운 바람이지요. 그것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는 태양과 모래가 있을 뿐입니다. 이 나무가 우리의 푸른 땅을 지켜줄 겁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황량한 그 곳에는 만호보석이 널려 있지만 그것들은 모래바람을 막기 위한 돌담으로 쓰일 뿐이지요. 환경운동가들과 보석채굴업자들의 분주한 발소리가 나란히 바람소리에 묻힌다. 흙을 덮은 집에 쪽문을 내고 사는 사람들의 마을에서 낙타처럼 귀를 가린 사람들이 모래 위에 누워 꿈을 꾼다. 갈고리 같은 뿌리들은 그들의 꿈 속에서 보석을 움켜쥔 채 끝없이 뻗어나간다. 축하합니다, 오월의 신부가 되겠군요! 채널을 돌리자마자 디제이의 경쾌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뒤이어 쏟아지는 축혼행진곡의 스타카토. 요란한 팡파르가 한낮의 햇빛을 퉁기며 질긴 메아리를 남긴다. 사연이 채택된 여자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감사합니다”를 연발하고 있다. 디제이도 덩달아 톤을 높인다. 쇳소리와 함께 그들의 웃음소리가 찢어진다. 오늘따라 유난히 잡음이 심하다. 수신기를 창문 쪽으로 돌려놓아 보지만 소용이 없다. 떨리는 금속 안테나 끝에 어른어른 정오의 빛이 매달린다. 오늘의 주제는 ‘첫사랑도 성공할 수 있다’. 사연을 보낸 여자는 8년간의 연애담을 몇 분으로 요약해 낸다. 비음이 섞인 여자의 목소리는 미리 준비된 스크립트를 읽는 아나운서처럼 멈춤이 없다. 캠퍼스 커플, 남자의 군입대, 이별, 재회, 집안의 반대, 도피, 결혼…. 쉼표도 물음표도 없는 단락들이 이어진다. 물음과 답과 감탄사! 어쨌든 그녀는 최신형 김치냉장고를 얻었고, 그리고 다음 주엔 첫사랑에 성공한 신부가 되는 것이다. 디제이는 혼수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한다. 사랑이 가장 큰 혼수지요, 여자는 호들갑스럽게 맞장구를 친다. 마지막으로 오월의 신부는 몇 년 전에 유행했던 노래를 신청한다. 세상에 하나뿐인 그를 위한 노래예요. 예정시간이 초과되었는지 디제이는 급하게 여자와의 인터뷰를 끝낸다. 부서지는 나뭇잎 소리와 둔중한 베이스음이 규칙적으로 흘러나온다. 사랑해, 사랑했어, 사랑할 거야, 사랑은…. 잡음에 묻혀 불분명한 암호가 되어버린 노랫말들이 괴괴한 사위로 퍼져 나간다. 조금 전 삼킨 밥알이 까끌거리며 곤두선다. 트릿한 속에서 가벼운 한숨이 터져 나온다. 전기밥솥이 고장난 지도 한 달이 넘었다. 하지만 나는 김치냉장고나 전기밥솥대신 근사한 라디오를 얻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나도 지난날들의 음악을 신청할 수 있을까? 우리는 도대체 어떤 노래들을 들었었지? 나무탁자 위의 그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반질반질한 포마이카 탁자에 반사된 한낮의 역광 속에서 그의 실루엣이 하얗게 부서진다. 그는 좀체 말이 없다. 광고방송이 시작된 라디오를 끄고 그에게로 다가가 앉는다. 너는 무슨 노래를 들고 내게로 돌아왔니? 그는 여전히 말이 없다. 나는 그에게로 뻗으려던 팔을 도로 모아들이고 바람이 들기 시작한 창가로 돌아가 앉는다. 건너편 솔숲에서 바람을 탄 먼지들이 날아든다. 바다를 건너온 모래알과 꽃씨들이 이 쪽 바다의 끝에서 저 쪽 바다의 끝을 향해 섬을 휘감으며 날아간다. 유리에 매달린 먼지들을 쓰다듬으려던 손이 맥없이 미끄러진다. 손끝을 빠져 나온 훈기가 희미한 얼룩을 만들어 놓는다. 얼룩 너머의 세상이 편각을 이루며 일그러진다. 멀고 푸른 섬을 이룬 솔숲 속에서 이따금 새들이 솟구쳐 오른다. 새들은 망설임 없이 유리의 경계를 날렵하게 지나간다. 숲을 빠져나간 새들은 뿌연 공중의 편대비행에 재빠르게 섞인다. 이제 그림자는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 바닥에 파묻힌 의자의 다리를 껴안으며 나른하게 드러눕는다. 먼지들이 외줄타기광대처럼 사선의 빛줄기를 어지럽게 감으며 올라간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 위로 날아드는 입자들이 느껴진다. 의자에 걸린 그의 트렌치코트 끝자락이 발에 채인다. 표정이 사라진 그와는 달리 감청색의 외투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다. 말없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한다.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악어가죽 지갑은 그의 생일에 선물했던 것이다. 현금 오만 원과 신용카드 두 장, 황갈색 아라베스크 무늬 타이가 도드라지는 여권용 사진 세 장, 그리고 아직 가장자리의 제단 흔적이 또렷한 낯선 이들의 명함들. 오른쪽 주머니에선 아직 다섯 개비가 남아 있는 구겨진 담뱃갑이 나온다. 넌 담배를 끊지 못했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찾지만 손에 잡히질 않는다. 왼쪽 주머니 안으로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만져진다. 구멍을 빠져나온 라이터는 그를 감쌌던 등을 에둘러 뒷단의 끝까지 내려가 있다.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빠졌던 길을 쉽게 찾아낼 수 없다. 라이터는 내 손을 따라 외투의 구석구석을 지나가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다. 그도 구멍난 주머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찾았을까.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딱딱해진 응어리를 등에 박아둔 채로 허청거리며 사람들 속을 걸어 다녔을까. 서랍을 뒤져 바늘쌈지와 성냥갑을 꺼내온다. 