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흥무관학교의 초석을 놓은 인물들은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이상
룡등 신민회회원 역시 신민회회원이었던 김필순은 그들과 힘을 모아
독립운동의 발상지를 구축한 것이다.
<장세원 연구위원 / 동북아역사재단>
원래 신민회는 계몽, 실업, 구국계몽과 함께 독립전쟁을 위한 군사용
지가 있어야 되겠다고 해서 군사학교를 세울 구상을 했었고 그 근거지
가 우리나라와 가까운 압록강 건너편 서간도로 구상이 됐죠.
의사 독립운동가 김필순
그가 의사의 길로 접어든 것은 선교사 언더우드와의 인연에서 출발했
다.
*김필순의 어린시절

*언더우드
김필순의 어린시절 그에 집에 머물며 선교활동을 하던 언더우드는 어
린 필순의 총명함을 눈여겨 보았고 그의 아버지를 설득해 필순에게 의
학을 가르쳤다.
이 땅의 서양의 의학교육이 시작된지 100여년 김필순은 세브란스병원
의 전신인 제중원에 입학했다.
하지만 당시는 의학교육의 체계가 미흡하던때 영어를 잘했던 의학도
김필순은 병원장 '에비슨'의 통역과 조수라는 직책에다 직접 세브란스
건립에 까지 헌신해야 했지만 졸업전 이미 저학년들을 가르칠 만큼 실
력을 인정받는 학생이었다.

*김필순이 번역한 의학 교과서
학생시절 그는 여러권의 서양의학서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한글로된 의학서적 한권없이 서양의학을 배워야 했던 후학들에겐 값진
유산이었다.
*세브란스의학교 제1회 졸업생
마침내 1908년 세브란드 최초의 졸업생 7명을 배출한다.
김필순은 세브란스를 통해 서양의술을 전공한 의사1호가 된 것이다.
세브란스 2기생이 졸업할 즈음 김필순은 이미 교수의 신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조국독립을 꿈구며 새로운 실천을 모색하고 있었다.
<박형우 교수 / 연세대 의사학과>
김필순이 망명을 하니까 당장 강의가 문제가 됐습니다.
또 하나는 당시에 김필순이 세브란스병원의 외래 책임자였기 때문에
역시 외래환자를 보는데도 큰 혼란이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환자보는데는 여러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넘어갔지
만 의학교육은 어쩔 수가 없어서 실제로 세브란스병원 의학교가 10개
월 동안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부인 김경순, 첫아들 김 영, 김필순 선생
세브란스시절에 바쁜와중에도 김필순은 항일운동에 깊숙히 발담그고
있었다.
*도산 안창호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조직 '신민회'의 활동이었다.
김필순과 안창호의 돈독한 우정과 조국애는 그들을 보며 자란 조카
'김마리아'를 독립운동의 길로 이끌기도 했다.
동갑내기 김필순과 안창호는 의형제를 맺고 조국의 독립을 결의한 사
이.

김필순은 안창호의 결혼 절차와 비용 일체를 해줄만큼 아낌없이 안창
호를 후원해 주었다.
안창호 또한 큰 아들의 이름을 김필순의 영문이름인 '필립'으로 지을
만큼 둘은 서로를 북돋으며 고난을 이겨내갔다.
그들이 함께한 신민회의 비밀 아지트 '김형제상회'
김필순이 형과함께 운영하던 상점이다.
당시 서울역 맞은편에 세브란스가 자리하고 있었고 세브란스를 지척으
로 둔 곳에 김형제상회가 있었으니 청년들이 모이기엔 자연스러운 공
간이었다.

