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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3일
며칠 전에 가덕도에 복수초 출사를 가려고 했는데 몸의 컨디션이 나빠 중지하고
찍사들과 2월 3일 아침 9시에 동래전철역에 모여 암남공원으로 출발하였다.
남포역에 내려 8번 출구로 나가 71번 버스를 타고 20여분 만에 부산국제수산물도매시장정류장에 내렸다.
작년에는 2월 21일에 출사를 했었는데 올해는 보름 이상 빠른 셈이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개체수가 작년보다 훨씬 적었다. 아마 너무 빨라서인 것 같았다.
허지만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꽃찍는데에는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많이 걸어서 그런대로 의미 있는 하루가 되었기 때문이다.
복수초를 대강 찍고 포구나무쉼터로 노루귀를 찾아 나섰다.
여기도 너무 일러서인지 노루귀도 3개체만 겨우 찾았다. 그래도 찾았으니 다행이었다.
대구수목원에는 노루귀가 많이 있는데 며칠 뒤에 출동해서 복수초와 노루귀를 구경할 생각이다.
포구나무쉼터에서 준비한 음식으로 식사한 후 송도해상케이블카 정류장 인근 모지포마을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자갈치지하철역으로 이동 귀가하였다.
노루귀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2
악양루 밑에서 배를 내린 사씨 부인은 밤이 새도록 강가에 머문 배에서 기다리다가 날이 밝은 후에야 비로소 인가를 발견하고 유모와 시비를 거느리고 배에서 내렸다. 뱃사람들은 갈길이 바쁘기 때문에 사씨에게 몸조심하라는 당부와 슬픈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이처럼 사씨는 천신만고 뱃길을 얻어서 장사에 거의 다 왔다가 풍랑에 밀려서 이곳에 와서 배에서도 내렸으므로 앞길이 다시 막혔으니 창자가 촌절할 듯 아무리 생각하여도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탄식하였다. 유모가 울면서 호소하였다.
"사고무친한 이 땅에 와서 또다시 앞길이 막혔으므로 부인은 장차 어떻게 귀하신 몸을 보전하려 하십니까?"
"인생이 세상에 나면 수요장단(壽夭長短)과 화복길흉이 천정(天定)한 운수임에 일시의 액운을 굳이 근심할 바 아니지만 이제 내 신세를 생각하니 자취기화(自取其禍)라 할 수밖에 없다.
옛말에도 하늘이 지은 화는 면할 수 있어도 스스로 지은 화에선 살아나지 못한다 하였는데 내가 지금 중도에 이르러서 이같이 낭패하니 다시 어디로 가며 누구를 의지하랴."
하면서 자탄하였다. 이때 유모가 도리어 사씨 부인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옛날의 영웅호걸과 열녀절부들도 이런 곤액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부인에게 지금 일지의 액화가 있으나 그 억울함은 명천(明天)이 조람하시고 신명이 재방하여 청풍이 흑운을 쓸어 버리면 일월을 다시 보실 것이니 부인은 너무 낙심
마십시오. 어찌 일시의 액운에 지쳐서 천금 같은 몸을 돌보지 않으시렵니까?"
그러나 사씨 부인은 여전히 힘을 잃고 탄식만 하였다.
"옛날 사람들도 액운을 겪은 이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자연 구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몸을 보존하였다. 그러나 지금 내 처지는 그렇지 못하여 연연약질이 위로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아래로 땅에 용납되지 못하니 어찌하랴. 구차하게 된 인생을 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한번 죽어서 옛날 사람처럼 꽃다운 이름을 나타내자는 것이 하늘의 뜻이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 같다. 강물이 맑아서 깊이가 천만장이니 마땅히
나의 한낱 뜻과 뼈를 감출 것이다."
하고 강물을 향하여 뛰어들려고 하였다. 유모가 놀라서 사씨의 몸을 부여잡고 울면서 애원하였다.
"저희들이 천신만고하여 부인을 모시고 이곳에 이르렀으매,부인이 만일 죽으시려면 저희들도 함께 죽어서 지하에서도 모시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안 된다. 나는 죄인이니까 죽어도 마땅하지만 너희들은 무슨 죄로 나를 따라 죽는다는 말이냐. 도중에서 노자 다 떨어졌으니 너희들은 인가에 의탁하여 일을 해주고 몸조심을 하다가 북방 사람을 만나거든 내가 이곳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고향으로 전해라."
하고 신신당부한 뒤에 거기 선 나무의 껍질을 깎고 큰 글씨로 모년 모월 모일 사씨 정옥은 시가에서 쫓긴 몸 되어 이곳에 이르렀다가 진퇴무로하여 몸을 이 강물에 던졌다고 썼다. 이 유서를 쓴 사씨는 붓을 놓고 통곡하였다. 유모와 시녀가 좌우에서 사씨를 붙잡고 슬피 울매 일월이 빛을 잃고 초목이 시들어서 슬픈 듯하였다. 어느덧 날이 어둡고 달이 떠서 달빛이 강 위에 처량하게 비치매 사면에서 물귀신이 울어대고
황릉묘에서 두견새가 처량하고, 소상강 대밭에서도 귀신 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서 악기(惡氣)가 사람을 침노하였다.
"밤기운이 몹시 차가우니 저 악양루에 올라서서 밤을 지내고 내일 다시 앞일을 선처하시기 바랍니다."
유모가 부인에게 권하자 부인이 유모의 말에 따라서 악양루로 올라갔다. 조각으로 된 들보가 하늘에 높이 솟아서 소상강 물에 임하였는데 오색 구름이 구의산에서 피어 와서 악양루를 둘러싸고 달빛이 난간에 은은히 비치매 시인 묵객이 읊어 쓴 글귀의 현판이 벽에 무수히 걸려 있었다. 사씨가 그 광경을 보고 길이 탄식하면서,
"이 악양루는 강호의 유명한 곳이지만 영웅호걸과 절부열녀들이 이렇게 많이 이곳에 인연을 맺었을 줄 알았으랴. 내 비록 표박중이나 이곳에 온 것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고 노주 세 사람이 그날 밤을 누상에서 지냈다. 그러자 이튿날 새벽에 누 밑에서 소란한 사람의 소리가 나며 수십 명이 누상을 향하여 올라왔다. 그들은 서울 사람들로서 이곳에 왔다가 악양루의 해 뜨는 경치를 구경하려고 일찍 올라온 일행이었다.
사씨 부인은 갑자기 사람들이 나타났으므로 유모를 데리고 뒷문으로 빠져 강변 숲으로 와서 말하였다.
"날이 밝았으나 노자가 없고 우리들이 의탁할 곳이 없으니 장차 어디로 가랴. 아무리 생각하여도 강물 속으로 몸을 감추는 수밖에 없다."
하고 사씨 부인이 또 강물에 몸을 던지려고 하였다. 유모와 시비가 망극하여 통곡하였다. 사씨는 어제 종일과 종야를 굶주리고 잠을 자지 못하여 지칠 대로 지쳤으므로 잠시 유모의 무릎에 기댄 채 깜박 졸았다. 그때 비몽사몽간에 한 소녀가 와서,
"저의 낭랑께서 부인을 모셔오라는 분부로 왔습니다."
하고 어디로인지 인도하여 가고자 하였다.
"너의 낭랑이 누구시냐?"
"저와 함께 가시면 아실 것입니다."
사씨 부인이 그 소녀를 따라서 어떤 곳에 이르니 고대광실의 전각이 강가에 즐비하게 빛나고 있었다. 소녀가 사씨 부인을 인도하여 그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중문을 몇 개나 지나서 들어가자 큰 대궐 위에서 이리로 올라오라는 지시가 내렸다.
사씨가 전상으로 올라가서 보니 좌우에 두 분의 낭랑이 황금교의에 앉았고 그 좌우에 고귀한 여러 부인들이 모시고 있었다.
사씨 부인이 예를 마치자 낭랑이 자리를 권하고,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순 임금의 두 비다. 옥황상제께서 우리의 정사를 측은히 여기시고 이곳의 신령으로 삼으신 고로 여기서 고금의 절부열녀를 보살피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그대가 한때의 화를 만나고 이곳에 오게 된 것은 모두
하늘의 정한 운명이다. 그대가 아무리 죽으려 하여도 아직 죽을 때가 아니므로 허락할 수 없으니 마음을 진정하라."
사씨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례하고 낭랑의 덕을 치하하였다.
"인간계의 미천한 여자로서 항상 책을 통하여 성덕열절을 우러러 사모할 따름이옵더니 이제 여기와서 양배하올 줄 어찌 뜻하였겠나이까?"
"그대를 청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대가 천금 중신을 헛되게 버려서 굴원의 뒤를 따르려 하니 이는 천도가 아니니라. 그대의 호천 통곡은 천도가 무심함을 한함이니 이는 평일의 총명이 옹폐함이요, 그대의 액운이 비상한 탓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의논하고 오래 쌓인 회포를 듣고 위로해 주고자 한 것이다."
"상랑의 분부가 이러하오니 미첩이 품은 소회를 아뢰겠나이다.
저는 본디 한미한 사람입니다. 일찍 엄부를 잃고 자모 슬하에
자랐으매 배운 바가 없어서 행실이 불미하던 중에 시부가 별세한
뒤에 크게 변하여 남산의 대[竹]를 베고 동해의 물을 기우려도
그 죄를 씻지 못할 누명을 쓰고 낯을 가리고 시가의 문을
하직하고 나왔습니다. 그 후에 눈물을 뿌려 시부의 묘하에
하직하고 강호를 유랑하다가 몸이 소상강에 이르러 진퇴궁전하여
앙천 장탄하였으나 하는 수 없어서 천장수심(千丈水深)에 임하니
한 터럭 같은 일신을 어복(魚腹)에 장사지낼 결심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아녀자의 마음이 망령되어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호천통곡하여 낭랑께서 들으시게 됨에 심려를 끼쳤사오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천정한 바로서 인력이 아닌데 그대가 어찌 굴원의
뒤를 따르며 하늘을 원망하겠느냐? 하늘이 이미 나라를
멸망시키고 원한을 시원케 하시니 임금이 죄를 다스리고 충신의
이름이 나타나서 천백 세에 유전된 것이다. 그 옛일을 비겨서
보면 처음에는 곤액하나 장래에는 복록이 무량함이니 어찌
그때를 기다리지 않고 자결하겠느냐? 우리 형제(아황과 여영)는
규중약녀로서 배운 바 없으되 시가를 조심하여 섬김을
옥황상제가 가엾게 여기시고 기특히 여기셔서 이 땅의 신령으로
봉하여 그윽한 음혼을 다스리게 하였으매 이 좌상의 여러 부인은
모두 현부열녀이므로 이따금 풍운의 힘을 빌려 이곳에 모여 서로
위로하매, 세상의 영욕이 어찌 문제가 되랴. 유가는 본디
적선지문(積善之門)인데 오직 유한림이 조달하여 천하사를
통하나 골격이 너무 징청한 고로 하늘이 재앙을 내리사 크게
경계코자 잠깐 이리하다가 좋은 때가 오면 다시 재앙을 없이
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 그것을 모르고 조급히 구느냐.
그대를 참소하는 자는 아직 득의하여 방자교만하지만 그것은
마치 똥벌레가 제 몸 더러운 줄을 모르는 것과 같으니 어찌
더러운 것과 곡직을 다루겠느냐? 하늘이 장차 대벌을 내리셔서
보응이 명백해질 것이다."
"어리석은 저를 이처럼 위로하시고 격려하여 주시니
감사하옵니다."
"그대 온 지가 벌써 오래 되었으니 내 말을 알았거든 빨리
돌아가라."
"제 허물을 낭랑께서 더럽다 하시지 않으시고 목숨을 구해
주시려 하오나 돌아가도 의탁할 곳이 없으매 속절없이 강물에
몸을 감추겠사오니, 낭랑께서는 저의 정상을 살피고 이
말재(末才)를 시녀로 삼아서 이곳에 참례케 하여 주십시오."
하고 사씨 부인이 다시 애원하였다. 낭랑이 그 말을 듣고
웃으며,
"그대도 나중에는 이곳에 머무르게 되려니와 아직 때가 마땅치
않으니 빨리 돌아가라. 남해도인이 그대와 인연이 있으니 그에게
잠깐 의탁함이 또한 천의(天意)로다."
"제가 전에 들은 바에 의하면 남해는 하늘 끝이라 길이
요원하다는데 이제 노자 한 푼도 없이 어떻게 거기까지
가겠습니까?"
"연분이 있어서 자연 가게 될 것이니 그런 염려는 말고 어서
돌아가라."
