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34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추석’]
[2018문학메카 원고]
추석
신고배 한 상자 들쳐메고 처갓집 대문 앞에 섰을 때,
얼핏 문 틈으로 쏟아져 나오는
왁자지껄. 까르르 여인네 웃음소리, 유쾌한 질책들,
두런두런 장모 목소리
콧구멍 벌려주는 참기름 연하게 바른 향내들,
송편, 절편. 약과. 다식, 부침개 내음이 정겹다
스윽 대문을 밀었을 때, 장모 얼굴이 와락 다가왔다
하이고, 사위 등짝 좀 보게나 만월까정 메고 왔구만
해동(海東)의 오래된 것들이 넉넉히
늠실대는 참 좋은 이 가을 저녁.
구두를 벗으며 앙금처럼 부유하던
어제의 엷은 갈등들을 툭툭 털어버릴 때,
등허리에 묻어 온 달빛을 타고
눅진한 희열이 번져온다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추석>은 명절이 지니는 본연의 풍성함과 가족 간의 따뜻한 정(情)을 아주 생생하고 감각적인 언어로 포착해 낸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이 시는 특별한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을 통해 잔잔하지만 깊은 감동을 끌어냅니다.
작품에 대한 세부적인 비평을 몇 가지 갈래로 나누어 정리해 드립니다.
1. 오감을 자극하는 생생한 묘사
이 시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독자를 순식간에 명절날 처갓집 대문 앞 스케치북으로 데려다 놓는 공감각적 심상에 있습니다.
⚫청각적 심상 : '왁자지껄', '까르르', '두런두런' 같은 음성상징어를 통해 대문 안쪽의 화기애애하고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전달합니다.
⚫후각적 심상 : '참기름 연하게 바른 향내', '송편, 절편, 약과, 다식, 부침개 내음'을 나열하여 명절 특유의 고소하고 정겨운 냄새를 묘사합니다. 이는 독자의 후각적 기억을 자극하여 시적 공간에 더욱 몰입하게 만듭니다.
2. 해학과 애정이 빛나는 은유
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장모님이 건네는 한마디는 이 시의 절정이자 가장 빛나는 구절입니다.
"하이고, 사위 등짝 좀 보게나 만월까정 메고 왔구만"
사위가 무겁게 들고 온 '신고배 한 상자'를 추석의 상징인 '만월(보름달)'로 치환한 장모의 표현에는 사위에 대한 깊은 애정과 고마움, 그리고 한국적인 해학이 듬뿍 담겨 있습니다. 이 대사 한 줄 덕분에 시 전체에 따뜻한 온기가 확 퍼지게 됩니다.
3. 일상의 갈등을 씻어내는 치유의 공간
2연에서는 분위기가 개인의 내면으로 깊어집니다. 화자는 구두를 벗으며 '앙금처럼 부유하던 어제의 엷은 갈등들'을 툭툭 털어냅니다.
세상(바깥)에서 겪었던 피로와 인간관계의 스트레스가, 정이 넘치는 가족의 품(안)으로 들어오며 눈 녹듯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등허리에 묻어 온 달빛'과 '눅진한 희열'이라는 표현은 명절이 주는 넉넉함(해동의 오래된 것들)이 단순한 포만감을 넘어,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묵직한 카타르시스로 작용함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 총 평
한기홍 시인의 <추석>은 가장 한국적인 명절의 정경을 통해, 현대인들이 잊고 살기 쉬운 '가족 공동체의 따뜻한 회복력'을 그려낸 수작입니다. 거창한 수사 없이도 사람의 냄새와 온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