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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5월 27일 영국 보닝턴대의 안나푸르나 남벽 등정과
6월 27일 독일 헤를리코퍼대의 낭가파르바트 루팔벽(남벽) 등정으로
히말라야에서 거벽등반 시대의 서막이 올랐다.
‘풍요의 여신’이란 뜻의 안나푸르나 1봉은 주봉(8,091m),
중앙봉(8,051m), 동봉(8,010m) 3개 봉과
북벽, 남벽, 북서벽, 그리고 노스 필라(프랑스 필라), 북서 필라, 북동 필라,
서릉, 동릉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국 산악인 크리스 보닝턴이 이끄는, 8명의 클라이머들로 구성된 등반대는
1970년 3월 안나푸르나 분지의 성소 4,250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했다.
보닝턴 대장은 이안 클러프와 함께 영국인 최초로
알프스 아이거 북벽을 등정했고 프레니 중앙 필라를 초등한 등반가였다.
부등반대장 돈 윌란스는 1961년 몽블랑 프레니 중앙 필라를 초등했고,
듀갈 해스턴 대원은 1966년 아이거 북벽 직등 루트, 즉 존 하린 루트 초등자였다.
또한 유일한 미국인 대원 톰 프로스트는 유명한 이본 취나드의 오랜 자일 파트너이었다.
‘다모클레스의 칼’ 밑 지날 때면 공포심으로 등골 오싹
안나푸르나 1봉의 좌측 서쪽에 히운출리(6,442m), 안나푸르나 남봉(7,219m), 모디체(7,150m), 팡(Fang·7,647m)이,
그리고 우측 동쪽에 록누아르(Roc Noir·7,485m), 플루티드피크(Fluted Peak·6,645m), 텐트피크(5,945m), 마차푸차레(6,994m)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아름다운 풍광이 연출되었으나,
수직고 3,000m의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굉음과 함께 낙석과 얼음사태,
그리고 눈사태가 수시로 쏟아져 내려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 벽은 한 번 쳐다보기만 해도 사람들의 기를 콱 꺾어버릴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그 벽 좌측으로부터 주봉으로 이어지는 스퍼(Spur·일명 버트레스 또는 필라),
중앙봉으로 이어지는 스퍼,
우측에 중앙봉과 동봉 사이의 능선으로 이어지는 3개 스퍼가
외관상 알프스 그랑드조라스 북벽의 3대 버트레스를 빼어 닮았는데, 규모는 3배 이상 더 컸다.
영국 등반대는 눈사태와 낙석의 위험을 최소화시키려고 주봉으로 이어지는 좌측 스퍼를 루트로 정했다.
수많은 얼음 첨탑들이 톱날처럼 늘어선 아이스 아레트와
스퍼 중간의 설원 위쪽에 위치한 높이 600여m의 록밴드(Rock band)가 최대 걸림돌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들은 강풍과 눈사태를 견뎌낼 수 있도록 견고하게 고안한 상자형 텐트로 모두 6개의 캠프를 구축하고,
그 상자형 텐트 지붕 위에 쌓인 눈이 낮 동안 햇볕에 녹으면 식수로 활용할 작정이었다.
맨 먼저 등로 개척에 나선 돈 윌란스와 듀갈 해스턴은
여기저기에 숨은 크레바스와 붕괴 직전의 빙탑들이 산재해 있어서
마치 지뢰밭을 걸을 때처럼 매우 조심스럽게 위태로운 빙하의 거대한 빙괴 사이로 스텝을 깎으며 나아가
빙하를 횡단하고 빙하 옆의 무릎까지 빠지는 심설 속으로 5km 이상 전진한 후,
그들이 ‘바위섬’이라고 명명한 빙하 상에 돌출된 바위 지대까지 진출했다.
그들은 그 바위 지대 상단부(4,877m)에서 남벽의 눈사태가 미칠 수 없는 안전한 캠프자리를 찾아냈고,
4월 2일 보닝턴 대장과 믹 버크, 닉 에스트코트 두 대원은 2명의 셰르파의 지원을 받아
그곳에 제1캠프를 구축한 다음 보닝턴과 버크가 상주했다.
4월 6일
보닝턴, 윌란스, 해스턴은 좌측 두 빙하 사이의 회랑지대를 지나고, 가파른 얼음 람페(Rampe·비탈길)를 올랐다.
