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란(AD66년 6월)
세계사에서 힘의 균형을 깨뜨리거나 인류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는 못 했지만 유대
人과 기독교라는 종교에서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지금도 그들은 이 반란과 전투를 자주
인용하고 있다. 일은 단순한 데서 시작되었다. 당시 유대 담당 장관인 ‘플로루스’는 예루살렘
의 속주세가 미납되자 예루살렘의 보물창고에서 해당 액수를(금화) 몰수했다. 서민들 560명의
1년치 수입 정도라고 한다. 장관은 공적 행위로 생각했지만 유대인은 성스러운 장소에서 그런
짓을 행한 장관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폭동이 일어 났고 장관은 강경책을 썼다.
著者에 의하면 유대인은 한 번 일을 벌이면 끝장을 본다고 했다. 바짝 가문 봄 들판에 불이
붙은 격이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은 두 파로 갈라져 있었다.
• 급진 파 : “시카리오” + 하층민
• 온건 파 : 예루살렘의 상층부
언제나 그렇듯이 급진파가 맹렬히 뛰어나가자 어쩔 방도가 없었다. 사태를 가볍 게 생각한 몇
안 되는 로마군 수비대는 학살당했고 온건파 유대 大祭司長도 죽었 다. 폭동은 들불 같이
번졌고 결국은 시리아 속주 총독이 나서야 했다. 1개 군단 과 “북부 유대”의 왕 “아그리파 2세
”(로마 식 이름 사용)가 파견되었으나 격렬한 유대인들의 반격으로 크게 패했다. 너무 가볍게
생각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초장에 패전을 보고받은 “네로”는 그래도 이때는 밥값을 했다. 病死한 시리아 총독 후임으로
‘무키아누스’를 임명했다. 시리아나 동방 군대는 항상 강적 파르티아를 견제해야 했기 때문에
유대문제는 따로 담당자를 보냈다. 후일의 황제가 될 ‘베스파시아누스’ 이었다. 북한에서도
최 고위 장성들이나 고위 공무원들이 김정은 같은 자가 얘기할 때 졸다가 목숨이 위태로워지
는 일이 발생하는데 ‘베스파시아누스’도 네로가 自作詩를 읊고 노래할 때 졸다가 걸린 적이
있어서 다들 출세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로’는 과감히 그를 기용했다.
● 유대인 요세푸스
로마가 융성해서 屬州를 관리하는 동안 많은 나라와 민족들이 로마에 귀의하거나 同和되었는
데 종교나 민족의 특성상 유대인은 로마化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배신자”의 딱지를 등에 붙
이고 로마化가 된 몇몇 유력한 인물들이 있다. 역사가 이며 정치가인 ‘요세푸스’가 그 중 하나
다.
요세푸스 플라비우스(Flavius Josephus) - 간단히 설명하면 “유대전쟁”이라는 책자를 쓴 사람
이다. 처음에는 유대軍 지휘관으로 싸워서 상당한 공로를 세우고 로마군 견제에 성공했으나
결국 패하고 로마 에 귀의해서 활동한 사람이다. AD37년생으로 ‘네로’와 동갑이다. 아버지-
제사장급, 어머니-왕가 혈연 즉, 상류층이다. 10대 시절 로마에 와서 ‘네로’의 ‘포파이아’ 와
친교를 쌓기도 했다. 여기서 귀국하자 마자(AD66년) 로마 軍에 대항하는 유대 軍 의 최 일선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었다. 여러 경험과 지식으로 유대 왕국 바깥의 현실을 알고 동포의 파멸
을 기록한 “유대 戰爭記”를 썼다.
※ 참고로 유대인의 派를 살펴보자.
- 바리새 派(Pharisees)
분리주의자, 배타적 신앙의 뜻. 율법을 세심하게 지켜 속세와 이방인에게서 분리해 나온다는
뜻. 선민(選民)/경건(敬虔)主義 운동
- 사두개 派(Sadduces)
다수의 제사장으로 구성. 大祭司長이 중심점. 귀족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치집단. 성문화된
율법(모세 5경)만 인정. 현실주의자라고 비난 받음.
