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지 터너'(Page Turner. 넘순이와 넘돌이)
저는 연주자(演奏자) 옆에 항상 서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연주자가 열심히 연주할 때 악보(樂譜)를 넘겨주는 일을 합니다.
저의 이름은 '페이지 터너'(Page Turner) 입니다. 흔하게 들어본 이름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세계에서는 다 알고 있는 이름입니다. 저의 이름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페이지 터너’입니다. '테너'(tenor)가 아닙니다. '터너'입니다.
저는 최대한 관객(觀客)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검은색 옷만 입습니다. 제가 연주자 곁에 설 때는 가락지도 빼야 합니다. 귀걸이도 목걸이도 빼야 합니다. 화장(化粧)도 진하게 하면 않됩니다.
얼굴이 잘생기거나 화려(華麗)하게 생기면 연주자들이 싫어합니다. 연주자나 연주 대신 주목(注目)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체격이 작거나 인상이 흐릿한 사람을 선호(選好)하기도 합니다. 저는 있어도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투명인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저의 존재를 최대한 감춰야 합니다.
제가 감기에 걸려 기침을 자주 하게되면 아무리 이 일에 재능이 탁월할지라도 그 때에는 이 일을 할수 없습니다. 제가 연주자 옆에서 <콜록 콜록>하게되면 연주자가 신경을 쓰게되고 관객들은 연주자와 연주보다는 저의 기침 소리에 신경이 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주자를 신경쓰게하는 것이라면, 심지어 헛 기침 한번도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가 바보가 되면 않됩니다. 피아니스트가 건반 위에서 춤을 출 때 저는 피아니스트가 보고 연주하는 악보를 저도 볼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어디를 연주하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에게 <지금 어디를 연주하고 있습니까?> 하고 묻지 못 할 뿐만 아니라 물어서도 않됩니다.
악보를 볼줄 아는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손이 아주 잽싸야 합니다. 더듬 거리거나, 머뭇거리거나, 악보를 떨어뜨리면, '아니 아니' 됩니다. 그것은 연주자에게 치명적(致命的)인 것입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아니됩니다. 악보를 넘겨야할, 그 찰라를 정확하게 잡아내야 합니다. 한 박자 빨라도 않되고, 한 박자 늦게 악보를 넘겨도 않됩니다.
연주자는 소리를 내야 하지만 전 소리를 내면 안 됩니다. 악보 넘기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손목의 스냅(snap)을 이용해 한 번에 넘기는 것이 가장 기술(?)이 좋은 것입니다.
저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대게 음악대학이나 음악대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입니다. 외국에서는 이 일만 하는 전문가가 있습니다. 보통 한 차례 공연에서 십여만원은 받습니다.
음악인들은 남자인 저에게는 '넘돌이'라고 부리고, 여자인 경우에는 ‘넘순이’라고 부릅니다. ‘넘기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페이지 터너’ 라는 정식 명칭이 있습니다.
저는 피아니스트의 연주회에 자주 등장합니다. 바이올린에 비해 피아노는 음표와 악보 자체가 많아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는 무대에 오르면 지켜야 할 것이 많습니다. 연주자보다 늦게 입장하고, 늦게 퇴장해야만 합니다. 연주가 끝나고 박수가 나올 땐 가만히 의자에 앉아 있거나, 아니면 피아노 뒤로 숨는 듯 가야 합니다.
연주자의 왼쪽 뒤편에 앉아 있다가 연주가 시작되면 본격적인 일이 시작됩니다. 악보를 넘길 때는 공식이 있습니다. 왼손으로 악보의 오른쪽 위 모서리를 잡고 넘겨야 합니다. 오른손을 사용하면 연주자의 손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현대음악이나 도돌이표가 많은 악보가 어렵습니다. 가장 만나기 싫은 곡이 '라벨'의 피아노 트리오(Ravel, Piano Trio)는 피하고 싶은 악보 중 하나라고 이 일을 해본 사람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말합니다.
시벨리우스(Jean Sibelius)의 5중주는 작으만치 악보가 '142쪽'에 달합니다. 그것을 연주할때는 71번이나 일어서야 하기 때문에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무릎 관절이 아프거나, 허리 디스크가 있는 사람에게는 하라해도 못합니다. 아주 사람을 녹초로 만들 정도로 체력적인 어려움도 있습니다.
일어나서는 않될 일이지만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숱한 실수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악보를 넘기다 악보 전체가 피아노 위로 쏟아져 내려 연주가 중단됐다> <악보를 실수로 2장을 넘겨 연주자가 급하게 다시 악보를 넘겼다> <악보를 빨리 넘기려 하다가 연주자의 연주하는 손을 쳤다> <의자에 앉으려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어 연주자가 놀라 일으켜 세워줬다>등 차마 웃을 수 없는 실수담도 다양합니다.
제가 이 일을 아무리 잘마쳐도 저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 한번의 박수도 저를 위해 쳐주지는 않습니다. 청중은 제가 있었는지도 모를 수도 있습니다. 연주자와 비숫한 자리에서 비슷한 시간 만큼 무대를 지켰어도 제가 누군이지를 알려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하는 <넘순이><넘돌이>일은 잘해야 본전이지만 작은 실수라도 나오게되면 연주 자체를 망칠 수 있습니다. 그랬어 <넘순이><넘돌이>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연주자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수 있으며, 연주를 가장 가까이서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점은 너무 좋습니다. 세계를 넘나드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넘돌이 넘순이 보다 더 가까이에서 연주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아주 듣기 좋아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악보 넘어가는 소리도 연주회의 일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힘이되는 것은, 연주 후에 연주자의 격려 한마디에 저의 긴장은 다 사라집니다.
저는 우리 신앙(信仰)도 주님 앞에서는 <넘순이> <넘돌이>가 되어야 한다라고 이 일을 하면서 늘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주(主) 예수님은 연주자이시고 나는 <넘순이>로 <넘돌이>로 살아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믿음의 대선배 중에 사도 바울은 그렇게 사신분인 것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7절에서 9절까지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는 고백에서 바울은 자기가 그 동안 자랑으로 삼았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버렸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마치 제가 연주자 곁에 설 때, 금반지도 목걸이도 다 빼버리고 서게되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 대신에 검은 옷으로 나를 감추듯이 예수님 앞에서 바울 사도는 그렇게 살다가 간 분이라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바울 사도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하였던 것은 연주자 옆에서 나를 감추고 오직 연주자만을 생각하고 배려하려는 <넘순이><넘돌이>와 너무 닮은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제 저는 예수님을 위한 <넘순이><넘돌이>로 살고 싶습니다.
“ 구원의 연주자이신 예수님, 주님의 연주를 곁에서 지켜보며 제가 할 수 있는 받은 달란트 대로 주를 위해 살기를 원합니다. 항상 연주자 되시는 주님 곁에서 살면서 몸을 바쳐 살기를 소원합니다.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것이나, 칭찬이나, 인기나 명성을 생각하지 않으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으로부터 칭찬은 받고 싶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칭찬만을 기다리겠습니다.
주님이 앞서시면 저는 항상 뒤에서 따라가겠습니다. 이 고백이 종의 사람에서 이루어지도록 능력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