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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 용 (龍)
불교에서는 용(龍)을 신성한 동물로 받아들였다.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에는 싯다르타 태자(太子)가
탄생(誕生)하셨을 때 하늘에 있는 가라용신과 울가라용신이 차고 더운 두 줄기 물을 뿌려 태자를
목욕시키고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법당이나 벽화(壁畵)에는 청룡(靑龍)과 黃龍(황룡)을 만들거나 그려서 이를 나타낸다.
아울러 불도량(佛道場)을 수호(守護)하는 성스러운 동물로 인정하고 있다.
불교의 여러 경전에 나타나고 있는 용(龍)의 성격(性格) 및 역할(役割)을 보면 다음과 같다.
1)불교에 귀의하여 불법(佛法)을 수호(守護)하는 용의 모습이다.
2)인간 세상에 정법(正法)을 펼쳐서 이로움을 베푸는 용의 모습이다.
3)경전(經典)을 봉안(奉安)하고 있는 용의 모습이다.
☀ 불법을 옹호하는 선신으로 존경받는 여덟 용은 다음과 같다.
1) 난타용왕(難陀龍王) 2) 발난타용왕(跋難陀龍王)
3) 사가라용왕(娑伽羅龍王) 4) 화수길용왕(和修吉龍王)
5) 덕차가용왕(德叉迦龍王) 6) 아나바달다용왕(阿那婆達多龍王)
7) 마나사용왕(摩那斯龍王) 8) 우발라용왕(優鉢羅龍王)
그리고 용(龍)의 모습은 아홉 가지 다른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조개, 비늘은 잉어, 발은 호랑이, 발톱은 매를 닮았다.
또한 비늘은 양(陽)의 수 9개가 중복된 81개로 되어 있고, 구리로 만든 쟁반을 울리는 듯한 우렁차고
힘 있는 소리를 내며, 입 주위에는 긴 수염, 턱 밑에는 구슬을 가지고 있다.
또한 용(龍)에게는 각기 성격이 다른 아홉 아들이 있다.
첫째 아들은 비희(贔屭힘쓸비,힘쓸희)라고 하며 거북을 닮았다. 무거운 것을 지기 좋아하여
돌비석 아래 놓는다.
둘째 아들은 이문(螭吻교룡이,입술문)이라하며 치미(鴟尾솔개치,꼬리미) 라고도 한다.
모양은 짐승을 닮았다. 먼 곳을 바라보기 위해 높은 곳이나 험한 곳을 좋아하며 화재(火災)를
누를 수 있어 지붕위에 세운다.
셋째 아들은 포뢰(蒲牢부들포,우리뢰)라고 하며 용(龍)을 닮았고 노래를 잘하고 울기를 잘한다고 하여
범종의 용뉴(龍鈕,상부고리)에 매단 다. 특히 동해바다의 고래를 무서워해 당목(撞木)은
고래모양을 취하여 포뢰를 겁주어 더욱 우렁차고 힘차게 울도록 한다.
넷째 아들은 폐안(獙犴짐승이름폐,들개안) 또는 헌장(憲章법헌,글장)이라 고 한다. 호랑이를 닮았고
위력이 있음으로 옥문(獄門)에 세우거 나 관가(官家)의 지붕에 장식한다.
다섯째 아들은 도철(饕餮탐할도,탐할철)이라고 하며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함으로 주로 솥의 뚜껑에
세우거나 식기(食器), 반기(飯器) 에 시문한다.
여섯째 아들은 범공(帆蚣돛범,지네공)이라 부르며 물을 좋아하고 강물 건너기를 좋아하여
다리의 기둥에 세운다.
일곱째 아들은 애차(睚撦눈초리애,찢을차)라고 하며 살생(殺生)을 좋아 함으로 칼의 콧등이나
손잡이에 조각한다.
여덟째 아들은 산예(狻猊사자산,불좌예)라고 부르는데 사자를 닮았다. 연 기와 불을 좋아하여
향로(香爐)에 시문하고 또한 앉기를 좋아 하므로 불좌(佛座)나 용좌(龍座)에 사용한다.
아홉째 아들은 초도(椒圖향기초,그림도)라고 하며 나방(나비)을 닮았다. 잠그고 닫기를 좋아하여
문고리나 반자 등에 붙인다.
이 외에도 용의 새끼를 교룡(交龍), 뿔이 없는 이룡(螭龍), 날개를 가진 응룡(應龍), 뿔이 달린 규룡(虯龍), 아직 승천하지 않은 반룡(蟠龍), 물을 좋아하는 청용(靑龍), 불을 좋아하는 화룡(火龍), 울기를 좋아하는
명룡(鳴龍) 등이 있다.
또한 용(龍)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발톱인데 각 나라마다 다르게 표현되는데 인도는 발톱개수가 6개,
중국 용은 5개, 우리나라 용은 4개, 일본 용은 3개로 그려져 있다.
346. 용맹정진 (勇猛精進) ☀불교에서 나온 말
부지런히 용감하고 맹렬하게 정진함을 이른다. 불교 선방에서는 1주일 동안 자리에 눕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며 수행자 자신에게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정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7일간의 ‘불면불와(不眠不臥)’ 치열한 수행』 <내면과의 치열한 전쟁>
스님들은 일 년 네 철 중에서 여름과 겨울철에 산문 출입을 금하고 수도에 전력한다.
부처님이 계실 때 여름 우기(雨期)동안 정사(精舍)에 머물며 수행했던 전통을 이은 것이다.
하안거는 음력 4월15일에 시작되어 7월15일에 끝나고 동안거는 10월15일부터 다음해 1월15일까지다. 시작하는 것을 결제(結制)라 하고 끝나는 것을 해제(解制)라고 한다. 흔히 여름 겨울은 공부철,
봄 가을은 ‘산(散)철’이라고 한다. 공부철에는 출입이 금지되고 산철에는 자유롭다.
산철동안 이곳 저곳을 다니며 만행을 한다.
안거 기간 동안 수행자들은 스승이나 선배에게서 설법을 듣고 지도를 받으며 수행에 정진한다.
3개월 내내 하루 10시간이상 좌선 정진하면서도 일주일 동안은 아예 한 숨도 자지 않고 좌선만 하는
초인적 고행을 하기도 한다.
바로 오늘날 한국의 선원에서 가장 엄격히 지키고 있는 용맹정진(勇猛精進)이다.
용맹정진이란 수면을 거부하고 장좌불와(長坐不臥) 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 결제 시작 7일, 해제 직전 7일, 결제와 해제 중간인 반 살림 때 7일 동안 용맹정진을 했지만
현재 대부분의 선방은 반 살림 기간 동안 일주일 밤 낮 동안 정진한다.
용맹정진은 가행정진(加行精進)의 일종이다. 일정한 기간을 정하고 평상시보다 한층 좌선 정진하는 것을 가행정진이라 한다. 유식론(唯識論)에 나오는 가행위(加行位)에서 차용한 것이다.
유식론에서는 수행의 단계로 오위설(五位說)을 내세우는데, 자량위(資糧位)ㆍ가행위(加行位)ㆍ
통달위(通達位)ㆍ수습위(修習位) 및 구경위(究竟位)가 그것이다. 첫 단계는 수행의 준비단계로 좋은
벗을 삼고 결의를 다진다. 가행위는 수행 실수하는 단계이다. 그래서 두 번째 단계에 있는 사람을
수행의 공을 더욱 증대시키라는 뜻에서 가행대사(加行大士)라고 한다. 아라한에 이르는 초지(初地)에
들어갔다고 한다.
용맹정진이 한국 선원에서 안거의 기본 전제조건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각 선원의 청규를 모은, 1928년에 발간한 ‘조선승려수선제요’에도 용맹정진은 보이지 않는다.
