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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일 공방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임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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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목표> * 프랑스 혁명의 원인인 구체제의 모순을 이해한다. (1) 신분제: 구체제의 사회구성 (3) 재정위기와 삼부회의 소집 (4) 삼부회의 결렬과 테니스코트 선언 (5) 바스티유의 함락과 대공포 (1) 봉건제 폐지선언과 인권선언
(1) 테르미도르의 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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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개관 동영상>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형제애의 이념을 표방한 시민계급이 중심이 되어 절대주의적인 구체제를 타도했던 전형적인 시민혁명이었다. 프랑스혁명의 근본원인은 교회집단인 제1신분, 귀족인 제2신분, 평민인 제3신분으로 구성된 봉건적인 신분제 내지 절대주의적인 구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평민 중에서도 상인 및 제조업자, 문필가 등의 자유직업인 등으로 이루어진 시민계급 곧 부르주아지는 재력과 교양에도 불구하고 귀족 및 정권으로부터 소외되고, 봉건적 제약으로 많은 불이익을 당했다. 농민은 농노신분으로부터 해방됐지만 봉건적 부담 및 국가에 대한 세금 등으로 많은 불만을 지녔다. 여기에 결정적 위기를 맞은 프랑스재정은 혁명에 이르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권계급에의 과세 및 왕실경비의 삭감을 통해 재정위기를 극복하려던 시도가 귀족과 왕실의 반발로 실패하자, 루이 16세는 신분제의회인 3부회를 소집했다. 3부회에서 표결방식을 둘러싸고 신분간에 충돌이 벌어지자, 제3신분 대표들은 별도로 국민의회를 성립시켰고, 이에 자극 받은 파리의 민중은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해 혁명적 분위기를 지방으로까지 확산했다. 국민의회는 「봉건제의 폐지선언」 및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으로 혁명이념을 제시하여 민중의 지지 및 혁명의 주도권을 확보했으며 “91년 헌법”으로 유산계급에 입각한 입헌군주제를 수립했다. 새로 소집된 입법의회는 국내외의 반혁명움직임에 대항해 92년 4월에 혁명전쟁을 시작했으며, 애국애와 혁명열기에 고무된 민중은 92년 9월 왕권을 정지하고 프랑스 제1공화정을 수립시켰다. 새로 소집된 국민공회에서 중산적 부르주아지 및 소생산자층에 기반했던 자코뱅당은 상층 부르주아지에 기반한 지롱드당과 대립하다가 93년 민중세력을 배경으로 자코뱅 독재를 확립했다. 새로 제정된 “93년 헌법”은 보통선거권, 노동권과 생존권 등을 규정한 민주적 헌법이었으나 평화시까지 그 실시가 보류되었고,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하는 공안위원회는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94년 7월 온건파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테르미도르의 반동’은 로베스피에르를 단두대로 보내고 공포정치를 종식시켰다. 95년 유산계급에 입각하여 수립된 총재정부는 전쟁에 따른 경제난과 좌우파의 압력으로 말미암은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군대에 의존했다. 혁명군 지휘자 나폴레옹은 99년의 쿠데타로 무능한 총재정부를 쓰러뜨리고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유럽대륙을 혁명의 이념으로 제패했던 나폴레옹은 혁명의 계승자라기보다 군사적 정복자였지만, 혁명의 성과를 수용해 프랑스 시민계급 및 재산권, 행정제도를 확립시킴으로써 프랑스사회의 제도적 틀을 이루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와 함께 북아메리카에서도 혁명이 일어났다. 미국이 공화국으로 독립하는 미국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17세기부터 영국의 신대륙 식민활동은 본격화돼, 18세기 초 청교도를 비롯한 이주민은 북아메리카 동부해안에 13개의 영국식민지를 건설했다. 