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기억
이방주
그녀는 정말로 나타났다. 노란 프리지아를 한 아름 안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사라진 그녀가 바람을 타고 나타난 것이다. 내 가슴에도 엷은 바람이 인다. 나는 달려가 그녀를 안았다. 프리지아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우리말이 어눌하다. 독일로 건너간 지 27년이라고 한다. 삼도 접경 의풍마을 순덕이가 바람 타고 독일로 넘어가더니 심장내과 명의 순주가 되어 돌아왔다.
백두대간 베틀재 고갯마루에는 언제나 바람이 불었다. 겨울밤에는 휘파람소리이다가 때로는 명도아기 울음소리를 냈다. 오월은 되어야 백두대간 베틀재에는 땅에 박힌 얼음이 빠진다. 얼음은 골바람이 되어 날망으로 기어오른다. 고갯마루에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다. 느티나무 아래에는 성황당이 있다. 널빤지로 지은 성황당 안에는 초라하지만 으스스한 ‘小白城隍 神位’라고 쓴 성황님이 앉아 있다. 느티나무 가지가 바람을 일으키면 성황당 판자가 덜렁덜렁 받아먹는다. 내겐 소름이 돋는다. 한낮에도 서늘하다.
단양읍으로 출장 갔다 돌아오는 길은 면소재지 영춘에서 오르막길 삼십 리 내리막길 십리 배틀재를 걸어서 넘어야 한다. 의풍학교 선생 4년, 아마도 한 80번은 넘은 것 같다. 그때마다 베틀재 바람을 맞았다. 순덕이도 분이도 만나려 넘어야 하는 운명이 휘적휘적 바람이 되었다.
베틀재 바람은 계절마다 다르다. 봄에는 산중에도 샛바람이 분다. 경상도 부석에서 도회의 소식을 안고 백두대간 마구령을 넘어 두메로 온다. 봄바람을 맞아도 베틀재 느티나무는 더디게 잎을 틔운다. 베틀재에서 골짜기 왕바위 사이를 비집고 의풍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십리가 넘는다. 개울가 바위를 병풍 삼아 화전민 가옥이 듬성듬성 들어앉았다. 골물이 제법 소리를 내어 우는 봄날에는 외딴집 분이가 나와 달래를 씻는다. 엉덩이를 다 드러낸 채…. “출장 다녀오시는가요?” 보송보송 이마에 봄바람 맞은 머리카락이 헝클어진다. 가슴이 지난가을보다 더 봉곳하다. 스물세 살 내 가슴에 바람이 인다.
어느 비 내리는 가을날은 밤에 고개를 넘었다. 영춘에서 초저녁에 출발했어도 베틀재를 넘을 때는 아홉시가 넘었다. 순덕이 오라버니인 김형이 고갯마루에 마중 나왔다. 영춘에서 남한강 물안개를 묻혀 넘어온 하늬바람이 느티나무를 흔들어댄다. 와르르 바람이 인다. 성황당 판자가 덜렁덜렁 흔들린다. 성황님이 튀어나와 옷자락이라도 붙잡을 것만 같다. 내리막길로 내려뺀다. 분이네 집에 호롱불이 깜빡거린다. 모롱이를 돌 때 개울에서 ‘왈그락 와사사’ 바람이 일었다. 절벅절벅 물 밟는 소리가 난다. 김형은 날다람쥐처럼 벌써 저 앞에 내닫는다. “얼렁 와요. 빨리요” 엎어질 듯 따라간다. 도시문명을 벗어나지 못한 발바닥이 자갈 박힌 밤길에 서툴다. 깜빡깜빡 순덕이네 집에 불빛이 보인다. 마당을 밟고 나서야 김형 걸음이 멎는다. “거 뭔지 알아요? 멧돼지요. 걸리면 뼈도 안 남기고 다 깨물어 먹어요.” 후〜 등골에 찬바람이 인다.
