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트선재센타에서 지난 18일부터 이번주 금요일(25일)까지 프리츠 랑 회고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총 13편의 작품이 상영중인데, 그 중 비디오로 출시되어 있는 <메트로폴리스>와 <M>을 제외하면 다시는 볼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달의 여인>이라는 작품을 보았는데 주최측에 의하면 국내 최초 상영이었다고 하더군요. 뜻하지 않게 '역사적 현장'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대부분의 고전 영화가 그렇듯이 어느 정도의 '역사적(고고학적) 관심'을 가져야만 영화를 감상할 수 있을 듯 합니다.
* 감독 : 프리츠 랑(1890~1976) : 독일 표현주의 시기(1920-27)의 대표적인 감독 중의 하나. 나치 집권 후 할리우드로 건너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든다. 종전 후 독일로 복귀한 그를 반겼던 것은 프랑스 시네마테크 회원들(누벨바그 감독들) 뿐이었다고 한다. 굴곡 많았던 20세기만큼이나 굴곡 많은 삶을 살았던 그의 영화 세계를 가장 잘 대표하고 있는 작품들은(<메트로폴리스>,<마부제 씨리즈>) 운명적이고 불가항력적인 힘의 존재(그것이 신비주의적인 죽음(저승사자)의 이미지이건 테크놀로지와 시스템으로 무장하고 있는 자본=권력의 이미지이건)에 대한 탐구와 그에 맞써는 주체의 싸움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 표현주의적 문체와 '범죄'에 대한 탐구 취향으로 인해 미국 필름 느와르의 탄생에 한 몫을 담당하기도 했다.
1. <운명/ 피곤한 죽음(Der Mude Tod)> 1921
1) 생애 처음으로 스크린으로 보게 된 '무성영화'. 그러나 역시 고고학적 관심을 빼고나면 영화에의 몰입은 힘들었다. 20년대 독일 표현주의의 한 특징인 '과거, 이국적인 배경 또는 환상이나 공포의 요소를 포함하는 서사'와 '액자구조' 형식이 전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2) 영화의 원제가 '피곤한 죽음'이었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운명'이라는 미국판 제목은 '실패한 개작'인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죽은 남편을 되살리고자 애쓰는 여자가 아니라 그 모습을 피곤하고 지친 표정으로 지켜보는 '저승사자'이기 때문이다.(적어도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재미도 있고 뭔가 새로운 의미도 느껴진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저승사자는 죽은 남편을 살려달라고 하는 여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 남의 불행을 지켜봐야만 하는 것이 이제 정말 피곤하고 힘들다"라고. 인격을 갖춘 죽음의 모습. 냉혹한 운명(죽음)의 집행자로서의 근엄한 표정과 운명의 굴레에 갖혀 몸부림치는 인간에 대한 연민어린 표정으로의 자기 분열. 그 분열된 모습은 정말 피곤해보였고, 그만큼 인간적으로 보였다. 권력과 체제의 하수인의 슬픈 숙명. '아버지의 이름(금지)'로서의 숙명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실재적 아버지의 서글픈 표정.
3) 몇몇 고고학적 발견
- 첫번째 이야기와 세번째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랑의 오리엔탈리즘.(불황과 전쟁으로 인해 불안에 떨던 그들에게 자신들의 과거 설화와 함께 동양의 신비가 어떤 구원의 표상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은 이해할만한 일이다. 그런데 세번째 이야기는 그 오리엔탈리즘이 얼마나 허황된 환상적 동경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페르시아의 양탄자와 일본의 기모노를 동원하고서는 중국이라고 우기는 랑.) 말년에 헐리우드에서 독일로 복귀한 이후 차가운 냉대에 그가 도피처로 찾은 곳도 바로 '동양'이었다고 한다. <운명>에는 랑 자신의 말년의 슬픈 운명에 대한 운명적 예감이 담겨있는 셈이다.그렇다면 랑의 영화 전체는 주제/소재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범주로 묶어볼 수도 있겠다. 과거의 서양(전설과 설화). 현대의 서양(과학 기술과 전체주의). 무시간적이고 추상화된 구원의 공간으로서의 동양.