- 엣세네派
공동체 생활을 하던 유대교의 종파(宗派)(일명 쿰란 공동체). 금욕생활을 하던 곳이 死海근처
쿰란 동굴지역. 終末論 예견. 사회와 격리 의도. “엣세네”는 “경건”, “치유자”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 로마 군에 의해 멸절된 후 1947년 死海근처(쿰란 지역) 동굴에서 구약
원본문서가 많이 발견됨(1세기 전후 작성). 소위 “사해문서(死海文書)”가 이것이다.
● 유대戰爭
AD67년 5월 대단히 화가 난 로마는 名將 ‘코르불로’가 정예화시킨 5,10,15의 3개 軍團 과
보조병을 진격시켰다. 이 전투의 총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는 여러 황제를 거치며 自手成家
한 보통집안 출신이다. 영재는 아니나 착실한 타입이다.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를 경험하고
AD51년에 집정관이 되었다.
6만명의 로마 戰力과 ‘요세푸스’는 맞서 싸웠다. 그의 奇策으로 로마 군이 47일 간 묶여있었으
나 결국 갈릴리 사령관 ‘요세푸스’는 패하고(전사자 4만명) 死海의 동굴로 도망 갔다. 거기서
“엣세네 派”를 만났다. 그들은 항복하지 않고 심지를 뽑아 한 사람씩 죽이는 방식을 택했는데
‘요세푸스’와 1명만 남고 옥쇄했다. 그는 애초 죽을 생각이 없었다. 포로가 된 그는 ‘베스파시
아누스’의 아들 티투스(Titus) 와 마주하면서 친구가 되었다.
● 예언
‘요세푸스’는 적의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를 만났고 그가 ‘네로’ 이후의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단명한 3명의 황제가 중간에 끼어 있었으니 예언이 맞지 않은 것이지만 결과는
같았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된 뒤 자기네 氏族 이름인 ‘플라비우스’를 그에게 하사했다
. 그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라는 이름으로 로마에서 저작활동을 했다.
유대인들은 ‘요세푸스’를 배신자로 낙인 찍었지만 이 배신자의 “유대 戰爭記”가 없이는 이
전쟁의 顚末이나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옥쇄(玉碎)는 후세를 감동 시킬 수는 있어도 자기
만족에 불과하다. ‘요세푸스’는 그 성향을 거부한 것이다.
“마사다”라는 낱말은 유대인, 기독교, 유대교에게 있어서는 “聖스러운 항전이고 위대한 정신
적 승리”라고 말한다.
※ 우리 조상들이 남한산성에서 처절하게 패하고 굴욕을 당할 때 “척화파 (斥和派)”는 전쟁을
주장했었다. 마음이야 그럴 수 있었지만 통치세력의 무능은 되짚어보지 못하고 실현하지도 못
할 기개와 감정 특히 朝鮮의 소중화(小中華)를 외치며 청나라 만주족을 야만인이라고 폄하하
면서 국제정세도 살피지 못하는 감정만 앞세운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할 때
그것을 대단한 기개와 아울러 야만인을 물리쳐야 할 당연한 일이라고 배웠다는 사실이다.
▶ 전쟁중단
견실한 ‘베스파시아누스’의 작전과 유대인 내분을 이용해 서서히 조여가면서 예루살렘을 포위
한 AD68년 여름 전쟁이 중단되었다. ‘네로’황제가 죽었기 때문이다. 결국 본국의 시끄러운
정세 때문에 1년씩이나 휴전이 성립되었다.
▶ 전쟁재개
AD69년 7월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추대되고 전쟁 재개가 결정되었다. (※ 그냥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이로부터 1900년 후인 1969년 우리는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 문제로 데모를
하다가 여름방학을 6월부터 4개월씩이나 누리는 등록금 허비의 시기를 보냈다. 대학 3학년때
다.)