오래 방치된 감청색 실은 엉킨 채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뜯어낸 밑단에서 새빨간 라이터가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다시 그에게로 다가가 앉는다. 언제부터 붙어 있었는지 꾸들꾸들해진 밥알이 그 앞에 매달려 있다. 아주 오래 전에 이 섬은 바다였다는데, 이제 저 모래바람이 몇 천 년 더 불어오면 사막이 될지도 몰라. 바다 위에 뜬 사막을 본 적 있어? 그는 미동도 않는다. 이래도 가만히 있을 거야? 슬쩍 밀어보지만 소리 없이 미끄러지기만 할 뿐이다. 그의 입술이 있었던 자리를 더듬는다. 그는 돌아왔지만, 이젠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없다. 상자 속에 얌전히 담겨온 그는 이 솔숲 언덕을 떠나던 날처럼 세상의 먼지와 꽃가루와 그 미세한 입자들의 질서를 훌쩍 떠나 버렸다. 술에 취한 청년은 그를 넘어뜨리고도 한참을 가서야 차를 세웠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의 몸은 무른 열매처럼 으깨어져 폭우가 쏟아지는 거리로 흩어져 있었다. 정확한 사인은 제2경추 치상 돌기 골절과 두개골 함몰이었지만 그 중 하나만으로도 죽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새벽 두 시 반, 그 여자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꾸만 입을 가리고 웃었을 여자를 바래다주고 네거리 교차로를 건너고 있었다. 그 여자의 집, 낡은 가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그의 집, 이 언덕바지, 그리고 아무리 더듬어보아도 그의 생활과는 무관해 보이는 낯선 길로 뻗어 있는 네거리 교차로. 그는 교차로의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그는 여자를 보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가 못 이긴 듯 고개를 숙이고 그가 두른 팔을 걷어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 교차로를 벗어나 밤의 침대로 곧장 걸어갔더라면 둘은 결국 흡족한 표정으로 잠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깔밋한 양복이 흠뻑 젖은 흙색으로 바뀌도록 그는 잘못 던져진 돌팔매처럼 길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아무도 그를 흔들어 깨우지 않았다. 동그랗게 담을 두른 사람들은 겁에 질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던 청년을 떠밀었다. 매캐한 냄새를 풍기는 급정거 자국과 그의 으깨진 두개골과 청년의 반짝거리는 구두가 나란히 놓였다. 붉은 빗금이 그어진 청년의 눈이 크게 벌어졌지만, 비명은 금세 빗소리에 묻혀 흘러갔다. 무성영화 속의 다정한 친구처럼 둘은 가만히 곁을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의 우산 끝을 타고내린 찬 빗방울들이 그의 이마로, 입술로, 움켜쥔 주먹 위로 떨어졌다. 끊길 듯 말 듯 외치며 달려오는 앰뷸런스가 부서진 그를 거두어갈 때까지 빗줄기는 더욱 거세어졌다. 길 위로 내동댕이쳐진, 그의 몸을 빠져나간 지난 시간들이 나를 불러냈다. “나 왔어!” 방안으로 들어선 그는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그 서슬에 차렵이불 속으로 고치처럼 말려 있던 몸이 뜯겨나간다. 숨은 뼈들이 으스러지는 것처럼 온 신경이 곤두선다. “그냥 좀 내버려둬.” 다시 몸을 말아 들이며 이불을 뒤집어쓰기가 무섭게 그의 손이 어깨를 흔들어댄다. “할 얘기가 있어서 왔단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생리통이야. 곧 끝날 거니까 좀 내버려둬.” 돌아누운 등 뒤로 그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간다. 높은 음이 미세하게 떨린다. “어떻게 그냥 내버려두란 말이야.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곧 끝날 거라니까.” “무슨 생리통이 그렇게 유난스러워? 이틀째 출근도 안하고, 전화도 안 받고. 이렇게 혼자 틀어박혀 있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 “나 좀 잘게. 나중에 얘기하자.” 그는 바퀴가 닳은 사무실 의자 위에서, 공사현장의 굉음 속에서, 휴대폰을 들고 수십 번 통화버튼을 누르다 지쳐 달려온 것이다. 걱정이 되어서인지, 화가 나서인지. 아마 둘 다겠지. 우선은 걱정이 되었을 것이고,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걱정해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을 것이고. 고개를 파묻고 있어도 그의 표정이 또렷하게 보인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벽을 텅텅 두드리며 서성거리다 풀썩 주저앉는다. 금속버클이 열린 채 그의 가방이 구석으로 내던져진다. 그는 소소한 불운도 견디질 못한다. 3년 동안 자리보전을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였다. 그의 아버지는 마지막까지도 ‘나를 죽게 내버려 둘 작정이냐’며 고함을 지르셨다. 그렇게 역정을 잘 내시는 분은 아니었다고 했다. 아버지 역시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병을 얻었고, 딴 사람이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그. 그들은 죽음과 분노로 서로 얽혀 있다. 하지만 상실감보다 더 큰 어떤 힘이 그들을 꿰어 묶고 있었다. 그것을 무엇이라 이름붙일 수 있을까. 