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라고는 하지만 / 제현 스님
사람들은, 마음을 비우라!
집착을 놓으라! 고 말을 하고,
나 또한 남이나 나자신에게 그런 말을 자주 한다.
하지만 정작 내 문제로 고민할 때,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비우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닌 법이다.
문제에 대한 해결보다는,
문제를 가지고 끙끙대고,
속상해하고, 내 자신말고 누군가를 원망하며,
나의 행위나 생각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사람들이 힘들어할 때, 마음을 비우라!
집착을 놓으라! 라는 말이 얼마나 공허한 말인가...'
한번쯤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만약에 너무 힘든 상황에서
마음을 비우고, 집착을 쉽게 비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그런 상황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 깨인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집착을 비우라는 생각에 골똘하다보면
이 생각조차도 집착이 되어버리니깐 말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축적해왔는데,
이것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가 배우고 경험한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받아온 교육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
새로운 기술, 인간관계, 지식, 지혜, 재산 등 등,,,
이런 것들은 우리가 생존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이다.
앞으로도 계속 우리들은 계속 이런 것들을 축적해 갈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해가 되는 것이다.
즉 좋은 것들을 축적해왔지만,
쓰레기 같은 것들도 많이 축적해왔다.
예를 들어, 과거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들,
좋지 않은 습관, 예를 들어, 흡연, 도박, 음주,
남을 비평하는 것, 모함하는 것들,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문제는 이 두 가지가 짬뽕이 되어
‘나’라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즉 이 두 가지가 ‘나’라는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것이다.
축적되어온 이 두 가지는 우리의 생각이나,
언어나, 행동으로 생활전반에 나타난다.
우리가 의자에 앉았다 하자.
우리가 앉은 의자는 보통의자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축적해온 모든 것을
상징하는 왕관이라 생각하자.
이 왕관을( ‘나’라는 아이덴티티) 잃어버리면,
나의 존재는 없어지기에,
이 왕관을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된다.
나는 현재 이 의자에 앉아 있다.
이 의자는 ‘나’라는 모든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의자는 내가 지금까지 받아온 모든 교육,
경험, 책이나 세미나를 통해서 얻은
간접 경험의 모든 것,
명상을 통해서 얻은 또 다른 경험들,
내 재산, 나의 인간관계, 내 가족,
나의 좋지 않은 습관, 덜렁대는 성격,
게으르고 나태한 습관,
과거에 좋지 않았던 경험에 대한 기억들...
이 모든 것들이 합쳐서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나의 감정이나 성격까지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이 의자를 잃어버린다면,,,
그러면 대체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 낸
아이덴티티가 아니던가!
이런 아이덴티티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마치 죽음보다 더 무서운 두려움일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이것을 相이라고 하고,
원각경에서는 幻, 즉 착각이라 한다.
서양에서는 이것을 illusion이라고 하고,
인도에서는 마야라고 한다.
이것을 깨기 위해서 수행이 필요하고,
명상이 필요하고, 이것을 깨고 나면
바로 그것이 해탈이요, 깨어남이리라! )
그러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이 의자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
그래서 이 의자에 앉아있는 의자를 꼭 잡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의자와 같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막상 해보면 무척이나 힘들고
우리 자신이 우습게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의자를 끼고 우리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움직이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의자를 움직여야 한다고 하자.
어떻게 움직여야 할 것인가?
쉽게 의자를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의자에서 일어나 의자를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의자와 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의자에 대하여 힘(Power)를 갖는다.
우리에게 지금까지 축적되어온 모든 것들에 대하여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의자의 관계처럼
보고 들은 경험이 축적되어 業身(업의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깨어있는 눈으로 바라볼 때 만이다.
나의 성격, 감정, 인간관계,
나의 습관, 언어, 행동 등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야만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럴 때야 만이 우리는 이런 것들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가슴 아프고, 슬프고 괴로울 때
아파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해 보자.
(정신없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감정을, 슬픔을, 느낌을 바라보자.
(어차피 당해야 할 것이라면...)
자신의 감정을, 슬픔을, 고통을 바라볼 수 있을 때,
그때서야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래야 우리는 내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이때 나에게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두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자.
한없이 끓어오르던 감정과 고통일지라도
마치 가마솥 보글보글 끓는 물에 찬물 한바가지를 부은 듯이
서서히 파도가 가라앉게 된다.
즉, 놓아버림이 일어난다.(止)
그리고 자신의 감정과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 가를 놓치지 않고 바라볼 때,
곧, 알아차림이 일어난다. (觀)
이것을 불교에서 止觀(지관)수행이라 하고
남방불교에서는 이것을 위파사나 수행이라고 하고,
서양에서는 Awareness(깨어있음)라고 한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자신의 감정을 바라볼 때,
어떤 비평이나, 판단을 하지 않고
그저 따뜻한 마음으로, 중립적인 마음으로
[ 바라보라는 것! ]이다.
그럴 때, [기적]이 일어난다.
그렇게 힘들었던 문제들이, 슬픔들이, 괴로움들이
다른 색깔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서 전에는 생각도 못한 대답들이나,
해결책들이 떠오르게 된다.
그것뿐인가?
상대방이 왜 저래야만 했는지에 대한 이해와
문제의 근원적인 원인들이 보이게 되면서
자신의 잘못도 느껴지고 상대를
안아줄 수 있는 여유도 생기게 된다.
(LOVE IS UNDERSTANDING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다 / 틱낰한 스님)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내가 싫은 것이 아니라,
어릴 적에 받은 상처와 나쁜 기억 때문이구나. 라든가,
혹은 두려움에서 나온 행동이라든가 등등,
많은 것들이 보일 것이다.
그것뿐인가?
나의 저변에 깔린 근원적인 문제가
수면에 떠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럴 때, 변화가 생긴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변하기 시작한다.
단지 내가 나를 깨어있는 마음으로 바라본 것 뿐 인데...
의자에서 떨어져 나 자신을 볼 때,
지혜가 생기고 이해와 자비가 생긴다..
그대의 의자에서 일어나라 !
내가 풀이하는 지혜라는 것은
지식(Knowledge)이 생활에 적용될 때,
바로 그것이 지혜이다.
The wisdom is when the knowledge is applied!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삶에 적용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쌓아올린 또 다른 축적밖에 되지 않으리!
그저 집착을 비우려고 하지 말고
마음을 비우려고 하지 말고,
그저 그 마음을 바라보라!
그러다보면 저절로 마음을 비우게 되고,
집착을 비우게 된다.
그러다보면 우리의 고통까지도,
슬픔까지도 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슬플지라도,
힘들지라도, 불행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인생은 정말이지 살아볼 가치가 있다. 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수행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네 자리에서 일어나라.
너를 바라보라.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어있으라.
잡동사니로 묶여져 있던
자신의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나
하얗게 눈 덮힌 산사의 정경을 바라보며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님들 이 되길 기원합니다.
출처 : 염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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