하루 좌선 시간을 보면, 월정사는 하안거 오전3시 기침해서 저녁 9시 취침에 들 때 까지
하안거 동안거 10시간 정진했다. 범어사도 10시간이며 해인사는 8시간이었다. 용맹정진 조항은 없다.
일주일간의 용맹정진이 언제 어떤 연유로 시작됐는지 보여주는 문헌은 없다. 송나라 종색선사의
선원청규에도 용맹정진과 관련한 조항은 없다. 다만 동안거 용맹정진이 납월8일 즉 부처님 성도일에
끝나는 것을 감안할 때 부처님의 고행을 따라 두타행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묵스님은 “선종에서는 달마나 백장 스님 등의 기일에 맞춰 용맹정진하고 이를 기리는 것을 큰 행사로 삼는 것을 볼 때 부처님 성도일과 일주일의 용맹정진을 연관시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스님은 또 “조실 스님 등이 예로부터 오후 불식, 장좌불와 등의 용맹정진을 늘 권유하고 강조하였는데
중국에서 총림이 제정되면서 함께 이 전통이 마련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의 선원에서는 모두 용맹정진을 안거의 수행 풍속으로 빠트리지 않고 있다. 일주일간 잠을
자지 않기 때문에 용맹정진은 졸음과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지면 모든 것이 끝난다.
용맹정진이 시작되면 돌아가며 죽비 경책 소임을 맡는다. 이를 인례(引禮)라고 한다.
졸거나 자세를 흐트리는 사람이 있으면 죽비로 쳐서 잠을 깨우는 역할이다. 죽비 소리를 듣고 당사자는
물론이고 들키지 않았지만 졸던 다른 사람도 함께 정신을 들게 하는 부수적 효과가 있다.
마음이 약하거나 초참자는 조는 사람을 발견하고도 차마 경책을 못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방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흐트러진다. 정히 참기 힘든 사람은 자청해서 경책을 받는다. 잠시나마 몸을 풀 수
있는 여유를 얻기 위한 목적도 있다.
가장 힘든 때는 자정 죽공양을 먹고난 뒤부터 새벽 예불 때 까지. 밤참을 먹고 난 뒤라 포만감에다
새벽녘 잠까지 합쳐 대부분 졸음에 빠져든다. 그래서 현진스님은 ‘삭발하는 날’이란 글에서
“용맹정진 기간 동안에는 용맹정진파와 용맹잠진파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혜암스님은 해인총림 부방장 시절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경책하는 힘이 있어
아무도 잠잘 생각을 못했는데 이제 죽비 경책에 무서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선방 수좌들이 졸음을 멈추었다고 한다.
잠을 못자기 때문에 외부 사람이 보면 포복절도할 일이 벌어진다. 처음 참여하는 학인들은 방바닥에
드러누워 이불을 덮는 행동을 하고,
간병 스님은 습관적으로 약방문을 펼쳐놓고 약재를 여러 군데 나누는 시늉을 한다. 수영장에서 다이빙
한 뒤 수영하는 모습으로 방바닥을 허우적거리는가 하면, 이불장을 열어 이불을 꺼내는 스님도 있다.
무의식중에 벌어지는 이 같은 행위를 두고 선방스님들은 본지풍광(本地風光)이라고 한다.
본래 진여자성을 뜻하는 말인데 출가전의 옛 습관이 드러나는 것을 꼬집는 선방의 은어(隱語)다.
일주일이 모자라 대중 합의나 개인적인 원력에 따라 기간이 늘어나기도 한다.
70년대 동화사 선방에서는 서로 원력이 넘쳐 한 달로 늘린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잠을 취하지 않으면
겨울에는 눈 위에서 자기도 하고 보통사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기행을 벌이기도 한다.
보다 못한 선원장 스님이 당장 멈추지 않으면 선방 구들장을 파내겠다고 ‘협박’해도 멈추지 않았다고
호계원장 월서스님은 회고한다.
이 때문에 송광사 등에서는 아예 개인적인 용맹정진을 불허한다는 규정을 청규에다 정했다.
전체 대중이 함께 하지 않는 용맹정진은 자칫 선방 분위기를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용맹정진은 수좌로서 정진력을 가늠하는 척도다. 철인적인 인내를 요구하는 고통을 견뎌낸 수좌는
나머지 안거 기간 동안 더 신심이 나서 공부에 매진하지만 수마(睡魔)에 굴복한 스님은 그 이후부터는
뒷방을 찾는 회수가 늘어나다가 끝내 선방을 등지게 된다.
기운을 잘 다스리지 못해 건강을 해쳐도 선방을 등지게 된다. 선방에는 좌선을 두고 ‘한 시간을 앉으면
한 시간 부처, 하루를 앉으면 하루 부처’라는 말이 있는데 이 용맹정진은 공부는 결국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 때문에 지금도 선방에서는 용맹정진을 안거의 가장 소중한 풍습으로 지키고 있다.
<박부영 기자 불교신문 2038호에서 발쵀>
347. 용명선사 (龍溟禪師)
한국불교는 전래 과정에 이차돈이 순교한 외에 순교란 전혀 없다가 1천 5백여 년 만에 순교의 역사를
기록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 역사상 불교의 세력이 가장 미미하던 조선조 말엽, 전북 김제군 금산사의
삼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선사가 바로 이 용명선사이시다.
1846년에 태어나 20세에 출가한 선사가 금산사의 총섭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금산사가 있는 금구
지방은 예부터 금(金)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따라서 금산사 부근에는 사금(砂金)을 캐기 위해
혈안이 된 금쟁이들이 하루도 끊일 날이 없었다.
이들 금쟁이들은 광맥을 따라 굴을 파고 개울을 건너고 하다가 나중에는 경내 사리탑(舍利塔)이 서 있는 언덕 밑에까지 와서 호밋자루를 대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당시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가
워낙 낮았던 때인지라 어느 누구도 이를 막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용명선사는 대중(大衆)들을 모아 놓고 부르짖었다.
‘우리가 저들이 무섭다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이 사찰은 유명하신 진표율사께서
창건한 고찰입니다. 이 고찰을 지키기 위해 우리 모두 나섭시다!
그리고는 금쟁이들에게 다가가 타협을 원했으나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러나 용명선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전주 감영(監營)으로 가서 이 문제를 호소하여 마침내 금산사 부근의 채광(採鑛)을 금지하도록 하는 일에 성공했다.
‘용명, 이 중놈아! 네놈이 우리들 밥줄을 끊어놓고 어디 살아남는가 보자’ 그래서 스님들이 피할 것을
간곡히 종용했으나 선사는,
‘내 한 목숨 죽어도 좋소. 나는 삼보를 수호하는 일을 했을 뿐이오.’ 하고 끝까지 버티다가 몰려든
금쟁이들에게 무수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그 때가 1902년 57세 때였다.
348. 용상방 (龍象榜)
사찰에서 맡은 소임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으로 결제 때나 큰 불사를 치를 때에 대중스님들이 맡는
소임을 말한다. 이러한 소임(所任)을 적은 것을 용상방이라고 하며 대중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붙여
놓는다.
중국 당나라 때 선문(禪門)의 규식(規式)을 제정한 백장(百丈)스님이 처음 총림(叢林)을 개설하면서
그 운영과 통솔을 위해서 각종 직무(職務)를 제정한 것이 그 시초다.
소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방장方丈: 총림에서의 정신적인 최고 어른스님이다.
조실祖室: 총림이 아닌 사찰에서 정신적인 최고 어른스님이다.
선덕禪德: 선원에서 덕망이 높은 스님이다.
입승入繩: 법을 세워 대중을 통솔하는 스님이다.
열중悅衆: 스님들(衆僧) 중에서 사무를 맡은 스님이다.
찰중察衆: 대중을 살피는 소임을 맡은 스님이다.
병법秉法: 의식을 집전하는 스님으로 법주(法主)라고 한다.
