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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하면 어떤 것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세요? 축구, 삼바, 카니발, 흑인 오르페, 아마존...브라질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들입니다. 그러나 브라질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음악''입니다. 브라질은 1960년대 이후 전 세계 음악시장에서 대단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미국은 물론, 아시아, 유럽에까지 그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보사노바의 아버지'' 안토니우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을 비롯해, 카이타누 벨로주(Caetano Veloso), 질베르토 질(Gilberto Gil), 이반 린즈(Ivan Lins), 갈 커쉬타(Gal Costa), 마리아 베타니아(Maria Bethania), 마리자 몽치(Marisa Monte), 다니엘라 메르쿠리(Daniella Mercury) 같은 뮤지션들은 이미 국제적인 스타가 됐죠. 브라질 음악은 특히, 퓨전 재즈에 현재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쪽의 리듬이 밑바탕인 브라질음악이 역시, 리듬 중심의 재즈와 음악적 궁합이 맞아떨어진 거죠. 그래서 퓨전 재즈의 삼분의 일은 브라질 음악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1960년대 초반 시작됐던 보사노바(Bossa Nova) 열풍은 전 세계를 휩쓸었다. 미국의 재즈와 브라질 음악 삼바가 결합된 이 독특한 형태의 음악에 지구촌이 열광했던 것이다. ''6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그 열기가 약해지기는 했지만, 브라질은 쿠바와 함께 양과 질적인 면에서 중남미 라틴 음악의 절대 강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여러 외형적인 모습만 살펴봐도 브라질 음악의 위용이 가늠되는데, 여기에 보다 큰 힘을 실어주는 것은 끊임없이 우수한 음악인들이 배출되어 그 맥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 부러운 점은 브라질 뮤지션들 대다수가 자국 내에서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현실이다. 이 점은 우리 현실과는 매우 다른 브라질 음악만의 경쟁력인 것이다. 여성 재즈가수 이타마라 쿠락스의 존재는 다시 한번 브라질의 풍부한 음악적, 인적자원에 대해 부러움을 갖게 한다.
최근 발매된 그녀의 앨범 [Serenade In Blue / My Favorite Songs]는 제목처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곡들을 재해석했다. 브라질 출신의 세계적인 연주인이자 프로듀서인 유미르 지오다투(Eumir Deodato), 쿠바 출신으로 요즘 가장 잘 나가는 재즈 피아니스트 곤잘로 루발카바(Gonzalo Rubalcaba)의 참여가 화제를 불러모았지만 역시, 음반을 가장 빛내는 것은 이타마라 쿠락스의 높은 실력이다. 특히 4옥타브를 넘나드는 그의 탁 트인 창법은 모든 노래를 능수 능란하게 주무른다. 음반은 자신의 주종목인 재즈를 비롯해, 샹송과 올드 팝, 브라질 음악의 명곡 등 다양하고 친숙한 레퍼토리들로 꾸몄다.
첫 곡 ''Un Homme Et Une Femme(남과 여)''는 추억의 프랑스 영화 <남과 여>의 친숙한 주제가이다. 리듬과 박자를 절묘하게 쪼개나가며 원 곡의 맛을 살린 이타마라의 노래가 돋보인다. 올드 팝의 대명사격인 ''Moon River''에서는 한 잔의 은은한 와인 향취를 풍긴다. 이어지는 타이틀 곡과, ''The Shadow Of Your Smile''이 지나칠 정도로 낭만적이다 싶었더니 ''Aranjuez-"Follow Me"''에서 이내 표정을 바꾼다. 로드리고와 데미스 루소스의 곡을 절묘하게 혼합한 이 곡에서 그의 보컬은 도도하리 만치 위엄이 넘친다. 음반 후반부에 배치한 몇 곡의 브라질 음악들에서 이타마라의 매력은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이게 바로 모국어, 모국 음악의 힘일까?
아무튼 모든 브라질음악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안토니우 카를로스 조빔의 극찬이 괜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며, 재즈 가수이지만 재즈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색깔에 맞게 각각의 곡을 소화한 사실이 마음에 든다. 비 영어권 음악인들의 높은 기량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수작이다.