북부에는 자영농업 및 상공업이, 남부에는 노예를 사용하는 농장경영이 행해졌으나, 불평등한 신분제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지 전체를 통해 자유와 자치의 전통이 뿌리내렸다. 그러나 해외식민지경쟁에서 주도권을 확보해 제국체제의 편성을 도모한 영국은 죠지 3세의 즉위(1760) 후 인지세와 차세의 부과 등 중상주의적인 식민정책을 채택했다. 식민지인들은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는 원칙으로 맞섰으며, 이는 1775년의 독립전쟁으로 폭발했다. 식민지대표들은 독립선언을 공포해(1776.7.4) 생명, 자유 및 행복추구의 자연권을 촉구했다. 유럽열강의 경쟁관계를 이용해 독립에 성공한 미국혁명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이고 헌정적이라는 성격을 띠나, 민주주의적인 성격도 가미돼 있다. 그러나 신분제 및 구제도가 부재했던 관계로 사회혁명으로서의 성격은 미약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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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혁명의 진행
(1) 봉건제의 폐지선언과 인권선언
프랑스혁명의 발발에서 민중들이 행한 역할을 살펴보았는데요. 이상과 같이 도시와 농촌에서 벌어진 민중봉기는 국민의회로 하여금 혁명을 진행시키도록 종용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먼저 국민의회의 혁명지도자들은 분명한 혁명이념을 제시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흔히들 프랑스혁명을 부르주아혁명이라고 하는데요. 이것은 국민의회 혁명지도자들의 인적구성이나 그들의 사상적 기반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혁명지도자들은 대부분 부르주아 출신이었습니다. 앞에서 보신대로 부르주아의 직업적 구성은 다양해 상공인, 금융인, 법률가, 언론인, 교사 등의 각종 직종에 종사하고 있었죠. 그런데 여기서 강조할 점은 혁명지도자들 중에서는 전형적인 부르주아보다는 법률가나 문필인 등의 지식인층의 존재가 더욱 두드러졌다는 겁니다. 그러던 중 1789년 8월 프랑스혁명을 자리 매김하는 두 가지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근대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진전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요. 그 하나는 1789년 8월 4일 밤에 이루어진 ‘봉건제의 폐지선언’입니다. 시대착오적인 봉건제의 잔재를 폐지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진정으로 폐지된 것은 농노제에 기반한 상속세나 인신예속 등 형식적인 부담들에 가까웠습니다. 오히려 지대와 물납연공 등을 포함한 실질적인 봉건제의 부담은 농민들의 되사기의 형태를 통해 폐지될 것이 결정됐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국민의회의 혁명작업이 매우 불충분했다는 겁니다. 이는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있는 3신분의 대표들조차 영지의 소유자로서 상당수가 봉건적 특권을 누렸음을 드러낸 것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언은 구체제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질서를 설정했다는 큰 의미를 지닙니다. 농민들은 이에 기반해서 봉건적인 부담들을 거부해 내고, 급기야 봉건제를 종식시키게 됩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문건은 1789년 8월26일에 이루어졌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입니다. 이 문건은 자유, 평등, 국민주권 등 혁명의 원리와 이념이 천명되어 있는 구체제의 사망문서였습니다. 여기에는 자유, 재산, 안전, 압제에 대한 저항 등 당시의 사상적 주류를 이루고 있던 자연권의 이념이 표방되어 있습니다. 이와 함께 법 앞에서의 평등과 3권 분립 등 근대국가를 이루기 위한 기본이념 역시 제시되어 있지요. 이 문건은 근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건의 하나로 혁명이 지향하는 기본 사회의 이념을 밝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겁니다.