하고 동벽 좌상에 용모가 미려하고 눈이 별같이 빛나는 자를
가리키면서 그는 위국부인이라 하고 또 한 사람을 가리켜서
반첩녀(潘妾女)라 하고 동한 때의 교대가와 양처사의 처
맹광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대가 이미 여기 왔으니
옛사람의 이름을 서로 소개하는 것이라고 웃어 보였다.
"오늘 여기 와서 여러 부인의 면목을 뵈오니 뜻하지 않았던
영광이옵니다."
하고 두루 예하자 여러 부인들도 미소로 답례하였다. 사씨
부인이 하직하고 물러서려고 하자 낭랑이,
"매사를 힘써 하면 오십 후에 이곳에 자연 모이게 될 것이니
그때까지 세상에서 몸을 조심하라."
하고 청의동녀를 명하여 사씨를 모시고 가라 하므로 사씨가
전상에서 계하로 내리며 전상에서 열두 주렴 내리는 소리가
주르르 하고 맑게 울렸다. 그 소리에 놀라서 정신을 깨우치니
유모와 시녀가 사씨 부인이 오래 기절한 것을 망극히 여기다가
사씨의 소생을 반기며 구원하였다. 사씨가 몸을 움직여서
일어나서 얼마나 잤느냐고 물으니 기절한 뒤 서너 시나 되었다
하면서 소생한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부인께서 기절하셔서 저희들이 당황하여 백방으로 구완하다가
이제야 정신을 차리셨습니다."
하고 그동안의 경위를 고하자 사씨도 낭랑을 만나보고 온
비몽사몽간에 본 이야기를 자세하게 하고,
"아무래도 보통 꿈과는 다르니 내가 그곳으로 가던 길을
찾아가 보자."
하고 소상강 가의 대밭으로 들어가니 과연 한 묘당이 있고
현판에 황릉묘라고 써 있었다. 이것은 아황, 여영 두 비의
사당으로서 사부인의 꿈에 본 장소와 같으나 건물의 단청이
퇴색하고 황량하기 말이 아니었다. 사당 안으로 들어가서 전상을
바라보니 두 비의 화상이 꿈에 보던 용모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사씨가 분향하고 축원하는 말이,
"제가 낭랑의 가르치심을 입사와 타일의 길할 때를
기다리겠사오니 낭랑의 성덕을 믿고 잊지 않겠습니다."
축원을 마치고 사당을 물러나서 서편 언덕에 앉아 신세를
생각하고 여전히 슬픈 회포를 탄식하였다. 그리고 묘지기 집에
가서 밥을 얻어 오게 해서 세 사람이 모두 먹었다.
"우리 셋이 방황하여 의지할 곳이 없으나 이것은 신령께서
야속하게 희롱하심이다. 낭랑의 말씀대로 참는 데까지는
참아보자."
하고 탄식하는 동안에 해가 서산에 지고 달빛이 떠서 몽롱하게
주위를 비쳤다. 묘 안에 들어가서 사방을 살펴보니 밤은 깊어만
가고 짐승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사씨가 곰곰이
생각하되,
"사람이 세상에 나면 부귀빈천이 팔자소정이나 여자로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갖은 고초를 겪으며 이곳에 와서 의탁할
곳이 없으니 아무리 아황, 여영의 영혼의 위로하는 말씀이
있었으나 역시 죽어서 만사를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하고 또다시 죽을 생각을 하였다. 이때 홀연히 황릉묘의
묘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와서 물었다.
"부인이 또한 고초를 당하고 물에 빠지려고 하십니까?"
사씨 부인이 놀라서 바라보니 하나는 여승이요, 하나는
여동(女童)이었다.
"그대들은 어떻게 우리 일을 아는가?"
여승이 황망히 읍하고 합장하면서,
"소승은 동정호 군산사에 있는데 아까 비몽사몽간에
관음보살님이 나타나셔서 '어진 사람이 환란을 만나서 갈 바를
모르고 강물에 빠지려고 하니 빨리 황릉묘로 가서 구하라'
하시므로 급히 배를 저어 왔는데 과연 부인을 만났으니 부처님
영험이 신기합니다."
"우리는 죽게 된 사람이라 존사의 구함을 받으니 실로
감격하나 존사의 암자가 멀고 가더라도 폐가 될까 합니다."
"출가한 사람은 본디 자비를 일삼는 처지이며 하물며 부처님의
지시로 모시려고 왔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하고 세 사람을 밖으로 인도하여 강가로 내려와서 배를 태우고
여동에게 노를 저어 가게 하자 순풍을 만나서 순식간에 군산사에
이르렀다. 이 섬의 산은 동정호 가운데 솟아 있으므로 사면이 다
물이요, 산은 푸른 대숲으로 덮여서 인적이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여승이 배에서 내려서 사씨를 부축이고 길을 찾아
갔으나 사씨의 기운이 파하였고 산길이 험해서 열 걸음에 한
번씩 쉬면서 암자에 이르렀다. 수월암(水月庵)이라는 이 절은
매우 한적하고 정결하여 인세(人世)를 떠난 선경이었다.
사씨는 몸이 피곤해서 곧 잠이 들어 이튿날 아침까지 깨지
못하였다. 여승이 먼저 일어나서 불당을 소제하고 향을 피우며
경자를 치며 부인을 깨워 예불하라고 권하였다. 사씨가 유모들과
함께 불당에 올라 분향배례하고 눈을 들어 부처를 쳐다본 순간에
문득 놀라며 눈물을 흘렸다. 알고 보니 그 부처는 다른 불체가
아니라 사씨가 십육 년 전에 자기가 찬을 지어서 쓴 백의관음의
화상이었다. 그 화상에 쓴 찬의 자기 글씨를 보니 자연 놀라움과
슬픈 회포를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모양을 본 여승이 또한
깜짝 놀라서,
"부인의 말씀이 그러실진대 분명히 신성현 땅의 사급사 댁
소저가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스님이 어찌 내 신분을 아십니까?"
"부인의 용모와 음성이 본 듯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소승 역시 그때 저 관음화상의 찬을 당시의 소저에게 받아간
우화암의 묘혜입니다. 소승이 유대감 댁의 명을 받고 부인에게
관음찬을 받아다가 보인즉 크게 칭찬하시고 아드님 유한림과
혼인을 정하셨던 것입니다. 소승도 부인과 혼사를 보려고
하였으나 스승이 급히 부르셔서 산으로 돌아왔으므로 참례를
못하였습니다. 그 후에 소승은 스승 밑에서 십 년을
수도하였으나 스승이 입적하신 후에 이곳에 와서 암자를 짓고
고요히 공부하면서 불상을 예배하고 부인이 쓴 글과 필적을 볼
적마다 부인의 옥설 같은 용모를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부인은 어찌하여 이런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씨 부인이 유한림의 부인이 된 이후의 전후사실을 자세히
들려주자 묘혜가 탄식하면서 사씨를 위로하였다.
"세상 일이 항상 이러한 법이니 부인은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부인이 감개무량해서 다시 관음불상을 우러러보니 외로운 섬
가운데 있는 한적한 절간에서 생기유동하여 완연히 살아 있는
듯하고 사씨가 소녀 시절에 지은 찬사가 또한 자기유락함을 그린
그 경지와 흡사하였다.
"세상만사가 모두 하늘이 정한 운수이매 인력으로 어찌하랴.
그러나 관음보살을 매일 분향하여 공양 기도하고 떼어놓고 온
어진 인아를 다시 만나야겠다."
고 축원하며 남자로 변복하였던 것을 여자옷으로 갈아입었다.
묘혜가 조용한 때 사씨 부인을 보고,
"부인이 이제 여기 와 계시나 왜 복색을 갈아입으십니까?"
"내가 자비로운 부처님과 스님의 보호를 받고 신변이 안전한데
어찌 어색한 변복으로 지내겠습니까."
"그렇게 마음이 안전되신 것을 소승은 고맙게 여깁니다.
그런데 유한림은 현명한 군자이시니까 한때 참언에 속더라도
멀지 않아서 일월같이 깨닫고 부인을 화거주륜으로 맞아 갈
것입니다. 소승이 일찍이 스승에게 수도하여 주(籌)도 약간 알고
있으니 부인의 사주를 보아드리겠습니다."
부인이 자기의 생년월일시를 말하자 묘혜는 한동안 침음하며
점을 친 뒤에 크게 기뻐하고 풀이를 하였다.
"부인의 팔자는 앞으로 대길합니다. 초년은 잠깐 재앙이
있으나 나중에는 부부와 모자가 다시 화락하여 복이 무궁하실
것입니다."
"아아, 그 말씀을 믿고는 싶으나 어찌 믿고 안심하겠습니까?
이 박명한 인생이 스님의 과장하신 복을 어찌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한담하는 동안에 도중에서 배가 풍랑을 만나고 병도 나서
어떤 인가에 들러서 휴양한 이야기와 그때 어진 주인 여자의
은덕을 입은 일을 칭찬하였다. 그러자 묘혜가 그 말을 듣고,
"그 여자가 소승의 질녀였습니다."
하고 뜻밖의 말을 하였으므로 사씨가 의아해서 물었다.
"스님의 질녀라뇨?"
"이름이 취영이라 하지 않던가요. 제 어미가 그 애를 강보에
두고 죽고 제 아비가 변씨를 후처로 취했는데 그 후 아비가 또
죽으니까 계모 변씨가 취영이를 소승에게 맡겨서 삭발시키라
하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내가 그 애의 관상을 보니
귀자(貴子)를 많이 두고 복록을 누릴 상이라 변씨에게 데리고
살도록 권하였는데 요사이 들으니 효성이 지극하여 모녀가 잘
산다더니 부인이 이번 도중에서 우연히 만나보셨습니다그려."
"역시 스님의 인연으로 그 질녀의 덕을 보았던 모양입니다.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 나도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여 몸에 누명을 쓰고 쫓기는 사람이 되어서 이런
신세가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모두 하늘이 정하신 운수입니다. 부인과 소승이 잠시 인연이
있었으나 어찌 이런 곳에 계시겠습니까?"
사씨 부인이 묘혜의 말을 듣고 슬퍼하며 민망스러운 말로,
"내가 이곳으로 온 것을 후회하겠습니까마는 집을 떠나 있으매
집에 남은 인아의 신세가 외로운 것이며 그 생사조차 모르고 또
근자에는 한림의 심정이 변한데다가 집안의 요인(夭人)이 있어서
나를 해치고자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한림의 신상에
화가 미칠까 염려하던 중 내가 시부님 묘하에 있을 때 시부님
영혼이 현몽하셔서 일러주신 말씀이 육 년 사월 십오 일에 배를
백빈주에 대었다가 급한 사람을 구하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어떤
사람이 그때 급화를 만날는지 모르겠습니다."
"유한림은 오복이 구전지상(具全之相)이요, 유문은
적덕지가이매 어찌 요화가 오래 침노하겠습니까? 그리고
백빈주의 급한 사람을 구하라 하신 말씀을 때를 어기지 말고
구하십시오. 유상공은 본디 고명하신 분이었으니까 영혼인들
어찌 범연하시겠습니까?"
사씨 부인도 묘혜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 수월암에
머물러서 세월을 보냈으나 그냥 한가롭게 놀지 않고 바느질과
길쌈을 부지런히 하여 절의 신세를 보답하였으므로 묘혜도
기뻐하고 부인을 극진히 공경하였다.
이때 교씨가 본실의 지위로 정당에 거처하면서 가사를
총괄하매 간악이 날로 더하여 비복들도 교씨의 혹독한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사씨의 인자한 대우를 그리워하며 슬퍼하였다.
교씨는 아래로는 비복을 학대하고 위로는 간악한 십랑과
공모하여 한림의 총명을 흐리게 하는 요물들을 집안에
끌여들여서 집안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었다.
교씨는 유한림이 조정에 입번할 때는 그 틈을 타서 동청을
백자당으로 청하여 음란한 추행으로 밤을 새웠다. 교씨가
그날밤에도 동청을 데리고 백자당에서 자고 날이 밝으매 동청은
외당으로 나가고 교녀는 수색으로 피곤하여 늦도록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유한림이 출번으로 집에 돌아와서 정당에
이르매, 교씨가 보이지 않았다. 시비에게 물으니 백자당에
있다는 대답이었다. 유한림이 곧 백자당으로 가서 아직도 전날
밤의 난잡한 몸매로 자고 있는 것을 보자 힐문하였다.
"왜 여기서 자는 거요?"
"요즘 정당에서 자면 꿈자리가 뒤숭숭하고 기운이 좋지 않아서
어젯밤에 여기서 잤습니다."
"그대 역시 그 방에서 자면 몽사가 흉하던가. 나도 잠만 들면
꿈자리가 번잡하여 정신이 혼침하고 입번으로 나가서 자면
편안해서 이상하더니 그대 역시 그렇다니 복술 잘하는 사람을
불러다가 물어보는 것이 어떨까?"