그의 말대로 진창을 같이 뒹굴어 본 가족이 없는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는 명확하고 계획적이며 계산한 것과 맞아떨어지는 일에만 안도한다. 그가 하루 종일 매달려 있는 제도판의 사각 설계도면처럼. 얼굴을 맞댈 때마다 퍼붓는 아버지의 악담들이 그를 바꾸어놓은 것은 아니다. ‘차라리 이제 그만 돌아가셨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던 그였지만, 어쩌면 그는 아버지의 빈 자리에 그려 넣을 것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악을 쓰고 주먹을 휘두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가족의 촘촘한 내부도면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거의 없다. 그런 그를 앞에 두고 가타부타 입을 다문 채 드러누워 있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지만, 저절로 허리를 꺾게 만드는 복통은 이틀째 사그라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생리통이 심한 편이니, 그런가보다 했다. 하지만 생리가 끝난 뒤에도 뒤틀리는 복통은 멈추지 않았다. 독기를 품은 흰게들에게 갉아먹히는 것처럼 지독한 통증이었다. 살점이 뜯겨나가고 내장이 뚫리고 뼈가 으스러지고…. 내심 불안한 기운이 불쑥 솟아오를 때마다 그를 기다린 것도 사실이지만 전화를 걸 수 없었다.
어둑한 빈소에 무릎을 꿇고 있던 그의 주먹 쥔 손이 떠올랐다. 그의 단단한 손등 위로 불거지던 푸른 핏줄들이 생생하게 살아나자, 벌어지던 입이 다시 굳게 닫혔던 것이다. 그가 더 이상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듯, 나도 그를 잃고 싶지 않다. 가족도 없고, 제 집도 없으니, 이젠 잃을 게 없을 것 같지만, 언제나 그런 사람들에게 불행은 찾아오니까. 찬물을 들이키고 온 그는 피곤이 감긴 턱을 치켜든 채로 눈을 감는다. 신음을 참느라 깨물었던 아랫입술에서 비릿한 피냄새가 올라온다. 우수수 앞으로 쏟아져 내린 앞머리 사이로 일그러졌던 그의 표정이 한순간 느슨하게 풀린다. 기대고 있는 벽보다 더 꼿꼿하던 그의 어깨가 점점 밑으로 가라앉더니 어느 순간 고개를 꺾는다. 잠든 그의 몸은 깨어 있을 때보다 한결 부드러워 보인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허리를 붙들고 끌어내려 보지만 생각보다 그의 몸은 완강하다. 옆에 누운 그도 동그랗게 몸을 말아 들인다. 그제야 그의 날숨 사이로 희미한 술냄새가 스며 나온다. 그는 지쳐있다. 등 뒤로 그의 둥근 무릎뼈가 느껴진다. 딱딱한 마디들이 서로 몸을 맞댄 채 드러누워 있는 지점. 나는 그의 부드럽고 둥근 뼈들을 사랑한다. 그것들은 화를 내지도 않고 함부로 몸을 꺾지도 않는다. 그가 잠든 동안, 나는 그 둥근 뼈들을 떼어내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곳에는 평화롭던 날의 그가 아직 남아있지 않을까. 드러나지 않아 변할 필요도 없는 평화로운 둥근 뼈 깊숙한 곳에. 그 곳에는 고통이나 불안이 없다. 땀에 젖은 손을 뻗어 그를 감싸 쥔다. 그는 표정 없이 깊이 잠들었다. 그제야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온다. 잠든 사람들의 골목을 찾아든 청소부들의 웅성거림이 시작될 무렵까지 그와 나는 번갈아 고된 숨을 내쉰다. 눈을 뜨자 온통 하얀 빛이 쏟아져 들어와 사위를 분간할 수 없다. 여기가 어딘가. 다시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자 차가운 금속소리와 함께 포르말린 냄새가 훅 풍겨온다. 병원이다. 병원임을 깨달은 순간, 다급한 발소리와 가느다란 신음소리 가운데 간호사들의 또렷하고 빠른 목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상황을 파악하자, 복통이 다시 격렬해진다. 그렇다면,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단 말인가. “맹장염인가요?” “아닙니다. 난소에 낭종이 발견됐어요. 염좌가 심하군요. 일부는 벌써 터진 것 같습니다. 바로 수술해야 합니다.” “염좌라니요?” “쉽게 말하자면, 혹이 커지면서 꼬리 부분이 꼬인 겁니다. 이 정도로 커질 때까지 전혀 몰랐다니…. 통증이 심했을 텐데요. 원래 초기에는 자각증상이 거의 없는 편이지만 이 정도면 통증이 있었을 겁니다. 자궁내막증도 있는 것 같은데요. 특별한 병력이 있나요?” “그런 얘기 들은 적 없는데…. ”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며 흐려진다. 반면, 의사는 리듬을 타듯 경쾌한 목소리다. “특별한 병력이 없다면, 몇 가지 검사하고, 바로 수술합시다. 요즘은 개복하지 않고, 복강경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까 회복도 빠르고 흉터도 거의 남지 않습니다. 병원 앞에 가면 의료기상사가 있을 겁니다. 우선 절차 밟으시고, 몇 가지 기구들을 사오시면 됩니다. 두 시에 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수술 전까지는 진행 상태를 확인해야 하니까 통증이 심해도 진통제 처방이 어렵습니다. 식사는 하지 마시구요, 간단한 수술이지만 며칠 입원해야 하니까 그렇게 준비하십시오. 더 궁금하신 것은 저쪽 간호사 선생님께 물어보시구요.” 의사가 총총 사라지자 그의 까칠한 얼굴이 눈앞으로 솟는다. “괜찮아? 수술해야 한대. 간단한 거라곤 하지만. 정말 연락할 곳 없어? 먼 친척이라도.” 수술동의서를 받아든 그는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읽는다. 