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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음력 12월)
음력 12월 30일경
중요무형 문화재 39(1971)
섣달그믐의 나례(儺禮) 또는 궁중이나 관아의 의례에서 처용(處容)의 가면을 쓰고 잡귀를 쫓아내는 벽사적인 춤. 1971년 1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어 현재는 국립국악원에서 전승되고 있으며, 해마다 처용문화제(處容文化祭)에서 공연되고 있다.
처용무(處容舞)의 유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편(紀異篇)」2에 나오는 신라 헌강왕(憲康王) 때의 처용설화(處容說話)에서 출발한다. 신라시대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밤놀이에 취해 늦게 귀가하여 아내를 범한 역신을 쫓아내는 축귀의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처용은 당시 왕을 모시는 국무(國巫)의 성격이 강하며, 이때의 처용무는 무당이 베푸는 굿 의식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민간에서는 처용의 특별한 능력을 문신(門神)으로 받아들여 집집마다 그의 화상(畵像)을 문에 걸어두고 잡귀를 쫓기도 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처용무는 궁중을 비롯한 상층의 무용으로 정착되었다. 처용무는 주로 섣달그믐날 잡귀를 쫓는 나례의식에서 행해졌으며, 그 외에 산대잡희(山臺雜戱), 각종 연회, 중국 사신 접대, 정조(正朝)의 궁중다례 때에도 연희되었다. 처용은 중국 종규(鐘馗)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는 설도 전한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의하면 섣달그믐날 붉은색 옷을 입은 수십 명의 동자로 이루어진 진자(侲子)들의 축귀의식무(逐鬼儀式舞)가 끝난 뒤에 처용무를 추었다. 이것은 전도(前度)와 후도(後度)로 나뉘는데, 전도에서는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만 추고, 후도에서는 처용무에 이어 학무(鶴舞), 연화대, 불가(佛歌)인 미타찬(彌陀讚), 본사찬(本師讚), 관음찬(觀音讚)에 의한 불교적 춤이 이어진다.
고려 말기의 처용무는 종교 의례로서 연말의 나례에 연희되었지만, 점차 오락적인 성격의 나희에서 행해졌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칠언시(七言詩) ‘구나행(驅儺行)’에는 역귀 쫓는 의식 다음에 처용무를 비롯한 가면희, 인형극, 줄타기, 마술, 1인극 같은 각종 산악잡희(散樂雜戱)가 포함되어 오락성이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려사(高麗史)』에 충혜왕(忠惠王), 우왕(禑王), 신하들이 직접 처용무를 추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궁중이나 상층의 연회 때 처용무가 하나의 여흥으로 추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연산군이 처용무를 풍두무(豐頭舞)라 명칭을 바꾸고 직접 추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조선시대에 오면 처용무를 구분해서 기록하기도 했다. 『중종실록(中宗實錄)』 중종(中宗) 19년(1524) 12월 10일조에 처용을 양재처용(禳災處容)과 관처용(觀處容)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정조다례(正朝茶禮)에서 양재처용을 반드시 실시하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양재처용은 축귀적 의식무의 성격을 지닌 춤이며, 관처용은 단순히 보고 즐기는 춤으로 구분되고, 이 중에 양재처용의 비중이 더 컸음을 알 수 있다. 처용무는 궁중무용으로 전승되다가 1971년 1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어 체계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처용무는 원래 검은 탈을 쓰고 1인이 추던 것이었으나, 조선시대 세종 때에 와서 오방처용(五方處容)으로 바뀌었다. 신라시대 불교에서 나타나는 오방신(五方神)과 고려시대에 중국 송나라의 오방춤의 유입에 의해 처용무도 오방처용무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처용무는 상층의 의식무나 연희로 전승되었으므로 기층 집단의 탈춤인 지역 가면극에는 전승되지 않았다. 현존 가면극에는 축귀의식무로서 오방신장무나 사상좌무, 사자춤이 처용무를 대신하고 있다.
한편 처용 탈은 원래 검정색이며, 저포(苧布, 모시)나 칠포(漆布, 옻) 껍질 또는 유자나무로 만든다. 탈은 가로 30센티미터, 세로 45센티미터 정도로 크며, 긴 콧수염과 약간의 턱수염이 있다. 『악학궤범』에 나오는 처용탈은 턱이 각지고, 코가 큰 다소 이색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탈 위에 대나무로 망을 짜서 만든 사모(紗帽)를 쓴다. 사모를 쓴 머리 좌우에 목단화(牧丹花)를 꽂고, 가운데에는 복숭아 세 개와 복숭아나무 가지로 장식한다. 여기서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며, 복숭아나무 가지는 잡귀를 쫓는 벽사적인 성격, 복숭아는 벽사와 신성성을 상징한다. 귀에는 주석 귀거리와 납구슬을 단다. 옷은 청, 백, 홍, 흑, 황 비단의 오방색(五方色)으로 만든다. 동방(東方)은 청색, 서방(西方)은 백색, 남방(南方)은 홍색, 북방(北方)은 흑색, 중앙(中央)은 황색의 비단으로 되어 있다. 치마[裳]는 황색 비단으로 만들며, 바지[裙]는 동과 북은 홍색, 서와 남은 흑색, 중앙은 남색 비단으로 만든다. 천의(天衣)는 목에 감은 상태에서 겉옷 위에 걸치는데, 녹색비단에 덩굴꽃[蔓花]을 그리며, 안에는 홍색 명주를 사용한다. 한삼은 긴 백색 비단이며, 허리의 대는 혹색 가죽띠, 신발은 흰 가죽신[白皮]에 끈 단 것을 착용한다.