교씨는 백자당으로 숨어서 동청과 간통한 사실을 유한림이
알아챌까 겁내던 차에, 유한림이 그런 말을 하므로 안심할 뿐
아니라 굿이라도 하라는 유한림의 뜻이라 좋은 기회라고
기뻐하였다.
이때 황제가 서원에서 기도를 일삼으며 미신에 빠져 있으므로
가의태우 서세가 상소하여 간하고 간신 엄승상을 논핵하자
황제가 대로하여 서세를 삭직하고 멀리 귀양보냈다. 이에 대하여
유한림이 서세의 충성을 변호하고 그를 구하려고 상소하였으나
황제가 역시 질택하시고 신하에게 조서를 내려서,
"이후로 짐의 기도를 막는 자가 있으면 참하라."
고 엄명을 내렸다. 이때 도관에 도진인(都眞人)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유한림과 친한 사이였다. 하루는 도진인이 유한림을
문병차 방문해 왔다. 유한림이 사람을 다 보낸 뒤에 진인만
머무르게 하고 내실로 데리고 가서 이 방에서 자면 흉몽을 꾸게
되니 무슨 악귀의 장난이냐고 물었다. 진인이 방 안의 기운을
살피더니,
"비록 대단치 않으나 역시 기운이 좋지 않소이다."
하고 하인을 시켜서 벽을 뜯고 방예물의 목인(木人) 여러 개를
꺼내서 유한림에게 보였다. 유한림이 대경실색하자 진인이 껄껄
웃고,
"이것은 굳이 사람을 해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시첩이
유한림의 중총(重寵)을 얻으려는 마음으로 한 소행입니다.
옛날부터 이런 방예로 사람의 정신을 미란케 하는 계교니까
이것만 없애 버리면 다른 염려는 없습니다."
하고 그 목인들을 곧 불살라 버리라고 권하였다.
"유한림의 미간에 혹기가 가득 차 있고 집안의 기운이 또한
좋지 않습니다. 이때는 주인이 집을 떠나라고 술법에 나와
있으니 조심하여 제액(除厄)하십시오."
"삼가 명심하리다."
유한림이 괴이하게 여기고 진인에게 후사하여 보냈다.
유한림은 진인의 신기한 도술에 경탄한 뒤에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집안에 이런 일이 있으면 사씨를 의심하게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사씨도 없고 방을 고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런 요물이 나왔으니 반드시 집안에 악사(惡事)를
꾸미는 자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고 보니 사씨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원래 이 일은 교씨가 십랑과 공모한 계교였는데 교녀가 동청과
백화당에서 동침한 사실을 숨기려고 창졸간에 꾸며댄 핑계인데
그 내실에서 자면 꿈자리가 나쁘다고 한 것이 도진인의 도술로
발각되고 말았던 것이다. 유한림이 비록 교씨의 짓인 줄 깨닫지
못하고 오랫동안 정신이 흐려졌으나 지금 비로소 전일의 총명이
다시 소생한 셈이었다. 유한림은 머리를 숙이고 과거 사오 년
동안 지낸 일을 곰곰이 반성하고 비로소 악몽을 깬 듯이 스스로
부끄러웠다.
이때 마침 장사로부터 고모 두부인의 편지가 왔다. 그런데
두부인은 아직도 사씨를 집에서 쫓아 내보낸 사실도 모르고
사씨의 일을 신신당부한 사연이 더욱 간절하게 유한림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고모께서 사씨를 축출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아직도
모르는 것이 의아스럽다. 그리고 사씨가 결코 방탕하지 않으므로
옥지환 사건도 어떤 자의 농간이 아닌가.'
하고 새삼스럽게 의심하게 되었다. 눈치가 빠른 교씨는
유한림의 기색이 전과 달라진 것을 보고 그 기위가 늠름해진
유한림에게 감히 요괴로운 수단을 피우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씨를 음해한 계교가 탄로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동청에게 상의하였다.
"요즘 유한림의 기색을 보니 그전과는 아주 딴 사람이
되었어요. 우리 양인의 관계를 눈치챈 듯하니 어쩌면 좋겠어요?"
"우리 관계를 집안의 비복들이 모를 리 없으되 지금까지
유한림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않은 것은 부인을 두려워했기
때문인데 지금 갑자기 기운을 잃고 약해지면 참소하는 자가
많을테니 그렇게 되면 죽어도 묻힐 땅이 없을 것입니다."
"사세가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아요. 나는 여자라 좋은
궁리가 나지 않으니 당신이 좋은 방법을 생각해서 우리 두
사람의 화를 면하게 해주어요."
교씨가 간부 동청에게 매달려서 애원하였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옛말에 남이 나를 해치기 전에
내가 먼저 그를 해치라 하였으니 좋은 기회를 노려서 한림의
음식에 독약을 섞어서 먹여 죽이고 우리 둘이 백년해로합시다."
간악한 교씨도 이 끔찍한 계획에는 한참 동안 침울하게
생각하였으나 결국 유한림을 죽이지 않으면 제가 잡혀
죽으리라는 두려움에서,
"결국 그럴 수밖에 없군요. 그러나 사전에 누설되면 큰일이니
둘이만 극비로 일을 진행시킵시다."
교씨와 동청이 이런 끔찍스러운 음모를 하는 줄도 모르고
유한림은 마음이 울적해서 친구를 찾아다니며 한담이나 하며
기분을 풀려고 하였다. 하루는 교씨와 동청이 유한림이 없는
틈을 타서 깊은 밤에 숨어서 은근히 정을 나누고 역시 유한림
해칠 계획을 상의하다가 동청이 책상 서랍에서 우연히 유한림이
쓴 글을 얻어 보게 되었다. 동청이 그 글을 읽어 보다가 희색이
만면해지더니,
"하늘이 우리 두 사람으로 백년가우가 되게 해주실 테니
부인은 아무 걱정 말아요."
교씨가 의아하여 동청의 손을 잡아 흔들면서,
"그게 정말이오? 무슨 좋은 징조가 있나요?"
"요전에 황제께서 조서를 내려서 짐의 기도 행사를 금하려고
간하는 자는 참하라 하여 계신데, 지금 다행히 한림이 쓴 이
글을 보니 엄승상을 간악소인에 비하여 비방하고 있습니다. 이
증거가 되는 글을 갖다가 엄승상에게 보이면 엄승상이 황제께
알려서 엄형에 처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 양인은 마음
놓고 백 년을 즐겁게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아이 좋아라!"
교녀가 반색을 하고 제 볼을 동청의 볼에 대고 문지르면서
음란한 교태를 부리며 시시덕거렸다.
"이번 계획이 공명정대한 나라의 위엄으로 처치하게 됐어요.
요전에 독살하려던 계획은 위험해서 걱정이더니 참 잘 됐어요.
역시 당신 말처럼 하늘이 우리 사랑을 도와 주신 거지요."
하고 음란한 행색이 더욱 해괴하였다. 동청은 교씨와 껴안고
뒹굴던 몸을 털고 일어서서 소매 속에 유한림의 글을 넣고 곧
엄승상 댁으로 가서 엄승상을 만났다.
"그대는 누군데 왜 왔는가?"
"저는 한림학사 유연수의 문객입니다마는 그 사람이 승상님과
나라에 반역죄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참지 못하여 그 비행을
알려드리려고 왔습니다."
엄승상은 평소에 못마땅하게 여기던 유한림의 약점을 알리러
왔다는 말에 귀가 번뜩 뜨였다.
"그래 그가 나를 어떻게 모해하던가?"
"그 사람의 의논을 들으면 항상 승상을 해치려고 하더니
어제는 술에 취해서 저에게 하는 말이 엄승상은 군부(君父)를
그르치는 놈이라고 욕하면서 모든 일을 송휘종(宋徽宗) 시절에
비하고, 황제께서 엄명을 내려서 간하는 상소는 못할지라도 글을
지어서 내 뜻을 풀리라 하고 이 글을 쓰기에, 글 뜻을 제가
물으니 승상을 옛날의 유명한 간신들에게 비유하였으며 짐짓
묘한 풍요(風謠)의 글이라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분격하고 이 글을 훔쳐서 승상께 드립니다."
하고 동청은 그럴 듯한 거짓말을 붙여서 참소하였다,
엄승상이 그 글 쓴 종이를 받아서 본즉 과연 천서와 옥배의
간악을 풍자해서 지은 글이 분명하였다. 엄승상이 잘 되었다는
듯이 냉소하고,
"흠, 유연수 부자만이 내게 항복하지 않고 음으로 양으로 나를
거역하더니 망령된 아이가 나라를 희롱하고 나를 원망하니 인제
죽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하고 그 글을 가지고 곧 궁중으로 들어가서 황제를 찾아
만나고,
"근래에 나라의 기강이 풀어져서 젊은 학자가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심히 한심하옵니다. 이제 성상께서 법을 세워
계시매 감히 상소치 못하고 불출한 한림 유연수가 왕 흠약의
천서와 진원평의 옥배로 신을 욕하오니 신이야 무슨 욕을 먹어도
참을 수 있사오나 무엄하게도 성주를 기롱하오니 마땅히 국법을
밝혀서 기강을 바로 세워야 할까 하옵니다."
하고 국궁배례하고 유한림 필적의 글을 증거품으로 어전에
바치었다. 황제가 그 글을 받아서 보시고 대로하여 유연수를
잡아서 옥에 가두고 장차 극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이 소문에 놀란 태우 서세가 상소하였다. 그 전에 자기가
억울하게 엄승상에게 몰려서 귀양간 때에 유한림이 그를
구명하려고 상소하였다가 엄승상의 미움을 받던 결과라고 생각한
서세가, 이번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유한림을 구하려는
정의감에서 올린 상서였다.
'성상께서 충신을 죽이려 하시는 그 죄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오나 청컨대 그 글을 내리셔서 만조 백관에게 알리게 하오.'
황제가 서세의 상소문을 보시고,
"유연수가 천서와 옥배로써 짐을 기롱하니 어찌 사죄를
면하리오?"
이에 대하여 서세가 다시 아뢰되,
"이 글을 보오니 천서 옥배로 비유하여 성상을 기롱함이
분명치 않으며 한무제의 송인종(宋仁宗)은 태평지주라 유연수
죄를 입더라도 죽일 죄는 아닌데 어찌 밝게 살피지 않사옵니까?"
황제가 이 말에 침음하시자 좌우에서 간언이 일어날 기세를
보고 심중에 불평이 북받쳤으나 여러 조신의 이목을 가리우지
못하여 선심이나 쓰는 척하고,
"서학사의 말이 이러하오니 유연수를 감형하여 귀양보냄이
마땅하옵니다."
황제가 허락하시사, 엄승상은 유한림을 엄중히 경호하여 먼
북방의 행주 땅으로 귀양보내라고 유사에게 명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집에서 기다리던 동청이 불만을 품고,
"그런 중죄자를 죽이지 왜 살려서 귀양보내는 경벌에 그치게
하셨습니까?"
"나도 죽이려고 하였는데 조정에서 간언이 많아서 그러지는
못했으나 행주는 수토가 험악한 북방이라 귀양간 자로서 살아 온
자가 없으니 칼로 죽이는 거나 별로 다름이 없다."
동청이 그 말을 듣고서 안심한 듯이 기뻐하면서 교씨에게
알리려고 백자당으로 달려갔다.
유한림이 벼락 같은 흉변을 만나서 귀양길을 떠나는 날 교씨는
비복을 거느리고 성 밖에 나와서 전송하면서 거짓 통곡을 하며
한림에게,
"한림께서 먼 곳으로 고생길을 떠나시는데 첩이 어찌 떨어져서
홀로 살겠습니까? 한림을 따라가서 생사를 같이 하고자
하옵니다."
하고 가장 열녀답게 호소하였다.
"내 이제 흉지로 가서 생사를 기약하지 못하니 그대는 집을 잘
지키고 조상의 제사를 받들고 아이들을 잘 길러서 성취시킬
직책이 있는데 어찌 나를 따라가겠다는 말이오? 인아가 비록
사나운 어미의 소생이나 골격이 비범하니 거두어 잘 기르면 내가
죽어도 눈을 감을 것이오."
"한림의 아들이 곧 제 자식이니 어찌 제 배를 앓고 낳은
봉추와 조금이라도 달리 생각하겠습니까?"
"부디 그렇게 부탁하오."
유한림이 재삼 부탁하였다. 그리고 집사 동청이 보이지
않으므로 어찌된 일이냐고 비복에게 물었다.
"집을 나간 지 삼사 일이 되었습니다."
