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국 첫 한국인 삼장법사 진용스님 *
** 삼매 욕심 놓으니 평화 절로 찾아왔죠 ** 1984년 3월, 진주지역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고 경상대학 불교학생회 회장을 지낸 청년은 동료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강원도 전방으로 끌려갔다.
훈련이라는 미명 아래 자행되는 가혹행위로 숱한 젊은이들이 죽거나 불구가 되어 실려 나가는 부대.
그러나 청년은 “종교를 가진 사람은 군종(오늘날 군법사)으로 빠지는 것만이 살 수 있는 길”이라는 중대장의 충고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목숨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대장은 청년 몰래 군종을 신청했고, 청년은 그렇게 죽음의 문턱에서 출가자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청년은 해인사로 가서 도성 스님을 은사로 ‘진용’이라는 법명을 받고 사미계를 수지했다. 군종 생활을 마치고 한 강원에 입학했으나 교과과정에 비판을 제기하다 1년 만에 중도하차한 스님은 부전생활과 공부를 병행해야 했다. 그러나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경전을 읽어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의문과 답답함이 옹이처럼 단단해지기만 했다.
** 3개월 만에 팔리어 완전 습득 **
그러던 중 남방불교가 부처님의 원음에 가깝다는 얘기를 들은 진용 스님이 찾아간 곳이 팔리불교대학 한국분원.
원전은 범어가 전부인 줄만 알았던 스님에게 팔리어는 새로운 불법의 길을 보여주었다. 1987년 가을, 스님은 초기불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팔리불교대학의 본원이 있는 스리랑카로 향했다.
하지만 스리랑카는 내전 중인데다 대학마저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듣고 태국 춤부리 지방의 위웩 아솜 사원으로 발길을 옮겨야 했다.
그곳에서 막상 명상센터를 다니기 시작했지만 영어만으로는 의사소통에 한계를 느꼈고 팔리어도 진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태국에서 6개월을 보낸 후 진용 스님은 두 번째 스승의 인연을 맺게 됐다. 왓 람쁭 수행처의 주지 아짠 통 스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아짠 통 스님은 마하시 스님의 직계제자로 태국에서 마하시 수행을 널리 알리고 있는 대표적인 스님이었다.
1988년 3월 아짠통 스님은 진용 스님을 보자마자 “어느 정도 시자생활을 하면 팔리어와 태국어를 완벽하게 익힐 수 있다”며 소임과 과제를 부여했다.
이때부터 진용 스님은 새벽 4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사원의 수행 프로그램을 따르는 것은 물론, 취침 시간인 10시 이후에도 팔리어와 태국어로 밤을 하얗게 새웠다. 잠은 길어야 하루 2시간. 그러나 공부가 급하다는 마음에 힘들다는 생각은 올라올 틈도 없었다.
간혹 나태한 마음이 들 때면 군사정권에 의해 전방에서 겪은 죽음의 순간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렇게 치열한 노력 끝에 스님은 3개월 만에 태국어와 팔리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었고, 주위에서는 몇 년에도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며 혀들 내둘렀다.
스님은 태국에서의 정진 중 가장 힘든 일은 수마를 극복하는 일이었다. 언어가 익어가면서 수시로 밀려드는 졸음은 더욱 그를 괴롭혔다.
스님은 한 때 타의에 의해 지옥에 떨어졌지만 이번에는 스스로 지옥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천 길 낭떠러지에 기둥을 세우고 그 곳에 자신을 묶은 채 결과부좌를 하고 정진하기를 숱하게 반복했다. 긴 고통과 굶주림….
스님은 장애란 고통에 자신의 온 몸을 내맡기는 행위로 뛰어넘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지속적인 알아차림의 수행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조절될 수 있음을 확신했다.
** 수마 극복하려 낭떠러지서도 정진 **
이렇게 언어와 수마의 장벽을 극복한 스님은 비구계본을 합송하는 포살법회에 참가했고 마하출라롱컨대학에도 입학해 본격적인 승가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2년 간 선정삼매에 진력한 후에야 삼매에 들고자 하는 욕망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었고 원하는 시간에 삼매에 들고 나오는 조절이 가능해졌다.