춤은 5인이 청, 백, 홍, 흑, 황의 순서로 등장하며, 이때 반주는 수제천(壽齊天)이다. 입장해서 좌로 돌아 북향한 다음 춤이 시작된다. 이어 처용가(處容歌)를 부르고 다양한 동작의 춤이 이어진다. 기본적인 준비 동작은 손등이 위로 가게 살짝 쥐고, 양 손을 허리에 대는 동작이다. 대무할 경우에는 대체로 청, 백, 홍, 흑이 하나이고, 황색은 별도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서거나 도는 방향이 일정하지 않으며, 수시로 움직임이 바뀐다. 마주 보고 대무하거나 서로 등을 지는 경우도 있고, 색깔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나뉘기도 한다.
춤 동작은 무릎을 구부렸다 펴는 동작, 발과 다리를 이용해 좌우로 방향을 트는 동작, 빙빙 도는 동작, 앞으로 세 발 나아갔다가 뒤로 물러서는 동작, 허리를 구부렸다 펴는 동작, 가슴을 웅크렸다가 하늘을 향해 활개를 펴는 동작, 양 손을 앞에서 위로 또는 좌우로 올렸다가 뿌리는 동작, 한 손을 들어 어깨 위에서 뿌리는 동작, 손을 반대 방향의 어깨에 대는 동작이 있다. 그리고 앞의 동작을 상호 결합하며 다리와 발, 허리, 손동작에 따라 다양한 춤동작을 만들어내며, 방향의 전환과 대무 방식에 따라 여러 동작이 나타난다. 음악은 수제천, 향당교주(鄕唐交奏), 영산회상(靈山會相)의 세령산(細靈山)과 삼현환입(三絃還入)으로 이루어진다.
출연 인원은 『악학궤범』에는 처용 5인, 의물 6인, 악사 40인이 등장한다고 하여 대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처용 5인에 악사로 집박 1인, 피리 2인, 대금·해금·장고·좌고가 각각 1인, 총 7인으로 구성되어 예전에 비해 규모가 간소화되었다.
현재 처용을 중심으로 한 처용문화제가 울산 지역에서 해마다 10월 초에 열리고 있다. 울산광역시 남구 성암동 개운포(開雲浦) 앞바다의 처용암(處容岩)과 처용비(處容碑)에서는 처용제사를 지내며, 처용설화를 바탕으로 처용의 개운포 입항과 헌강왕과 화랑과의 만남, 역신을 쫓아내는 처용무를 보여준다. 그리고 헌강왕과 왕비 선발대회, 처용 퍼레이드와 가면페스티벌, 국제민속춤페스티벌, 전국탈춤경연대회, 마두희(馬頭戱), 각종 공연과 전시 행사를 하고 있다.
처용무는 신라시대에는 원래 무속의 굿에서 탈을 쓰고 춤추는 축귀적인 의식무였다. 수신(水神)과 용(龍) 신앙을 바탕으로 하면서 부정을 없애려는 원초적인 정화의식의 탈춤 형태를 지니고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 점차 궁중의식무로 자리를 잡아 연말의 나례나 상층의 의례 때에 추어지면서 기층 집단의 의식무가 상층의 의식무로 자리 잡게 되는데, 춤은 독립적이기보다는 주술종교적인 종합 가무극의 형태였다. 처용무는 붉은 옷을 입은 진자들의 춤, 십이지신의 춤, 방상씨 춤, 그 외에 학춤, 연화대, 불가(佛歌)의 춤과도 서로 결합되어 있다. 이것이 고려 말기에 점차 상층의 연회에서 여흥으로 춤을 추게 되고, 나례 때에는 산악백희가 결합되면서 점차 오락적인 가면무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高麗史, 牧隱集, 三國遺事, 樂學軌範, 慵齋叢話, 中宗實錄
張師勛. 韓國傳統舞踊硏究. 一志社, 1997
이흥구. 처용무. 화산문화, 2000
鄭亨鎬. 韓國 儺禮의 假面劇史的 意味 考察,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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