글·송기철(팝 칼럼니스트) / 사진 제공·헉스 뮤직
oimusic 2001년 01월호 송기철
Gal Costa Ao Vivo - Hoje
Gal Costa Ao Vivo - Santana
Gal Costa Ao Vivo - Luto Gal Costa - Ensaio - "Canto Triste" 아주 흔한 말로 시작해 보자면 낭만적이고 또한 게으른 보사노바(Bossa Nova)는 60년대에 브라질의 어느 욕조에서 만들어진 이후 아직까지도 계속 사랑받고 있으며 남미를 넘어 유럽, 일본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음악이다. 보사노바는 소위 파이오니아라 불리우는-목욕탕 욕조에서 보사노바 리프를 만들었던-호앙 질베르뚜(Joao Gilberto)와 안토니오 까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 그리고 그에 이은 까에따노 벨로주(Caetano Veloso)와 질베르뚜 질(Gilberto Gil) 그리고 현재의 알토 린제이(Alto Lindsay)등의 아티스트를 통해 계승되고 있다.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 미친듯 흘러나오고 있는 이지 리스닝과 라운지, 다운 템포의 뿌리가 되었으며 끊임없이 리퀘스트, 리믹스, 그리고 리메이크 되어지고 있는 범지구적 인기 장르이기도 하다. 브라질의 아이들은 낮에는 바지만 입고 땀 뻘뻘흘리면서 개처럼 축구를 하다가도 땅거미가 지고 저녁이 오면 클래식 기타를 잡고 낭만적인 보사노바 클래식 넘버들을 연주한다고 한다.
본 씨디의 부클릿을 보게되면 포르투갈어인 'Saudade'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 단어는 여러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는데 동경과 그리움, 당신이 사랑하던 것들이 현재 없다는 것, 그리고 노스텔지아를 포함하고 있는 복합적인 뜻을 가졌다고 한다. 슬픈듯 하지만 무엇인가 희망을 내포하고 있는, 한가지로 정의될수 없는 단어로 여러 보사노바의 히트곡들의 가사와 제목에서 자주 찾아볼수 있는 단어 이기도 하다. 겁대가리 없이 라몬 레알의 본 앨범을 한단어로 축약해보면 바로 'Saudade'가 될수 있겠다. 슬프지만 또한 밝고 무언가가 아쉽지만 기대를 가지게끔 하는 분위기와 감정들을 복합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맑고 투명한 기타사운드가 만들어내는 보사노바의 청량감 넘치는 매력으로 가득찬 위 앨범은 살랑대는 보사노바 특유의 리듬감이 잘 살아있으며 감미로운 모노톤의 보컬이 곡을 주도하고 있는데, 물 흐르듯 넘실대는 부드러운 전개가 청자를 편안하게 만든다. 대부분이 원 작곡자가 존재하는 곡이다만 재해석의 의미에서 봤을 때 그의 성과 또한 크다는 것을 앨범이 끝나는 순간에 알게될 것이다. 그는 보사노바의 자연스러운 매력을 고스란히 청자에게 전달할 줄 아는 연주자이며 또한 프로듀서이기 때문이다. 보사노바는 대부분이 여름을 위한 음악이지만 이런 식의 따뜻한 보사노바 음반은 당신의 겨울 또한 따뜻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런 류의 앨범이 아직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아직도 당신의 몸에서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라몬 레알은 마침내 앤 라안(Ann Laan)이라는 적당한 파트너를 찾게 된다. 마치 엘리스 레지나(Elis Regina)와 조빔, 마리아 크레우자(Maria Creuza)와 비니셔스 드 모레즈(Vinicius de Moraes) 또는 아스트럿(Astrud)과 호앙 질베르뚜(Joao Gilberto)와 같은 전통적인 커플처럼 라몬은 앤과 멋진 혼성듀오 벤봄(Ben Bom)을 형성하게 된다. 라몬의 정제된 해석으로 이루어진 브라질리언 곡들과 고상한 앤의 보이스는 듀오로서 최상의 콤비네이션임을 증명하였고 확실한 브라질과 스페인의 대중음악계의 가장 중요한 인물들로 떠오르게 된다. Gal Costa - Ensaio - "Meu Nome é Gal" Gal Costa Gal Costa - Ensaio - "Saudosismo
GAL COSTA - NADA MAIS (LATELY) Tropialia: 1960년대후반, 브라질의 독재군부정권에 반대하여 일어난 새로운 브라질 대중음악을 말한다.