그들이 빙하 상의 수많은 크레바스를 피해 스퍼 하단의 바위 절벽과 빙하의 경계선으로 전진할 때,
절벽 위쪽에서 따뜻한 햇볕에 녹은 고드름이 낙빙이 되어 낙석과 함께 그들에게 계속해서 폭격을 가했다.
그들은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루트 좌측의 오버행 빙벽을
‘다모클레스의 칼(Sword of Damocles·머리카락 한 올로 매달아 놓은 칼)’이라고 명명했는데,
그 밑을 지날 때 공포심으로 등골이 오싹했다.
그 위쪽 빙하 상에 쌓여 있는 여러 개의 원추형 눈더미는 공포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들은 위쪽의 안전한 바위 오버행 밑(5,334m)까지 진출해 제2캠프를 구축하고
윌란스와 해스턴 대원이 그곳에 머물렀다.
그들의 다음 목표지점은 760여m 위쪽 스퍼 상의 콜(col·안부)이었다.
제2캠프에 머물고 있던 윌란스와 해스턴은 폭설과 혹한 속에서 등반을 강행해 작은 걸리(Gully·쿨와르·골짜기)를 오르고,
바위 버트레스를 가로지른 뒤 다시 큰 걸리로 들어섰다.
그들은 걸리로 쏟아져 내리는 가루 눈사태를 피하기 위해 걸리 측면의 무릎까지 빠지는 심설을 헤치며 등반을 계속해,
그들의 목표지점인 스퍼 상의 콜 바로 밑에 위치한 작은 암벽까지 고정로프를 설치하고 하강했다
13일
마틴 보이슨과 닉 에스트코트 대원은 적설 속에 파묻힌 고정 로프를 파내며
윌란스와 해스턴의 최고 도달 지점을 지나 콜(6,126m)까지 진출해 상자형 텐트로 제3캠프를 구축했고,
보닝턴과 톰 프로스트 대원이 그곳에 머물렀다.
그들 앞에는 2개의 루트, 즉 아이스 아레트 하반부 능선마루의 직등 루트가 있었고,
아이스 아레트 좌측 벽에 위치한 넓은 눈 선반을 따라
안나푸르나 남벽과 아이스 아레트 사이에 형성된 코너 밑까지 트래버스한 후
그 코너 안에 위치한 걸리로 아이스 아레트 중간 지점으로 오르는 루트가 있었다.
그런데 이 코너 밑까지 가는 길은 설벽과 능선에 매달린 붕괴 직전의 여러 눈 처마 밑을 통과해야 하는 위험한 루트였다.
톰 프로스트는 과거에 남미 페루의 차카라후봉의 험난한 북릉을 등반한 경력이 있었기에 아이스 아레트를 직등하자고 고집했다.
두 사람은 그 루트로 등반하던 중에 프로스트 대원이 숨은 크레바스에 빠질 뻔한 위기를 겪고 나서
서로 자일을 묶고 가파른 아이스 아레트 능선 마루 상의 가파른 얼음 스텝(Step)으로 전진했다.
빙벽의 얼음이 단단하지 않아 발 밑의 얼음이 부서져 몸의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고,
빙벽에 박은 아이스 피톤과 아이스 액스가 자꾸만 빠져나와 확보하는 데 난항을 겪었다.
그들은 드디어 높이 30m의 가파른 스텝을 어렵사리 오르고,
대퇴부까지 빠지는 심설을 헤치며 전진하다가
등로의 장애물인 버섯 모양의 눈 더미와 눈 처마를 피해서 측벽으로 트래버스하고
다시 능선 마루에 붙었는데, 거의 수직에 가까운 또 하나의 스텝이 길을 막고 있었다.
제3캠프로 하산해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등반을 재개한 그들은 아이스 피톤을 줄줄이 박고,
또한 스텝을 깎으며 수직의 스텝을 어렵사리 돌파했다.
그들은 통과 불가능한 능선 상의 여러 개의 눈 처마를 측벽으로 우회한 후 다시 능선에 붙어 전진했다.
그들은 솜사탕 같은 심설을 만나 등반의 속도를 낼 수 없게 되자,
다시 좌측의 측벽으로 트래버스하고 능선으로 되돌아갔는데,
이번에는 면도날 능선이 나타났다. 그곳을 통과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어,
그들은 그동안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등반을 시도했던 이 루트를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다.
다음날 윌란스와 해스턴, 보닝턴, 프로스트 네 사람은
아이스 아레트의 좌측 벽에 위치한 넓은 눈 선반으로 트래버스하여 남벽과 아이스 아레트 사이의 코너 밑에 도달했다.