- 초자연적 존재(유령)의 영상화. 주로 이중인화라는 원시적 테크닉으로 구현해낸 그 귀신들의 모습이 어찌보면 컴퓨터 그래픽으로 형상화된 오늘날의 구신보다 한결 신비로와 보이기도 한다.
- 달빛을 배경으로 나무위에 앉아있는 올빼미. 지그재그로 계속되는 계단. 박찬욱의 <공동경비구역...>과 <복수는 나의 것>에서 언듯 보았던 한 이미지. 표현주의적 이미지들.
2. <마부제 박사의 천개의 눈>(1960) - <마부제 박사:1922>,<마부제 박사의 유언:1932>를 잇는 마부제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이자 프리츠 랑 감독의 마지막 작품.
1) 영화를 본 첫 소감."어라, 이거 완전히 히치콕 영화잖아!" 그렇다. 헐리우드 시대를 거친 랑의 문체와 화법은 어쩔 수 없는 어떤 '변질'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앞의 두 작품을 보지 않아서 확실히 그 변화가 어떤 것이고 그 의미가 무엇일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영화에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많은 할리웃식 컨벤션이 담겨있다.(어쩌면 이러한 표현은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다. 우리가 접한 많은 할리웃 영화라는 것이 이 작품 이후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 시대착오성이 우리의 슬픈 운명인 것을. 운명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시대착오적 감상을 계속하려한다.) 냉혹함과 신비한 마력을 동시에 갖추고 있는 마부제의 캐릭터는 <배트맨>의 매력적인 조커를 떠올리게 한다. 두 수사관의 '엇갈리는 조화'는 많은 형사 버디무비적 코드를 생각나게 한다. 부유한 남자와 가여운 운명에 처한 여인의 멜로적 설정은 말할 것도 없다. 관객으로 하여금 계속 헛다리 집기를 유도하는 강박적인 트릭 설정 역시 그러하다.(심지어 초반 점성술사의 '범죄 예지' 장면에서는 <마이너리티 리포트>까지 연상되었다^^;)
물론 랑은 이 다양하고 잡종적인 요소들을 치밀하게 엮어내는 장인적 솜씨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뿐이다. 뒷맛이 뭔가 좀 어수선하다. 여전히 남아있는 랑적인 요소가 있다면 신비주의적 모티브(예언과 텔레파시 등의 초능력)와 '눈'(감시의 시선)을 통해 포착해낸 전체주의의 어떤 이미지 정도이다. 그런데 그 요소들이 중심에 자리잡지 못하고 다른 것을 위해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느낌. 이것이 그 어'어수선함'의 정체일지도 모르겠다.
2) 영화의 주요한 모티브로서의 '눈'(응시).
도시 마천루 상공의 어두운 하늘에서 여러개의 눈이 회전하며 우리를 노려본다. 아래쪽 흰자위가 약간 보이는 섬찟한 형상의 눈들이 우리를 응시하는 가운데 메인 타이틀이 올라간다. 이 '눈'은 영화의 내러티브 속에서 뤽소 호텔 감시 카메라와 장님 점성술사로 위장한 마부제의 백태낀 눈으로 치환된다. 늘 대상을 관찰하고 감시하고 있지만 정작 그 대상에 의해 포착되지는 않는 눈. 보이지 않는 응시, 관음적이고 외설적인 응시로 환유되는 현대화된 전체주의의 어떤 이미지. 그 응시에 포획되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종되고 통제당하는 피사체들의 불안과 혼란. 사실 이 영화에서 마부제의 힘은 오로지 자신이 상대방을 보고 있음을 상대방은 알지 못한다는 것에서 나온다. 다시 말하면 철저히 관음적 권력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험외판원(국제경찰관)에게 장님이 아님을 들킨 이후 마부제의 힘은 급격히 축소되고 이후 그는 그때까지의 섬짓하고 신비스러운 권위의 아우라를 완전히 상실하고 지극히 희극적인 소동을 펼친다. 그에 따라 서사의 긴장은 급격히 떨어지고 말랑말랑한 해피엔딩으로 서둘러 마무리된다.(이러한 캐릭터와 서사의 혼란스러움이 영화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고 '어수선함'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
3) 또 하나의 관음적 응시-이중 거울.