oimusic 2004년 03월호 원용민
Gal Costa Ao Vivo - Te Adorar
당신이 현재 들고있는 라몬 레알(Ramon Leal)은 현재 가장 중요한 보사노바 아티스트이다만 낮에 바지만 입고 미친듯이 축구를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방금 전의 말은 개그인데 브라질 태생은 아니라는 뜻이다. 어떤가, 웃긴가? 그는 여느 시에스타 레이블의 아티스트처럼 스페인 출신인데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에서 까에따노 벨로주의 공연장면을 보면서 뜨악했던 사람이라면 스페인의 문화권도 보사노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축구만 안했지 곡들의 성격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얘기이다. 자꾸 축구얘기만 해서 미안한데 사실 지구 대표팀이라 불리우는 레알 마드리드가 스페인 소속구단 인 것은 사실이지만 길거리 축구는 역시 브라질이 최고다. 사실 이러한 연유와는 그닥 관계가 없는데 억지로 끼워 맞추자면 유럽/일본에서 만들어진 보사노바는 브라질의 흙냄새보다는 아무래도 깔끔한 테라스의 발코니에 놓여져 있는 와인냄새가 짙다.
[어느 스페인 보사노바 뮤지션의 연대기]
이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라몬 레알은 현재 가장 존경받는 보사노바 아티스트중 하나이다. 50년대 중반에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60년대말에 어린시절을 보내며 자신의 누이에게 기타를 배웠는데, 그는 비틀즈(Beatles)나 비치 보이즈(Bitch Boys)의 악보들을 해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7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그는 재즈와 삼바, 그리고 보사노바에 빠져드는데, 결국 그러한 움직임은 삼십년이 지난 지금에 까지 이르고 있다. 그에게 보사노바는 새로운 세계였다는데 위에서 언급했던 질베르뚜나 조빔, 그리고 벨로주와 시코 바로끄(Chico Buarque) 등의 대가들과 데오다토(Deodato), 토미 리푸마(Tommy Lipuma)등의 편곡자/프로듀서들의 이름 또한 발견하게 된다. 같은 곡들도 유명 프로듀서와 편곡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원곡보다 훨씬 풍부해지며 감성적이고 효과적으로 변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편곡과 재배치, 그리고 새로운 어레인지에 대한 미칠듯한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연구와 활동으로 인해 라몬 레알은 70년대 중반에 진정한 프로페셔널 뮤지션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스페인 전국의 재즈클럽, 까페, 페스티벌에서 전설적인 연주를 펼치며 재능있는 뮤지션들과도 협연을 하게 된다. 이 경험은 그에게 곡을 구성함과 선율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 성공적인 연주자로서 조화를 이루는데 좋은 자극이 된다. 이 흥미진진한 여행동안 뮤지션들은 대체로 새로운 음악적 진로를 탐구하게 된다고 한다. 세션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친구들과 함께 Linea Clara라는 밴드를 조직하게 되는데 개인적인 사건들로 무대와는 멀어지게 된다.
80년대로 접어들어 그는 아스트럿 질베르뚜(Astrud Gilberto)의 스페인 투어의 세션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지만 그의 재능은 눈에 띄지 못한 채 어느 레코드 계약도 따지 못한 신세가 되었다. 그의 작품에 대한 비판 및 기회도 들어오지 않았다. 당시 스페인에서는 메인스트림의 신나는 락음악이 주를 이루던 시대였다. 라몬 같은 마에스트로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 불행의 나날이었다.