가느다란 펜이 끼워진 중지에 검은색, 청색 볼펜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날카로운 쇠자를 대고 벽과 마루의 직선을 긋고 둥근 지붕과 창문을 공글리는 데 한 치의 오차도 없던 그의 손이 빈 서명란 앞에서 오랫동안 주춤거린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다시 몸을 말아 들인다. 머리 위에서부터 늘어뜨려진 링거줄이 팔목을 칭칭 휘감는다. 면접관의 물음에 애꿎은 귀밑머리를 꼬았던 날처럼 휘감겨드는 기억을 한 줄 한 줄 걷어내다 까무룩 잠이 든다. 수술이 아니라 더 대단한 일이 생기더라도 연락할 피붙이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태어나 자랄 수는 없는 일이다. 그가 동화를 바랐다면 나는 아주 근사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낳은 여자와 살았던 열 살 이전의 시간과 그 무너져가던 집에 대해 그에게 얘기하려 할 때마다 번번이 아버지의 대목에 가서 입이 다물어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에 대해 말하려면 우선 외삼촌의 방에 걸려 있던 세계지도를 떠올려야 한다. 절름발이 외삼촌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둥그런 지구의와 벽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끝을 조금씩 접어야 할 만큼 커다란 지도를 갖고 있었다. 외삼촌은 비틀려 쪼그라든 왼쪽 다리 대신 의자 귀퉁이를 붙잡고 지도 속의 푸른 점들을 짚으며 지구 반대편의 나라와 여자와 남자의 구분이 없는 나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나라, 구멍난 돌로 과일을 사는 나라, 사철 지지 않는 꽃이 피는 나라를 가르쳐 주었다. “그럼 우리 아빠는 어느 곳에 있는 거야?”라고 물었을 때 외삼촌은 지도 위의 먼지를 한참 쓸어내리다가 남태평양의 깊고 푸른 바다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여긴 어떤 나라야?” 외삼촌은 비밀을 누설하는 사람처럼 소리를 죽여 속삭였다. “여긴 한 번 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이야. 이곳에서 돌아오는 지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세상에는 없거든. 이곳은 언제나 파도 반대편으로 흘러가니까. 네 아버진 그 곳으로 가버린 사람들을 데리러 간 거지. 옛날에 말이야, 소금을 싣고 집으로 돌아가던 아라비아 상인들도, 붙잡힌 공주를 구하러 가다 길을 잃은 페르시아 왕자도, 고래를 잡으러 폭풍 속으로 떠났던 어부들도 모두 다 이곳에 있어. 여기에선 물고기들이 사람처럼 말을 하고 사람들은 물고기처럼 바다 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지. 아주 옛날에 그 곳은 사막이었어. 파도가 모래를 삼켰지. 낙타들이 돌고래들과 둥둥 떠다니면서 간밤의 꿈 얘기를 해. 하지만 너무 어려서 너는 갈 수 없어.” 내게 그것은 최초의 아름다운 동화이자 부서지기 쉬운 꿈의 시작이었다. “실망할 것 없어. 아무에게도 묻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면 그 곳으로 갈 수 있으니까. 삼촌처럼 크면 말이야, 그 곳으로 가는 길이 보여.” 그러니까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은 그게 전부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와 엄마를 떠나버렸다는 젊은 남자, 사진 한 장 없는 아버지는 어쩌면 외삼촌보다도 젊었을지 모른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나이를 먹지 않으니까. 외삼촌이 잘린 손목을 양철대야에 담그고 엷은 웃음을 띤 채 잠들었을 때도, 외할머니가 꺽꺽 소리를 내며 문턱에 머리를 찧고 다시 일어서지 않았을 때도, 엄마가 진달래색 우단 원피스에 노란 리본을 달아주고 손을 흔들며 팔랑팔랑 나비처럼 날아가 버렸을 때에도, 나는 그들이 모두 지도 속의 깊고 푸른 점으로 들어갔다고 믿었다. 언젠간 그 곳에서 낙타와 돌고래와 왕자와 공주들 속에 있는 내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열에서부터 거꾸로 세어보세요.” 열, 아홉, 여덟…. 여덟을 넘기지 못한 채 집도의의 푸른 마스크가 시야에서 흐릿해진다. 순간, 흰 섬광이 번쩍 푸른빛을 수직으로 가른다. 흰 포말을 가득 단 커다란 파도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순식간에 파도가 덮쳐온다. ‘그 곳에는 바다 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지’ 소독모로 덮인 귓바퀴 안쪽으로 누군가 속삭이고 있다. 훅 숨을 들이마신 순간 이내 모든 게 캄캄해졌다. 나는 깊고 푸른 잠 속에 빠져들었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깨어났을 때, 파도가 있던 자리에는 불 꺼진 수술등이 동공이 빠진 동물의 눈처럼 그악스럽게 알몸을 훑고 있었다. 내 이름이 들려오는 곳으로 손을 뻗어보려 했지만 링거가 꽂힌 양팔이 구부러지지 않았다. 발가락을 움직여보려고 힘을 주자 푸른 천으로 덮인 아랫도리가 얼음처럼 뻣뻣해졌다. “피를 많이 흘렸어요. 혹만 떼어내려고 했는데, 유착이 너무 심했고 이미 터진 상태였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복막 전체에 퍼져서 아주 위험할 뻔했어요. 오른쪽 난관과 난소는 완전히 들어냈습니다. 어쩔 수 없었어요. 반대편 난소 쪽에도 유사한 낭종이 발견됐어요. 경과를 지켜봐야 알겠지만, 난소기능이 어느 정도 남아 있을지 알 수 없군요. 이 상태로 진행이 된다면 자궁을 들어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시간 정도면 끝난다는 수술은 네 시간 반 동안 계속되었다.