유한림은 그가 집을 나갔다는 말을 듣고 속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이때 호위하는 관졸이 재촉하므로 비복 약간 명만
데리고 먼 귀양길을 떠났다. 유한림을 음해하여 귀양보내게 한
동청은 그 후에 승상 엄숭의 가인이 되었다가, 엄숭의 세도로
인진되어 진유현 현령으로 출세하여 되었다. 이에 득의양양해진
동청은 교씨에게 사람을 보내서 기별하였다.
"내 이제 진유현령이 되어 재명일 부임하게 되었으니 함께
가도록 차비를 차리시오."
이 기별을 받은 교씨가 기뻐하면서 집안 사람들에게 거짓말로,
"내 사촌 형이 먼 시골에 살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가 왔으므로 가야겠다."
하고 심복 시녀 납매 등 다섯 명과 인아, 봉추 형제를 데리고
남은 비복들은 자기가 다녀올 때까지 집을 잘 지키라고 이르고
집을 떠났다. 이에 인아를 맡아 기르던 유모가 따라가고자
원하였으나,
"인아는 젖 먹지 않아도 아무 관계없으니 내가 장례를 보고 곧
돌아올 테니 너는 가지 않아도 좋다."
하고 꾸짖어 물리쳤다. 그리고 집에 있던 금은 주옥을 비롯한
값진 재물을 모두 꾸려가지고 갔으나, 그 눈치를 아는 사람도
감히 막을 수가 없었다. 집을 떠난 교씨가 사흘 동안 주야로
급행하여 약속한 지점에 이르니 동청이 부임 행차의 의의를
갖추고 벌써 거기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탕아 음부는 서로
만나서 이제는 저희들 세상이 되었다고 기뻐 날뛰었다.
"인아는 원수 사씨의 자식인데 데려다 무엇하겠소? 빨리
죽여서 화근을 없앱시다."
동청의 말을 옳게 여기고 시비 설매에게,
"인아가 장성하면 너와 내가 보복을 당할 테니 빨리 끌어다가
물에 넣어서 자취를 싹 없애 버려."
하고 명하였다. 설매가 곧 인아를 안고 강가로 가서 물에 던져
버리려고 할 때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는 금방 죽을 줄도 모르고
악마 같은 설매의 품안에서 색색 잠을 자고 있었다. 이것을 본
설매의 마음에는 자기도 모를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눈물을
흘리고 혼잣말로,
"사씨 부인의 인덕이 저 강물같이 깊은데 내가 억울하게 죽는
데 방조하고 이제 그 자식마저 해치면 어찌 천벌을 받지
않으랴."
하고 차마 죽일 수가 없어서 인아를 강가의 숲속에 감추어
두고 돌아와서 교녀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아이를 물 속에 던졌더니 물 속에서 잠깐 들락날락 하다가
가라앉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교녀와 동청이 기뻐하고 채선(彩船)에
진수성찬을 차려서 술을 통음하고 비파를 타고 노래를 하면서
음란하기 형언할 수 없었다. 거기서 배를 내려서 위의를 갖추고
육로로 진유현에 도임하였다.
한편 유한림은 금의옥식으로 생장하여 높은 벼슬을 지내다가
일조에 적객의 몸으로 영락하여 귀양길을 촌촌전진하여 적소에
이르렀다. 그 도중에 고초가 참혹하였으며 북방의 수토가
황량하고 험악할 뿐 아니라 주민들의 습관이 포악무도하였으므로
과거의 일을 회상하고 후회하여 마지 않았다.
'사씨가 동청을 집사로 채용할 때부터 꺼려하더니 그 슬기로운
사람 봄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는 내가 화근을 자초하고 사씨를
학대하였으니 지하에 가서 무슨 면목으로 선조의 영혼을 대할
것이냐?'
하는 생각으로 한숨을 쉬는 동안에 자기도 모르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이때부터 주야로 심화(心火)가 가슴을 태워서
병이 되어 눕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지방에서는 약을 구할 길이
없어서 병은 점점 위중해질 뿐이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비몽사몽간에 노인이 와서,
"한림의 병이 위중하시니 이 물을 잡수시고 쾌차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권하였다. 유한림이 이상히 여기고 물었다.
"노인은 누구신데 이 외로운 적객의 병을 구해 주시려고
합니까?"
"나는 동차군산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 말만 하고 물병을 마당에 놓고 홀연히 떠나가므로 재차
물으려고 부르는 자기 음성에 깨어 보니 병석에서 꾼 꿈이었다.
유한림은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 이튿날 아침에
노복이 뜰을 쓸다가 놀라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유한림에게
들렸다,
"뜨락 마른 땅에서 갑자기 웬 물이 솟아나올까? 참 이상도
하다."
유한림이 목이 타서 신음하다가 창을 열고 내다보니 물나는
곳이 꿈에 나타났던 노인이 물병을 놓고 간 그 장소였다.
유한림이 노복에게 그 물을 떠 오라 해서 먹어 보니 맛이 달고
시원해서 감로수같이 좋았다. 그 물 먹은 즉시로 유한림의 병이
안개 가시듯이 금방 낫고 기분이 상쾌해졌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기고 탄복하였다. 그 소문을 들은 지방
사람들이 모여 와서 먹고 모두 수토병이 나았으며 그 후로 이
행주 지방의 수토병이 근절되고 말았다. 이에 감격한 사람들은
그 우물을 기념하기 위하여 학사천(學士泉)이라고 불러서
후세까지 유명하게 되었다.
한편 동청은 교씨와 함께 진유현에 도임한 후에 백성에 대하여
탐람을 일삼았으며 세금을 가혹하게 받는 등 고혈을
착취하였으나 그래도 부족한 동청은 황제에게 상소하여 승상
엄숭에게 가봉(加俸)을 요청하였다.
'진유현령 동청은 고두재배(叩頭再拜)하옵고 수상 좌하에 이
글을 올리나이다. 소생이 미한한 정성을 다하여 승상을 섬기고자
하되, 이 고을이 산박하며 재화가 없으므로 마음과 같지
못하오니 재정과 산물이 풍부한 남방의 수령을 시켜 주시면 더욱
정성을 다할 수 있을까 하옵니다.'
엄승상이 이 기회에 수단가인 동청을 아주 심복부하로
만들려고 곧 남방의 웅읍(雄邑)의 수령으로 영전시키려고 곧
황제에게 진언하였다.
"진유현령 동청이 재기과인하므로 큰 고을을 감당할 만하오니
성상께서 적소에 써 주시기 바라옵나이다."
"경이 보는 바가 그러하면 각별히 큰 고을의 수령으로
승진시켜서 그의 재능을 발휘하게 하라."
하고 곧 허락하셨다. 이때 마침 계림태수의 자리가 비어
있으므로 엄승상은 곧 동청을 금은보화가 많이 나는 고을로
영전시켰다. 그리하여 제 뜻대로 재물이 풍부한 계림의 태수가
된 동청은 교씨를 데리고 부임하여 더욱 탐관오리의 수완으로
백성의 고혈을 수찰하기에 분망하였다.
때마침 황제가 태자를 책봉하는 나라의 큰 경사가 있었으므로
유학사도 사은(赦恩)을 입었다. 그러나 곧 서울 본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척친이 있는 무창으로 향하였다. 여러 날 길을
가다가 장사 땅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때가 마침 여름의
염천이라, 더위로 여행이 어려웠다. 피곤한 몸의 땀을 식히려고
길가의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전후사를 생각하였다.
'내 신령의 도움으로 삼 년 동안의 귀양살이에서도 심한
수토병도 면하였고, 또 천사(天赦)를 입어서 돌아가게 되었으니
북경의 처자를 데려다가 고향에 두고 생을 어옹(漁翁)이 되어
성대의 한가한 백성으로 지내면 얼마나 즐거우랴.'
하고 외로운 몸을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북쪽에서 왁자지껄하는 인성이 들리더니 붉은 곤장을 든 관졸과
각색기치를 든 하인들이 쌍쌍이 오면서 길을 치우라고 호통을
하였다. 유한림이 무슨 어마어마한 행차인 줄 짐작하고 몸을
얼른 부근 숲속으로 숨기고 보니 한 고관이 금안백마 위에 높이
타고 수십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지나고 있었다. 유한림이 그
말을 탄 사람을 자세히 본즉, 분명히 자기 집에서 집사로 일하던
그 간악한 동청이었다.
"아니 저놈이 어떻게 높은 벼슬을 하고 이 지방을
행차해갈까?"
의심하고 일행의 거동을 살펴보니, 그 기구가 자사(刺使)가
아니면 태수의 지위임이 분명하였다.
'아하, 저 간통스러운 놈이 천하의 세도가 엄승상에게
아부하여 저런 출세를 하였구나.'
하고 더욱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동청이 탄 백마가
지나간 뒤에 곧 이어서 길 치우라는 관졸의 호통이 들리더니
채의시녀 십여 명이 칠보금덩을 옹위하고 지나갔다. 그것이
동청의 처의 일행이라고 짐작한 유한림은 그 행렬이 다 지나간
뒤에 다시 큰길로 나와서 한참 가다가 주점에 들러서 점심을 사
먹었다. 이때 맞은편 집에서 여자 한 명이 나오다가 주점에서
점심을 먹는 유한림을 보고 놀라면서 물었다.
"유한림께서 어떻게 이런 곳에 와 계십니까?"
유한림도 놀라서 그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그 여자가
다름 아닌 사씨의 시녀였던 설매였다.
"나는 이제 은사를 입고 귀양이 풀려서 황성으로 돌아가는
길이다마는 너는 어떻게 이곳에 왔느냐? 그래 그동안 댁내가
평안하냐?"
"대감님, 이리로 오세요."
설매는 황망히 유한림을 사람 없는 장소로 모시고 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목멘 소리로,
"그동안 댁에서 겪은 일을 다 아뢰겠습니다. 한림께서는 아까
지나간 행차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동청이 무슨 벼슬을 하고 가는 모양이더라."
"뒤에 가던 가마 행차는 누구로 아셨습니까? 동해수를
기울여도 씻지 못할 원통한 일입니다."
"그야 필경 동청의 내자일 게 아니냐?"
"동태수의 그 내권이 바로 교낭자입니다. 소비도 일행을 따라
가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저 집에 들렀다가
뜻하지 않은 한림을 이렇게 뵈옵게 되었습니다."
유한림이 설매의 말을 듣고 기가 막혀서 한참 말을 못하다가
이윽고 설매에게 다시 물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느냐! 좌우간 이렇게 된 자초지종을
자세히 말하라."
유한림이 비통한 안색으로 재촉하자, 설매가 흐느껴 울면서
호소하였다.
"소비는 하늘을 속이고 주인을 저버린 죄가 천지에 가득하오니
한림께서 관대히 용서하여 주십시오."
"내 지난 일은 탓하지 않을 테니 사실대로 숨기지 말고
말하라."
"사씨 부인께서는 비복을 사랑하셨는데 불충한 소비가 우둔한
탓으로 교낭자의 시비 납매의 꼬임에 빠져서 사씨 부인의
옥지환을 훔쳐 내었으며 교낭자 소생 장지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사씨 부인에게 씌워서 축출케 하는 계교에 방조한 것이
모두 소비의 죄올시다. 그 근원은 모두 교낭자가 동청과
사통하여 갖은 추행을 일삼으면서 요녀 십랑과 공모하여 꾸민
간계였습니다. 한림께서 행주로 귀양가시게 된 것도 교낭자가
동청과 함께 엄승상에게 참소하여 꾸민 농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림께서 행주로 귀양가신 뒤에 교낭자는 동청을 따라 도망할
때도 형의 초상을 당하여 조상하러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 댁에
있는 보화를 전부 훔쳐 가지고 갔습니다. 소녀는 비록 배우지
못한 비천한 계집이나 이런 해괴한 변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일입니다. 또 교낭자의 투기와 형벌이 혹독하여 시비들을
악형으로 괴롭혔으매, 소비도 비록 한때 이용은 당했으나 언제
살해될지 모르는 목숨입니다."
하고 설매는 자기 소매를 걷고 팔뚝에 악형당한 흉터를
내보이면서 말을 이었다.
"미천한 제 신세라 어미 품을 떠나서 호구지책으로 종의 몸이
되어서 그런 포악한 상전을 만났으니 누구를 원망하오며 제가
저지른 죄가 끔찍하오니 만 번 죽은들 어찌 속죄하겠습니까."
유한림이 설매의 보고와 참회하는 말을 듣다가 인아도
죽이려고...... 하는 말에 이르러서, 크게 실성하고 아찔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유한림은,
"내가 어리석어서 음부에게 속아 무죄한 처자를 보전치
못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세상과 조상께 대하랴."
유한림이 탄식하자 설매는 인아를 죽이려던 경과에 대하여
말을 계속하였다.