상황이 개선될 때 즈음 라몬은 베이시스트 마리아 클라라(Mariate Clara)와 결혼하여 1989년 아들 데미안 Damian을 출생하였다. 보사노바 뮤지션으로서의 야망을 버리지 못한채 라몬은 기타 테크닉과 퍼커션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보사노바가 졸라 게으르고 단순한 음악같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미칠듯이 복잡하고 어려운 코드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어 꾸준한 연구와 노력이 절실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또한 라몬 레알은 부드러운듯 하면서도 어려운 테크닉을 구사하는 라몬은 몇 안되는 기타리스트 중 하나이다.
Gal Costa - Ensaio - "Folhetim"
후에 그는 싱어이자 개성파 여배우인 베아트리체 비놋띠(Beatrice Binotti)와 여러 작업을 하게 되는데 기타리스트의 역량은 물론이거니와 프로듀서로서의 활약을 보여주면서 스페인 보사노바씬의 마에스트로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기존의 보사노바 클래식을 어떤식으로 가공하는가에 중점을 두었고 그것은 원곡들과는 또다른 묘미와 감동을 주면서 사람들에게 사랑받게 된다. 그 이후에도 시에스타에서 발매된 리타 칼립소(Rita Calypso)와 컴필레이션 <여행 삼부작>의 기획과 프로듀싱을 담당하였으며 스페인 보사노바 씬의 최대 걸작중 하나인 자신의 앨범 를 발표하게 되면서 그는 전세계를 아울러 가장 중요한 보사노바 프로듀서가 된다.
[Cordas e Metais] Gal Costa - Ensaio - "Baby"
이전과 마찬가지로 위 앨범도 재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다. 대부분이 보사노바 히트곡들이며 당신이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트랙들인데 따뜻하고 깨끗한 질감의 느낌들이 잘 살아있다.
1. ciume
전설의 보사노바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인 카를로스 라일라(Carlos Lyra)의 곡으로 상큼한 건반과 현을 중심으로 편곡 되었다.
2. januaria
역시 보사노바씬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 였던 시코 바로끄의 곡으로 리타 칼립소(Rita calypso)에서도 활동중인 앤 라안의 코러스와 혼 섹션이 청량한 느낌을 준다.
3. ligia
형님중의 형님인 조빔의 곡으로 이미 유명 섹소폰 주자인 스탠리 투렌타인(Stanley Turrentine)과 스탠 겟츠(Stan Getz) 녹음했던 적이 있으며 가장 훌륭한 브라질 여성보컬인 갈 코스타(Gal Costa)와 현재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알토 린제이도 불렀던 적이 있다. 현악 세션이 돋보이는 편곡을 가지고 있다.
4. laia ladaia
플루겔혼의 인트로가 돋보이는 곡으로 세르지오 멘데스(Sergio Mendes)의 버전이 가장 유명하다. 코러스 멜로디 파트가 한국의 민요 <옹헤야>와 흡사하다.
5. morena boca de ouro
청량한 플룻과 담백한 보컬, 그리고 깔끔한 기타연주가 아름다운 트랙이다.
6. estrada do sol
조빔이 만들었던 곡으로 엘리스 레지나와 갈 코스타같은 여성 보컬들이 많이 불렀던 곡이다. 결국 라몬 레알은 여기서 앤 라안을 메인 보컬로 투입시킨다. 그녀의 아름다운 보컬이 빛을 발한다.
7. eu preciso de voce
조빔의 곡으로 리드미컬한 전개와 시원한 전개가 돋보인다. 벨로주의 누이였던 마리아 베싸니아(Maria Bethania)의 버전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8. presente de natal
플룻의 인트로와 기타와 셰이커가 주를 이루고 있는 곡으로 조앙 질베르뚜의 버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라몬 레알의 목소리도 거의 조앙 질베르뚜와 비슷해서 처음듣는 사람이면 누가 누군지 햇깔릴 수도 있다.
9. chora tua tristeza
역시 리타 칼립소의 앤 라안이 메인 보컬로 참여한 곡으로 루이즈 본파(Luiz Bonfa)와 까에따노 벨로주 그리고 영화음악 작곡가로도 잘 알려진 랄로 쉬프린(Lalo Schifrin)의 오케스트라 버전 또한 훌륭하다. 현악 파트와 건반, 그리고 혼섹션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트랙이다.