사령관 겸 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에 대기하고 아들인 ‘티투스’가 예루살렘 공략을
책임졌다. 30살의 ‘티투스’옆에는 유대인이 많았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명장 ‘코르불로’
휘하에 있었던 노장이고 北유대 왕가의 ‘아그리파 2세’, 역사가인 ‘요세푸스’ 등이 있었다.
황제로 로마에 입성하고 아들 ‘티투스’를 명확한 후계자로 삼기 위해 유대전쟁을 빨리 끝내야
했다. AD70년 유대 측은 강경파의 목소리만 커졌다. 공방전 속에 항복하고자 하는 유대인은
급진파들이 죽였다. “자유와 神權政治 없는 곳에는 죽음 뿐”이라는 주장 아래 그런 사태가
벌어졌다.
● 예루살렘 함락
5개월의 격전 끝에 AD70년 9월 20일 저항은 끝났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사상 자가 60만명이
라고 했으나 ‘요세푸스’는 사망 110만명, 포로 97,000명 이었다고 했다. “예루살렘”이 함락될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말을 믿고 유대 전역에서 “예루 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이 칼 맞아 죽은
것 보다 돌림병이나 굶어서 죽은 경우가 훨씬 많았다고 한다.
워낙 유대인들이 독하게 굴고 항복권유를 무시했기 때문에 로마의 규율대로 잡힌 사람들은
이집트에 노역, 각 속주에 노예 또는 검투사로 팔리거나 심하면 영화에 나오듯이 경기장에서
야수에게 물려 죽고는 했다. 16세 이하는 병사에게 분배 되고 그들은 노예로 팔렸을 것이다.
누가 잘못했다고 할 일은 못되지만 이런 원한이 쌓이다 보니 西方의 종교에 관한 얘기에서
로마제국은 끝까지 “악마와 같은 존재”로 표현되고 있는 것 같다.
로마의 후속조치는 다음과 같다.
- 예루살렘 大神殿을 불태우고 파괴
- 유대인의 兵役 대신 “유대인 세”를 받았다(어차피 입대하지 않으니까).
- 유대인 大祭司長 제도 폐지
- 예루살렘에 로마군(보조병 포함) 1만명 주둔
- 유대종교는 그대로 인정. 직접 반항자만 엄격한 조치
▶마사다(Masada) 요새
※ 이스라엘에 가면(아직 못 가보았음.) 死海 근처에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데 마사다(Masada)
라는 곳이다. 횅한 황야에 산 꼭대기 부분을 툭 잘라낸 것 같은 산 하나가 있다. 요새는 약
440m 정도의 높이고 물, 식량 등이 갖춰진 강력한 천연요새였다.
예루살렘이 떨어지자 극단주의자 “시카리(Sicari)” 또는 열심당원(Zealots)과 가족 들 960여 명
이 들어가 로마 군에 저항한 곳이다. AD73년 악전고투 끝에 요새가 떨어지자 집에 가서 가족
을 다 죽이고 전투병들은 서로를 죽이고 마지막 남은 자가 요새를 불지르고 자결했다. 로마
군이 발견한 것은 936구의 시체와 살아 남은 다섯 명의 아이들과 지하 동굴에 있던 두 여인
뿐이었다고 한다.
혹자는 유대인들의 저항정신과 민족적 자긍심과 단결을 상징한다고 표현하지만 이의 해석은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2001년 UNESCO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多神敎를 가지고 속주
관계지만 공존을 주장하는 로마와 이를 전혀 받아들일 생각 이 없는 신권정치–唯一神을 주장
하는 유대인 집단의 충돌 결과였다.
* 로마군은 공격이 여의치 않자 오른 쪽에 경사진 토담을 쌓아 함락시켰다. 이는 안시성에서
당태종이 시도했다는 방법과 유사하다.
그 이후 유대인들에 대한 처결은 AD130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행했다. 자꾸 뒤에서 반란
을 획책하는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고 아예 거주를 금지 시켰다. 황제의 강경책으로
실질적인 “디아스포라(Diaspora)/離散”가 발생되었다. 하지만 유대교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1998년 “포로 로마노” 남쪽의 “티투스 개선문”앞에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건국 50주년”을
기리는 행사를 벌였다. 직접 상관없는 곳에서 자기 들이 질기게 싸워 서 승리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행동이다. 기독교도들도 해마다 순교한 적이 없는 “콜로세움” 앞에서 로마제국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자축하는 교황미사를 올린다고 한다. 어쨌든 로마제국은 없어졌고 유대
교나 기독교는 살아있다.