(2) 혁명정부의 조치
이와 함께 1789년 11월에는 교회 토지를 국유화하고 그 토지를 부르주아와 농민층에게 매각함으로써 혁명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보다 견고히 했습니다. 이에 따라 성직자들은 독자적인 물적 기반을 상실하고, 국가로부터 급여를 부여받는 공무원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었지요. 게다가 혁명정부는 1790년 7월 12일에 ‘성직자의 시민헌장’을 제정함으로써 성직자들에게 다른 프랑스인들과 마찬가지로 시민임을 고백하는 선서를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혁명정부의 조치는 “비기독교화운동”이라고 하는 격렬한 민중적 차원의 움직임을 자극했습니다. 여기서 많은 카톨릭 교회들이 파괴되고, 많은 성직자들이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혁명정부는 카톨릭교회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종속된 기관으로서 존속시키려 했습니다. 여기에 카톨릭교회의 위상 축소로 말미암아 발생하게 될 일종의 정신적인 공백을 메우려 했습니다. 혁명 지도자들은 상징과 의식을 통하여 혁명의 이상을 프랑스 민중에게 널리 유포하고 또한 프랑스인들에게 통합과 일체감을 부여하고자 했습니다. 이리하여 혁명 축제가 조직되었는데, 이 축제들은 혁명의 전개상황에 따라 그 함의가 달라지고, 다양한 상징물과 의례 등을 출현시켰습니다. 또한 프랑스, 자유, 평등, 공화정, 민중, 투쟁 등을 복합적으로 상징하는 표상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른바 ‘마리안느’라고 하는 여인이지요. 이 여인의 이미지 역시 혁명의 진행상황에 부응하는 함의를 띠면서 나타나게 됩니다. 마리안느의 이미지는 혁명 이후 프랑스 역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의미로 표출됩니다. 동일하게 오늘날의 마리안느는 프랑스 공화정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정착되었지요. (그림12-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7월 혁명을 그린 들라크루아의 그림에 표현된 마리안느)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혁명지도자들이 프랑스 역사에 남긴 문화적 유산에 대해서 어는 정도 인정할 필요도 있는 듯 합니다. 이 외에도 자유를 상징하는 ‘나무심기’ 등의 관습 등이 조직되기도 했습니다. 또 새로운 혁명력의 제정 역시 옛 시간과의 단절을 추구했던 혁명 지도자들의 의지로 파악될 수 있겠습니다.
(3) 입헌군주제의 수립
파리민중의 지지를 확보한 국민의회는 1791년 헌법을 제정하게 됩니다. 1791년 헌법은 권력분립에 입각한 단원제의 입헌군주제로 왕의 존재를 아직은 인정한 헌법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입헌군주제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밖으로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영국이 혁명을 분쇄하려는 위협을 가해왔고, 안에서는 왕을 중심으로 한 반혁명 세력의 준동이 계속됐던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국민의회가 어떻게 혁명을 이루어 나가는지 좀 더 살펴보도록 할까요? 특히 혁명세력과 민중과의 관계에 대해서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4) 혁명전쟁의 발발
혁명정부는 일단 국외의 반혁명세력을 제압함으로써 국내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1792년 4월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함으로써 혁명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혁명전쟁은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프랑스혁명을 분쇄할 요량으로 조직되었던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 대불동맹국들의 반격은 강력했고 귀족들의 망명으로 말미암아 지휘력을 상실한 프랑스군은 패전을 거듭했습니다. 전쟁으로 말미암은 사회불안은 국내외 반혁명세력과 함께 혁명과격파를 자극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국왕은 오스트리아로 망명하려 하다가 국경지대에서 발각되기도 했습니다. : 1791년 7월 20일 밤, 루이 16세는 바렌느로 탈주를 시도했다. 그러나 22일에 발각되어 다시 파리로 압송되었다. 이 사건으로 반혁명의 위협이 피부로 감지되고, 군주제의 위엄이 땅에 떨어지게 된다('군주제의 장송행렬') 여기서 혁명 정부 내의 과격파와 민중과의 제휴가 다시 한번 이루어졌습니다. 1792년 8월 봉기한 프랑스 민중들은 문제의 왕이 살고 있는 왕궁을 습격하고, 9월에는 의회를 습격하여 의회 내의 온건파, 특히 군주주의자들을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5) 제1공화정의 수립
혁명전쟁의 발발과정을 살펴봤습니다. 1792년 9월 프랑스에서는 드디어 왕권이 정지되고, 최초의 공화정인 제1공화정이 수립됐습니다. 입법의회는 해산되고 대신 국민공회가 소집되었지요. 공화제의 헌법이었던 ‘92년 헌법’은 농민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모든 봉건적, 영주제적 권리를 무상으로 폐지했습니다. 이 결과 프랑스농민들의 토지소유권 내지 재산권이 확립되었고 이 후 프랑스 농촌에서는 소농체제가 확립, 지속됐습니다. 이어서 1793년 1월에는 루이16세와 그의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맙니다. 그러나 국민공회도 일치된 합의에는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혁명지도자들 사이에서도 대립과 분열이 나타난 것이지요. 특히 지롱드와 자코뱅 사이의 대립은 혁명 진행에 주요 변수로 작용했습니다. 이 두 집단 사이에 사회, 경제적인 혹은 신분적인 구분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 양 당파의 지도자는 모두 부르주아였습니다. 그러나 지롱드파는 주로 상층 내지는 부유한 부르주아에 입각한 당파로서 자유주의적인 경제체제를 선호하여 민중들의 요구와는 다소 배치되었으며, 정치적으로도 입헌군주제와 지방분권제를 지향했습니다. 반면, 자코뱅파는 주로 중산층 및 소생산층의 요구에 접근했습니다. 특히 이들은 혁명 초기부터 자코뱅 클럽을 통하여 민중과의 연대성을 확보하였고 생활권에 대한 민중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했습니다. 또한 공화정 및 중앙집권제를 지향했던 도시서민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민중과의 연대관계가 크게 작용함으로써 자코뱅은 드디어 정권을 수립하게 되는데요. 그 과정을 살펴볼까요?