다각茶角: 마실 차를 준비하는 소임이다.
종두鐘頭: 범종을 울리는 소임이다.
법고鼓頭: 법고를 치는 소임이다.
헌식獻食: 재식(齋食)때 올린 음식을 거두어 명부사자와 잡귀 및 금수가
먹도록 헌식대에 가져다 놓는 소임이다.
미두米頭: 양곡을 맡아 출납하는 소임이다.
별좌別坐: 취사장을 감독하는 소임이다.
공사供司: 밥을 짓는 소임으로 공양주(供養主)라고 한다.
채두菜頭: 반찬을 만드는 소임이다.
정두淨頭: 해우소(解憂所)를 청소관리하는 소임이다.
화두火頭: 등화와 점등을 관리하는 소임이다.
욕두浴頭: 욕장(浴場)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소임이다.
갱두羹頭: 국을 끓이는 일을 담당하는 소임이다.
부목負木: 나무하고 불 지피는 소임이다.
증명證明: 삼장과 선리(禪理)에 밝은 원로 대덕으로 고문격인 스님이다.
강주講主: 강원의 교육전반을 맡은 스님이다.
중강仲講: 강주를 보조하여 학인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스님이다.
설양設楊: 책상 및 의자를 정리하는 소임이다.
삭두削髮: 삭도(削刀)를 다루는 소임이다.
회계會計: 재정을 맡아보는 소임이다.
서기書記: 사무를 관장하는 소임이다.
경비警備: 잡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소임이다.
이외에 주지(住持스님)을 비롯하여 3직 혹은 7직이 있다.
3직은 총무, 교무, 재무(總務, 敎務, 財務)이고 7직은 3직에 포교, 호법, 사회, 문화(布敎, 護法, 社會, 文化)를 둔 것을 말한다. 노전ㆍ부전ㆍ원주(爐殿, 副殿, 院主) 등도 있다.
그리고 감원(監院)은 큰절에 딸린 암자를 맡아서 감찰하는 스님을 말한다.
정재소(淨齋所)는 삼업(三業)을 깨끗이 하고 만드는 음식을 청정하게 준비하는 곳이다.
금난방(禁亂榜)은 금단방(禁斷榜)이라고도 하는데 불사(佛事)가 있을 때 잡인(雜人)이 드나드는 것을
금하기 위해서 붙이는 방문(榜文)이다.
또한 대중공사(大衆公事)는 대중들이 모여서 공공의 일을 의논하는 것을 말하며,
사발통문(四發通文)은 사방으로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349. 용성선사 (龍城禪師)
용성선사는 1864년 전북 남원에서 백(白)씨 가문으로 태어났다.
선사(禪師)의 모친께서는 어느 날 꿈속에 승복을 입은 스님 한 분이 방안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낳았다고 한다. 어려서 유난히 영특(英特)했을 뿐만 아니라 생선 같은 비린내 나는 것을 먹지 않아
사람들이 ‘기이한 아이’라고 했다 한다.
선사가 7세 되던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 낚시터에 나갔다가 아버지가 잡아놓은 물고기를 바라보다가
그 가운데서 아직 살아있는 물고기를 물속에 놓아주었다. 이를 본 아버지가,
‘이 녀석아! 애써 잡은 고기를 왜 물속에 도로 넣어주느냐?’ 하고 책망하자 그는,
‘죽어가는 고기를 어찌 그냥 보고만 있겠어요?’ 하고 울먹이더라는 것이다.
19세에 해인사에 들어가 출가한 뒤 고운사로 수월선사(水月禪師)를 찾아가 물었다.
‘스님, 생사는 큰일이며 너무도 무상하고 신속한 일이니 어찌해야 견성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수월선사가 가르침을 주었다. ‘먼저 대비신주(大悲神呪)를 외우도록 하라,
그래서 우선 업장을 말끔히 씻어 버려야 하느니라.’
그 후 양주 보광사에 이르러 ‘개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하다가 마침내 크게 깨침을
얻었다.
27세에 통도사에서 선곡율사로부터 비구계를 받고 송광사 삼일암에 들어가 <전등록>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선사에게 일대 전기를 가져다주었다. 그 <전등록>에서 ‘달은 굽은 활과 같고 가랑비 속에 요란한 바람소리여’ 라는 황벽선사의 법어 한 대목에 이르러 문득 활연대오하였기 때문이다.
선승(禪僧)으로 보다 포교승(布敎僧)으로 더 명성을 떨쳤던 용성선사는 한문경전(漢文經典)의 한글화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1930년대를 전후하여 선사가 번역한 경전은 <화엄경><원각경><능엄경>
<금강경><여래경> 등을 꼽을 수 있다.
한편 선사의 나이 61세 때에는 어금니 사이에서 사리(舍利) 한 과(果)가 나왔는데 색이 영롱하여 마치
진골사리와 같았다고 한다. 1940년 어느 봄날 갑자기 가벼운 병 증세를 보이더니 문도들을 모아놓고
“내가 이제 떠나고자 하니 너희들은 슬퍼하지 말고 오직
‘무상대열반 원명상적조(無上大涅槃願明常寂照)’ 이 한마디만 외워다오.” 하시고
미소를 지으시며 입적하셨다고 한다.
기미년 3.1운동 때에 만해 한용운선사와 함께 불교계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선사의 사리탑과
비(碑)가 해인사 서쪽에 세워져 있다.
☀ 용성선사행장 龍城禪師行狀(1864.5.8-1940.2.24) *퍼온글
1). 용성龍城선사(이하 '선사')는 1864년(고종1년) 음력 5월 8일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水原 백씨白氏고 아버지는 남현南賢이며 어머니는 밀양 손씨다.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선사의 족보상 이름은 형철亨喆이고 속명은 상규相奎다.
그의 어머니는 휘황찬란한 법의를 입은 스님이 방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선사를 낳았다고 전한다.
2). 7세 때부터 마을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배우던 선사는 어린 나이에도 빼어난 문재를 보였으며 9세에
이미 '합죽선'이란 한시를 지을 정도였다. 14세 때 어느 날 꿈속에서 부처님 수기授記를 받고 불경을
보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가출하여 찾아간 곳이 남원 교룡산 기슭의 덕밀암德密庵이었다.
3). 당시 그 절의 주지 혜월慧月스님은 선사의 내방을 미리 인지하였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자신의 꿈에
나타나 범종을 울렸다면서 혜월 스님은 선사에게 진종震鐘이라는 법명과 함께 남원의 옛 지명
용성龍城을 법호로 내려주었다. 그러나 선사의 첫 번째 출가는 말없이 가출한 맏아들을 애타게 찾아
헤매던 부친에 의해 1년여 만에 막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불법의 진리를 갈구하는 선사는 16세 때
해인사 극락암으로 다시 출가하여 화월華月 스님을 은사로 하고 혜조慧造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고 정식으로 출가하였다.
4). 전국의 명산 고찰과 선지식을 찾아 진리의 길을 찾으러 구도행에 나선 선사는 이듬해 의성
고운사孤雲寺 수월水月 스님을 찾아
"나고 죽음은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일입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여 날로 변합니다.
어떻게 해야 생사 없고 변하지 않는 '나'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수월 스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고 먼저 천수대비주千手大悲呪를 외울 것을 권했다고 한다. 수월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선사는 대비주를 10만 번 외우기로 스스로 다짐하고 부지런히 외워 9개월에 걸쳐 대비주를 10만 번 외웠다고 한다
5). 그가 양주 보광사 도솔암에서 수련하고 있을 때,
"산하대지와 삼라만상에는 모두 근원이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근원은 무엇일까?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근원은 어디에 있으며 어디서 오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불현듯 솟아났다.
이 의문을 일념으로 용맹정진한 지 엿새 만에 의문을 확연히 풀어 첫 깨달음을 얻었다.
