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30일은 우리 집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안산1대학교에서
감독회장 및 연회감독을 선출하는 총회가 열렸었다.
감독회장 선출 후 결정 과정에서 일어난 잡음으로 인해 너무도 시끄러운 총회가 되었지만
나에게는 열 한 분의 연회 감독 중 가장 눈에 띄는 한 분이 있어 그 시끄러운 모습들마저도 모두
잊게 해 주었는데 그 분은 바로 중부연회 감독으로 당선되어 새로이 업무를 시작하게 되신
전명구감독님이시다.
나와 전명구감독님과의 만남은 내가 고3때니까 1978년도였다.
내가 자란 장호원감리교회에는 당시 학생들이 약 6~70명 정도 모이고 있었는데
담임목사님이었던 이윤성목사님께서 어느 토요 학생예배때
웬 키가 작아 보이는 한 분을 모시고 오셔서 우리 학생들 앞에 소개를 시켜 주시는 것이었다.
" 앞으로 강대룡전도사님을 이어 여러분을 이끌어 주실 전명구집사님이시다.
집사님 말씀 잘 듣고 신앙생활 잘 하도록."
그 때 나는 조금 의아스러웠다. 그동안 우리 학생회는 본 교회 출신인 강대룡전도사님이
초대 교육전도사님으로 우리를 잘 이끌어 주셨는데 웬 집사님이,
그것도 본교회 출신도 아닌 집사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는걸까?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전도사님은 감곡 문촌교회 출신이신데
당시 일반대학을 나오시고 편입을 해서 협성에 다니고 계셨고
문촌교회 재무집사님으로 문촌교회 담임전도사이셨던 유지열목사님을 섬기고 계시다가
처음 교육전도사님으로 오시게 된 것이었다.
아무튼 순전히 담임목사님의 의지에의하여 우리는 그 분을 처음에 집사님으로 불렀었다.
그런데 몇 주 후부터 그 분의 직함은 교육전도사님으로 바뀌어 불려지고 있었다.
난 그 분을 무척이나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분이 개인기도를 하실때에나
설교를 하실 때에나 뜨겁고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자란 장호원교회는 이미 2년전부터 성령의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었고
은혜를 체험한 학생들은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때였기에 전명구전도사님과
우리들의 만남은 정말 어쩌면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당시 학생회 총무를 맡고 있었고 교회에 행사때마다 써 붙이는 글씨는
모두 내 몫이었다.
그런데 어느 토요일이었다.
전도사님은 내게 " 흥식아! 오늘 강단에 글씨를 써서 붙여 놓고 가야 되겠다. "
' 무슨 글씨를요? ' 나는 조금은 달갑지않은 어투로 응대하고 있었다.
" 응,~ 조금 급해서 그러는데 왜 안되겠니? "
' 예~~ 월요일부터 시험이고.... ' 나도 모르게 내 손은 뒤통수를 긁고 있었다.
이 때 전도사님은 내게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거였다.
"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로구나. 그래 좋아 그러면 하지마! 네가 안 하면 다른 사람을 시켜야지 뭐!
처음엔 너만 못할지 모르지만 나중엔 좋아질거야. 하지만 넘어간 촛대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해."
나는 참 사태가 이상해 짐을 느낄 수 있었다.
' 이게 아니었는데... '
나는 적어도 전도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다.
" 흥식아 좀 해 줘라 응? 네가 안하면 누가 하니? 해라? 응? "
그러나 나의 기대와 상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전도사님께 잘못을 빌었다.
" 전도사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하고 갈께요! "
오늘의 나의 모습이 이 정도만이라도 만들어진것은
나의 교만을 완전히 꺾어 주신 전도사님의 그 대담하신 믿음과 성품 때문이었다.
그 때는 무척이나 야속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고마운 분이 바로 그 분이었다.(계속)
첫댓글 두 분의 만남이 그렇게 시작되었군요. 후속편이 기다려집니다. ^^
기다려 주시는 그 후덕하신 마음이 왠지 고맙네요.^^ 좋은 주일 되세요~~~
믿을만 하다고 이끌어주신것 같습니다..
그 분의 혜안도 있으셨겠지만 무엇보다 그건 그 분의 신앙이고 신념이셨던 것으로 저는 느껴지네요.^^
역쉬~ 성님두^^ 역시 이천사람은 달라요? 어디를 보아도 달라요? 그 때부터 싹스가 있었던 우리 형님~ ㅋㅋㅋ. 홧팅!!
이감리사 이런 글을 올려 놓으면 지역 감정 조장죄로 걸려.^^
ㅎㅎㅎ 저는 83년도에 이천남지방 도리교회 개척한 사람인데- 그 때- 이윤성 감리사님이 계셨습니다. ㅎㅎㅎㅎ 85년도인가?? 장호원 감리교회에 가서 벌벌 떨며 쌀 퍼주는 전도사 시절부터 목회 공부했습니다. 그곳에 성령의 역사가 굉장하더구먼 그런 연유가 다 있었네요- 그러고 보니 민 목사님도 나와 형제로구먼유- 후속편은 제가 쓸가요 ^^** 저도 믿을만하고- 이천 사람인데요 --ㅎㅎㅎ 이천 출신들 잘하요 모든 일을- 현재 이천에 계신 분도- 이 누구라 ???