(6) 자코뱅 공포정치의 수립
자코뱅과 지롱드의 대립에는 1792년에서 1793년에 이르는 프랑스의 정세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정세는 구체적으로는 방데지방의 반란을 비롯해 1793년 초 프랑스 전역에서 발발했던 반혁명봉기와 극심했던 대외적 위협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궁극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던 것은 자코뱅이었으며 이에는 자코뱅과 민중의 연대관계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1793년 5월31일에 파리의 민중이 국민공회를 습격한 직후인 6월2일 국민공회는 지롱드파의 지도자들을 숙청함으로써 자코뱅의 독재체제를 확립시켰습니다. 이리하여 제정된 ‘93년 헌법’은 보통선거권, 노동권과 생존권, 공공의 지원을 규정한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헌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실시는 혁명전쟁을 비롯한 대내외의 반혁명위기라는 비상시국이 해소되는 평화시까지 보류되었고, 선거 역시 중단됐습니다. 국민공회는 또한 봉건제의 무상폐지를 선언했습니다. 정권을 잡은 자코뱅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했던 공안위원회는 공포정치와 독재정치를 실시했습니다. 공안위원회는 혁명전쟁의 수행을 위해 총동원령을 내리고 국민징병제를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가 실시한 통제경제정책입니다. 이 정책은 자유주의적인 경제체체의 도입으로 말미암은 도시서민들의 몰락을 우려한 것으로 독립적인 소생산자들을 위한 사회체제를 추구한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자코뱅은 군대 및 도시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기 위해 군수품생산을 조직하고 통제했으며 기본 일상품의 가격 및 노동자들의 임금에 대해서도 가격통제를 가했습니다. |
9-3. 혁명의 보수화 (1) 테르미도르의 반동 자코뱅의 공포정치를 통하여 프랑스는 어느 정도 위기를 수습하고, 혁명에 대한 안팎에서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자코뱅에 대한 지지를 감소시킴으로써 그 지도자인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자코뱅을 몰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는데요. 이것이 1794년에 일어난 테르미도르의 반동입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자코뱅의 경제정책 실패에 있었습니다. 통제경제정책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면서 도시 서민들의 불만이 증대했으며 농민 역시 낮은 곡가와 혁명전쟁을 위한 정부의 수용정책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여기에 위기를 증폭시킨 것은 자코뱅의 정치적 태도입니다. 자코뱅은 혁명전쟁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둔 이후에도 공포정치를 강화했으며,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온건파는 물론 민중들의 의견을 직접 대변하려했던 과격파까지 계속해서 제거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나마 자코뱅정권을 지탱해주고 있던 민중과의 유대까지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났을 때 민중이 보여주었던 방관의 태도는 여기에서 연유합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프랑스혁명은 반동의 길을 걸었습니다. 1795년에 수립된 총재정부는 부유한 부르주아라는 사회세력에 입각했으며 중앙집권적인 행정기구를 확대시켜 관료기구를 안정시켰습니다. 그러나 총재정부는 민중의 생활을 외면하였고 통제경제체제를 후퇴시킴으로써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습니다. 이리하여 총재정부는 민중과 유산계급 양쪽으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민중들은 몇 차례의 봉기를 시도했지만 결국 진압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1796년에 바뵈프는 “평등주의자들의 음모”단을 이끌고 정부 전복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바뵈프의 시도는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이념이 처음으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좌파적 봉기의 실패는 결국 총재정부를 우경화 했습니다. 이는 왕당파의 입지를 강화시키게 됩니다. 왕당파의 입장에서 볼 때에, 국민공회의 온건파가 주류를 이루었던 총재정부는 너무 과격했던 것이지요. (2) 나폴레옹의 쿠데타와 몰락 왕당파의 압력에 직면해있던 총재정부는 그 진압을 위해 군대에 의존했고 여기서 군대의 독자적 지위가 강화됩니다. 