10. morena dos olhos d'agua
이번 앨범은 전작들에 비해 유난히도 현악 파트의 부분이 돋보이는데 이번트랙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코 바로끄의 곡으로 까에따노 벨로주, 갈 코스타가 녹음 했던 바 있다.
11. o orvalho vem caindo
한국 사람들한테 가장 익숙한 트랙일 수도 있겠는데 첫번째 트랙을 작곡했던 까를로스 라이라의 곡이다. 곡의 제목을 번역하면 '이슬이 내린다' 라고 하는데 실제로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다.
12. e nada mais
마지막 트랙은 역시 아쉬운 감정으로 끝난다. 리듬파트가 부각되서 활발하고 밝은듯 하지만 사실 바닥에는 슬픈 감성이 깔려있는 트랙이다.
* 출처 : 파스텔뮤직 홍보자료....
Gal Costa - Ensaio - "Coracao Vagabundo"
음악의 스타일은 사회적인 인식을 이끌어내고 고발하는 이데올로기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가삿말이 함축적이고, 시적이다.
후에 MPB(브라질대중음악)에 영향을 줬다.
보사노바: 삼바에 모던재즈의 감각이 가미되어 발달한 새로운 포퓰러음악.
가사와 곡조가 모두 지적이며 차분한 경향을 띠고 있다. 보사노바란 '새로운 경향' '새로운 감각'을 뜻하는 포르투갈어이다. 1952년경부터 브라질에서 싹트기 시작했으나 조니 알프가 스타일을 만들고, 1955년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이 빌리브랑코와 공동으로 내놓은 최초의 보사노바 《태양의 찬가》가 발표됨으로써 일약 유명해졌다.
조빔은 다시 가수 주앙 질베르토 등과 함께 보사노바를 보급시켜 1958년경에는 브라질의 포퓰러음악계를 주도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다른 나라에서도 모던재즈 연주자들의 대부분이 이 리듬으로 연주하게 되고 마침내 세계적인 유행을 가져왔다.
Caetano Veloso는 "브라질의 Bob Dylan"이라 불리며, 그는 작곡가이자 가수일 뿐만 아니라 시인,영화제작자, 사회운동가로서도 뛰어난 흔적을 남겼다.
30년 동안 그가 남긴 앨범과 책들이 그의 재능과 정열이 "브라질의 Bob Dylan"이란 경구가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Veloso는 '코카 콜라와 samba carnival을 동시에 사랑하는' 인물이었고, 그 결과 열정적 리듬 위에 흐르는 서정적 시가 있는 극도로 정교한 절충적인 팝 음악이 탄생했다.
그의 음악은 '나긋나긋한 낭만이 흐르는 발라드'를 좋아하는 센티멘털한 취향부터 '정열적 리듬이 넘실거리는 댄스 음악'을 모두 포괄한다. 1942년 Bahia 의 Santo Amaro da Purificacao에서 태어난 그는-그의 본명은 Caetano Emanuel Vianna Telles Veloso이다-Caribbean, African, 북미팝과 Bahia의 여러 음악적 전통을 접하면서 자신의 음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음악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이로는 쿨하면서 차분한 음색을 내는 Joao Gilberto의 사운드였으며, Veloso의 음악-아주 강렬한 전자음을 내는 음악에서도-의 기저에는 언제나 Joao의 느낌이 묻어난다.
1960년대 초 그의 여동생인 Maria Bethania-매우 훌륭한 여가수이며 브라질의 그레타 가르보로 불린다-Nara Leao의 공연 "Opiniao"의 Nara의 대역을 제안 받아서 Rio로 이주하게 되며 Veloso도 같이 오게된다.1) 23살의 Veloso는 "Um Dia"로 한 콘테스트에 참여하게 되며 Phillips 레이블 관계자의 눈에 뛰어 그들과 계약하게 된다.
그는 싱글앨범인 "Cavaleiro" 와 "Samba em Paz"을 발표하게 된다.