이 때의 견도송見道頌은 아래와 같다.
오온산중심우객五蘊山中尋牛客 독좌허당일륜고獨坐虛堂一輪孤
방원장단수시도方圓長短誰是道 일단화염소대천一團火炎燒大千
6). 22세 때는 순천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전등록傳燈錄'을 읽다가 문득 세 번째 깨달음을 얻었고
다시 여러 사찰과 암자를 오가며 치열한 수행 정진을 거듭한 끝에 선사는 1886년 23세 때 금오산 아래
낙동강변을 거닐며 마침내 네 번째 깨달음의 기쁨을 오도송悟道頌으로 읊었다.
금오천추월金烏千秋月 낙동만리파洛東萬里波
어주하처거漁舟何處去 의구숙로화依舊宿蘆花
7). 선사가 선사의 생애에서 기념비적 명저로 알려진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집필한 것은 1910년이었다.
이 책은 불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과 불교의 상대적 우수성을 밝히는 내용으로 1913년 6월 조선선종
중앙포교당에서 발간했다.
1911년 48세 때 대각사를 창건하였고, 1912년 49세 때 한국 선종의 뿌리인 임제종臨濟宗을 바탕삼아
민족불교의 중흥과 수호에 앞장서고자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 세워진 조선 임제종 포교당
개교사장開敎師長을 맡아 3년간 포교당 주무主務 만해萬海선사와 함께 힘썼다.
이후 일제 탄압으로 조선선종 중앙포교당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고, 서울 시내 신도가 3천여 명에
이르자 이에 힘입은 선사는 종로구 봉익동 대각사大覺寺에서 포교 활동에 더욱 더 매진하였다.
8). 당시는 불교뿐만 아니라 한일합방으로 인해 우리 민족의 정기가 크게 억눌린 시대였는데 선사는
만해韓龍雲 스님과 더불어 불교부흥과 민족의 장래를 함께 논의하였으며 만해 스님과 함께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불교대표로 서명하였다. 이로 인해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1년6개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9). 1921년에는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이고 활발한 불경번역 사업에 들어간다.
또한 전통불교가 퇴색하고 일본화되어 가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불교
운동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대각교를 창업하였다. 본부를 대각사에 두었고 한편으로는 만주 간도에
대각교당을 설립하여 그곳으로 흘러간 동포를 상대로 포교사업에 더욱 정진하였다.
10). 1926년 선사는 한국전통불교를 지키기 위해 승려들의 엄격한 계율생활을 촉구한 건백서建白書를
두 차례에 걸쳐 조선총독부에 제출한다. 당시는 일제가 발표한 사찰령에 의해 비구승의 가정생활이
허용되어 많은 승려들이 처자와 가정을 거느리게 되는 등 삶이 점차 세속화되던 무렵이다.
따라서 사찰마다 대처 식육이 공공연히 묵인되었고 심지어 조선총독부에서는 주지 자격에 비구 조항을 없애려는 움직임마저 있는 등 한국불교가 매우 어지러워지는 때다.
이때 선사가 건백서를 통해 승려들의 축첩을 강력히 반대하는 내용을 발표하자 이 일로 한 때 선사는
조계종 정화불사의 초조初祖로 숭앙되기도 하였다.
11). 1927년 경남 함양에 화과원華果園을 세우며 수행과 일을 다 함께 힘쓸 것을 내용으로 하는
선농일치불교禪農一致佛敎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삼장역회의 기관지로 '무아無我'를
발행함으로써 대중포교에 더욱 힘을 쏟았는데 이 잡지는 지금도 계속 발행되고 있다.
같은 해 64세 때 대각교의식집大覺敎儀式集을 발간하면서 왕생가往生歌, 권세가勸世歌 등 창작국악조의 창작 찬불가를 최초로 작사, 작곡하여 연주하곤 했는데 이 분야에서는 국내 효시라 할 수 있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대각사에 일요학교를 설립하여 오르간을 손수 연주하였으며 한문으로 된 불교의식을 한글화하여 불공을 올리고 제사 등을 치렀다.
12). 이후로도 꾸준히 불경을 번역하고 선회禪會를 개설하며 대각교를 발전시켰으나 일제 탄압으로
1934년 대각교 재산이 신탁되어 사실상 몰수되었다가 급기야 1938년에는 결국 대각교가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선사는 처절한 아픔을 곱씹으면서 그 뒤로 계속 포교사업에 힘쓰다 1940년 음력 2월 24일
77세, 만으로는 75세에 열반에 들었다.
13). 선사의 생애는 첫째, 조선시대 불교배척으로 인하여 쇠퇴한 불교를 부흥시키는 것이었으며
둘째, 외세침략으로 인한 민족의 시련기에서 외래종교의 범람과 그로 인해 주체성을 잃어 가는
국민들에게 민족주체성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호국의 법을 설함이었다.
다시 말해 호법불교 운동을 쉼없이 이끈 생애다.
선사가 평생 과업으로 여긴 사업은 첫째 어려운 한자 불경을 쉬운 우리말 불경으로 옮김이고 둘
째, 시대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지식 운동이며 셋째, 왜색불교로부터의 탈피다.
특히 '불교에 대처승 없다'라는 문제를 놓고 만해 스님과 외형적으로는 대척점에 있었다고 보았으나
실제로 두 사람의 사상은 일치하였다
(참고로 만해 스님은 출가 후 축첩한 게 아니라
가정을 이룬 상태에서 출가하 였고 그 가정을 그대로 끝까지 지킨 것 뿐이니까.)
350. 우리나라 종교들
1) 대종교 (大倧敎)
대종교는 한국 민족의 국조(國祖)인 단군 한배검을 삼위일체의 신으로 받드는 한국민족 종교 가운데의
하나이다. 대종교는 한얼님을 숭배하고 단군을 섬기는 민족종교로 이어져 오다가 대종교로 개칭하기에 이르렀다.
대종교(大倧敎)의
첫째 이치는 ‘셋과 하나’로 나타낸 삼일신(三一神)사상이다.
곧 우리 으뜸 조상(祖上) ‘한얼님’인 단군은 ‘한인(桓因), 한웅(桓雄), 한검(桓儉)’의 세 신(神)이 한 몸을
이루어 “나누면 셋이요 합치면 하나이니, 셋과 하나로써 한얼 자리가 정해진다.”고 풀이 한다.
바로 ‘한얼’의 화현(化顯)이라는 것이다.
둘째 대종교(大倧敎)는 독특한 인류 기원론을 가지고 있다. 곧, 그 한울 가람(송화강)이
인류 시현(示顯)의 중심지라고 하였고,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우리 민족이 세계 인류 중에서 가장
으뜸되게 잘났다고 하였다.
셋째 대종교의 구원론은 삼진(三眞)을 깨달아야 ‘한얼님 누리’에서 길이 살게 된다는 것이다.
대종교(大倧敎)의 경전으로는 천훈(天訓), 신훈(信訓), 천궁훈(天宮訓), 세계훈, 진리훈의 5훈(五訓)이
실린 삼일신고(三一神誥)를 비롯해서 신리대전(神理大全), 신사기(神事紀), 천부경(天符經) 등이 있다.
2) 천도교
천도교는 온 누리에 덕(德)을 펴서 암흑에서 헤매는 창생(蒼生) 곧 세상의 뭇 사람을 건지자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을 부르짖는 새로운 종교이다.
이 교(天道敎)는 최치원(崔致遠, 857~ ?)의 25대손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1824~1864)가
1860년 4월 5일에 경북 경주 용담에서 창도하였다.
천도교의 종지(宗旨)는 인내천(人乃天)인데, “사람이 곧 한울이다.”는 뜻이며, 경전은 수운 최제우가
지은 신인일체사상(神人一體思想)을 담은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
해월 최시형이 지은 신사법설(海月神師法說) 및 손병희가 지은 의암성사법설(義庵聖師法說) 등이다.