그러셨군요. 그 이찬용목사님이 이 이찬용목사님이셨군요. 얘기 들었습니다. 도리교회가 지금은 잘 지어졌죠.^^
권순덕목사도 있습니다. 신하초16회 이천북중24회 이천고24회 ㅋㅋ 교회는 신하장로교회에서 초딩, 중딩, 장록감리교회(당시 이주유목사님)에서 고딩, 대딩, 세례는 당시감리사님이셨던, 사동교회 양윤식목사님께 받았구용, 84년 1월 사경회가 장호원교회에서 했구요,,그때 성경시험에서 제가 1등을 했구먼유,,제 인생을 통털어 시험에서 1등하기는 첨이구먼유,,가좌교회(당시 이성현목사님)에서 군딩, 그리고 신학갔슝~~~~~~~~~~~~목회는 북지방 고척교회에서 했궁요,
지는 이천쌀 좋아하는디 이천파에 껴 주면 안되남유?
이감리사님! 여기 임금님표 이천쌀 한포대 대령해 주셔야 되겄슈!ㅎㅎ
어헉- 이주유-양윤식 그 때 제가 전도사로 장호원-또 한터교회에서 사경회 쌀 퍼주었는데요 권순덕 목사님- 그 때 고딩이셨나요 83-86년도 까지 제가 이천남지방에 있었는데요 ㅎㅎㅎㅎ 민 목사님 도리교회 다시 지었나요?/ 제가 3가정으로 개척 ( 마을회관빌려) 하고 지금 번지수를 몰래 사서- 90평정도- 매일 노가다하며 지었는데요?? 지방 청년들이 봉사하고- 지방에서 헌금해주고- 한터교회 장로님이 100만원 내 주고- 그러그러서 마무리하였는데요?? 지금은 새로 지었나보네요?? 고생 억수로 했음다- ㅎㅎㅎ 3년에 이사 4번 했지요 ^^*** 이장님이 쌀 주어서 먹고- 논에가서 모도 내고- 돌미나리 캐다 고추장에만 비벼먹고- 아 도리리
장록교회에서 고1때부터 - 85년까지 다녔고, 86년도에 가좌교회가 개척되면서 그리 다녔지요,,
그러고 보니 이천에서 꽤나 고생하셨던 분들이 있으시네요^^ 저는 아예 여기서 자리잡고 살고 있습니다. ㅋㅋㅋ. 이찬용목사님 도리교회 잘 짓고 봉헌예배드렸지요? 개척하셨던 분이 이목사니이셨군요? 감사합니다.
83년도에 마을회관 바람이 설설 부는 8월말에 문작은 덜렁이고- 마루밑은 찬바람돌고- 농 가운데 두고 반은 교회로 쓰고 반은 잠자고 으히 추워- 요즘 미자립 (죄송하지만) 의식하고는 전혀 달랐죠.없으면 굶는다는 생각이었죠?사례도없고- 매일노가다하고-데모도??몸이 반으로 줄고- 세멘트와벽돌-삽질 그래도 그 때가 보람이었죠?아- 도리교회 새로 지었군요? 지금계신 목사님이 카페보고- 일전에 화분 2개 보냈는데-초청이없어서-^^**장록교회83-86에가보니 학생들이 농구도하고-청소도하고-그러던데-전도사시절^^**이주유전도사님이 부흥회도 잘하셨죠/사동교회에서- 아직도강원도에계신가요?양윤식감리사님이절 무척도와주셨죠?
이-이천에서 길- 길되신 주님 만나 윤--윤택한 삶 자리잡은 분은 이길윤 목사님뿐- 우린 고생하고 떠나온 사람^^** 예전엔 정회원하고 밥도 한 식탁에 못 앉고- 한 방도 못쓰고- ㅎㅎ 그래도 이천남지방 큰 교회 목사님들이 수안보 온천 등 - 잘해 주셨는데- 참 재미났었습니다. 초향 유홍규 목사님- 대월=홍동희 목사님 등등-- 이천 출신-----한번 모여 볼가요 우리--^^**
이주유목사님은 지금 포천 가산교회에 계시죠. 유홍규목사님은 당진 정미교회에 계시구요.^^
캬- 민 목사님은 전국구 이시네요 -- 그리도 잘 아실가요??? 하긴 민-백성의 동향을 잘 살펴 솔로몬처럼 태평한 목자이시죠??
민흥식목사님! 좋은만남,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후배를 위해 부흥회 인도좀 해달라고 했을때 흔쾌히 두번씩이나 허락해주신 전명구감독님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러셨군요!^^
으잉 두번이나 모셨나요 ??역시 --- 영적으로 충만한 분 모셔서 그런지 서 목사님 늘 넘쳐요 주님의 열굴 빛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