흥미 있는 것은 같은 뿌리라고 할 기독교는 예루살렘 함락 전부터 다른 방향의 길을 걷게 된
다. 著者는 조금 비판조로 글을 썼다. “로마人 歷史家 ‘타키투스’는 이 전쟁에 대해 서술하면서
유대인의 역사를 ‘모세’까지 거슬러 올라가 얘기했다. 하지만 유대인은 역사책에서 자기 민족
의 역사만 서술하고 敵인 로마에 대한 서술을 찾아볼 수 없다.
첫댓글 독하디 독한 유다 민족, 질기고도 질긴 그들의 생명력에 감탄할 따름이다. 2018년 말에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있는 리조트에서 일주일 정도 묵은 적이 있었는데 1905년 우리가 머물던 리조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도착하여 주변 22개 에네켄(=용설란) 농장에서 계약 노동자로 일을 시작한, 나라 잘못 만나 고생생한 우리 조상들을 생각했다. 일본인 상인에게 속아 사실상 노예로 팔려 와서 제대로 된 음식도 먹지 못하고 혹사당하던 그들은 4년간의 의무 노동계약이 끝나고도 일본의 강점으로 돌아갈 조국이 없어지자 유카탄반도와 티후아나 등 멕시코 전역으로 이주하고, 일부는 1921년 쿠바로 건너갔다. 유카탄반도의 메리다 시와 주변 지역에는 3∼5세대 한인 후손 7,000여 명이 거주 중이라고 한다. 혼혈 결혼으로 외모도 토착민 처럼 변하고,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아직도 아버지 나라를 잊지 않으려 한다는 그들을 생각하며 지도자 복은 지지리도 없지만, 유다인 못지 않게 독하고, 질기고, 영특한 우리 민족을 생각해 본다.
기독교는 개신교, 천주교(가톨릭),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네스토리우스파 교회 등 예수를 메시아라 믿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그리스도교(크리스트교)라 부르기도 한다. 기독교의 '기독'은 그리스도의 한자 음역 표현인 기리사독(基利斯督)에서 유래하였다.그러므로 기독교와 그리스도교(크리스트교)는 명백한 동의어다. 한편,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곧 개신교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와 기독교를 동일하게 여기며, 천주교(가톨릭)는 별도의 종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공통분모 아래에서 천주교(가톨릭)와 개신교, 정교회 등의 종파가 나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개신교이며 천주교는 기독교가 아니라는 인식은 잘못되었다.(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집 사람에게 끌려다니는 교회 신자 ㅎㅎ. 다른 나라도 그렇겠지만 우리나라 교회(특히 그리스도교=개신교=기독교)에서는 이런 기초적인 교육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교회의 기본적인 개념이나 역사를 알려고 하지 않고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나도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서 아! 그렇게 넓은 의미의 기독교=그리스도교가 발전되면서 가톨릭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거기서 또 갈려서 로마, 카르타고, 그리스 등의 주교 -- 교황 등의 복잡한 관계가 설정된 것을 배웠지... 그러다가 나중 가톨릭의 폐단을 깨고자 노력한 결과가 지금의 그리스도 교 또는 개신교 또는 기독교가 되었다는 것을 배웠지. 한글로 표현된 기독교는 이 책에 보면 원래의 초기 가톨릭이라는 낱말이 생기기 전의 그리스도 교회를 통틀어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도 되는 것이겠지? ㅎㅎㅎ알고나면 재미있는 일. 대부분 개신교 신자들은 구약과 신약으로만 구분해서 이해하고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창시자(?) 또는 조상(?)으로 올라가면 태초의 창세기에서 모세, 아브라함 등이 함께 등장하고 다윗과 솔로몬을 거치면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