영화 속에는 또 하나의 관음적 응시의 장치가 등장하는 데 바로 여자의 방 한 벽에 설치된 이중 거울이다. 이 역시 여러 영화에서 반복된 적 있는 하나의 컨벤션이다. 가장 가까운 예는 <나쁜 남자>의 그것이었다. 안전한 관음적 위치의 확보. 이것은 많은 남성 환타지의 한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안전하게 여자를 관음하는 남자. 그 남자를 뒤에서 지켜보는 카메라. 그 카메라 뒤에서 이중적 관음의 위치를 갖게 되는 관객...그런데 생각이 이쯤에 미치면 불현듯 뒷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곤 한다. 혹시 이런 나를 뒤에서 지켜보는 어떤 응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음흉하게 미소짓고 있는 초자아의 시선. 그 초아아의 시선은 말할 수 없이 섬짓하고 불편하다. 왜냐하면 결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우리의 뒤통수에 찰싹 달라붙어있다. 우리가 확인하고자 고개를 뒤로 돌리면 그도 함께 따라서 돈다. 분명 뒤에 있음을 느끼지만 결코 볼 수는 없다. 어쩌면 외설적 초자아가 느끼는 주이상스란 이렇듯 관음적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영화(예를 들면 <X파일>)에서 잘 묘사되고 있듯이 국가정보기관의 감청자들은 분명 뭔가를 즐긴다. 바로 그 외설적 초자아의 주이상스를.
그런데 이러한 관음적 장면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관음적 위치를 제공해주지는 않는 그런 영화가 있었다. 파졸리니의 <소돔,120일>의 마지막 장면. 마당에서 벌어지는 가학적 성애(고문) 장면 - 창을 통해 망원경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 - 망원경을 통해 보여지는 고문 장면. 관객이 이 장면에서 관음적 호기심의 충족을 위해 몸을 앞으로 당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되는 것은 단지 그 고문 장면의 잔인성 때문이었을까? 혹시 진짜 원인은 그 반대의 사실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실 그 고문 장면은 내내 원사로 잡혀 모호하고 흐릿하게만 포착된다. 관객이 그 장면에서 모종의 호기심을 느끼지 못하고 끔직한 이질감만을 느끼는 진짜 이유는 그 고문 당하는 피사체들의 절대적인 무력성에서 비롯되고 있다. 극 중에서 관음적 위치에 있는 인물이 그 피관찰자에 의해 들킬 염려가 전혀없다. 또는 상대도 내가 보고 있음을 알지만 어차피 저항할 수 없다. 이런 경우 우리의 초자아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초자아는 피관음자와의 공모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마무제...>나 <나쁜 남자>의 문제의 그 장면에서 우리를 화면 쪽으로 바싹 끌어당기는 것은 바로 피관음자가 거울로 다가와 관음자(관객)을 응시한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었다. 그 순간에야 비로소 우리의 초자아는 갈등하고 긴장하며 비로소 스릴을 낳는 것이다. 만약 <소돔,120일>의 그 장면에서 고문당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한 번이라도 우리(카메라와 망원경을)를 노려보았다면 그만큼 우리는 한발짝 스크린을 향해 다가갔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에서 (보이지 않는) 형식은 (직설적으로 드러나는) 그 내용보다도 더 '정치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