3) 증산교 (甑山敎)
증산교는 창시자인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 1871~1909)의 호를 따라 이름 지어진 민족 종교이다.
일제의 강점(强占) 동안에는 흠치교라고 하였다. 당시에 이 지역은 여러 차례의 민란과 동학 농민운동(1894년)이 발생한 지역이었다.
강일순은 1902년부터 그를 추종하는 이들에게 도를 전파하였는데, 자신을 신도들에게 천지인
3계(天地人三界)의 대권을 가진 주재자로 가르치면서, 천지공사(天地公事) 또는 3계공사(三界公事)를
행하였다고 한다.
증산교의 사상은 사람존중, 원한 씻기, 민족의 임자노릇하기 등의 셋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민간 사상과 유, 불, 선에다가 그리스도교 및 동학의 교리를 섞어서 체계화하려고 노력한다. 이를테면 무속 신앙과
선도사상, 음양풍수도참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유교의 오상(五常), 곧 다섯 가지 덕(仁, 義, 禮, 智, 信)을
찬양하며, 성(誠), 경(敬), 신(信)을 인격수양의 방법으로 삼고, 불교의 미륵불 출세사상을 동학의 주문과 섞었으며, 그리스도교의 재림 사상을 끌어들여 통합시키려고 노력한다.
증산교 각 계파는 대순전경(大巡典經), 대순철학(大巡哲學),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
고부인선정기(高夫人禪政記)를 공통으로 쓰고, 증산종단개론(甑山宗團槪論)과 증산교사(甑山敎史)도
이용한다.
4) 원불교 (圓佛敎)
원불교는 소태산 박중빈(小太山 朴重彬,1891~1943)이 26세 되던 1916년 4월 28일에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깨닫고 세운 종교이다.
원불교의 교리는 일원상 진리를 기본 종지로 삼고, 한국 고유의 유, 불, 선(儒,佛,道) 삼교(三敎)는 물론,
기타 모든 종교의 교리도 종합, 활용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만물의 근원을 일원상으로 표현하면서 이것은 오랜 수양을 통해 도(道)를 깨달으신 부처님과 성현님의
원만하신 마음과 죄악과 어둠이 물들기 전의 타고난 본성과 통한다고 하였다.
원불교의 경전으로는 원불교 전서(圓佛敎全書)에 정전(正典), 대종경(大宗經), 예전(禮典), 정산종사법어(鼎山宗師法語), 원불교교사(圓佛敎敎史), 원불교교헌(圓佛敎敎憲) 및 성가(聖歌) 등이 수록되어 있고,
참고 경전으로 불조 요경(佛祖要徑)이 있다.
351. 우담바라 (優曇波羅)
부처님이 세상에 나투실 때 한번 핀다고 하는 꽃이다. 3천 년 만에 한번 핀다는 신령스러운 꽃이며
매우 드물고 희귀하다는 비유로 쓰여진다. 식물학상 우담화는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자라는
온화 식물이며 인도에서는 보리수와 더불어 신성한 나무로 취급된다.
1.우담바라는 무슨 꽃인가?
⌾우담바라는 인도 전설에서 여래(如來)나 전륜성왕 (轉輪聖王)이 나타날 때 피어난다는 꽃이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상상속의 꽃이다.
⌾전륜성왕은 부처처럼 32상(相)과 7보(寶)를 갖추고 있으며 무력에 의하 지 않고 정의와 정법의
수레바퀴를 굴려 세계를 지배하는 이상적 제왕 을 가리킨다.
2.역사기록
선문에 「꽃을 집어 들고 미소 짓는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석가모니가 영취산상에서 설법할 때
꽃 한 그루 집어 들고 있었던 적이 있다. 그때 많은 제자와 신도들은 설법의 제일성이 터져 나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군중 속에서 유일하게 수제자 가섭존자만이 꽃을 집어든 뜻을 알아차리고
미소 지었다.
이에 「그대만이 나의 마음을 터득했느니라. 나의 법문을 그대에게 물리리로다」했다. 이 유명한
이심전심의 꽃이 연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고사의 출처인 불경에 보면 우담바라의 꽃으로 돼 있다.
☀ 우담바라 (優曇婆羅) <불교사전>
불경에서 여래(如來)나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나타날 때만 핀다는 상상의 꽃이다. 한자로는 優曇婆羅,
優曇波羅, 優曇跋羅華, 優曇鉢華, 優曇華 등 다양하게 표기하고 있다. 영서(靈瑞)ㆍ서응(瑞應)ㆍ
상서운이(祥瑞雲異)의 뜻으로, 영서화·공기화(空起花)라고도 한다.
3천년 만에 한 번 꽃이 피는 신령스러운 꽃으로, 매우 드물고 희귀하다는 비유 또는 구원의 뜻으로
여러 불경에서 자주 쓰인다. 불경에 의하면, 인도에 그 나무는 있지만 꽃이 없고,
여래가 세상에 태어날 때 꽃이 피며, 전륜성왕이 나타날 때면 그 복덕으로 말미암아
감득해서 꽃이 핀다고 하였다. 때문에 이 꽃이 사람의 눈에 띄는 것은 상서로운 징조라 하였다.
또 여래의 묘음(妙音)을 듣는 것은 이 꽃을 보는 것과 같고, 여래의 32상을 보는 것은 이 꽃을 보는 것보다 백만배 더 어렵다고 하였다. 여래의 지혜는 우담바라가 때가 되어야 피는 것처럼 적은 지혜로는 알 수
없고 깨달음의 깊이가 있어야 알 수 있다고도 하였다.
☀ 식물학상으로는 인도 원산의 뽕나무과 상록교목 우담화를 일컫는다.
<개요>
뽕나무과(Moraceae)에 속하는 무화과의 일종. 학명은 Ficus glomerata이다. 우담발라화(優曇跋羅華), 영서화(靈瑞花), 공기화(空起花), 기공화(起空花)라고도 한다. 인도에서는 보리수와 더불어 신성한
나무로 여긴다. 인도의 전설에 따르면 여래(如來)가 태어나거나 금륜왕(金輪王)이 이 세상에 출현할
때에는 커다란 복덕의 힘으로 이 꽃이 피어난다고 한다.
불교의 과거칠불(過去七佛) 가운데 다섯째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Kanakamuni-buddha)은
이 나무 밑에서 성불했다고 한다.
<형태와 활용>
암수딴그루로 나무의 높이는 3m가량이고, 잎은 달걀 모양으로 얇다. 꽃은 꽃받침에 싸여 있는데 작아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열매는 지름이 3㎝가량으로 달린다. 열매는 식용으로 이용되며, 잎은 가축과
코끼리의 사료로 쓰인다. 나무의 진은 고무질이 있기 때문에 끈끈이를 만들며, 재목은 거친 건축재로
사용된다.
352. 우바리존자 (優婆離尊者)
지계제일(持戒第一) 우바리 존자의 행적은 거의 전해지지 않아 어떻게 계율을 지켰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불교의 평등사상을 논할 때 언제나 손꼽는 것이 우바리 존자의
출가 이야기입니다.
우바리 존자는 인도의 네 계급 중 가장 천한 수드라(노예) 출신입니다. 그는 장성하여 석가족의 궁중에서 머리를 깎는 이발사로 일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신 뒤 고향에 돌아와 법을 설하였을 때 설법을 들은 석가족의 왕자들은 발심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부처님이 계신 곳을 찾아가면서 궁중 이발사 우바리를 데리고 갔습니다.
부처님이 계신 곳에 이르러 모든 왕자들이 출가할 뜻을 품는 것을 보고 우바리도 출가하고자 하였으나,
수드라 출신의 천민인지라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모하고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와 같은 우바리의 마음을 헤아려 출가를 허락하였고,
우바리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맹세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의 가장 밑바닥의 인생인 노예로서 온갖 천대와 괄시를 받으며 살아왔다.