"교씨가 소비에게 인아 공자를 물에 넣어 죽이라는 명을 받고
강가에까지 갔었으나, 그때 비로소 소비의 잘못을 뉘우치고 차마
교씨 말대로 할 수가 없어서 길가의 숲에 숨겨 두고 가서 물에
넣었다고 거짓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혹 어쩌면 그 인아
공자는 어떤 사람이 데려다가 잘 기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그렇게라도 되었으면 제 죄의 만분지 일이라도 덜어질까
하고 공자의 생존을 신명께 빌어 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한림이 약간 미간을 펴고,
"다행히 너의 그 갸륵한 소행으로 인아가 살았다면 너는 그
애의 생명의 은인이다."
"밖에 저를 데리러 온 사람이 있으니 지체하면 의심받을까
겁이 납니다. 떠나기 전에 한 말씀 급히 아뢰고 가겠습니다.
어제 악주에서 행인을 만나서 들은 소식이온데 한림부인께서
장사로 가시다가 풍랑을 만나서 물에 빠져 돌아가셨다는 말도
하고, 다른 사람은 어떤 도움으로 살아 계시다고 풍문이
자자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겠으니 한림께서 수소문하여 자세히
알아보시고 선처하십소서."
하고 설매는 밖에서 부르는 동행 시비를 따라서 급히 나가
버렸다. 설매가 교씨의 행렬을 쫓아가자 교씨가 의심하고 늦게
온 이유를 추궁하였다.
"낙마한 상처가 아파서 곧 오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핑계하였으나 교씨는 의심이 많고 간특한 인물이라
설매를 데리고 동행해 온 시비에게 다시 물었다.
"설매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다가 그 앞집의 주점서 어떤
관위를 만나서 한동안 이야기하느라고 이토록 늦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더냐?"
"행주 땅에 귀양갔다가 풀려서 돌아오는 유한림이었습니다."
교씨가 깜짝 놀라서 행차를 멈추고 동청과 함께 선후책을
상의하였다. 동청도 대경실색하고,
"그놈이 죽어서 탸향 귀신이 될 줄 알았는데 살아서 돌아오니
만일 다시 득의하면 우리는 살지 못할 것이다."
하고 건장한 관졸 수십 명을 뽑아서 유한림의 목을 베어 오면
천금의 상을 주리라고 명하였다. 이런 소동이 일어난 것을 본
설매는 교씨에게 맞아 죽을 것을 겁내고 뒤로 가서 나무에 목을
매고 죽었으므로 교씨는 그년 잘 되었다고 기뻐하였다.
이때 유한림은 설매로부터 기막힌 소식을 듣고 힘없는
걸음으로 가면서 생각하였다.
'내가 음부의 간교한 말을 듣고, 현처를 멀리하여 자식을
보전하지 못하고 일신이 이처럼 표박하게 되었으니 만고의
죄인이다.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처자를 보겠느냐.'
하고 악주에 이르러 강가를 배회하면서 부근 사람들에게 그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사씨의 소문을 알아보려고 하였으나 모두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유한림은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끈덕지게
수소문하다가 어떤 노인을 만나 물었더니 어느 해 어느 달 어떤
부인이 시녀 두어 명을 데리고 악양루에서 밤을 지새고 강가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으나 그 후의 일은 모르겠다고 알려 주었다.
유한림은 그것이 필경 사씨로서 물에 빠진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더욱 절망하고 슬퍼하였다.
유한림은 그 강가를 떠나지 못하고 사방으로 배회하다가 큰
소나무 껍질을 깎아 거기에 큰 글씨로 쓴 것을 발견하였다.
'모년 모일 사씨 정옥은 이곳에서 눈물을 뿌리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 유서를 발견한 유한림은 깜짝 놀라서 통곡하다가 그대로
기절하였다. 시동이 황망히 구원하여 한림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탄식하였다.
"부인이 그 현숙한 덕행으로 비명에 죽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억울한 물귀신에게 제사라도 지내서 위로하리라."
하고 제문을 지으려 하자 마음이 아득하여 눈물이 앞을 가려서
붓이 내려가지 않았다. 이때에 갑자기 밖에서 함성이
진동하였다. 놀라서 문을 열고 보니 장정 수십 명이 칼과 창을
들고서 들이닥치면서 외쳤다.
"유연수만 잡고 다른 사람은 상하지 말라!"
유한림이 놀라서 뒷문으로 도망쳐서 방향도 없이 허둥지둥
달아났다. 마치 그물을 벗어난 물고기 같고 함정에서 뛰어나온
범같이 정신없이 도망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앞길이
막히고 바다 같은 큰 물이 가로놓였으므로 정신이 아득하여
진퇴가 극히 어려웠다.
"유연수가 이 물가에 숨었으니 샅샅이 뒤져서 잡아라!"
뒤에서 추격하는 괴한들이 호통을 쳤다. 유한림은 이제는
잡혀서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였다.
"내가 선량한 처자를 애매하게 학대하였으니 어찌 천벌을 받지
않으랴. 남의 손에 죽느니보다는 차라리 물에 빠져서 스스로
죽으리라."
하고 물에 몸을 던지려는 순간 문득 배 젓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유한림이 그 뱃소리 나는 곳을 찾아 허둥지둥 가면서,
'어떤 사람이 나의 위급한 몸을 구해 주려는 것일까.'
하고 요행이라도 있기를 하늘에 빌었다.
동정호 섬에 있는 수월암의 묘혜 스님은 사씨 부인을 보호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사씨에게,
"부인, 오늘이 사월 보름날인데 그 전에 하시던 말을
잊으셨나요?"
하고 물었다. 사씨는 세상과 인연이 없는 섬 속의 한가로운
암자에서 세월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체력이 필요없는
생활이라, 그 중대한 사월 보름날의 일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금년 사월 보름날에 배를 백빈주에 매고 있다가 급한 사람을
구하라는 예언을 시부님 영혼이 가르치셨다 하셨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어서 백빈주로 배를 저어 가십시다."
사씨 부인은 그날 황혼에 배에 올라 백빈주로 저어 가면서
급해서 이 배의 구원을 받은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궁금히
여기면서도 반가운 사람이면 얼마나 좋으랴 하는 생각이 들자
자연 자기 신세의 슬픈 회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유한림이 뱃소리가 가까워 오는 강가로 내려가면서 물 위를
보니 어떤 여자가 일엽편주를 저어 구슬픈 노래를 탄식처럼
부르며 오고 있었다. 그 노래의 귀절이 유한림에게 들려왔다.
창파에 달이 밝으니
남호의 흰 마름[白濱]을 캐리로다
꽃이 아름다워 웃고자 하되
배 젓는 사람 슬퍼하는도다
이 노래를 받아서 부르는 또 다른 여자의 노래도 들렸다.
물가의 마름을 캐니
강남의 날이 저물었네
동청에 사람 있어 고인을 만나리로다
유한림이 배를 향하여 빨리 배를 대어서 사람 살려 달라고
구원을 청하였다. 배를 젓던 묘혜가 백빈주 물가로 배를 대려고
하자 사씨가 당황해서 묘혜를 말리면서,
"저 사람의 음성이 남자인데 이상한 남자를 이 배에 태워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주저하였다. 그러나 묘혜는 조금도 저어하지 않고,
"급한 인명이 천금보다 귀중한데 목전에 죽을 사람을 어찌
구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급히 배를 저어서 물가로 대었다. 유한림이 배에
뛰어오르면서 애원하였다.
"도적놈들이 내 뒤를 쫓아오니 빨리 배를 저어 주시오."
조금만 늦었으면 유한림은 추격하던 동청의 부하 관졸에게
잡힐 뻔하였다. 체포 직전에 뜻하지 않은 배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본 괴한들은 호통을 치며 배를 불렀다.
"배를 도로 돌려 대라. 그렇지 않으면 전부 죽여 버린다!"
그러나 묘혜는 못 들은 척하고 배를 저어 그들의 추격을
피해갔다.
"그 배에 태운 놈은 살인한 죄인이다. 계림태수께서 잡으라는
놈이니 그놈을 잡아오면 천금 상을 주신다."
유한림은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놈들이 보통 도적이 아니고
동청이가 보낸 관졸임을 분명히 알았다. 머리끝이 새삼스럽게
쭈뼛해지고 전신에 소름이 끼친 유한림은 묘혜를 향하여
호소하였다.
"나는 한림학사 유연수로서 살인한 죄가 없는데 저 도적놈들이
공연히 꾸며서 하는 소리입니다."
묘혜는 유한림이 선량한 사람인 줄로 알았으므로 도적들을
비웃는 듯이 닷줄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기까지 하였다.
창오산 저문 날에
달빛이 밝았으니
구의산의 구름 개는데
저기 가는 저 속객은
독행 천리 어디를 부질없이 가는가
유한림은 사지(死地)에서 뜻밖에 구해 준 배 안의 두 사람의
여자, 그 중의 늙은 여자가 부르는 이 노래의 의미도 알아들을
경황이 없었다. 이때 배 안에 담장소복으로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유한림을 보더니 놀랍고 반가워서 울음을 터뜨렸다.
유한림이 이상히 여기고 자세히 보니 자기의 아내 사씨가
분명하지 않은가.
"부인을 여기서 만나다니, 이것이 웬일이오!"
유한림은 뜻밖에 만난 부인에게 인사한 후에 자연 나오는
탄식은 부인에 대한 자기 불찰의 후회와 사과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이제 무슨 낯을 들어 부인을 대하겠소. 부끄럽고 마음이
괴로워서 할 말이 없소. 그러나 부인은 정신을 진정하고 이
어리석은 연수의 불명을 허물하시오."
하고 설매에게 갓 듣고 온 소식을 마치 자백하듯이 말하였다.
즉 사씨 부인이 집을 떠난 후에 교씨가 십랑과 공모하고 방예로
저주한 일이며 또 설매가 옥지환을 훔쳐 내다가 냉진과 더불어
갖은 흉계를 꾸민 말을 다 하였다. 사씨 부인이 남편의 이런
뉘우치는 말을 듣고 감사하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한림께 이런 말씀을 듣지 못하였으면 죽어도 어찌 눈을
감았겠습니까?"
하고 흐느껴 울었다. 한림이 또 설매를 꼬여서 장지를 죽이고
춘방에게 미루던 말과, 동청이 엄승상에게 참소하여 자기가 죽을
뻔하였다는 말과 교씨가 집안의 보물을 전부 가지고 동청을
따라간 경과를 알리자 사씨 부인은 기가 막혀서 묵묵히 울고만
있었다. 유한림은 부인이 아직도 자기의 잘못을 야속히 여기는
분함을 풀지 않고 대답도 않는 것이 아닐까 하고 더욱 가슴이
답답하였다.
"다른 것은 참을 수 있다 하더라도 어린 자식 인아가 죄도
없이 부인의 품을 잃고 아비도 모르게 강물 속의
무주고혼(無主孤魂)이 되었으니 어찌 견딜 수 있겠소."
하고 탄식하는 유한림의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이 흘러내렸다.
사씨 부인은 처음부터 너무 놀라워서 말도 못하고 있었다가
유한림의 이런 말을 다 듣자 외마디 비명을 올리고 기절하고
말았다. 한림이 황급히 구호하여 부인이 정신을 차리자 한림은
실의 상태에 빠진 부인을 위로하려는 듯, 또는 요행을 바라는
듯이,
"설매의 말을 들으니 인아를 차마 물에 던져 죽이지 못하고
길가의 숲속에 숨겨 두었다 하니 혹 하늘이 도우셨으면 어떤
고마운 사람이 데려다 길러 주고 있을지도 모르니 만나지
못하더라도 어디서든지 살아 있기만 해도 내 죄가 덜할까 하오."
사씨 부인이 흐느껴 울면서 비로소 입을 열었다.
"설매의 그 말인들 어찌 믿을 수 있습니까? 설사 숲속에 넣어
두었더라도 어린 것이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서로 죽은 줄 알았다가 만난 부부는 반갑기보다도 어린 인아의
생사로, 새로운 슬픔에 사로잡혀서 오열하였다.
"아까 강가의 소나무를 깎고 쓴 필적을 보니 부인이 물에 빠져
죽은 유서가 분명하므로 슬픈 회포를 제문으로 지어 제사를
지내고 고혼이나마 위로하려고 하다가 마침 동청이 보낸
자객놈들을 만나서 데리고 오던 동자의 잠을 깨울 새 없이
쫓겨서 강가까지 왔으나 앞에 물이 막혀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 부인의 배로 생명의 구원을 받았으니 감사하여 마지
않는데, 도시 부인은 어떻게 이곳에 와서 나를 구해 주었소?"