여름철 앞개울에는 맑은 물이 넘쳐흐른다. 밤에는 별이 밝다. 개울가 자갈밭은 밤에 더 깨끗하다. 처녀 총각들이 저만치 떨어져 멱을 감는다. 이들은 열다섯 살부터 스물서너 살까지가 대부분이다. 스물 서너 살만 넘으면 대개 가정을 이룬다. 하숙을 해야 다닐 수 있는 중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한다. 한해에 한둘이 고작이다. 순덕이는 한문서당에 들어갔다. 내 가슴에는 슬프고 안타까운 바람이 들었다. 졸업반 아이들이나 마을 청년들을 보면 가슴에 왕바람이 든다. 진학은 때가 있어 놓치면 그걸로 끝이다. 그들에게 부채감이 바람처럼 일어 가슴을 앓았다. 가슴에서 일어난 바람은 온몸을 휘젓고 다녔다. 하마터면 중학교에 가지 못할 뻔했던 기억이 된바람이 되어 머리를 때렸다, 함께 진학하지 못한 친구에 대한 기억, 졸업식 날 숨이며 울던 여자 아이들이 바람의 씨앗이 되었는지 모른다.
봄이 되어 나는 야학을 열었다, ‘의풍 야학’ 40명 넘게 모였다. 윗마을, 아랫마을, 양지뜸, 음지말에서 모여들었다. 순덕이도 분이도 왔다. 경상도 마구령 아래 남대리에서도 오고, 고치령 아래 마락리에서도 왔다. 삼도봉, 형제봉, 마대산 골짜기 화전민 독립가옥에서 바람에 멍든 청년들이 다 모였다.
저녁 여섯시에 모여 네 시간 수업을 했다. 월간지 같은 강의록은 한권에 전과목이 다 들어 있다. 결석도 없다. 나도 청년들도 신이 나 있는데 구설이 심하다. ‘지지바들 연애하기 좋겠다,’ ‘총각선생이 처녀 맛 좀 보겠네.’ ‘산골 청년들을 의식화하려 한다.’ ‘왜 순진하게 일 잘하는 아이들에게 바람을 넣느냐.’ 경찰서에 불려가서 조사도 받았다. 구설은 바람을 잠재우지 못한다. 그해 고입 검정에 다섯 명이 합격했다.
큰일이다. 봄바람이 불었다. 봄바람이 일자 처녀 아이들이 보따리를 싸들고 베틀재를 넘었다. 모내기 때 들밥 광주리를 이고 나가야 할 처자들이 보따리를 이고 대처로 나가버렸다. 이들은 산업체 부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순덕이가 사라진 건 그때였다.
사라졌던 순덕이가 순주가 되어 돌아왔다. 순주는 프리지아를 내려놓고도 내 손을 놓을 줄을 모른다. 산업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K대에 합격했다. 재학 중에 독일 유학시험에 합격했다. ‘여러분들에게는 베틀재 너머에 여기서보다 더 크고 의미 있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야학에서 내가 한 말이라고 한다. 스물세 살 청년 교사가 어찌 그런 말을 생각해 냈는지 생각할수록 기특하다. 그건 처음 일어난 미풍일지도 모른다. 순주는 의대에 진학하여 박사 학위를 받고 독일에서도 이름난 심장내과 명의가 되었다. 한 달 휴가를 받아 30년 전의 나를 수소문해 찾아온 것이다.
바람은 느티나무 가지 끝에서 일어나지만 거기서 멈추는 것은 아니다. 성황당에도 불고 우리네 이마에도 불고 가슴팍에도 분다. 산골 소녀 분이 치맛자락에도 불고 가슴에도 파고든다. 그러나 바람은 혼자서 존재를 드러내지는 못한다. 누군가에게 부딪치면서 존재를 드러낸다. 성황신도 불러내고 야학도 일으키고 명의도 만들어낸다. 바람은 그렇게 무섭지만 그냥 바람일 뿐이다. 그러나 바람의 기억은 고희를 넘은 내 안의 나뭇가지에 아직도 남아 살랑거린다. (2024. 4.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