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로 옮겨지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춥다는 것뿐이었다. 지독한 추위였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온 냉기가 머릿속, 장기와 뼈의 틈 사이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진통제를 놓아주러온 간호사의 손목을 붙들고 나는 다시 추위를 호소했다. 앳된 얼굴의 간호사는 주사바늘을 꽂기 위해 들췄던 담요를 목까지 끌어올려 준 후 종종걸음으로 병실을 빠져나갔다. “괜찮아? 네가 죽는 줄 알았어.” 면도를 하지 못한 그의 턱에 수염이 비죽 솟아있다. “그냥, 춥기만 해. 무슨 말이야? 뭘 떼냈다구?” 그는 한참 말이 없다. 그의 눈 속에 담긴 눈부처가 기우뚱 한쪽으로 쓰러진다. “네가 들어가고 두 시간 정도 지나서 의사가 나왔었어. 트레이에 무얼 갖고 나왔는데…” “그래, 그게 뭔데?” “난관과 난소에 혹이 엉켜 붙어서 어쩔 수 없었대. 내가 확인했어. 그냥 조그만 살덩이였어. 아무것도 아냐. 다른 쪽이 남아 있으니까…. 어차피 그건 쓸모없는 거야.” “쓸모없는 거라구?” “….” 쿨럭, 칼칼한 목을 타고 가래가 올라온다. 기침을 할 때마다 아랫도리에서부터 시작된 쓰라림이 가슴께에 와서 다시 한 번 속을 파고든다. 손사래를 치며 그를 내보내고 난 뒤에도 기침은 오랫동안 멈추지 않는다. 유리 수조에 담겨온 신생아를 들여다보던 건너편의 할머니가 야멸찬 눈초리를 거두며 중얼거린다. “폐병환자 아닌가? 산모도 있고 갓난애도 있는 병실에….” “어머니, 아녜요. 마취 때문에 나오는 가래예요. 좀 전에 수술한 아가씨예요.” 아직 부기가 빠지지 않은 여자의 갓 피어난 해사한 얼굴에 미안함과 함께 어쩔 수 없는 자신감이 넘친다. 병원을 하루 앞둔 아침, 오층 병실 복도 밖으로 진눈깨비가 쏟아진다. 창 밖으로 붙박여 있던 눈에 깃을 세운 그의 낡은 코트가 들어온다. 그는 환자처럼 비척대며 차와 사람들을 피해 구석에서 구석으로 발을 옮긴다. 현관의 녹나무 앞에서부터 갑자기 그가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빼내 밑을 내려다본다. 녹나무 잎사귀 밑으로 진눈깨비를 맞고 있는 그가 보인다. 빈 의자에 앉은 그는 고개를 수그린 채 구두코를 쳐다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그는 좀체 고개를 들지 않는다. 그의 어깨 위로 차가운 진눈깨비들이 날아와 박힌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추운데….” “어? 어떻게 나왔어?” 흠칫 놀란 그의 머리칼에서 반짝이는 결정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창문에서 봤어. 왜 그렇게 힘없이 걸어? 나보다 더 기운 없어 보이더라.” “….” “오늘 못 온다면서?” “어… 현장으로 가다가 와본 거야. 이 근처거든. 내일 퇴원하지?” “응. 퇴원해도 회사에는 당분간 쉰다고 했어. 아르바이트생으로 한 명 구했나봐. 좀 나아지면 다시 출근하기로 했어. 다행이야.” “그래, 다행이다. 추운데 빨리 들어가. 나 이제 가봐야 해.”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왜, 잠깐이라도 들어왔다 가지. 집은 아니지만.” “아니야, 정말 가봐야 해.” “바빠?” “응, 바빠. 어쩌면 내일 데리러 올 수 없을지도 모르겠어. 혼자 갈 수 있지?” “어… 그럼. 저녁에 집에서 보면 되지 뭐.” “….” 녹나무 그늘에서 벗어난 그가 총총 시야에서 사라진다. 올 때와는 달리 커다란 보폭으로 성큼성큼 멀어진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그의 등에 마른 잎사귀 한 장이 매달려 간다. 불러 세우려고 손을 들어올리는 사이, 잎은 진눈깨비 흩어진 거리 위로 툭 떨어진다. 그 위로 병원으로 드는 사람들의 무연한 발걸음이 바쁘게 이어진다. 녹나무 그늘께로 와서 그들은 환자로 혹은 보호자로 나뉜다. 돌아가는 사람들의 등에는 꼭 마른 잎사귀 한 장씩이 매달려 간다. 묵은 잎을 바꾸어 다는 나무가 땅 속으로 한 뼘의 뿌리를 다시 뻗고 있다. 일찍 출근해야 해. 새 공사 시작되면 할 일이 많아. 리모델링할 건물도 몇 건 있고. 기다리지 마. 당분간 야근할 거야.” 외투에 한 쪽 팔을 집어넣으며 그가 내뱉듯 말한다. “그래도 회사에서 대충 먹고 자지 말고 잠깐이라도 왔다 가.” 돌아선 선 그가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 중얼거린다. “너무 애쓸 것 없어. 네가 그럴수록 나도 힘들어. 그만 포기하고 편하게 지내.” “뭘 애쓴다는 거야? 그리고 뭘 포기해?” “우린 아직 결혼도 안했어. 그리고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가족이 아니야.” 낮고 단호한 말과 함께 그의 몸의 문을 완전히 통과해 나간다. 그가 빠져나간 몸은 재빨리 바뀌는 그의 표정과는 달리 여전히 따뜻하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웅숭그린 아랫배에 손을 얹는다. 육 개월간의 식이요법과 호르몬 치료에도 불구하고 몸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월경은 보름에 한 번, 혹은 두 달에 한 번 정도 스치듯 시작되었다가 이내 멎어 버렸다. 남은 난소는 엄지손톱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도 정상적인 부분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가능성이 있다는 말에 자궁을 들어내지 않았다. 오십이 넘은 여자들도 남은 불씨를 그러모아 동그란 아이들을 빚어내는데, 서른도 되지 않아 시든다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내게는 아직 꽃 필 자리가 남아 있었다. 