"제가 선산 묘하에 있을 적에 도적이 위조 편지를 하여 제가
속아서 납치될 뻔하였으나 시부님께서 현몽하셔서 모년 모월
모일에 배를 백빈주에 대령하고 있다가 급한 사람을 구하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오늘이 바로 그때 분부하신 날입니다. 그러나
제가 아득히 잊고 있었던 것을 저 스님께서 기억하시고 있어서
오늘 배를 타고 왔더니 과연 한림을 위급에서 구하게 되었으니
저 묘혜 스님은 우리 양인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아까 보셨다는
소나무의 유서를 쓰고 물에 뛰어들려고 했을 때에도 저 묘혜
스님이 구해다가 스님 암자에 지금까지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유한림이,
"우리 부부는 묘혜 스님의 힘으로 살았으니, 그 태산 같은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고 묘혜를 향하여 사례한 뒤에,
"지금 생각하니 묘혜 스님은 원래 서울에 계시던 스님이
아니십니까?"
"호호, 소승의 일을 한림께서 기억하고 계십니까?"
"기억만 하겠습니까. 당초에 우리 혼사를 담당해 주시고 이제
또 우리 부부를 구해 주시니 하늘이 우리 부부를 위하여 스님을
이 세상에 내신가 하옵니다."
묘혜가 유한림의 감사에 사양하면서,
"한림과 부인의 천명이 장원(長遠)하시기 때문이지 어찌
소승의 공이라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곳에서 오래 말씀하고 계실
것이 아니라 빨리 소승의 암자로 가셔서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하고 묘혜가 배를 젓기 시작하자 순풍이 불어서 순식간에 암자
있는 섬에 도달하였다. 수월암에 이르러서 묘혜가 객당을
소제하고 유한림을 맞아들이고 차를 대접할 때 사씨를 모시던
유모와 시녀가 유한림을 뵈옵고 일희일비의 주종(主從)의 회포를
금하지 못하였다. 유한림이 부인을 보고 말하기를,
"이제 호구의 환은 벗어났으나 의지할 곳이 없고 가업이
황폐하였으니 무창으로 가서 약간의 전량을 수습하여 앞일을
정한 후에 서울로 올라가서 가묘를 모시고 전죄(前罪)를 사코자
하니 부인이 나를 버리지 않으면 동행하기 바라오."
"한림께서 저를 더럽다 하시지 않으시면 제가 어찌
역명하겠습니까. 제가 선산을 떠날 적에 친척을 모아서 가묘를
개축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제 댁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제가 옛일을 죄로 생각한 것은 없으나 사람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서 그럽니다. 출거지인이 다시 입승하는데 예절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 내가 너무 급하게 생각한 모양이오. 내가 먼저 가서 묘를
모셔오고 다시 소식을 수소문한 후에 예를 갖추어서 데려
가리다."
"그는 그러하오나 한림의 외로운 몸이 또 도적의 무리를
만나시면 위태하니 조심하여 가십시오. 동청이 폭도를 보내어
잡지 못하였으므로 필연 다시 잡아 죽이려고 할 것이 분명하니
한림은 성명을 바꾸고 변복으로 가십시오."
유한림이 사씨 부인의 염려가 옳다 하고 혼자 떠나서 여러
날만에 고향땅 무창에 이르러서 약간의 재산을 수습하고 선산을
수축하고 노복을 시켜서 농업을 경영하도록 지시하였다.
한편 동청은 교녀를 데리고 계림태수로 도임해 가다가 악양루
부근에서 유한림이 은사를 받고 귀양이 풀려서 행주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서 장정 수십 명을 급히
보내어 목을 베려고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교씨와 함께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유연수가 무사히 서울로 가면 우리 죄상을 황제께 아뢰고
원한을 풀 것이니 어찌 방심하겠소?"
하고 심복부하의 관졸들에게 유연수를 극력 수색하여 잡으라고
엄명하였다. 그리고 사씨 학대에 공모하던 냉진도 의지할 곳이
없어서 생각한 끝에 큰 벼슬을 한 동청을 찾아서 도움을 청하자,
동청이 환대하고 심복을 삼고 그의 간교로 갖은 악행을 하여
백성을 가렴주구하고 왕래하는 행인을 유인하여 독주를 먹여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이리하여 남방의 사람들은 모두
독청의 학정을 저주하고 그의 고기를 씹으려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교씨는 계림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데리고 온
아들 봉추가 병들어 죽었으므로 역시 어미의 정으로 번민하였다.
큰 고을 계림에는 자연 관사가 많아서 분망하였다. 따라서
동청이 자주 관하 소현에 순행하여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그리하여 동청이 본아에 없는 동안은 불량배 냉진이 내외사를
다스리게 되어 세도를 부리는 한편 요부 교씨는 동청의 눈을
속이고 냉진과 간통하고 추태를 재연했다. 마치 유한림 집에서
유한림의 눈을 속이고 동청과 간통하던 버릇을 그대로
되풀이하였던 것이다.
동청은 자기의 지위와 재산을 더 얻으려는 수단으로 계림 지방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여 십만보화를 엄승상에게 뇌물로 바치려고
그의 생일축하 선물 명목으로 냉진에게 전달시켜 보냈다. 그런데
냉진이 서울에 와서 보니 이미 엄승상의 세도가 무너진 때였다.
황제도 그의 간악함을 깨닫고 관직을 삭탈하고 가산을 압수하는
소동 중이었다. 냉진은 깜짝 놀라서 그 화가 자기에게도 미칠
것을 두려워하였다. 자기의 보호자요 공모자인 동청의 죄악이
많은 사실은 세상이 다 알고 있었으나 그의 배후에는 엄승상의
세도가 두려워서 감히 말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언제나 제
욕심에서 남을 이용만 하고 의리라고는 추호도 없는 냉진은
자기가 살아날 계교로 동청을 숙청시키는 공을 세우려고
등문고(登聞鼓)를 울려서 법관에게 민정을 호소하였다. 법관이
무슨 소송이냐고 묻자 냉진은 천연스러운 우국양민의 열변으로
진술하였다.
"저는 북방 사람으로서 남방에 다니러 갔다 왔습니다. 계림
지방에서는 태수 동청이 불인무의하여 학정을 일삼을 뿐 아니라
하늘을 속이고 무소불위하여 행인을 겁박하여 재물을 탈취하는
등 열두 죄목을 아룁니다."
법관이 냉진의 진술대로 황제에게 아뢰자 황제께서 대로하고
금오관을 파견하여 동청을 잡아 가두라고 분부하고 따로
순찰관을 보내서 민정을 조사한즉 냉진이 고발한 사실과 조금도
틀리지 않는 학정을 일삼고 있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조정에는
이미 동청의 죄를 비호해 줄 엄승상이 숙청되었으므로 그를 구해
줄 사람은 없었다. 간악한 동청이 아무리 간신의 세도를 믿고
갖은 악행으로 재물을 구산같이 쌓고 살기를 원하였지만 어찌
불의의 뜻대로 되리오. 그는 속절없이 잡혀 와서 장안
네거리에서 요참의 형을 받았으며 백성에게 도적질한 재산을
몰수한 황금이 사만 냥이요, 그밖의 재물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냉진은 동청을 배반한 덕으로 제 죄를 면하였을 뿐 아니라,
동청이 엄승상에게 보내던 뇌물 십만 냥을 고스란히 착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청의 덕을 볼 때에 간통하던 교녀를 데리고
당당한 부부행세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서울에서 살기에는
뒤가 켕겨서 멀리 산동으로 피해 갔다. 산동으로 가는 도중에
어떤 여관에서 탕남음녀는 술에 만취하여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그들을 태우고 가던 차부 성대관이란 놈이 본디
도적놈이었으므로 냉진의 행장에 큰 돈 냄새를 맡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그날밤에 냉진의 재물을 송두리째 훔쳐 가지고
도망해 버렸다. 냉진과 교녀는 함께 잠을 깬 후 도적맞은 것을
알고 애고하고 한탄할 따름이었다.
이때 황제가 조회를 받고 각 읍 수령의 불치를 탐문하시는 중
동청의 죄상 보고를 듣고 통탄하시며,
"이런 도적을 누가 그런 벼슬에 천거하였는고?"
"엄승상의 천거로 진유현령에서 계림태수로 승진시켰던
것입니다."
하고 승상 석가뇌가 보고해 올렸다.
"그렇다면 이 한가지로 미루어 보면 엄승상이 천거한 자는
모두 소인이요, 그가 배격하던 자는 모두 어진 사람임을 가히 알
수 있다."
하시고 엄승상의 잔당은 모두 벼슬을 삭탈하고 엄승상의
질시로 몰려서 귀양갔거나 좌천되었던 신료를 다시 초용하여
관기를 일신하였다. 이번의 큰 인사이동으로 가의대부 호연세로
도어사를 삼으시고 한림학사 유연수로 이부시랑을 삼으시고 또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천하에 구하셨다. 이때 외해랑이
급제하여 문벌의 영화를 보전하였으니 그는 유한림의 부인
사씨의 남동생이었다. 사씨 부인이 두부인을 찾아서 남방의
장사로 향할 때 두총관은 이미 이직하고 서울로 돌아갈 때에
두부인도 함께 상경하였다. 사공자는 서울에서 그런 줄도 모르고
또 누님이 장사로 가다가 중간에서 낭패한 사실도 전혀 모르고
배를 얻어 타고 장사로 가려던 참에 서울의 조보를 보고
두총관이 순천부사로 영전된 것을 알았다. 마침 과거 시행의
시일이 멀지 않아 있게 되었으므로 두부인이 상경하기를
기다리며 과거 공부를 하다가 다행히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때
마침 순천부사로 승진된 두총관이 부임준비차 상경하였다.
사공자는 곧 누님의 소식을 물었으나 무사는 소식을 모른다고
눈물을 머금고 슬퍼하였다.
사공자는 누님이 장사로 가다가 중도에서 낭패하고
진퇴유곡하여 마침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 누님
소식을 알려고 물가에 가서 두루 찾았으나 생사를 모른다는
소식을 두부인께 보고하였다.
"그때 그곳의 어떤 사람 말로는 어느 해 유한림이 그곳에 와서
사부인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필적을 보고 슬퍼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려고 하다가 그날 밤에 도적에게 쫓겨서 어디로 간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조정에서 유한림을 다시 벼슬에
영전시키려고 찾으나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오니 기쁨이 도리어
더욱 슬픔이옵니다."
"그렇다면 한림은 살지 못하였을 듯하다."
하고 두부인이 여러 사람을 보내서 사방으로 탐문하자
유한림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많다는 보고였다. 이에
용기를 얻은 사공자가 행장을 차리고 악양루 근처의 강가에
이르러서 극진히 누님과 유한림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역시
행방이 묘연하여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단념은 하였으나
남양 지경이 장사와 멀지 않으니 도임한 후에 찾으려고
생각하였다.
이때에 유한림은 이름을 고치고 모든 행동을 취하였으므로
그의 신분을 알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유한림은 고향에서
비복에게 농사를 열심히 짓게 하고 그 수확의 일부를 군산사로
사씨 부인에게 보내고 소식을 알아오라고 일러 보내었더니
다녀온 동자가 돌아와서,
"부인께서는 무사하십니다. 그런데 약주관아에서 방을 붙이고
한림을 찾고 있습니다. 그 연고를 물어 보았더니 황제께서
한림을 초용하셔서 이부시랑을 제수하시고 사신을 적소 행주로
보내서 찾았으나 벌써 은사를 입고 돌아가셨으나 종적을 몰라서
각처에 방을 붙이고 한림을 찾는 중이라 합니다. 그래서 소복은
감격하였으나 한림 허락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관원에게 고하지
못하고 빨리 소식을 알려드리려고 달려왔습니다."
유한림은 동자의 이 소식을 듣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엄승상이 천권하면 내 어찌 이부시랑에 초용되리오. 내가
초용되었다면 엄승상이 쫓겨난 모양이구나.'
하고 무창으로 나가서 관청에 복명하자 관원이 크게 놀라서
급히 맞아 당상으로 인도하면서,
"황제께서 선생을 이부시랑으로 제수하시고 소명이
미급하시온데 이제 어디로부터 오십니까?"
"소생이 뜻하는 바가 있어서 신분을 숨기고 다니다가 황제께서
엄승상을 조정에서 몰아내시고 현자를 부르시는 말씀을 듣고
왔습니다."
유한림은 무창 관원에게 이렇게 신분을 밝혔다. 그리고 외로운
섬의 암자에서 좋은 소식을 기다리는 부인에게 이 소식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오늘부터 유시랑의 신분이 된 유연수는 빨리
상경하여 황제께 복명하려고 역마를 몰아 길을 재촉해 갔다.
유시랑이 남창부에 이르자 지방 장관이 명함을 드리고
인사하였다. 유시랑이 명함을 받아서 본즉 성명이
사경(謝敬)으로 되어 있으나 본인의 얼굴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지방 장관은 유시랑을 귀빈으로 영접하고 주찬으로 환대하였다.