1967년 그의 친구인 Gal Costa와 Domingo앨범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 앨범은 bossa nova앨범으로 그는 대중에게 주목받게 된다.
그냥 bossa nova를 구사하는 평범해 보이던 그는 Gil과 함께 TV Record Festival에 참가하게 되는데 Veloso는 "Alegria Alegri"로 Gil은 "Domingo no Parque"로 출전하게 되는데 각각 4위와 2위에 입상하게 된다.2)
그러나 관중들은 그들이 기대했던 Veloso의 음악이 너무나 판이해서 엄청난 야유를 보냈다고 한다.3)
하지만 이것이 tropicalia 운동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Veloso은 Gal Costa와 Gilberto Gil등과 더불어 MPB를 대표하는 가수들이 되며, 영리하고 야망이 넘치며 창조적인 그는 그의 좌파적인 모습 때문에 언제나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68년, 그는 브라질에서 서서히 태동하는 hippie 운동과 유사한 성격의 이 tropicalismo에 Gilberto Gil과 Tom Ze등과 주도하게 되며 Gil, Gal, Ze, Torquato Neto, Rogerio Duprat, Capinam, Nara Leao, Os Mutantes가 "Tropicalia ou Panis et Circencis"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tropicalismo4)는 bossa nova 영향을 부인할 수 없으며 folk-rock과 art-rock의 비트,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 시적인 가사, 재즈에 영향을 받은 불협화음등이 뒤섞인 음악이다. folk 음악에 일렉트릭 사운드를 도입한 Dylan이 기존의 팬들에게 엄청난 야유를 받았듯이 이 음악운동은 전통적인 음악을 선호하는 브라질인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그 반대편에 당시의 idol 스타이던 Chico Buarque가 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열리고 새로운 표현수단을 갈구하던 새로운 세대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게 되며 Gil과 Veloso는 그 시대의 icon이 된다.
1964년부터 군부에 의해 통치가 시작된 브라질에서 군부는 정치적 색채를 분명히 드러나는 그들의 음악을 경계하게 되며 tropicalista의 공연과 음반녹음에 제제를 가하게 된다. 군부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에게 구금은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으며, Veloso와 Gil은 요주의 대상이었다.
두 사람 다 "반정부행위"로 두 달간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네 달간 가금연금을 당했다. 1968년 도전적인 공연을 가진 직후 런던으로 망명을 가게되며 다른 tropicalismo 뮤지션과 곡을 만들며 보내게 되며 1972년까지 머물게 된다.
이 곳에서 "London London" 과 "Como Dois e Dois"같은 곡을 쓰게 된다.
브라질로 돌아온 그는 순회공연을 다니게 되고, 음반제작자로 일하게된다.
그가 브라질로 돌아왔을 때 반정부성향의 좌파사람들은 그를 반정부의 icon으로 만들려고 준비했다 한다.5)
하지만 그가 귀국 직후 가진 공연에서 Veloso는 Carmen Mirada와 같은 손동작을 선보이고 춤을 추며 좌파와 우파 모드들 경악시켰다고 한다.
1972년 그가 녹음한 "Araca Azul"은 최악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한다.
1976년, Caetano는 Gil, Gal, Bethania와 함께 Doces Barbaros라는 그룹을 결성하게 되며, 음반을 제작하며 순회공연을 하게된다.
80년대에는 Veloso는 브라질뿐만 아니라 Africa, Paris, Israel 등지에서 공연을 하여서 그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알려줬으며, 그는 단순한 cult 이미지보다는 브라질음악의 중심부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곡들을 녹음한다.
그는 "Outras Palavras"(1981), "Cores, Nomes"(1982), "Uns"(1983) "Velo"(1984) 같은 앨범을 발표하고 1983년에는 브라질을 방문한 Mick Jagger를 그가 인터뷰하기도 하였다.
1983년 41살이던 그는 New York의 Public Theater에서 3일 동안 공연을 하게 되는데 표는 매진되었으며 New York Times의 음악 평론가인 Robert Palmer가 그의 공연에 대하여 극찬을 하며 기고했다고 한다.