이제 왕자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출가하여 평등하게 부처님의 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제는 왕자도 수드라도 없다. 다 같은 부처님의 제자로서 화합하고 목숨을 바쳐 계율을 지키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리라.”
우바리가 출가 한 지 7일째 되던 날, 부모의 허락을 얻은 7왕자는 정식으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하시던 것처럼 출가한 순서대로 선배 제자들을 앉게 하신 다음
새로 출가한 7왕자의 절을 받게 하셨습니다.
7왕자들은 장로들로부터 앉은차례대로 예배를 해 나가다가, 맨 끝에 앉은 우바리 앞에 이르러서는
절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신 부처님께서는 그들을 타이르셨습니다.
그러나 7왕자들은 선뜻 우바리에게 절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거듭 타이르시며 이렇게 설법하셨습니다.
‘백천 갈래의 물줄기는 하나같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고
사성(四姓)들은 출가하여 하나의 석씨 성이 되도다.’
(백천하수 동류입해 사성출가 동일석성:百千河水 同流入海 四姓出家 同一釋姓)
일단 교단에 들어오면 출가 전의 왕자도 수드라도 똑같은 사문일 뿐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마침내 7왕자는 왕자였다는 교만심을 버리게 되었으며, 출가 전의 왕자와 이발사의 관계를 깨끗이
잊고 순수한 마음으로 우바리에게 공손히 절을 했습니다.
이로써 불교 교단 내에서 절대평등사상은 굳게 확립되었고, 모든 중생이 똑같은 불성종자(佛性種子)임을 만천하에 공표하게 된 것입니다. 또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인도사회에서도 그 엄하던 사성제도가 옳지
않음을 각성하기 시작하였으니, 참으로 획기적인 인권존중의 구현이요,
사자의 포효와도 같은 인권선언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월간 법공양:조계종 원로위원 석주스님 글>
353. 우바새 (優婆塞), 우바이(優婆夷)
오계(五戒)를 받았거나 혹은 보살의 48경계(輕戒)를 받은 남자 불자(佛子)를 우바새,
여자 불자를 우바이라 한다.
우바새를 청신사(淸信士), 거사(居士)라고도 하며 우바이를 청신녀(淸信女), 보살(菩薩)이라고도 한다.
보살이란 말이 우리나라에서만 여자 신도에게 불려지는 점이 특이하나 원래의 뜻은 남을 위해
헌신(獻身)하며 정법(正法)에 따라 사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붙여질 수 있는 호칭이다.
스님들도 남을 위해 헌신하는 경우가 있으면 보살이란 이름을 붙인다.
원효스님을 원효보살이라고도 했다.
354.우란분절
우란분절은 백중ㆍ백종ㆍ백종ㆍ망혼일(百衆, 百種, 白腫, 亡魂日)이라하며 음력(陰曆) 7월 15일이다.
범어 ullambana에서 나온 말이다.
<불설우란분경>에 의하면 목련존자가 육신통을 얻은 후 부모를 찾아보니 어머니가 아귀도에서
고통 받고 있음을 알게 되어 부처님께 구제할 바를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지금 살아있는 부모나 7대의 죽은 부모를 위해 7월 15일에 음식 의복 등촉 형상 등을 갖추어 대덕 고승들에게 공양하면 고통에서 구할 수 있다고 일러주었고 목련존자가 행한 데에서 유래한다.
<형초세시기>에는 중원일(中元日)에 스님, 도사, 속인들이 모두 분(盆)을 만들어 모든 절에 바쳤다고
했고, 신라시대에는 왕녀가 7월16일부터 8월 15일까지 6부의 여자들을 데리고 베짜기 대회를 개최하여 진편이 이긴편에 주식을 대접하고 즐겼다 해서 백종절(百種節)이라 하였다 한다.
고려 때에는 예종 1년(1106) 숙종의 명복을 빌고 천도를 하며 이 법회를 행했으며,
조선시대에도 초파일과 우란분절을 일년 중 가장 큰 행사로 여겼다.
이때는 절에 불공을 드리고 돌아가신 영가를 천도하는 재를 올렸으며 스님들은 중생을 위해 탁발을
베풀었다고 한다. 법회의 의식은 부처님 오신 날 봉축법회 같은 절차로 행하며 다만 고혼 영가의
조상을 천도하는 의례가 첨가되며 독경은 천수경이나 지장경, 부모은중경 가운데 택한다.
355. 운력(運力,雲力) ☀불교에서 나온 말
사찰에서 대중이 함께 모여 육체노동을 하는 것을 운력이라 한다. 함께 힘 모아 일하는 것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하는 일이란 순수한 우리말이다. “많은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 일을 한다.”는
운력(雲力)이나 “함께 힘을 기울인다.”는 의미로 운력(運力)이라고 한다.
의미와 관계없이 울력은 사찰에서 대중들이 모여 육체적인 노동을 함께 한다는 뜻이다.
불교의 모든 것에서도 그렇듯이 울력은 노동에서조차도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울력이 삶의 방편으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찰에서의 울력은 수행의 한 방편으로 중요한 일과(日課) 가운데 하나다. 특히 선종에서는 이 울력을
수행의 중요한 과정으로 보고 있다.
중국 당나라 때 백장스님은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는 선종의 유명한 청규를 남겼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의미다. 백장스님은 90세가 되어서도 대중들과 함께 울력을 했다.
어느 날 그 제자들이 스님의 건강을 생각해 스님이 사용하는 농구(農具)를 감추었다.
이에 스님은 단식을 하며, 일하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고 말씀했다고 한다.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선종에서는 참선의 형식이 따로 있다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행(行) 주(住) 좌(坐) 와(臥) 즉, 거닐고 머물고 앉고 누워있는 그대로가 수행과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아침 공양 전후에 전 대중이 도량을 청소하는 울력은 마당뿐만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번뇌라는
티끌을 함께 쓸어내는 수행의 과정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울력은 많은 대중이 모여 사는 총림뿐만 아니라 작은 사찰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또 일반 재가불자들이 대중과 함께 일하는 모든 것이 울력에 포함된다. 수련회 가서 설거지를 하고,
함께 사찰이나 대중처소를 청소하는 것 등이 모두가 울력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수행의 한 방편임을
유의해야 한다.
356. 운문종 (雲門宗)
운문종은 운문문언선사에 의해 개창된 종파다. 송 초에 왕성한 활동을 보인 임제종과 힘을 겨를
정도였으나 남송이후 점차 그 법맥이 소멸했다. 약 2백년간 활동을 한 운문종은 6조 혜능의 제자
석두희천ㆍ천화도오ㆍ용담승신ㆍ덕산선감ㆍ설봉의존ㆍ운문문언으로 이어지는 법계다.
운문문언의 문하에서는 백운자상ㆍ덕산연밀ㆍ향림징원 등이 법맥을 잇는다. 운문종에서 가장 눈에
띠는 선사는 향림징원의 문하에서 배출된 설두중현선사, 비범한 문학적 자질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설두중현선사는 종문 제일서로 불리는 원오극근선사의 <벽암록>의 원형이 되는 <설두송고백칙>을
펴냈다. 종(宗)은 설두중현 선사에 의해 꽃피워졌다.
운문종의 대표적인 선사상은 운문삼구(雲門三句) 일자관(一字關)으로 정리된다.
운문삼구는 온 우주를 덮고 있는 불성의 당체를 뜻하는 ‘함개건곤’ 당체를 깨달아 번뇌의 흐름을
순간에 끊어버리는 ‘절단중류’ 사람의 근기에 따라 자유로운 방편을 사용하는 경지인 ‘수파축랑’으로
압축된다.
일자관(一字觀)이란 운문문언선사가 학인들의 질문에 단 한 글자로 답변하면서 비롯됐다.