태국에서 수행한 지 10년이 되던 해인 1997년, 진용 스님은 마침내 태국 교단에서 최고의 위치에 해당되는 삼장법사 자격을 취득했다.
삼장은 경, 율, 론을 가리키는 말로 원로의원 10명, 행정직 10명 등 20명의 스님이 자격을 철저히 심사한다.
삼장 법사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완벽하게 팔리어를 구해야 하는 것은 물론, 삼장 전체를 달달 외울 수 있어야 한다.
또 얼마나 깊은 삼매에 드는지도 테스트하는데 경전을 근거로 일주일간 육체적, 정신적인 면을 두루 점검할 정도로 대단히 엄격하다.
태국 스님 약 40만 명 중 현존하는 삼장법사는 불과 20명. 우리나라에서도 명예 삼장법사 자격을 가진 스님은 있지만 태국의 정식 삼장법사 심사를 거쳐 자격을 얻은 스님은 진용 스님이 처음이다. 스님은 태국의 승가에서 칭송받는, 유일한 외국인 삼장법사가 된 것이다.
진용 스님은 태국 교단의 존경과 찬사를 뒤로 하고 1998년 말 한국으로 돌아와 은사 도성 스님이 주석하는 태종사를 근본불교 수행도량으로 일구었다.
도성 스님을 비롯한 9명의 스님과 함께 태종사에서 일주일간 움막을 짓고 장좌불와, 일종식, 좌선과 경행을 겸해 24시간 실시했던 용맹정진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진용 스님은 4년 후 한국을 다시 떠나 출가 초기의 목적지였던 스리랑카에서 관월암을 개원했다.
그곳에서 포교와 수행에 전력을 기울이던 중 스님은 “4개월 후 열반할 것”이라는 태국의 은사 아짠 통 스님의 연락을 받고 정확하게 4개월 후 태국으로 갔다.
점심나절에 왓 람쁭 수행처에 도착한 제자를 반갑게 맞이한 아짠 통 스님은 3일간 들지 않았던 공양을 이날 제자들과 함께 했다. 공양 후 아짠 통 스님은 “이제 다 왔네.”라고 말하며 제자들에게 열심히 정진할 것을 당부하고 좌선 상태에서 고요히 열반에 들었다. 2004년 10월 28일. 세수는 83세였다.
평생 수행과 교화의 삶을 살아온 아짠통 스님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진용 스님은 지난 2005년 2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뒤늦게나마 자신을 불법으로 이끌어 준 은사 도성 스님에게 제자의 도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 집중수행 지도…담마스쿨 곧 개설 **
아침, 저녁으로 좌선에 들고 오후 불식을 실천하는 진용 스님의 지도 아래, 태종사 불자들은 팔리어로 조석예불을 봉행하고 대중법회 때면 스님들에게 탁발공양을 올린다.
특히 매주 토요일 위빠사나 집중수행팀을 지도하고 있는 진용 스님은 우안거 기간에는 담마스쿨도 개설해 초기불교와 관련된 교리공부를 병행할 계획이다.
지난 20여 년간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며 정진했던 진용 스님. 스님이 대중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어떤 경지에 이르는데 집착하거나 많이 알려고 하기보다는 단 한 번의 호흡과 단 한 구절의 경전 말씀이라도 정확하고 깊게 이해하려 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 되는 길입니다.”
부산지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2005-06-22/808호>
입력일 : 2005-06-21 10:44 < 법보신문에서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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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용스님 |
아짠 빤냐와로(진용스님) |
1983년 합천 해인사로 출가 |
1987년 태국에서 마하시 스님 직계제자인 아짠통 스님의 수제자(11년동안) |
1994년 마하 쭐라롱콘 대학교 석사졸업 |
1996년 태국에서 최초 외국인으로 삼장법사 취득 |
1997년 태종사 근본불교와 위빳사나 수행 가르침 시작 |
2003년 태종사 주지 |
2007년 붓다의길따라 선원장 http://buddhayana.kr/index.html |
2008년 사단법인)한국 테라와다 불교 대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