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136)
고요한 노동
정세훈(1955~ )
살기 위한, 고요한 노동
어린 들고양이
인적 끊긴 들녘 풀섶에
잔뜩 웅크린 자세로
숨죽인 진을 치고 앉아 있네
풀섶 가시덤불 속
들쥐의 동태를
숨죽여 응시하고 있네
죽이기 위한, 고요한 노동
정세훈 시인
1955년 충남 홍성 출생. 1989년 『노동해방문학』과 1990년 『창작과비평』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 『손 하나로 아름다운 당신』 『맑은 하늘을 보면』 『저 별을 버리지 말아야지』 『끝내 술잔을 비우지 못하였습니다』 『그 옛날 별들이 생각났다』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부평4공단 여공』 『몸의 중심』 『동면』 『당신은 내 시가 되어』 등과, 시화집 『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 동시집 『공단마을 아이들』 『살고 싶은 우리 집』, 장편소설 『훈이 엉아』, 장편동화집 『세상 밖으로 나온 꼬마송사리 큰눈이』, 그림동화 『훈이와 아기제비들』, 산문집 『소나기를 머금은 풀꽃향기』 『파지에 시를 쓰다』 『내 모든 아픈 이웃들』 등이 있다. 제32회 기독교문화대상, 제1회 충청남도올해의예술인상, 제1회 효봉윤기정문학상 등 수상.인천작가회의 회장, 한국작가회의 이사, 인천민예총 이사장, 한국민예총 이사장 대행 등 역임. 현재 노동문학관 관장.
◆이완근의 詩詩樂樂/시 읽는 즐거움의 136번째 시는 정세훈 시인의 “고요한 노동”입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아프리카 대평원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습니다. 백만 마리에 이르는 버팔로 무리의 이동 모습은 경이롭기 그지없습니다. 다른 한편에선 새끼 두 마리를 둔 암사자가 쿠두 사냥에 나섰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도망가는 쿠두와 삼사일 굶주린 새끼를 둔 암사자의 추격전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녀석을 응원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쿠두에게는 위급한 상황으로 당장의 생명이 달린 문제이며, 암사자에게는 사냥에 실패할 시 어린 새끼 두 마리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응원할지의 문제는 각자의 판단에 달렸습니다.
세상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흑과 백, 두 가지로만 나눌 수 없는 여러 가지 상황이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해봅니다.
“어린 들고양이”와 “들쥐”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묘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들녘 풀섶”의 들고양이는 “살기 위한, 고요한 노동”과 “죽이기 위한, 고요한 노동”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습니다. “진을 치고 앉아 있”거나 “숨죽여 응시하고 있”는 들고양이의 모습에서 삶의 긴장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가시덤불 속” 들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기에 분주합니다. 생존에 필요한 선천성 조심성만이 그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뿐입니다. “살기 위한, 고요한 노동”을 들쥐도 수행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삶은 팽팽한 긴장감의 연속입니다. 그것은 절대자를 비롯한 누구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예술은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숨죽여 응시하”며 삶의 단면을 처절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습니다.
【이완근(시인, 본지 편집인대표 겸 편집국장)】
<뷰티라이프> 2024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