그런데 그 관원의 얼굴에 수색이 가득 차 있으므로 이상히
여기고 물으니,
"하관이 심중에 소회가 있어서 자연 기운이 없어 보인
모양이니 실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고 자기 누님을 한번 이별한 후에 생사를 모르고 매부
유한림의 종적도 묘연하다는 한탄을 하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유시랑이 비로소 그 지방 장관이 처남 사공자임을 알고
손을 잡고 탄식하였다.
"아 자네가 내 처남 아닌가. 내 얼굴을 자세히 보게."
남창부윤 사경이 놀라서 자세히 보니 분명히 매부 유한림이라,
반갑게 소매를 잡고 누님의 소식을 물었다.
"내가 우암하여 무죄한 누이를 집에서 내쫓아서 그 후에 갖은
억울한 고생을 시켰으니 자네 대할 면목이 없네."
"지난 일은 하는 수 없습니다. 누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묘혜 스님의 구원을 받고 지금 군산사에 잘 있으니 염려
말게."
"누님이 생존해 있는 것은 매형님의 복입니다. 묘혜 스님의
은혜는 백골난망입니다."
"자네는 너무나 마음을 상하지 말게. 천은이 호대하시매 다
갚기 어려운데 나의 박덕으로 이런 영복을 당하니 황송하기
그지없네."
하고 서로가 술잔을 나누며 끝없는 이야기를 다하지 못하고
이별하였다. 유시랑은 서울로 나가서 황제께 사은하자 친히 불러
보시고 간신 엄승상에게 속아서 유시랑의 충성을 모르고
고생시킨 존후사를 후회하였다. 유시랑이 황송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성은이 이렇게 홍대하시니 미신이 황공무지하옵니다."
"경의 뜻이 굳어서 특히 강서백(講書伯)을 삼으니
인심찰직(仁心察職)하기 바라오."
"황공하옵니다."
유시랑이 어전을 하직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비복들이 나와서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 당사가 황량하고 정자에 잡초가 무성하여
주인이 없음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유시랑이 사당에
참배하고 통곡 사죄하고 고모 두부인을 찾아 사죄하매 부인이
흐느껴 울고,
"이 늙은 몸이 살았다가 현질이 다시 귀달(貴達)함을 보니
죽어도 한이 없다. 그러나 네가 조종향사를 폐한 지 오래니 그
죄가 어찌 가벼우랴."
"제 죄는 만 번 죽어도 부족하오나 다행히 부부가 다시
만났으니 죄를 용서하십소서."
두부인이 질부와 만났다는 말에 놀라운 기쁨을 참지 못하고,
"조카의 액운이 인제야 다하였구나. 옛날에 현인에게는 복을
내리고 악인은 재화를 만난다 하니 너는 이제
회과자책(悔過自責)하겠느냐?"
유시랑이 전후사를 모두 고하고 앞으로 다시는 그런 간악에
속지 않고 근신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 같은 대악이 어찌 세상에 용납되겠습니까?"
하고 거듭 사과하였다. 이때에 모든 친척들이 유시랑을
찾아와서 하례하고 위로하였다.
"이것은 모두 가운이매 어찌 인력으로 막았으리오."
유시랑이 친척들과 하직하고 강서로 갈 제 그 위용이 매우
장엄하였다. 이때 사추관이 누님을 데려오겠다고 말하자
유시랑은 허락하고 자기는 강가에 가서 맞을 테니 먼저
떠나가라고 약속하였다.
동생 사추관은 미리 편지를 보내고 동정호의 섬 군산사에
이르니 사씨 부인이 미리 알고 기다리다가 만나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수년 동안 그리던 정회를 푼 뒤에 유시랑의 편지를
전하였다. 사씨 부인이 편지를 받아 보니 남편은 방백을
하였는지라 감격하여 묘혜 스님에게 사은하고 유시랑이 보내 온
예물을 전하였다.
"이것은 모두 부인의 복이지 어찌 소승의 공이겠습니까?"
이윽고 작별하게 되자 사부인과 묘혜 스님이 마치 모녀의
이별같이 서로 슬퍼하였다. 사추관이 묘혜에게 재삼 은혜를
치하하자 묘혜 또한 재삼 사양하고 앞으로도 여러분의 복록을
불전에 축원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날 사추관이 객당에서 자고
이튿날 부인과 함께 발정하자 묘혜가 암자의 여러 승니와 산에서
내려와서 떠나는 배를 기쁨과 슬픔으로 전송하였다. 일행이
약속한 지경에 강가에 배를 대니 유시랑이 이미 그곳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금수채장(錦繡彩帳)이 강변을 덮고 환영하는
사람이 물가에 정렬하고 기다렸다. 시비가 새 의복을 사씨
부인에게 올리매 부인은 칠 년 동안이나 입었던 소복을 비로소
벗고 화복으로 갈아입고 부부가 상봉하니 세상에 희한한
경사였다. 여기서 뱃길로 강서로 행하여 고향집에 이르니
비복들이 감격으로 환영하였다. 유시랑 부부가 묘에 참배할 제
제문을 지어서 부부가 재합함을 보고하는 사의가 간절하더라. 이
소문을 들은 강서 지방의 대소관원이 모두 유시랑을 찾아와서
예단을 드려 하례하고 또 사추관에게 하례하였으며, 유시랑은 큰
잔치를 베풀어서 빈객을 접대하였다.
사씨 부인은 남편을 만나서 다시 유가의 주부가 되었으나
새로운 슬픔이 있으니 아들 인아의 생사 소식이었다. 사방으로
수소문하였으나 인아의 행적은 묘연하여 알 길이 없었다. 어느덧
신년을 맞으며 부인이 유시랑에게 은근히 술회하였다.
"그전에 제가 사람을 잘못 천거하여 가사가 탁란하였던 일을
회상하면 모골이 송연합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고 제 나이도
사십에 이르러서 생산하지 못한 지 십 년이라 밤낮으로 큰
걱정입니다. 후손을 위하여 다시 숙녀를 얻어 생남의 길을
마련할까 합니다."
"후손을 위하여 소실을 권하는 부인의 뜻은 고마우나 그 전에
교녀로 말미암아 인아의 생사를 알지 못하매
통입골수(痛入骨髓)한데 어찌 또다시 잡인을 집안에
들여놓겠소?"
부인이 한숨을 짓고,
"제가 시랑과 동서 삼십 년에 일점 혈육이던 인아의 생사를
모르고 아직 사속(嗣屬)이 없으니 지하에 가서 무슨 면목으로
조상을 뵈오리까?"
"그러나 부인의 연기가 아직 단산할 때가 아니니 그런 불길한
말을 하지 마시오."
"상공은 그런 고집은 마시고 제 말을 들으십시오."
하고 묘혜 스님의 질녀가 현숙하고 또 귀자(貴子)를 둘 팔자라
하면서 유시랑의 첩으로 삼으라고 굳이 권하였다. 유시랑은 사씨
부인의 성의에 마지 못하여 묘혜 스님의 질녀라는 여자의 근본을
물은 뒤 부인의 생각에 맡기겠다고 허락하였다.
"또 청할 일이 있습니다."
부인이 말을 바꾸어 남편에게 상의하였다.
"노복이 충성으로 나를 시중하다가 조난한 뱃속에서 죽었으니
그 영혼을 위로해 주어야겠으며, 또 황릉묘가 황폐하였으니
중수해야겠으며, 또 묘혜 스님의 암자가 있는 군산동구에 탑을
세워서 모든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유시랑이 부인의 청은 마땅히 하여야 할 사은의 지성이라 하고
모두 많은 재물을 희사하여 시설하였다. 묘혜 스님은 유시랑
부부가 보낸 후한 금백으로 곧 수월암을 중수하고 군산동구에
탑을 신축하여 부인탑이라고 불렀다. 특히 황릉묘를 장엄하게
중수하고 노복의 영혼을 위로하려고 관곽을 갖추어서 다시
후장을 지내준 데 대하여 사씨 부인의 기특한 뜻을 세상이
칭송하여 마지 않았다.
사씨의 사동이 황릉묘지기에게 중수 비용을 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회룡령 땅에 들러서 묘혜 스님의 질녀를 찾아갔다. 이때 그
낭자가 그 전에 알았던 사씨 부인의 사동을 보고도 채 알지
못하고 물었다.
"총각은 어디서 어떻게 또 이곳에 왔소?"
"낭자는 왜 나를 몰라보십니까? 연전에 사씨 부인을 모시고
장사를 가던 길에 댁에서 수일간 신세를 진 사환입니다."
"아참 그랬군. 내가 몰라뵈서 미안했어요. 사씨 부인은
안녕하신지요?"
사동이 그 후에 지낸 사씨 부인의 사실을 대략 전하자 낭자는
사씨 부인이 누명을 벗고 시가로 돌아가서 잘 계시다는 말과
그것이 모두 낭자의 고모님 묘혜의 공이라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인사가 끝난 뒤에 사환은 사씨 부인이 보낸 편지를
낭자에게 내놓았다. 임낭자가 감격하고 봉을 떼어 보니 사연이
매우 간곡하였으므로 사씨 부인을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벌써 칠 년 전에 설매가 인아를 차마 물 속에 던지지 못하고
가만히 강변의 숲 속에 놓고 간 뒤에 인아가 잠을 깨어 아무도
없으므로 큰소리로 앙앙 울고 있었다. 이때 마침 나경으로
장사차 지나가던 뱃사람이 우는 어린아이를 찾아가 보니 얼굴
생김이 비범하고 가엾어서 배에 싣고 가다가 갈 길이 멀고 남경
가서도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기로, 도중의 연화촌에서 인아를
사람의 눈에 띄기 쉬운 곳에 내려놓고 갔었다. 이때 마침 임가의
아내 변씨가 꿈을 꾸었는데 문 밖에 이상한 광채가 비치었으므로
놀라서 깨니 꿈이었다. 아내의 꿈 이야기를 들은 남편 임씨가
급히 울 밖으로 나가서 본즉 용모가 잘난 어린아이가 울고
있으므로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 변씨가 하늘의 꿈을
통해서 자기에게 준 귀동자라고 기뻐하고 고이 길렀다. 그러다가
변씨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임낭자가 친동생같이 기르고 있었다.
동리 사람들은 효성이 지극하고 용모가 고운 임낭자가 부모를 다
잃고 외롭게 지내게 되자 동정도 하고 탐도 나서 여러 군데서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임낭자는 고모 묘혜 스님이 장차
귀한 몸이 되리라던 말만 생각하면서 시골 농부의 집으로
출가하기를 원하지 않고 장차 재상의 부인이 될 것만 믿고
있었다.
사씨 부인은 임낭자의 재덕을 생각하고 유시랑에게 허락을
받은 후 사환을 그 연화촌에 보내고 얼마 지나 다시 시녀와
교부를 보내서 임낭자를 데려오게 하였다. 임낭자가 사부인을
만나려 생각하던 차에 가마로 데리러 왔으므로 감사히 여기고
얻어서 기르던 소년(인아)을 데리고 함께 사씨 부인을 만나
반기고 아이는 동생이라 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씨 부인은 임낭자에게 유시랑의 둘째 부인이
되기를 권하였다. 임낭자는 이것이 꿈인가 의심하면서도 고모
묘혜 스님의 예언을 생각하고 감격하였다. 사씨 부인은 택일하여
친척을 초대하고 잔치를 베풀어 임씨를 성례시키니 그 용모가
아름다운 숙녀였으므로 유시랑이 심중으로 기뻐하고 사씨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 그대에게 정이 덜할까 염려하노라 하니
부인은 미소만 보이고 대답하지 않았다.
하루는 인아의 그전 유모가 임씨 방으로 들어가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요전에 시비의 말을 들으니 낭자의 남동생 도련님이 그 전에
제가 시중하던 우리 공자와 얼굴이 꼭같이 생겼다 하기에 한번
보러 왔나이다."
유모의 말을 의아스럽게 생각한 임씨가 유모에게 물었다.
"댁의 공자를 어디서 잃었던가?"
"북경 순천부에서 잃었습니다."
임씨가 생각하기를 북경이 천 리인데 어찌 남경 땅에서 잃은
공자를 얻었으랴 하고 의아하였으나 시녀에게 인아 소년을
불러오게 하였다. 유모가 본즉 어렸을 때 자기가 밤낮으로 안고
기른 인아가 틀림없었다. 반가운 생각으로 왈칵 끌어안으나 한편
의심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 소년은 실로 내 모친이 낳은 친동생이 아니고 '모년 모월
모일'에 강가에 버려진 어린아이를 주워다가 길러서 의남매가
되었다네. 만일 얼굴이 댁이 기르던 공자와 같으면 혹 그런 연고
있는 소년인지도 모르겠네."