의사는 더 악화되기 전에 아이를 가져야 출산이 가능하다고 당부했지만, 정작 그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넉 달이 더 지나갔다. 가족이 필요하지 않다는 그의 말은 불행의 씨앗을 안고 싶지 않다는 말일 것이다. 기대할수록 실망과 상처가 클 것이므로 어쩌면 그가 현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아직 오지 않은 불행에 뒷걸음질치느라 즐거움을 잊었다. 차가운 타일 바닥에 서서 거울 속의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열 살의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겁먹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뿌옇게 흐려진 거울을 닦아낸다. 그녀를 닮은 젊은 여자가 지친 얼굴로 나를 들여다본다. 이제 여자는 급속히 늙어 주름진 얼굴에 가느다래진 머리채를 틀어 올린 채 내 얼굴에 손을 갖다 댄다. 소스라치게 차갑다. 월요일 아침의 사무실, 갇혀 있는 것들이 쿰쿰한 냄새를 피우며 느리게 깨어난다. 유리잔과 재떨이를 씻고 책상을 훔치고 청소기를 돌리는 동안 철문의 쇳소리와 함께 빈 의자들이 하나씩 채워진다. “미스 정, 이번 주가 부가가치세 신고 마감일인데, 알고 있지?” 이 부장의 억실한 턱이 파티션 옆으로 불쑥 들어온다. “저… 오후에 상주건설에 한 번 다녀와야겠어요. 세금계산서 확인할 게 좀 있어서요.” 이 부장은 여전히 건들거리는 말투다. “아, 내가 그거 안 전해줬나? 어쩐 일인지 그 쪽 경리아가씨가 확인해 보라면서 들고 왔더라구. 미스 정이 부탁한 게 아니었어? 어디 있더라, 가만…. 음, 여기 있네. 틀린 건 없을 거라던데? 요즘 거기 재미가 좋은 모양이야. 대주아파트건이 거기로 떨어질 거라는 소문이야. 하청받는 우리야 덩달아 좋은 거지 뭐. 혹시 틀린 게 있으면 전화 주라던데?” 책상 위로 툭 던져진 누런 서류봉투에 그가 일하는 회사 로고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그와 자리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는 어린 여자아이의 동그란 글씨가 상형문자처럼 흐릿해진다. 그에게서 연락이 끊긴 지 한 달째다. 바뀐 전화번호를 누르자 녹음된 여자의 상냥한 목소리에 이어 이국의 말들이 끝도 없이 쏟아진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매출액과 매입액은 매번 계산할 때마다 다른 합계가 나온다. 마른세수를 하며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는다. 감은 눈꺼풀 안으로 오계산된 숫자들과 그의 전화번호가 떠돈다. 잊어버린 생년월일과 나이, 떠나온 집들의 주소, 멀고 푸른 남태평양의 깊이…. 세금신고 마감일이 얼마 남지 않자, 여기저기서 누락된 서류들을 보내온다. 코발트색 모자를 눌러쓴 우체부가 출입문에 서서 손을 든다. “여기 사인 좀 해주세요.” 그의 걀쯤한 손가락들이 푸르게 굳어 있다. 순간, 불룩 솟아오른 뼈마디를 만져보고 싶다. “저… 죄송한데 물 한 잔 마실 수 있을까요?” 우체부가 커다란 눈을 끄먹끄먹 슴벅거린다. 정수기에서 찬 물을 받아 건네자 그는 갈급증 들린 사람처럼 급하게 물을 들이킨다. 목울대가 쿨럭거리며 힘차게 부풀었다 쪼그라든다. 의자를 내어주지만 그는 오 분이 걸리든 십 분이 걸리든 앉는 법이 없다. 순환근무는 육 개월마다 재배치된다. 그는 앞으로도 이 거리와 건물을 두 달 동안 뛰어다녀야 할 것이다. 그 이후로도 또 다른 골목을 통과하며 문을 두드리겠지만. 그는 아직 채 반도 채워지지 않은 수령목록을 들고 꾸벅 고개를 숙이곤 돌아나간다. 닳은 제복의 무릎이 툭 튀어나와 있다. 3층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그의 발걸음이 건물을 뒤흔들다 곧 공중으로 흩어진다. “임신인가요?” “….” 의사는 비닐장갑 낀 손을 마주 비빈다. 그 속에 담긴 희고 건조한 손가락들이 탄력 있는 고무 밖으로 꿈틀거린다. “난관내임신입니다. 그냥 두면 곧 파열되겠어요.” 의사는 흑백의 초음파화면을 내 쪽으로 돌려 놓고 사진 속에 담긴 점 하나를 짚어 준다. 개구리처럼 벌려진 다리 옆으로 검은 화면이 확대된다. “임신이 힘든 케이스인 건 아시죠?” “….” “시간을 끌면 수정란이 난관벽을 뚫고 나올 거예요. 조기임신종결이 되는 게 대부분인데 꽤 자랐어요.” “임신종결이라뇨? 유산된다는 말인가요?” “네. 임신초기에 유산되는 게 대부분인데, 아직 그 속에서 자라고 있군요. 위험하니까 빨리 수술하는 게 좋겠어요.” 의사는 정지된 화면 속에서 같은 지점을 찾아 가리킨다. 내 속에 저런 동굴 같은 집이 있었다니. “죽나요?” 의사는 코끝에 걸린 안경을 끌어 올리며 입을 실룩거린다. 웃고 있는 것인지 찡그린 것인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불분명하다. “그동안 통증이 심했을 텐데요. 갑자기 쇼크에 빠지거나 출혈이 심해지면 아주 위험해요. 더군다나 지금 자궁상태도 좋은 편이 아니구요. 임신이 된 게 신기할 정돕니다.” 초음파화면을 다시 제 쪽으로 돌려 놓으며 먼저 일어난 의사가 얼음 기둥처럼 높이 솟는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그의 목소리가 또렷하다. “어차피 이곳에서 태아는 살 수 없어요.”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회복실의 침대는 뜨겁게 데워져 있다. 커튼 너머 스무 살 초입의 연인이 서로 손을 잡고 조용히 울고 있다. 여자아이의 흐벅진 다리 밑으로 선홍색 피 한줄기가 주르륵 흘러나온다. 수술실에 들어가며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플란넬 치마에서 커다란 모란꽃송이들이 뚝 뚝 떨어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시내의 가장자리를 맴돌다 커다란 통유리 안으로 들어간다. 