Veloso의 음반이 거의 미국에서 찾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씩 인기를 얻고 있었다. Palmer외의 Robert Christgau 같은 평론가들도 Veloso의 음악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하였다.
그는 그의 뛰어난 음악성에 불구하고 브라질이외의 지역에 그의 인지도가 미미함에 별 관심이 없었으며-물론, 그가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뒤에도- 미국인의 취향에 맞도록 그의 음악 경향을 바꾸지 않았다.
물론 그가 영어로 노래하긴 하지만 그것은 판을 많이 팔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그가 그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그의 음악을 아끼는 트렌디한 New York뮤지션-원래는 브라질인 이었지만 미국으로 와서 음악활동을 하여 인기를 얻은-과 교류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시류에 편승하지도 않았다.
1989년 55살의 Veloso는 노쇠함을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그의 앨범 Estrangeiro-연인사이인 Arto Lindsay 와 Peter Scherer가 제작했다-는 브라질에서 만들지 않고 미국에서 모든 과정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는 미국에서의 그의 위치를 말해주는 전환점이 되었고 그와 Gil의 앨범 Tropicalia 2가 출시되게된다.
이 앨범은 Veloso의 재능이 전혀 줄지 않았음을 보여주는-물론 Gilberto Gil도-앨범이다. 그는 그 이후로 Fina Estampa, Circulado, Circulado Vivo-이 앨범에서 는 Michael Jackson의 "Black and White" 와 Dylan의 "Jokerman"을 부른다-을 불렀고 한결같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1997년 여름 Veloso는 미국순회공연을 시작하게 된다.
2년 후 1999년, 그가 브라질에서 녹음한 1998년 앨범 Livro를 미국에 내놓게 되는데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2000년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Federico Fellini와 그의 부인이자 배우인 Giulietta Massina에게 바치는 Federico E Giulietta앨범을 발표하게 된다. Bossa de Caetano 앨범은 2000년대 중반에 출시되었으며, 그 해 첫 번째 Latin Grammy Awards에서 Livro 앨범으로 the Best MPB앨범을 수상하였다.
2001년 봄에 Veloso는 아프리카 리듬이 흠뻑 묻어나는 Noites Do Norte앨범을 녹음하였다.
1) "Opiniao"공연은 엄청난 성공을 거둔 역사적인 공연이었으며 Nara Leao, Ze Keti, Joao Do Vale 같은 뮤지션들이 출연했으며 urban favela samba를 대중에게 알린 공연이었다. 하지만 이 공연으로 그들은 많은 경제적 이득을 보았고 가난한 빈민을 위한 samba를 외치던 그들은 좋은 집과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도덕성에 타격을 받았으며 대중으로부터 외면받게 된다.
2) 이 Festival에서 우승은 Edu Lobo가 "Ponteio"라는 곡으로 한다.
3) 당시의 Festival은 축구 경기와 비슷한 이벤트였다.
Festival이 열리는 순간에 도로는 한산할 정도였으며, 관중들은 축구팬과 마찬가지로 싫어하는 가수에게는 야유를 보내며, 좋아하는 가수에게 박수로 열광하곤 했다.
당시의 Festival은 단순히 노래의 경연장이 아니라 노래의 가사와 멜로디에 대한 설명, 또 토론 곁들어져 대부분 군부독재의 시대상황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오곤 하였다.
4) 이 운동은 단순히 음악사조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Tropicalia라는 단어는 Helio Oiticica의 예술 작품에서 따왔으며, 1928년 San Paulo의 시인인 Oswald de Andrare이 주창한 예술운동인데 1967년 Caetano, Gil, Ze 등의 음악인들이 모티브를 제공받았으며 "상상력으로 힘"과"미학적 편견을 최소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게 된다.
5) Chico Buarque는 Veloso와 달리 망명하기 전에는 반정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으나 브라질로 귀국한 후 반정부적인 앨범과 공연을 계속 하게 된다.
Chico의 1972년 귀국후에 만든 앨범 "Construcao"를 보면 망명전 후의 변화를 쉽게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