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탁번/굴비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장수가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은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있게 먹고
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 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 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녁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 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안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다니고
베짱이들도 밤이슬 마시며
노래 불렀다
(오탁번,
<굴비> 전문)
오탁번
1943년 충북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평동리는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의 주인공 박달이가 금봉이를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마을이다.
1968년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육군사관학교, 수도여자사범대학, 고려대학교,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교수를 역임하였다.
첫댓글 몇번이나 읽었는지 울수도 웃을수도없네 여인의 마음과 그 사내의 무력함이 겹쳐져 슬프기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