그들이 눈사태 통로인 코너 안의 걸리로 쏟아져 내릴 가루 눈사태에 대비해서
걸리 옆의 작은 얼음 능선으로 등반을 진행하던 중 폭설이 퍼붓기 시작했다.
곧 가루 눈사태가 걸리 속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며 심한 눈보라를 일으켜 화이트아웃 현상이 유발되었고,
가시거리가 짧아져 등반이 불가능하게 되어 제3캠프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보닝턴과 프로스트는 휴식을 위해 베이스캠프로 하산했고,
윌란스와 해스턴은 전날 도달했던 최고지점에서 그 위쪽 얼음 능선으로 등반을 계속했는데,
등로가 막혀버려 좌측의 아이스 스크루 설치가 불가능할 정도로 무른 빙벽으로 루트를 변경해야 했다.
그 벽은 워낙 난코스여서 그들은 여러 시간 동안 겨우 15m의 고도를 돌파했는데,
악천후마저 닥쳐서 등반을 중단하고 제3캠프로 하산해야 했다.
영국대의 안나푸르나 1봉 남벽 등반루트
절망하는 순간 아레트 관통하는 얼음 터널 발견
3월 23일 윌란스와 해스턴은 등반을 재개해 고난도의 빙벽을 어렵사리 돌파하고,
아이스 아레트 중간 지점의 능선에 올라 해발 6,492m 높이 눈밭에 상자형 텐트를 세워 제4캠프를 설치했다.
고소 포터들은 이곳까지만 짐 수송을 돕고, 여기서부터는 대원들만의 힘으로 루트 개척과 짐 수송을 교대로 행해야 했다.
보이슨과 에스트코트가 그곳에 머물며 루트 개척을 이어갔다.
두 사람은 아이스 아레트 상의 가파른 빙사면을 오르고,
작은 얼음 뾰족탑과 첫 번째 거대한 빙탑의 오버행 벽 사이에 도달했다.
에스트코트가 그 빙탑을 좌측의 가파른 설벽으로 우회하려 시도했으나,
설벽의 눈이 견고하게 얼어붙지 않아 밟자마자 미끄러져 내리는 통에 전진이 불가능했다.
그는 그 빙탑의 오른쪽 오버행 빙벽으로 트래버스를 재시도했는데,
해빙 직전의 구멍이 뻥뻥 뚫린 무른 얼음에 박은 아이스 스크루가 빠져나오는 바람에
확보가 불가능해 빙벽을 돌파할 수 없었다.
에스트코트가 절망감에 사로잡힌 순간 보이슨은 기적적으로 얼음 능선을 관통하는 높이 60cm, 길이 6m의 얼음 터널을 발견했다.
그가 짐을 벗어놓고 그 굴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군데군데 고드름이 진로를 방해했지만,
그는 아이스 액스로 제거하며 반대편 절벽 입구에 당도했다.
그는 터널 입구에 아이스 스크루를 견고하게 설치하고 자일을 걸어 매달린 후
절벽에 스텝을 깎아 핸드홀드와 풋홀드를 만들며 바닷게처럼 옆 걸음으로 빙벽을 트래버스했다.
계속 아이스 스크루를 설치하면서 빙벽 상의 가파른 걸리에 도달했다.
그는 팔꿈치, 무릎, 발, 아이스 액스를 이용해 걸리 속에 붙어 있던 젖은 눈을 파내고 스텝을 깎으며 걸리를 올랐다.
그는 걸리로 등반이 불가능한 지점에 이르러 걸리 가장자리의 얼음 리지를 이용하며 아이스 아레트의 능선 위로 올라섰다.
그는 그곳까지 모두 46m의 고정 자일을 설치했다.
이리하여 아이스 아레트의 최대 난코스 구간이 돌파된 것이다.
보이슨은 능선 상에 또 다시 나타난 빙탑을 우회하기 위해 가파른 빙벽을 가로지르는 바위 선반을 기어서 돌파했다.
두 사람은 그 날 하루 종일 90m의 고도를 돌파하고 제4캠프로 하산했다.
다음날 에스트코트가 선등하여 빙벽 트래버스를 끝내고 아레트 능선을 따라 전진했는데,
칼날 능선이 나타났고 그 위의 눈 처마가 루트를 가로막고 있었다.
선등을 교대한 보이슨이 우측 절벽에 돌출된 암벽지대를 루트로 이용하려고 자일을 잡고
절벽 상의 아이스 걸리에 들어서 18m를 하강한 다음 텐션트래버스(자일을 당기며 행하는 트래버스)로
거대한 아이스 걸리를 대각선 방향으로 건너서 암벽지대에 붙었다.
