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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롬 12:9-18절
제 목 : 성도의 대인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2
일 시 : 2023. 5. 24.
로마서 12:9-18/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변화산 위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렇게 네 명이서 변화산으로 올라가서 기도하고 있을 때 거기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모습이 해보다 더 찬란하게 변화되었고 또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모습이 베드로의 눈에 보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황홀경에 빠져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예수님께 주여, 여기가 좋사 오니 내가 초막 셋을 만들겠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만들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상태로 영원히 머물러 있고 싶은 베드로의 마음이 그대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산 위에 머물러 있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산 밑에는 예수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산 아래로 내려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혼자서 영광을 누리고 있어도 아무런 문제도 없고 부족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영광을 버리고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며,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주님이 좋다고 교회 안에서 그리고 주님의 임재안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죄악에 물든 악한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원수 마귀에게 사로잡혀 죄를 지으며 지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구원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만 만나서 교제하고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만을 좋아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로 와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무장했으면 이제는 세상으로 가서 죄인들을 만나야 하고 핍박자들을 만나야 하고 나를 미워하는 원수들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세상에 하나님과 나와 단둘이 밖에 없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신앙생활하기가 정말 쉬울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지만 세상에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 바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도 발라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발라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안 좋은데 하나님과의 관계는 좋다. 이것은 모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다면 사람과의 관계도 발라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른지 그렇지 않는지를 평가하고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개인적인 삶은 어떻게 살아야 되고, 대인관계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성도로서 개인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지난 시간에 다루었습니다.
1)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했습니다.
2)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했습니다.
3)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4)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5)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2. 오늘은 성도로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1)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저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축복하다란 율로게오라고 하는데 좋게 말하다, 칭찬하다 라는 뜻입니다. 축복하다는 말이 성도가 하나님에 대해 사용할 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사용하게 되면 복을 주신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를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사용할 때는 축복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약3:9/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라고 했으며, 마25: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했으며, 눅2: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고 했습니다. 축복하다는 단어가 하나님께 쓰일 때는 하나님을 찬양하다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용할 때는 복을 주신다는 뜻이며, 사람이 사람에게 말할 때는 축복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르치는 이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5: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으며, 눅6:28/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박해하는 자, 즉 원수를 축복한다는 것에는 그들을 용서하는 것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에게 임하기를 바라는 내용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으로는 이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나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내가 하기 위해서는 나의 본성의 법이 아닌 성령의 법에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갈5: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박해하는 자를 축복한다는 것은 참 잘 안되는 부분인데 이것이 되어져야 합니다. 이 훈련을 통해서 우리의 인격이 다듬어질 때까지 박해를 받게 하십니다. 그리고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기 위해서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2)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했습니다. 앞의 14절과 본절 말씀은 자신을 잊어버려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본절은 우리가 슬픔 중에 있을 때에도 즐거워하는 자들과 즐거워하며, 우리가 즐거울 때에도 슬픔 가운데 있는 자들과 슬퍼하라는 권면입니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동정하는 것, 즉 감정과 처지와 조건을 같이 하는 것은 사랑으로써 가능하며(눅10:27), 성령으로 인도받아야(갈 5:16)만 가능합니다(빌 2:2). 이와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은 성도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14절 말씀을 보시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셨습니다(요 11:33-35).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선한 것을 즐거워하는 자들과 선한 것을 함께 즐거워하며(빌2:18) 곤경과 불행으로 우는 자들에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지체로서 같은 슬픔을 갖게 됩니다.
3)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여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①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같이한다는 표현은 헬라어로는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나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로를 나타내는 헬라어는 에이스 알렐루스인데 알렐루스(one another)는 대개 전치사 엔(안에)과 함께 사용됩니다. 그 차이는 엔 알렐루스가 너희 중에, 너희 가운데라는 범위의 의미가 강하다면 에이스 알렐루스는 서로를 향하여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외부로 나타나는 행동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또한 14절이나 17-20절로 비추어 보면 사도 바울은 특히 성도들의 행동이 외부에 나타남으로써 미칠 영향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은 빛 된 선행으로 나타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것입니다.
②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라고 했습니다.
높은 데 휴셀라 라고 하는데 중성 명사이면서 목적격으로 높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높은 데 마음을 두는 것은 인간이 자기의 수준을 망각하고 분에 넘치는 크고 놀라운 일에 뜻을 품는 것입니다(시131:1). 낮은 데란 타페이노이스라고 하는데 비천한, 겸손한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낮은 데 처하라는 것은 자신을 생각함에 있어서 겸비(謙卑)하라는 것이며, 3절의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권면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③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했습니다.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련한 자들 즉 지혜없는 자들의 생각입니다(잠3:7). 이를 히브리식으로 표현하면 높은 것에 대해 심사숙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남들보다 뛰어나길 원하고 우월의식을 갖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귀하고 중하게 여기고 온순함을 가져야 함을 말씀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스스로 지혜있다 생각하는 오만함을 가지는 것은 자신을 과대평가 하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4)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했습니다.
①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라고 했는데 이것은 인간이 가진 죄의 본성과 악한 본성을 제한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 보다 더 큰 악으로 갚으려고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본성인데,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는 말씀은 이러한 인간의 죄된 욕구를 억제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눈은 눈으로...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4-25)는 말씀은 공식적인 형벌을 말한 것이며, 이런 율법규정을 세운 것도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것들을 금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인간의 어두워진 마음(1:21)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죄 된 본성을 억제하고 다스리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문은 살전5:15/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는 말씀과 벧전3:9/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과 비슷한데 그 이유는 모두가 예수님이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 왔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대대로 전승되었기 때문입니다.
②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소극적인 권면에서 이제는 더욱더 발전하여 적극적인 권면으로 나아갑니다. 모든 사람이란 아무에게도 라는 명칭과 대칭되는 말로서 신자나 불신자 모두를 가리킵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는 라는 말은 주님 앞에서(고후8:21)라는 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과의 영적인 관계가 사람들과의 관계와 별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한 일이라고 했는데 선하다라는 단어는 마7:12에 나오는 헬라어 아가도스 대신에 칼로스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아름다움, 즉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선한 일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도모하다란 프로노에오 라고 분사형 명령형으로 미리 생각하다, 간구하다, 몰두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일에 반응하여 선을 행하라는 소극적인 명령이 아니고, 미리 솔선 수범하여 선을 행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일을 도모하라는 말씀은 선한 일에 너희 자신을 몰두하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는 선한 일에 소극적인 자세가 아닌 적극적인 자세로 선한 일에 몰두해야 합니다.
5) 마지막으로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시면 우리는 모든 사람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성도들이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평화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그래서 할 수 있거든 이란 표현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화합(和合)을 향한 욕구가 아무리 강력해도 그것을 받아 드려지지 않는 경우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는 인간의 애씀만으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평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위해 이 땅에 오셨으며(눅2:14),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을 화목케 하시려고(골1:20,22)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면서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궁극적인 삶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악된 인간과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믿는 성도들도 평화를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골3:15). 그러므로 성도들은 화평케 하는 자들입니다(마5:9). 저와 여러분의 삶이 이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댓글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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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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