일자관은 풀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언어가 아닌 수행자가 실제적인 참구를 통해서 통과해야할
선의 관문 중 하나로 알려져 오고 있다.
357. 원이삼점(圓伊三點) 삼보(三寶) ☀불교에서 나온 말
열반은 원이삼점과 같이 해탈의 법과 불신과 평등의 대지혜가 합하여 일체로 상관된 경지를 의미한다.
이 ‘해탈의 법’ 이나 ‘평등의 대지혜’ 그 어느 것이든 하나 하나가 따로 떨어져서 단독으로는
‘열반’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불(佛)ㆍ법(法)ㆍ승(僧)을 상징하여 삼보(三寶)라고 이름 한다.
⌾'원이삼점(圓伊三點)'은 보통 사찰의 지붕 합각에 그려진 것으로 큰 원에 점 세 개를 그린 것을 말한다.
이자삼점(伊字三點)이라고도 말한다. 실담의 이자(伊字)는 3점으로 이루어지고,
이들 3점이 세로줄도 가로줄도 아닌 형태이므로,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이 원이삼점이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설명이 있다.
먼저 원이삼점을 둘러싸고 있는 큰 원은 '우주법계'를 나타낸다고도 하고,
또 다른 설명으로는 큰 원은 '원융(圓融)'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여기서 원융이란 걸리고 편벽됨이 없이 모든 것에 가득하고 만족하며, 완전히 일체가 되어서
서로 융합하므로 방해됨이 없는 것을 뜻한다.
안에 위치한 세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들이 있다.
먼저 이 세 점은 가로나 세로가 일치하지 않고 삼각의 관계에서 물(物)의 불일불이(不一不異) 또는
비전비후(非前非後)를 나타낸다고도 설명한다.
또는 모든 종류의 삼법(三法)이 삼즉일(三卽一), 일즉삼(一卽三), 불일불이(不一不異),
비전비후(非前非後)임을 비유하는 글자라고도 설명한다.
또는 이 세 점은 각기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를 상징한다고 하며 그런 의미에서
이를 삼보륜(三寶輪)이라고 이름붙이기도 한다.
또는 이 세 점은 각기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삼법인(三法印)을 상징한다고도 설명한다. 그래서 각기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소중하고 덜 중하지도 않으며,
모두 평등하고 서로 깊은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또는 이 세 점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의 삼신불의 삼위일체를 상징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즉 법신 보신 화신이 합하여 일체로 상관된 경지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법신(法身)은 해탈의 법인 진리 자체를 뜻한다. 또 보신(報身)은 수행의 결과로 얻어진 공덕이
갖추어진 불신(佛身)을 뜻한다. 또 화신(化身)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나투시는 모습으로 응신(應身)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법신 보신 화신은 그 어느 것이든 하나 하나가 따로 떨어져서 단독으로는 열반을
이룰 수 없다. 따라서 이 원이삼점은 이 세 가지 법이 일체로 상관된 경지를 나타내는 것이며,
이를 비밀장(秘密藏)이라고도 한다.
또 이 세 점은 각각 열반의 3덕인 법신ㆍ해탈ㆍ반야가 서로 상즉(相卽)하고 있음을 상징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입장에서 『남본열반경』권2 애탄품(哀歎品)에서는, 이것들을 가지고
열반의 내용인 법신ㆍ반야ㆍ해탈의 삼덕이 상즉(相卽)불리(不離)의 관계에 있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고
한다. <출처: 홍법원사전>
358. 원효대사 (元曉大師)
① 원효대사(617~686)는 신라의 스님이다.
스님의 속성은 설(薛)이고 이름은 서당(誓幢)이다. 잉피공(仍皮公)의 손자로 담내니말의 아들이었다.
압양군(경산) 남불지촌의 북쪽, 율곡 사라수(裟羅樹)아래서 태어났다.
29세에 황룡사에서 출가하였고 자기가 살던 집을 절로 만들었다 한다.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교리(敎理)를 연구하였고 글을 잘하고 변론(辯論)이 놀라웠다고 전한다.
하루는 장안 거리로 다니면서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면, 하늘 받칠 기둥을 찍으련다.
<수허몰가부(誰許沒柯斧),아작지천주(我斫支天柱)’>라고 크게 외치었다.
무열왕이 그 말을 듣고 요석공주와 함께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는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겠다는 것이니
나라에 큰 성현이 있으면 그보다 이로움이 없으리라.” 하고 사신을 보내어 원효를 맞아
과공주(寡公主) 요석궁(遙石宮)에 들게 하였다.
사신이 스님을 문천(蚊川)의 다리에서 만나 일부러 물에 떠밀어 옷을 젖게 만들고는 궁으로 모시고 가서 젖은 옷을 말리는 핑계로 스님을 유숙케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공주는 아들을 낳았으니 설총(薛聰)이었다.
그 후부터 원효선사는 파계(破戒)하였다고 속복으로 바꾸어 입고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자칭하며
다녔다 한다. 우연히 광대들이 놀리는 큰 박을 보고 도구를 만들어 무애(無碍)라 이름 짓고 촌락으로
다니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중생들을 교화하였다.
일찍 분황사에 있으면서 <화엄경소>를 지어 제 40권 10회향품에 이르러 그만두었고 <약소>3권을 지어 황룡사에서 강설하였다. 이 약소는 중국까지 널리 퍼져 <금강삼매론>이라 이름 하였다.
<지월록(指月錄)>에는 원효선사가 당나라에 도를 구하려고 가는 도중, 어느 날 밤에 무덤이 많은 곳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물을 찾다 어떤 바가지의 물을 마셨는데 시원하기 비길 바 없었다. 아침에 깨어보니 해골바가지에 있는 물이었다. 메스꺼워 구토질을 하고 깨달은 바가 컸다.
“마음이 일어나면 여러 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여러 가지 법도 없어진다 하더니,
마음이 없으면 해골도 없는 것이로구나. 부처님 말씀이 삼계가 마음뿐이라 하셨으니
어찌 나를 속였으랴!” 하고 본국으로 되돌아와 글을 쓰고 경전을 번역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한다.
스님은 신문왕 6년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나이 70에 입적하셨다.
② 원효대사(元曉大師)
元曉는 新羅 眞平王 三十九年(六一七年) 押梁국(慶北慶山) 불지촌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佛道를 배우기 시작하여 마침내 佛敎敎理에 正統하고 깨달은 바를 그대로 실천하여
一代의 碩學으로서 그 名聲을 世界에 떨쳤다. 그리고 그는 民族의 先覺者로서 謙虛하게
民族統一의 理念과 實踐力을 길러 준 民族이 횃불이 되었다.
어릴 때의 이름을 誓幢이라 했고, 俗性은 薛씨이며 귀족 문벌의 出身이었다.
그는 出家하여 자기 집을 절로 만들었고, 여러 곳으로 다니며 眞理를 探求하였다.
그는 당시 未曾有의 盛大를 맞았던 唐으로 留學의 길을 떠났다. 중도에서 해가 저물어
오래된 무덤 사이에서 잠을 잤다. 자다가 목이 말라 물을 찾으니. 어떤 그릇에 물이 있기에
그 물을 마시고 해갈되어 편안히 잠을 잤 다.
아침에 깨어 본즉 밤에 먹은 물그릇이 해골박이였다. 구토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문득 깨달아,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온갖 법이 사라지는 도다,
(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종종법멸 혹초루불이: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 惑觸髏不二) 하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三界가 唯心이요 萬法이 唯識이라고 하신 것이 어찌 나를 속였으리요! 하며,
留學을 抛棄하고 本國에 돌아와서 많은 經論에 疎(소=註譯)를 붙이고 많은 著書을 남기었다.