이 때 독자적 지위를 확보한 혁명군 지휘자 나폴레옹이 등장해 1799년 11월 곧 군사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프랑스혁명을 종식시키게 됩니다.나폴레옹은 혁명의 이념을 코에 걸고 자신의 군사적 야심을 추구하여 1808년경에 이르러서는 영국을 제외한 유럽대륙을 제패하게 됩니다.그러나 나폴레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무모한 러시아 원정을 시도하다가 결국 패하면서 몰락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군사적인 정복자로서 프랑스 혁명의 사생아였지만 현실감각이 탁월한 행정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혁명기에 이루어진 제반 변화를 인정하여 시민계급 및 재산권을 인정하고 프랑스은행을 설립했으며, 중앙집권적인 행정제도를 확립하고 나폴레옹 법전을 편찬하는 등 프랑스사회의 제도적 틀을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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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프랑스혁명의 성과와 성격 이제 프랑스혁명의 결과를 살펴볼 차례가 되겠지요? 혁명 이후 프랑스 사회는 자본주의적인 경제활동을 촉진시켰습니다. 특권계급의 계서제에 입각한 신분제를 철폐하고 법적으로 평등한 사회구조로 전환시켰죠. 또 지방간의 관세장벽을 철폐해 국내 경제통합의 범위가 넓어졌고 기업의 자유가 선언되면서 보다 자유로운 경제활동의 가능성이 보장됐습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설사 프랑스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하더라도 혁명지도자들은 그들의 이해관계를 보편적인 이념과 용어로 표현하여 광범위한 호응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민중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민중의 입장이 혁명의 진행에 주요한 변수로 작용했던 것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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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맺음말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공부해 보았는데요.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 시민의 법적인 평등성을 확립하고 동일한 기준에 입각한 중앙집권화를 강화시켰습니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는 혁명에 의해서 비로소 국민적 통합을 이루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서양 민족주의의 원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권선언에는 인민주권의 원칙이 천명되어 있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쟈코뱅 정권의 시기에 상퀼로트의 직접민주주의적인 정치활동을 통하여 어느 정도의 실험이 이루어졌다 할 수 있겠지요. 이 시도는 비록 좌절되고 말았습니다만, 그 후 서양의 정치적인 사유에 민주주의라고 하는 흐름을 제공하게 됩니다. 인권선언은 또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과제를 제시했고, 이에 따라 자유주의 및 사회주의의 발전을 촉진했습니다. 양 과제가 프랑스혁명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오늘날에 와서도 제대로 실현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요. 프랑스혁명은 또한 전국 토지 면적의 15% 정도를 재분배함으로써 사회적인 변화를 이룩했다. 이에 따라 독립적인 토지 소유농이 증가하였습니다. 또한 사회적인 지배집단을 봉건적인 귀족으로부터 귀족의 후예, 지주, 대상인, 금리생활자, 공증인, 기타 자유전문직업인, 벼락부자, 군사 지휘관 등 다양한 성분으로 구성된 이른바 명사층으로 교체시켰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아무리 혁명이 일어났다 해도 과거와 완전히 단절할 수는 없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프랑스혁명은 옛것과 새것, 혹은 보수반동세력과 혁신세력의 끊임없는 싸움을 예고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우리 사회 역시도 해결해야 할 과제인 것 같습니다. '자유, 평등, 우애'로 요약되는 프랑스혁명의 이념은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했으며, 또한 아직도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류에게 어떻게 하면 자유를 상실함이 없이 평등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까 하는 과제를 남긴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