이때 소년이 먼저 유모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유모, 왜 나를 몰라보는거야?"
"앗, 도련님!"
유모가 이때 소년을 끌어안고 임씨에게,
"이것 보십시오. 이 댁의 도련님이 아니면 어찌 나를 알아보고
이렇게 반가워하겠습니까?"
"이 아이의 성명은 비록 모르나 전에 귀한 댁 아들로서 곱게
길렀던 것이 분명하고 남경으로 가던 뱃군이 어디서 주웠으나
가다가 우리집 근처에 버리고 간 것이니까, 유모가 잘 알아보고
대감 양위께 말씀드리도록 하게."
유모가 임씨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곧 사씨 부인에게
그 말을 전하자 부인이 황망히 임씨 방으로 달려와서 그 소년을
보고 반신반의하면서,
"너는 나를 알겠느냐?"
인아가 사씨 부인을 자세히 보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어머니, 어머니는 저를 몰라보십니까? 어머님이 집을 떠나신
후에 소자가 매양 그립게 생각하였습니다. 어릴 때 일이라 제
기억이 아득하여 잘 모르나 여자가 저를 멀리 가다가 제가 잠든
사이에 강변 숲속에 두고 갔기 때문에 잠을 깬 뒤에 외롭고
무서워서 울 적에 큰 배를 타고 가던 사람이 데리고 가다가 또
어떤 집 울 밑에 놓고 갔습니다. 그때 그 집의 은모(恩母)가
거두어 길러 주어서 전보다 편하게 지내다가 이제 뜻밖에 여기
와서 어머님을 뵈오니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사씨 부인이 인아의 손을 잡고 대성통곡하며,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꿈이면 이대로 깨지 말아야겠다. 내
너를 다시 보지 못할까 하였더니 오늘날 집에 돌아온 것을
만나니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느냐?"
하고 흐느껴 울다가 유시랑에게 인아를 찾은 사실을 고하자,
유시랑이 급히 달려와서 자초지종을 듣고서 임씨를 칭찬하면서
기뻐하였다.
"우리가 오늘 부자, 모자가 이처럼 만나서 즐기는 경사는 모두
그대의 공이니, 그 은덕을 어찌 잊겠는가. 금후로는 나의 가장
큰 슬픔이 없게 되었다."
"과분하신 말씀을 듣자와 황송하옵니다. 오늘날 부자 모자가
상봉하신 것은 모두 존문의 음덕이시지, 어찌 제 공이겠습니까.
사씨 부인의 성덕현심(聖德賢心)에 신명이 감동하신
영험입니다."
"음, 그것도 그렇고 그대 공도 또한 장하지 않은가?"
하고 온 집안이 이 경사를 축하하면서 인아의 모습을 보니
장부의 체격이 발월하고 그 준매함을 칭찬치 않은 사람이
없었다. 원근의 친척이 모두 모여서 치하하는 동시에 임씨에
대한 대우가 두터워지고 비복들도 착한 임씨를 존경으로 섬겼다.
그리고 사씨 부인이 임씨 대하기를 동기처럼 아끼고 임씨 또한
사씨 부인을 형님같이 극진히 섬겼으며 보통 처첩간의 투기 같은
감정은 추호도 없었다.
이 무렵에 교녀는 동청이 죽은 뒤에 냉진과 살다가 마침내
냉진이 역적의 도당을 꾸미다가 괴수로 잡혀 처형되자 도망가서
낙양 술집의 창기가 되어 낙양의 인사에게 웃음을 팔아 재물을
낚으면서 전신이 한림학사의 부인이라고 호언하였으므로
낙양에서 교녀의 교태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유시랑 댁의
사환이 마침 낙양에 왔다가 창녀 교씨의 유명한 평판을 듣고
술집에 가서 보니 분명히 본인이라 깜짝 놀라고 돌아와서 교녀의
소식을 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시랑은 부인 사씨에게,
"교녀를 잡지 못할까 걱정했더니 낙양청루에서 행색이
낭자하더니 내가 돌아갈 때에 잡아서 설치(雪恥)하겠소."
"그러세요. 그년을 잡아서 제 원한을 풀어야겠습니다."
관대한 부인 사씨도 교녀에 대한 철천지한은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사씨는 아들 인아를 만난 후로는 시름이 없었고
유시랑은 사사로운 고민이 없어서 모든 힘을 치민(治民)에
근면하매 모든 백성이 농업과 학업에 힘썼으므로 그의 일읍이
대치(大治)하여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황제가 그 공적을
들으시고 예부상서로 승탁하시니 유상서가 사은차 상경하게
되었다. 행차가 서주에 이르러서 창녀로 이름난 교녀를 염탐한즉
분명히 그곳 화류계에서 군림하는 존재로 있었다. 유상서는 수단
있는 매파와 상의하고 창녀 교칠랑을 시켜서 이러이러하라고
명하였다. 매파가 교녀를 찾아서,
"이번에 예부상서로 영전되어 상경하시는 대감께서 교낭자의
향명을 들으시고 소실을 맞아 총애코자 하시는데 낭자 의향이
어떤가? 상서벼슬은 거룩한 재상의 지위요, 그 시비의 말을
들은즉 정실부인은 신병으로 치가(治家)도 못한다니까 낭자가 그
대감 댁에 들어만 가면 정실부인과 다름이 없이 집안 실권을
휘두르며 마음대로 호강을 할 것이니 이런 좋은 혼담이 어디
있겠나. 여자의 부귀는 역시 교낭자 같은 미인의 차지야."
교녀가 매파의 달콤한 권고를 듣고 생각하되,
'내 비록 화류계 생활로 의식의 부족은 없지만 나이도 점점
먹어 가니 종신의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기회에 상서
부인이 되어서 천한 신분을 면하자.'
하고 매파에게 잘 성사시켜 달라고 쾌락하였다.
"성례는 대감과 본부인이 보시는 데서 할 것이므로 준비가
되면 낭자를 데리고 갈 테니 화장을 곱게 하고 기다려요."
"알겠어요."
하고 교녀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매파가 교녀의 승낙을
고하자 유상서는 인부를 갖추어서 교녀를 가마에 태워서 본
행차와 따로 서울로 데려가도록 분부하였다.
유상서는 서울에 이르러 황제 어전에 사은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친척을 모아 놓고 경축 잔치를 크게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사씨는 임씨를 불러서 두부인을 뵙게 하고,
"이 사람은 그전의 교녀와 같지 않은 현숙한 사람이니
고모님께서는 그릇 보지 마십시오."
하고 소개하자 두부인은 새사람이 비록 어진 사람이라도
나에게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담담한 태도를 취하였다. 이때
유상서는 빙글빙글 웃으며 두부인과 좌중 손님들에게,
"오늘 이 즐거운 잔치에 여흥이 없으면 심심할까 합니다.
노상에서 명창을 얻어 왔으니 한번 구경하시오."
하고 좌우에 명하여 창녀 교칠랑을 부르라 하였다. 이때
교자로 실려서 서울로 왔던 교녀가 사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승명하고 상서 댁으로 데려오자 가마 안에서 내다보고 깜짝
놀라면서,
"이 집은 분명히 유한림 댁인데 왜 이리 가느냐?"
시녀가 시치미를 딱 떼고 하는 대답이,
"유한림은 귀양가시고 우리 대감께서 이 집을 사서 들어
계십니다."
교녀가 시녀의 말에 안심하고 또다시 가증한 교만한 생각을
일으켰다.
'나하고 이 집과는 인연이 깊구나. 마땅히 그 전에 정들었던
백자당에 거처하겠다.'
시비가 그렇게 옛꿈을 그리워하는 교녀를 인도하고 유상서와
사부인 앞으로 갔다. 교녀가 눈을 들어서 보니 좌우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 낯익은 유연수 문중의 일적이라 벼락을
맞은 듯이 낙담상혼하고 말았다. 교녀는 땅에 엎드려서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하였다. 유상서가 큰 호통을 하며 꾸짖었다.
"네 죄를 아느냐!"
"제 죄를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관대히 용서하여 주십시오."
"네 죄는 일륜이니 음부는 들으라. 처음에 부인이 너를
경계하여 음탕한 풍류를 말라 함이 좋은 뜻이어늘 너는 도리어
참소하여 여우의 탈을 썼으니 그 죄 하나요, 요망된 무녀 십랑과
음모하여 해괴한 방법으로 장부를 혹하게 했으니 그 죄 둘이요,
음흉한 종년들과 동청과 간통하여 당을 이루고 악행을 하였으니
그 죄 셋이요, 스스로 저주하고 부인에게 미루었으니 그 죄
넷이요, 동청과 사통하여 가문을 더럽혔으니 그 죄 다섯이요,
옥지환을 도둑질하여 간인(奸人)을 주어 부인을 모해하였으니 그
죄 여섯이요,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이고 그 악을 부인에게
미루었으니 그 죄 일곱이요, 간부와 작하고 부인을 사지에
몰아넣었으니 그 죄 여덟이요, 아들을 강물에 던졌으니 그 죄
아홉이요, 겨우 부지하여 살아가는 나를 죽이려고 하였으니 그
죄 열이다. 너 같은 음부가 천지간의 음악한 대죄를 짓고 아직도
살고자 하느냐?"
교녀가 머리를 땅을 받으면서 울어대고,
"이것이 모두 제 죄이오나 자식을 해친 것은 설매가 한
일이요, 도적을 보낸 것과 엄승상에게 참소한 것은 동청이가 한
일입니다."
하고 사씨 부인을 향하여 울면서 호소하되,
"저는 실로 부인을 저버린 죄인이오나 오직 부인은
대자대비하신 은혜로 저의 잔명을 살려 주시비오."
부인 사씨는 눈물을 머금고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하였다.
"네가 나를 해하려 한 것은 죽을 죄가 아니지만 대감께 죄진
너를 내가 어찌 구하겠느냐?"
유상서는 교녀의 비굴한 행색에 더욱 노하였다. 곧 시동에게
엄명하여 교녀의 가슴을 찢어 헤치고 심장을 꺼내라고 하였다.
이때 사씨 부인이 시동을 만류시키고,
"비록 죄가 중하나 대감을 모신 지 오랜 몸이니 시체는
완전하게 처치하십시오."
유상서는 부인의 권고에 감동하고 동편 언덕으로 끌어내다가
타살한 후에 시체를 그대로 버려서 까막까치의 밥이 되게 하라고
명하니 좌중의 모든 사람이 상쾌하게 여겼다. 유상서는 만고의
간부 교녀를 죽이고 상쾌하게 여겼으나 사씨 부인은 시녀 설매가
억울하게 참사된 것을 가엾이 여겨서 뼈를 찾아서 잘 묻어
주었다. 그리고 십랑을 잡아서 치죄(治罪)하려고 찾았으나
전년에 금령의 옥사에 연좌되어서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임씨가 유씨 문중에 들어온 지 십 년이 지나는 동안에
계속하여 삼형제를 낳았는데 모두 옥골선풍이요,
천금가사(千金佳士)였다. 장자의 이름은 웅(雄)이요, 차자의
이름은 준(俊)이요, 삼자의 이름은 란(爛)이라 하였는데 모두
부형을 닮아서 세상에서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황제는 유상서의
벼슬을 좌승상으로 승진하고 자주 불러서 만나시니, 유씨 가문의
영광이 비할 데 없었고 또 두춘관이 높은 벼슬에 이르니 그
명성의 웅성함이 천하에 으뜸이었다.
유승상 부부는 팔십여 세를 안양(安養)하고, 그 후대의 공자는
병부상서에 이르고 유웅은 이부상서를 하고 유준은 호부시랑을
하고 유란은 태상경을 하여 조정에 참열하였으니, 그 모친
임씨도 복록을 누려서 자부와 제손을 거느리고, 사씨 부인을
모시며 안락한 세월을 보냈다. 문필에 능달한 사씨 부인은 내훈
십 편과 열녀전 십 권을 지어서 세상에 전하고 자부들을
가르쳐서 선도를 행토록 권장하였다.
이러므로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앙화를 받는
법이니 후인을 징계함직 하나 사정이 기이하므로 대강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바이니 보시고 사람은 명심하소서. 희로애락을
지성으로 근고(謹告)하옵니다. <끝>
첫댓글 여전하십니다
활동하시는모습 존경스럽네요
매년다니시면서 관찰하시는 선생님 그림자도 못따라 갈것같아요
추운날씨 무리하지 마시고 건강도 잘챙기십시요
뵌지 오래라 시간되면 한번 뵙고싶습니다
복수초. 노루귀 인터넷으로만 구경하고
실제로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2월 지나도 볼수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