수직에 가까운 암벽은 얇은 얼음 갑옷을 걸치고 있어 등반이 몹시 까다로웠다.
그는 바위 립(rib)을 힘들게 오른 후 피톤을 설치하고 콜로 내려가 그 날 일과를 끝마쳤다.
다음날도 두 사람은 루트 개척에 계속 매달렸다.
클러프와 보닝턴이 루트 개척의 고역을 떠맡았다.
아레트 상의 제4캠프는 항시 강풍에 노출된 위치여서 텐트의 가장 작은 틈새로도 눈가루가 파고들었고,
대원들의 호흡에서 생긴 수증기가 텐트 천에 얼어붙어
다닥다닥 매달렸던 얼음조각들이 낮 동안 햇볕의 열기에 녹아 텐트 속의 침낭을 적셔놓는 바람에
그곳에서 겪는 혹한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켰다.
보닝턴과 클러프 두 사람은 우선 절벽 위로 60cm가량 튀어나온 눈 처마 위를 통과하는 고정 자일을 안전하게 재배치하기 위해
눈 처마를 피켈로 깎아내는 작업에 매달렸다.
두 사람은 아이스 아레트 6,553m 지점의 측면 절벽에 위치한 거대한 아이스 걸리에 보이슨이 설치해 둔,
통과하기 매우 힘든 고정자일 트래버스 구간을 ‘공포의 트래버스 길’이라고 명명했다.
두 사람은 제 4캠프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보닝턴은
아레트 측면의 절벽에 튀어나온 암벽의 오버행을 오르고 경사진 레지(ledge·좁은 바위 선반)에 도달했다.
그는 눈사태와 낙석의 위험이 도사리는 우측 아이스 걸리와
암벽지대를 피해 좌측 오버행 코너의 얼음이 들어찬 크랙을 재밍(틈새에 주먹을 밀어 넣음)하며 올랐다.
여러 개의 중간 확보물에 통과시킨 자일이 그를 자꾸만 끌어당기는 바람에 전진이 용이하지 않았다.
그는 암벽에서 레지를 아무리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었고,
두 서너 개의 풋홀드와 피톤을 설치할 만한 크랙만 눈에 띄었다.
그 앞에는 또 다른 오버행 바위가 나타났다.
보닝턴은 그곳으로 클러프를 불러 올려 선등을 교대했다.
클러프는 오버행 밑에 피톤을 설치하고 슬링을 걸어 풋홀드로 삼으며 오버행 위쪽으로 팔을 뻗어 크랙에 피톤을 설치한 후,
거기에 슬링을 걸어 끌어당기며 오버행을 돌파해 좁은 레지에 도달했다.
보닝턴이 클러프와 합류했을 때 갑자기 눈구름이 그들을 삼켜버렸고,
잠시 후 두 사람은 폭설과 강추위의 기습을 받아 등반을 중단했다.
그들은 그 날 겨우 30m 고도를 개척하고 바위 램프를 이용해 하산하며
‘공포의 트래버스 길’ 가까운 지점까지 고정 자일을 직선으로 수정했다.
강풍과 폭설, 혹한 속에서 초인적인 노력으로 루트 개척
다음날 보닝턴과 클러프는 등반을 재개해 전날의 최고 지점에 도달했다.
보닝턴은 암벽에서 핸드홀드를 찾아내기 힘들어 그 측면의 가파른 설사면을 올라 첨봉 꼭대기에 도달했는데,
그곳에서 천연 얼음 동굴을 발견했다.
그는 아이스 아레트의 능선으로 전진이 불가능해 클러프를 동굴까지 불러 올리고,
그의 확보를 받으며 아이스 아레트 측면의 잘 부서지는 가파른 암벽과 빙벽을 바꿔가며 힘들고 위험한 트래버스를 계속했다.
그들은 이 트래버스를 ‘악마의 트래버스 길’이라고 명명했다. 그들은 등반 도중 폭설이 내려 제4캠프로 귀환했다.
5월 3일
해스턴과 보닝턴은 아이스 아레트 상의 걸리를 넘어선 다음 빙벽과 암벽을 트래버스하고
스텝을 깎으며 전진하며 아이스 아레트의 위쪽 안부(6,553m)에 도착했다.
그들이 제3캠프를 설치한 지 5주 만에, 남벽 등반의 최대 난관인 아이스 아레트 돌파에 드디어 성공했다.
