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매일 2024년 11월 8일 금요일
유진의 詩가 있는 풍경
시월역(驛)
손순미
지네처럼 스르륵 기차가 오네 수수밭머리 새떼들 북천(北天)의 바다를 저어가고 벤치의
늙은이 지친 얼굴에 수고했다 수고했다 석양이 햇빛연고를 따뜻하게 발라주는 가을, 당신
은 보이지 않고 우물쭈물 안경을 떨어뜨리는 사이 기차는 떠났네 돌아올 것이다 돌아올 것
이다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리는 망상의 정거장, 나는 그 적막을 지근지근 밟으며 무슨 슬
픈 꿈처럼 역사(驛舍)를 떠나지 못하네
멀리 천일홍 언덕 너머 안적사 종소리 수풀의 벌레들을 울리고 저녁은 밭가의 농부를 말없
이 데리고 가네 모든 것을 버리게 하네 나는 전생의 길섶에 두고 온 것이 많았던가 무엇이
든 보내지 못하네 나무들 하나씩 잎을 떨어뜨리네 저녁은 무엇이든 보내고 있네
♦ ㅡㅡㅡㅡㅡ 풀벌레 소리 들리고 아직은 석양이 따스한 시월이다. 서쪽하늘에는 새떼 날고, 들판에 농부들 집으로 돌아간 저녁,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오는 기차역이 아니어도 호젓한 적막이 찾아들고 상념에 젖게 되는 시월이다. 가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슬그머니 쓸쓸해지는 시절이 있었고, 오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돌아올 것 같은 막연한 그리움에 공연히 쓸쓸해지는 시월이다. 상념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나야 할 것들 모두 떠나간 자리에 혼자만 우두커니 남겨 지기도하는 시월이다. ‘지네처럼 스스륵 기차가 오네’ 시월역(驛)은 그렇게.....
ㅡ 유진 시인 (첼리스트. 선린대학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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