커피집의 늘어진 모조 야자수가 살짝 이마를 스쳐간다. 빛이 바랜 회녹색 잎사귀 위에 먼지가 가득 쌓여 있다. 물기 없는 플라스틱 잎사귀는 아무런 저항 없이 쑥 뽑힌다. 잎을 매달았던 자리에 빈 구멍이 남는다. 속이 모두 빠져나가버린 것처럼 헛헛하다. 네거리 교차로, 그의 집을 향해 난 길을 쳐다본다. 꼭 다문 그의 입술을 벌리고 싶다. 어린 날의 동화처럼 깊고 푸른 점으로 사라지기 전까지 그의 따뜻한 무릎뼈를 베고 잠들고 싶다. 디제이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모래사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차를 세운다. 바다 반대편으로 굽어 자란 해송의 그늘 밑이다. 차창을 열자 먼 곳으로부터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소리가 쏟아져 들어온다. 괭이 갈매기 한 마리가 버려진 깡통과 비닐 사이를 종종걸음친다. 바다로 난 길의 끝에서 언덕은 갓 포장한 아스콘 도로와 모래사장,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이따금 해안도로 드라이브 코스를 벗어났던 차들이 주춤거리다 방향을 바꾸어 달려나간다. 해변에는 짧은 머리에 풀빛 셔츠를 걸친 남자가 모래에 다리를 파묻고 앉아 있다. 밀물이었다. 암녹색 셔츠자락이 점점 바다 쪽으로 끌려가는데도 남자는 숫제 눈을 감은 채 꼼짝하지 않는다. 바위처럼 주저앉은 사내의 실루엣 안으로 사라진 사람들을 채워 넣는다. 모래사장에 처박힌 차를 끌어내던 날이 떠오른다. 높하늬바람이 밀려오던 늦여름, 해변의 천막들이 하나 둘씩 걷혀 말려지고 있던 오후였다. 사구의 끄트머리에 차를 세우고, 지는 볕이 부드럽게 퍼져가는 그의 옆얼굴을 보며 말했다. “저 모래사장을 건너면 또 길이 있을 것 같지?” 그는 아무 말 없이 조심스레 두 바퀴를 모래사장에 내려놓았다. 푹신한 느낌, 하지만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하자 바퀴는 점점 모래 속을 파고들었다. 바퀴들이 모래 속으로 점점 파묻히면서 우리의 몸도 모래 속으로 점점 가라앉았다. 차창 안으로 모래알들이 솟구쳐 올랐다. 우리는 시동을 끄고 차 안으로 들어가 모래알이 달라붙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한참을 웃었다. “모래가 노래하는 산이 있대.” 그는 내 얼굴에 묻은 모래알들을 떼어주며 모래알이 있던 자리마다 입을 맞췄다. “그 곳은 커다란 모래산인데, 바람이 불면 다섯 가지 색깔의 모래들이 노래를 불러. 그 산을 넘으면 초승달 모양의 작은 오아시스가 있어. 모래바람은 계속 불지만 그 샘은 마르지 않아. 샘에서 부는 작은 바람이 모래를 밀어 올리거든. 노래 부르는 산을 넘은 쌍봉낙타들은 그 샘에서 목을 축이고 아름다운 달을 보면서 다시 사막을 넘지. 오아시스를 믿지 않는 낙타들은 절대 그 곳에 닿을 수 없어.” 그는 마지막으로 내 입 속의 모래알들을 훑고 난 후, 언덕 너머의 마을로 달려갔다.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는 그를 따라 밀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사이 해변의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오도마니 패인 자리에 그가 했던 것처럼 다리를 밀어넣고 중얼거려본다. 달이 뜨는 바다. 나는 하늘에서 보면 반월과 같다는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여윈잠 속에서 물 위를 떠다니는 꿈을 자주 꾸었고, 그러나 물을 무서워했으며, 해마다 하얗게 부푼 시체가 떠내려오는 모래사장에서 한 차례의 밀물과 한 차례의 썰물이 지나도록 난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먼 동쪽 하늘의 반월은 점점 부풀어올라 갓난애를 품었던 둥그런 뱃속으로 들어찬다. 너를 위해 품은 오아시스라고 말해주었다면 그는 교차로에서 들다 만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모래산을 넘어 내게로 돌아왔을까. 꼭 한 번만 그 곳에 다시 가고 싶어진다. 천진한 두려움과 기대로 물 속의 달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하늘이 색을 바꾸며 저물어간다. 난바다에 닿을 듯 걸쳐진 해가 점점 빠르게 잠긴다. 그가 사람들에게 단단한 집을 만들어주고 싶어 했던 것처럼 나는 그에게 주고 싶던 따뜻한 집을 아직 뱃속에 남겨두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세상에서 소용을 찾으려 애썼던 기관을 모두 잃어버린 채 둥근 뼈만을 남겼다. 손가락 사이로 그의 웃음소리와 따뜻한 살과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빠져나간다. 그 사람의 살아있는 둥근 뼈가 그립다. 눈물이 쏟아지려다 어느 지점에서 날아가 버린다. 조각난 시간들이 공중으로 흩어진다. 더러는 새처럼 날아가 굽은 나뭇가지에 걸려 흔들린다. 먼지 속으로 그의 둥근 뼈가 부드럽게 퍼져 나간다. 입술 사이로 잊혔던 노래들이 살아난다. 바람으로 가득 찬 공기가 굼실대며 내 곁으로 밀려왔다 날아간다. 새들이 다시 솟구쳐 오른다. 언덕을 돌아나가는 자동차 굉음에 사람들이 떠난 바다가 잠시 몸을 뒤챈다. 소리가 사라진 쪽에서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소리를 따라 흙먼지를 일으키며 흐려졌던 길이 멀리 한 점으로 모인다. 부호처럼 공중에 떠 있는 점 너머로 고깃배의 집어등이 하나 둘 불을 밝힌다. 언젠가 내가 잃어버린 사람들은 남태평양의 깊고 푸른 점으로 몰려간 그 아름다운 입자들을 데리고 이 바다를 건너올 것이다. 열어놓은 차창 밖으로 음악소리가 쏟아진다. 