이제 그들의 등반이 절반쯤 성공한 셈이었다.
4일,
버크, 프로스트, 윌란스, 듀갈이 아이스 아레트 위쪽 안부까지 로프를 운반했고,
해스턴은 혼자서 얼음이 얼어붙은 긴 자일을 끌면서
무릎까지 빠지는 심설을 헤치며 전진해 150여m의 고정 자일을 설치했다.
다음날 그들은 45도 경사의 능선이 갑자기 절벽으로 치솟은 얼음 절벽 밑까지 진출해,
튼튼한 상자형 텐트가 아니라 보통 텐트를 세워 제5캠프를 구축하고
해스턴과 윌란스가 그곳에 머물렀다.
그들의 텐트가 눈 속에 온통 파묻혀 버릴 지경으로 얼음 절벽 위쪽에서 밤새 가루 눈사태가 계속 쏟아져 내렸다.
7일,
해스턴이 텐트 입구의 윌란스에게 확보를 받으며 크램폰을 착용하고 설원을 지나
가루 눈사태를 뒤집어쓰고 자신의 진행 방향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경우를 겪으면서
얼음 절벽 중간지점까지 진출해 90여m의 고정 자일을 설치한 후 하산했다.
그러나 그날 오후 눈구름 지붕이 산 아래쪽으로 이동하자마자
다시 등반에 나서 고정로프를 따라 해스턴이 아침에 도달했던 최고지점까지 올라갔다.
해스턴이 단단한 얼음에 스텝을 깎기도 하고,
아이스 스크루를 설치하면서 얼음 절벽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
90여m 위쪽 설사면 끝에 록밴드가 거대한 성당의 탑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해스턴은 얼음 절벽 위로 윌란스를 불러 올렸다.
그들은 등반 도중 자일이 바닥이 나서 각자 단독으로
록밴드 아래 베르그슈룬트(bergschrund·가로로 형성된 크레바스)까지 올라갔는데,
그곳에서 이상적인 캠프지를 발견하고 하산했다.
8일,
윌란스와 해스턴은 제5캠프의 텐트를 제외한 모든 장비를
록밴드 아래의 베르그슈룬트로 운반하고 휴식 차 베이스캠프로 하산했다.
버크와 프로스트는 에스트코트와 보이슨의 지원을 받으며
얼음이 얼어붙은 제5캠프의 텐트를 록밴드 아래의 베르그슈룬트 안으로 이동시켜 설치했다.
그들은 록밴드 좌측에 돌출한 다리미 꼴 바위 스퍼가 아이거 북벽의 플래트 아이언과 닮은꼴이어서
‘플래트 아이언’이라고 명명했다.
버크와 프로스트 대원은 록밴드의 좌측 아래 빙암 지대로 트래버스하며 등반을 시작했다.
갑자기 후등자 프로스트는 발아래 눈밭이 함몰, 너비 2m, 깊이 18m쯤 되는 숨은 크레바스에 빠졌다.
그는 추락 중에 좁은 바위 틈새에 몸이 끼여 더 이상의 화를 면했으나 두 발은 캄캄한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프로스트가 얼이 빠진 상태로 간신히 기어 나온 다음
그들은 등로를 바꿔 바위 버트레스 옆의 50도 경사의 빙벽을 직등했다.
프로스트는 오랜 자일 파트너인 이본 취나드가 고안한,
성능이 우수한 아이스 해머를 사용했지만,
아이거 북벽의 제2 빙원을 오를 때만큼 빙벽등반이 어렵다고 느꼈다.
선등자 버크가 빙벽을 46m 오르고 옆의 암벽에 확보 앵커를 설치한 다음 프로스트를 불러 올렸다.
빙벽이 더 가팔라졌고 얼음의 강도가 강철처럼 단단했다.
버크는 빙벽등반을 마치고 바위 날개에 도달해 피톤을 설치한 후, 홈통을 이용해 암벽 등반을 계속했다.
그의 앞에 베르글라(verglas·얇은 얼음)가 덮인 가파른 암벽이 나타났다.
그들이 이 암벽을 어렵사리 돌파하고 홈통의 상부에 도달했을 때
눈 덮인 긴 레지(ledge)가 거대한 빙원으로 이어져 있었다.
오후의 강렬한 햇볕에 벽의 얼음이 해빙되면서 낙석과 낙빙의 포화가 연속되었다.
그 때 돌멩이 하나가 프로스트의 배낭에 명중해 그는 넋이 나갔다.