*사진 10:56

신민회는 생명과 재산을 바치겠다는 사람만이 회원으로 될 수 있는 엄
격한 조직으로 이회영, 노백린, 양기탁, 이동휘등 뛰어난 지도자들이
모임을 이끌고 있었다.
이에 일제는 데라우찌총독 암살미수사건의 배후로 신민회를 지목하고
있었다.
<김희곤 교수 / 안동대 사학과>
국내에서 대검거 선풍이 불 것이다라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것이니까
그때 대표들이 중국의 칭따오라는 청도에서 회담을 갖고 우리들이 피
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길' 그것이 결국 국
내 진공작전을 벌이는 것 밖에 없다.
그러니까 국내진공작전을 벌이려면 국내로 진공할 수 있는 틀을 만들
어야 되고 군대를 양성해야 하고 군대를 만드려면 그 전에 한국인 청
년들을 모아야 된다.
우선 그들이 올 수 있는 근거지를 마련해야 되겠다.
하는 것이 신민회의 목표였습니다.

신민회가 움트기 시작한 것은 한일강제병합이 되기전인 1906년~ 1907
년 일제는 강제로 고종황제를 퇴위 시키고 한국군에 대한 강제해산명
령을 내림으로서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주권을 빼앗아 갔다.

*서울에 진군하는 일본군
*1907년 군대해산보도 <Le Petit Journal>
그러나 무장해제된 한국군이 해산식을 하기 위해 집합했을때 서소문
밖에선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한다.
항쟁의 불길은 제2연대로 파급되어 치열한 시가전으로 번져갔다.
한국군의 희생은 컸다.

그들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병원을 거부하고 세브란스로만 몰려들었다.
당시는 어엿한규슈가 남정네를 돌볼 수 없는 시대였지만 밀려드는 부
상병들 앞에 김필순의 조카 마리아와 동생 김필례도 팔을 걷어붙였다.
그때 김필례와 김 마리아의 경험은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되었
다.
< 박규원 (김필례여사의 증손녀) >
한 열흘이상 잠도 못자고 온 식구가 달려들어 간호하면서 그때 아주
한국인으로서 울분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었죠.
그리고 안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고 너무나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 가족
들이 모두 독립투사의 길로 들어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지 않았나...생
각합니다.
<김희곤 교수 / 안동대 사학과>
군인들을 치료할 때 그 심정이 어땠을까 그러니까 크게 봐서 나라가
무너진다라는 것... 김필순은 아마 자기가 죽어가는 심정을 쉽게 이야
기해서 우리군인들이 죽어간다는 것.
작게 이야기하면 눈앞에서 본인스스로가 전쟁을 목격할 뿐 아니라 본
인스스로가 전쟁을 치룬 것이죠.

대한제국의 종말을 처절하게 목격한 김필순과 신민회회원들에게 중국
의 신해혁명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중국에서 군주국가가 끝나고 근대적인 공화국이 들어선 것이다.
그들과 힘을 합친다면 일제를 몰아내기는 보다 수월해 질 것이라는 희
망에 독립운동가들은 고무됐다.

그러나 일제는 신민회가 데라우찌 총독에 대한 암살을 모의했다고 날
조하고 700명에 달하는 민족지도자를 검거하고 무려 105인에 대해 유
죄를 선고했다.
<김희곤 교수 / 안동대사학과>
김필순같은 인물은 신민회요원이고 가까운 인물들이 안창호를 비롯해
서 이런 분들이 그 낌새를 알아채고 해외로 망명을 했고 그러니까 자
기 주변에 검거망이 좁혀오니까 나가는 것이고 급하게 망명하게 된 것
도 바로 105인 사건 때문입니다.

105인 사건을 계기로 간도로 망명했던 김필순은 다시 치치하얼로 근거
지를 옮긴다.
간도지역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검거가 심각해진 까닭이었다.
몽골과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도시 치치하얼.

*중국 흑룡강성(아무르강) 치치하얼
김필순이 도착할 즈음 치치하얼은 이미 철도가 개통되어 중공업도시로
발전하고 있었다.
더욱이 치치하얼은 여러군사시설에 포로수용소까지 있을 만큼 군사적
인 요충지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