먼 곳에서 불어온 모래바람이 가볍게 등을 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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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젊은이의 사랑·좌절 다룬 수작 총 응모작은 96편이다. 단 한편의 예외도 없이, 모든 작품에 켜켜이 배어 있는, 응모자들의 열정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그러나 열정 하나만으로 소설 작품이 씌어질 수 없는 것임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마지막까지 검토 대상이 된 작품은 ‘뫼비우스의 띠’, ‘유인김씨신위’, ‘4°C’, ‘공무도하’, ‘그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등 다섯 편이었다. ‘뫼비우스의 띠’는 젊은이들의 일상을 다룬 작품이다. 그러나 그 일상이 ‘의미 있는 일상’으로 전환되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은 여러 개의 단편적인 이야기를 하나로 연결하는 데에 필요한 유기성의 결핍에서 기인한다. 정해진 분량을 훨씬 초과한 것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유인김씨신위’는 4·3의 직접적 피해자인 여인의 이야기가 내용의 줄기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얼핏 뚜렷한 서사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은, 한 문장이 곧 한 단락이 될 정도로 긴 만연체 문장이 수시로 그 서사 구조를 약화시키고 있는 점에서 발견된다. ‘4°C’는 작자의 색다른 경험의―여기에는 간접경험도 포함된다―바탕 위에서 씌어진 작품이다. 정교한 문장으로 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평범한 작품에 머무르게 된 것은, 염장이로 일하는 청년의 이야기를 우리 삶의 이야기로 보편화시키는 데에 필요한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무도하’는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주인공의 직업이 의사이므로 아무나 쓸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이야기의 내용은 평범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만일, 이 작품이 우리 삶의 어떤 본질적 국면을 암시하는 방향으로 씌어졌더라면 다르게 평가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김지희의 ‘그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는 한 젊은이의 사랑과 좌절을 다룬 작품으로, 수작이라 할 만하다. 이 작품에서, 작자는 주인공의 현실적 삶을, 내면세계와 외면세계를 조화시키는 방식으로 반영한다. 작자는 또한 소설에서의 묘사와 서술이 다른 장르의 그것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 결과, 이 작품은 독자의 내면을 고양시키는 여러 측면의 소설적 품위를―한 예로, 낙타를 상징의 도구로 사용한 것을 들 수 있다―보여준다. 이것이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소이이다.
<김병택/문학평론가> |
당선소감 김지희
“삶의 여행자에 위안 되고파” 유난히 눈이 많고 추운 겨울이다. 며칠 전, 폭설로 얼어붙은 길 위를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새삼 불안해졌다. 길 아닌 곳에 처박히거나 서로 부딪쳐 부서진 저 차들처럼, 나 또한 헛돌면서 방향도 없이 미끄러지고 있는 중은 아닌가. 성에꽃 가득한 차창 속에 갇혀, 입술이 바짝 말랐다. 어느 늦은 여름, 모래사장에 묻혀 차와 함께 서서히 가라앉던 날이 떠올랐다. 어디를 가나 사방이 바다인 섬에서, 그 섬의 가장자리에서, 나는 용감하게 차와 함께 사구를 내려갔었다. 결국 사람들의 도움으로 견인되어 나오긴 했지만, 그 달콤했던 모래의 감촉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 추락과 충돌이면 어떠랴. 그것이 또 다른 길로 이어진다면 나는 몇 번이고 유혹을 뿌리치지 않을 작정이다. 나는 자주 길을 잃었고 의심했으며 변명했다. 책을 선물할 때마다 여러 번 고쳐 쓴 편지를 건네주었던 선배, 자판기 커피 한 잔이면 몇 시간이고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나의 폭력에도 말없는 격려로 곁을 지켜준 가족,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안전한 곳을 찾느라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었을 것이다. 모처럼 햇빛이 환한 아침, 당선 소식을 들었다. 이십대가 끝나는 겨울에 받은 기쁜 선물이다. 말주변이 없는 나는 셋 이상이 모인 자리에서는 침묵을 지켜 타박을 받곤 한다. 하지만 “이젠 네가 말할 차례다” 하였으니, 입을 열어야 할 것이다. 나의 말이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 난 길을 유연하게 통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완성된 한 장 한 장의 지도들이 삶을 여행하는 이들에게 위안이 되길 꿈꾼다. 물론, 추락과 충돌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겠지만. 나의 가족과 다정한 친구들, 나의 운동장 ‘각’, 내 서툰 연애에 답해주었던 모든 이들, 그리고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 1977년 제주 출생 - 제주대학교 영어교육과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