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조선업의 몰락을 마주하며 조공 노동조합의 투쟁을 떠올리다
–남화숙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한국 조선업의 몰락과 다시금 닥친 구조조정의 위협
최근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듯 보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한진중공업 등 국내 조선업체의 위기와 몰락,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구조조정 방안이 국민경제 전체 초미의 관심사였다. 기자들은 연일 거제와 울산을 방문하여 대량실업 위기에 놓인 조선업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상인들이 풀어놓는 불안한 민심을 경쟁적으로 보도했으며 많은 국민들은 이번 사태가 가뜩이나 불황인 우리의 경제상황에 끼칠 파장을 우려 섞인 눈으로 지켜보았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도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가 마냥 동정적인 것은 아니었는데 거기에는 배운 것 없는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고임금을 받아온 조선업 노동자들에 대한 차가운 질시와 자신이 낸 ‘혈세’가 다시 동원되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억울함이 혼재되어 있었다. 과거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지만, 두 도시의 노동자들은 다시금 어떤 고립 속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문가들은 한국 조선업이 몰락한 원인으로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인한 해운업의 불황과 저임금을 무기로 내세운 중국의 부상, 그리고 해양플랜트 산업에의 무리한 진출을 꼽고 있다. 하지만 최근 불거진 대우조선해양의 분식회계와 비리 사태는 경영자들의 부실경영과 철저한 기업규제 및 관리감독의 의무를 저버린 정부의 과오 역시 한국 조선업 위기의 핵심적인 요인 중 하나임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문제는 사정이 이러함에도 이제까지의 구조조정이 늘 그러했듯 가장 큰 피해와 책임은 또다시 노동자들의 몫으로 전가될 위험에 처해 있다는 데 있다. 현장의 노동자들은 이에 대해 강력한 저항을 예고한 상태다. 보도에 따르면 대우조선해양과 STX조선해양 노조는 이미 파업을 결의한 상태며 현대중공업 노조는 쟁의발생 결의, 노동쟁의 조정신청에 이어 파업 찬반투표를 예고한 상태라고 한다.
망각된 대한조선공사의 투쟁을 복원시키다
남화숙의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박정희 시대의 민주노조운동과 대한조선공사』(후마니타스 2014)는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의 전신(前身)인 대한조선공사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의 역사를 1만쪽에 가까운 노동조합 문서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되살린 책이다. 이 책은 조선소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근대국가 건설에 대한 노동자들의 비전과 정권의 비전이 어떻게 교호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한국에서 조선산업이 차지해온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일깨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최근 한국 조선업을 둘러싼 논의들과 새롭게 예고된 노동자들의 저항을 역사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지평을 얻을 수 있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남한 노동운동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재구성하려는 시도다. 관련하여 저자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남한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적 연속성을 되살리는 일의 중요성이다. 저자는 대한조선공사 노동조합의 사례를 통해 1950~60년대에는 노동운동이 완전히 압살되어 무력한 상태였다는 “표준적인 견해”를 반박한다. 노동운동의 ‘암흑기’로 인식되는 “1960년대에 적어도 일부 주요 부분에서는 민주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조합운동이 자라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와 자본에 맞선 노동자들의 감동적인 투쟁이라는 익숙한 서사를 구축하는 것이 저자의 관심사는 아니다.
저자가 더욱 강조하는 것은 국가와 자본의 지배와 억압에 놓여 있던 수동적인 노동자성이 아니라 스스로 근대국가의 비전을 그려나가며 이를 성취하기 위해 투쟁했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노동자들의 대안적인 기획이다. 저자는 “‘약한 노동, 강한 국가’라는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노동자들의 주체적인 행동력을 가리고, 일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었던 성취들을 간과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주장”하며 박정희정권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정권에 의해 강압적으로 부과된 과제가 아니라 “근대에 대한 대중의 열망과 이에 대한 국가의 반응이 결합해 형성된 것”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아래로부터의 열망에 주목할 때 식민지시기와 해방공간의 노동운동은 새롭게 복원되어야 할 훌륭한 자산이 된다. 특히 저자는 식민지시기 말 전시 노동통제가 단지 노동자들에게 착취와 억압의 기억만을 남긴 것이 아니라 “고용주와 피고용인 모두에 대한 애국적 책임의식과 훈육, 복지 조항 및 노동자의 고충을 완화하기 위해 도입된 노동 현장의 관행” 같은 것들을 유산으로 남겼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후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이 노동자들의 의식을 한껏 드높이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대개 이러한 유산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말살된 것으로 치부되지만 저자는 대한조선공사 노동조합의 투쟁을 근거로 들며 1960년대에도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고 본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공동체를 향한 꿈
그렇다면 대한조선공사 노동자들이 추구했던 대안적인 세계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약자가 배려 받고 노동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확보할 수 있는 평등한 사회였다. 이를 대표하는 구호가 지위가 낮아 형편이 어려운 노동자에게 인상분이 더 많이 돌아가야 한다는 ‘하후상박(下厚上薄)’의 원칙이다. 이와 동시에 이들은 정규직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임시공, 견습공, 파견공, 하청공 등의 비정규직까지 노동조합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연대의 범위를 획기적으로 확장시켰다. 이렇게 대한조선공사 노동자들이 구축해냈던 “약한 집단의 이해와 어려움을 운동의 중심에 포함하는 포용적이고 민주적인 조합 문화”는 더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요구하는 아래로부터의 열망을 대표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조선산업의 몰락은 단지 한 부문산업의 몰락이라기보다 차라리 발전국가로 대표되는 한 시대의 패러다임이 몰락했음을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 ‘배 만들기’가 곧 ‘나라 만들기’와 나란히 설 수 있었던 그 시기는 이제 엄연한 과거로 저문 듯싶다. 새로운 나라의 모습은 이제 조선소나 공장이 아닌 IT와 서비스업에 의해 주조되어야 하는 것처럼 보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 “노동운동이 마주한 도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크고 힘들다.” 하지만 우리가 “대안적인 근대의 전망”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할 때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을 벼려가는 공간으로서 노동의 장(場)이 지닌 의미는 여전히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작업장은 역사적으로 민주적이고 평등한 공동체를 향한 꿈이 가장 강렬하게 피어올랐던 터전이었다. 한국 조선업이 몰락에 처해 있다는 현 시점에서 대한조선공사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다시금 되돌아봐야 할 이유다.
한영인 / 문학평론가
2016.6.2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