원효스님이 다룬 經典과 疏와 宗要로서는 華嚴經, 涅槃經, 法華經, 楞伽經, 維摩經, 金光明經, 般若經,
無量義經, 金剛三昧經, 勝鬗經, 不增不減經, 解深密經, 無量壽經 阿彌陀經, 彌勒上生經, 梵網經,
菩薩瓔珞 本業經등이 있으며,
또한 論으로서는 大乘起信論, 成唯識論, 瑜伽論, 因明論, 攝大乘論, 中辯論, 掌珍論, 中觀論, 廣白論,
成實論, 寶性論, 阿毘曇論 等에 註釋을 붙였으며, 調伏我心論, 安身事心論, 求道譬喩論, 十門和爭論,
遊心安樂道, 發心修行章, 六情懺懷法 等 萬世不朽의 著書를 많이 남겼다.
九十九部 二百四十여권에 達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總 三百六十여권 또는 千권에 가깝다는
傳說도 있어서, 현재 밝혀져 있는 數字보다도 古今獨步의 大 著述이었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二十九部 二十三卷이 傳해오고 있는데, 그 中 十門和爭論은 元曉의 中心思想을
알 수 있는 代表的 著書로 알려지고 있다.
불교사상 몇 백 권의 저술을 남긴 大論師나 大學者는 몇 몇 분 있었지만 元曉大師의 경우와 같이
대, 소, 승(大小乘)三藏을 통털어 華嚴, 法華, 涅槃 三論, 法相 淨土, 律, 成實, 阿毘曇論 등 각부 각종의
要領과 骨髓를 추려 엮은 宗要, 料簡 등을 撰述하였다는 것은 世界佛敎敎學史上 오직 원효 보살님
한 분 뿐이었음을 우리는 看過해서는 안된다. 그는 神文王 六年에 70歲로 일생을 마칠 때까지
著述과 說法을 그야말로 超人的 精力으로 繼續하였던 것이다.
359. 유식사상 (唯識思想)
중관사상은 논리는 전개했으나 체계적인 학설을 세우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현실 존재가 어째서
이 같은 질서 위에 성립되어 있는가 하는 까닭을 체계적으로 고찰한 것이 유식사상이다.
유식사상은 기원 후 4 세기경의 인도 불교학자 무착(無着,Asanga)에 의해 집대성되었으며,
그의 사상은 그 후 동생인 세친(世親,Vasubandhu)에 의해 종합적으로 체계화되었다.
이러한 유식 사상의 내용은 중생의 현실, 중생의 본성 그리고 몸과 마음의 수련과 중생구제 운동의
세 부분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으며, 매우 분석적이고 조직적으로 구성된 이론이다.
그러나 복잡한 이론을 간추리면 그 대의는
첫째, 미망에 있는 중생의 심리 상태를 잘 알고
둘째, 자신의 본성이 진리 그대로의 진여성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초기 불교 시대에는 마음을 둘로 나누어 생각하였다. 즉, 번뇌를 일으키고 악한 일을 저질러,
그 업력(業力)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게 하는 마음인 유루심(有漏心)과 모든 잘못을 벗어난 맑고 깨끗한
해탈의 마음인 무루심(無漏心)이 그것이다.
그리고 정신계와 물질계는 이러한 마음과 행위의 업력에 의한 인과(因果)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유식학에서는 구체적으로 마음을 여덟 가지 혹은 아홉 가지로 나누어 설명을 한다.
먼저 인간의 마음은 육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육체를 통하여 외부와 접촉하면서 작용이
시작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외계의 사물을 접촉하는 장소를 인식이 시작되는 뿌리란 뜻으로 근(根)이라 한다.
우리의 육체에서 근이 시작되는 곳은 눈, 귀, 코, 혀, 몸이다. 이를 안근(眼根), 이근(耳根), 비근(鼻根),
설근(舌根), 신근(身根)이라 하고 합하여 오근(五根)이라 한다.
또한 인식되는 외계의 대상인 사물을 경(境)이라 한다. 눈으로 인식되는 대상은 색과 모양인 색경(色境), 귀로 인식되는 것은 소리인 성경(聲境), 코로 인식되는 것은 냄새인 향경(香境), 혀로 인식되는 것은 맛인 미경(味境), 몸으로 인식되는 것은 촉감인 촉경(觸境)이라 하며 합하여 오경(五境)이라 한다.
외계의 대상이 우리 몸에 접촉하게 되면 즉시 각 기관에서 인식 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바로 헤아려 아는 작용의 식(識)이 발생하는 것이다. 오근 각각에 안식(眼識), 이식(耳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이 일어나므로 이를 오식(五識) 또는 다섯 가지 마음 작용이라 한다.
그러나 오식은 각각의 대상만을 인식할 뿐 종합된 인식은 할 수 없다. 따라서 이들을 종합하여 인식하는 식이 필요한데, 그러한 식을 의식(意識)이라 한다. 또 이 의식의 주체를 의근(意根)이라 하고, 의식하는
대상이 되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모든 것을 법경(法境)이라 한다. 이렇게 하여 앞의 오식, 오근, 오경과 의식, 의근, 법경을 합하여 각각 육식, 육근, 육경이 성립하게 된다.
의식(意識)은 제6식이라 하는데, 나머지 오식을 종합하고 선과 악을 구별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추리하고 예측 판단하여 모든 인간 행위를 주관한다.
그러나 깊은 잠에 빠질 때나 의식이 불명일 때, 의식은 끊어지기도 하고 다시 깨어나기도 하며,
머무는 곳이 일정하지 않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따라서 제6식 이후의 새로운 식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하여 제7식이 성립하게 된다. 이것을 말라식(末那識)이라 한다.
제7식은 앞의 제6식이 머무는 곳이 되기도 하고, 항상 번뇌와 망상을 일으켜 자신에 대한 잘못된 집착을 낳게 하는 원인이 된다.
바로 ‘내가’라고 하는 의식이다. ‘내가 누군데’라고 하는 이러한 자기중심을 떠나지 못하는 아집 때문에
인간은 항상 나의 물건에 집착하고 나와 남을 차별하게 된다.
유식학에서는 인간이 의식(意識)하고 행위했던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고 업력으로 남게 되며,
그것에 합당한 과보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위와 인식을 저장하는 역학을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이 제8식인 알라야(Alaya)식이다. ‘알라야’란 이름 그대로 ‘저장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알라야식이란 인간의 의식과 행위를 모두 저장하여, 이에 알맞은 과보를 낳게 하는 식을 일컫는다.
제8식은 윤회의 주체가 되기도 하고, 우리들의 인식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8식은 인간의 과거 행위나 의식만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행위와 의식도 저장하기도 한다. 현재의 행위나 의식에 의하여 과거에 저장된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저장된 것은 원인인 인(因)의 역할을 하지만, 적합한 여건인 연(緣)의 도움이 없이는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제8식 속에 부처님의 성품인 불성(佛性)이 있다고 한다. 그것을 별도로 제9식이라고도 한다.
불성은 영원하며 손상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설사 악인이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불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어떠한 생명체에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모든 중생들은 부처님 아닌 이가 없으며, 진리 그대로 오신 분인 여래(如來)가 된다.
이렇게 하여 여래가 항상 우리들 속에 잠재되어 있다는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이 성립하게 된다.
이러한 인도의 유식학은 중국에 전해져 여러 종파를 탄생시킨다.
보리유지(菩提流支)는『십지경론(十地經論)』을 번역하여 지론중(地論宗)을 만들어 냈다.
그 후 진제(眞諦)가『섭대승론(攝大乘論)』을 섭론종(攝論宗)을,
현장(玄裝)은『유식삼십론(有識三十論)』에 해석을 가한『성유식론(成有識論)』을 번역하여
법상종(法相宗)을 이루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원측(圓測)은 지론종, 섭론종, 법상종을 종합하여 유식학을 발전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등의 저술로 중국과 한국의 유식학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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