그들은 고정로프가 낙석에 맞아 절단될까봐 두려워했다.
버크 대원은 레지의 크랙에 피톤을 설치한 후 자일 하강했다.
다음날 두 사람은 150m 자일을 휴대하고 전날 최고 도달지점에 당도했다.
그들은 낙석의 포화를 뚫고 설원의 꼭대기에 도달한 다음 암벽등반과 빙벽등반을 병행했는데,
빙벽의 경사도가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 제3 빙원의 기울기만큼 가팔라졌다.
그때 버크는 좌측 벽에서 거대한 군함의 뱃머리처럼 튀어나온 플래트 아이언 스퍼를 향해
전진하며 휴대한 자일을 다 깔고 하산했다.
다음날 두 사람은 등반을 재개해 전날의 최고 도달점에 도착했다.
버크가 크램폰을 벗고 30m를 암벽 등반한 후 피톤을 설치하고 등반을 계속해 걸리(쿨와르) 밑에 도달했다.
그는 걸리 속의 빙벽을 등반하려고 크램폰을 다시 착용했다.
그러나 그는 플래트 아이언 스퍼의 상단 30m 아래 지점에서 너무 지친 나머지 등반을 포기하고 하산해야 했다.
강풍과 폭설, 혹한 속에서 가파른 절벽에 루트 개척은 초인적인 노력이 필요한 고역이었다.
히말라야 고산의 설릉에서
셰르파가 심설 속으로 미리 러셀하며 터놓은 길로 산소마스크를 쓰고 워킹만 하는 데도 가슴이 터질 듯한 고통을 겪고,
또한 선등자들이 난코스에 미리 설치해 둔 고정자일로 등강기를 이용하며 오르는 일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닌데,
7,000m가 넘는 고도의 절벽에서 무산소로 루트를 개척하며 빙벽과 암벽을 등반하는 일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작업이었다.
두 사람이 하산할 때 록밴드 위로 가루 눈사태가 쏟아져 내렸다.
그 날 밤 연속되는 가루 눈사태로 베르그슈룬트 속에 설치된 그들의 텐트는 거의 파묻혀 버릴 지경이 되었다.
다음날 프로스트는 삽으로 캠프 주변에 쌓인 눈을 파냈고,
버크는 휴식을 위해 아래쪽 콜로 하산했으며,
보이슨, 윌란스, 해스턴은 플래트 아이언 스퍼의 상단 7,315m 지점까지 짐을 운반했다.
‘알파인 스타일 등반의 귀재’ 매킨타이어 낙석에 절명
윌란스와 해스턴이 플래트 아이언 스퍼의 상단에 제6캠프를 설치한 다음날인 5월 20일
대원들은 영국 육군 등반대가 안나푸르나 북벽으로 등정했다는 기쁜 소식을 접했다.
보닝턴과 클러프가 제6캠프까지 짐을 운반하고 하산했다.
21일 보닝턴과 에스트코트가 제6캠프까지 짐을 운반하는 도중에
첫 번째 빙원에서 에스트코트는 탈진하여 하산했다.
보닝턴은 혼자서 자일을 짊어지고 제 6캠프로 올라갔다.
그 날 윌란스와 해스턴은 걸리와 침니 그리고 스노 걸리를 오르고 록밴드 상단까지 루트를 개척했는데,
자일이 부족해 록밴드 상단 아래 60m 지점까지만 고정 자일을 깔았다.
보닝턴 대장은 혼자 제5캠프로 내려와 취침 후 다음날 다시 텐트, 촬영장비, 식량이 든 짐을 제6캠프로 운반했다.
등반대장의 최종캠프까지 세 번째 짐 운반이었다.
윌란스와 해스턴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제6캠프에서 6일간을 버티어낸 후인
5월 27일 산소와 카메라 장비, 그리고 텐트와 로프를 휴대하고 정상으로 향했다.
그들은 록밴드 위쪽에서 제7캠프 사이트를 물색했으나 마땅한 장소를 발견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가파른 설원으로 등반을 계속해 설원 상부에 텐트를 데포시켜 놓고,
이어 눈보라 속에서 가파른 설릉으로 등반을 계속했다.
그들이 높이 240여m의 빙암벽을 돌파하고,
정상 능선을 넘어서자 좌측에 안나푸르나 정상 설봉이 나타났다.
그들은 산소를 사용하고 있어서 1,200m 아래쪽에서 루트를 개척할 때보다 더 큰 고통을 겪지는 않았다.
등반을 시작한 지 2개월 만에 두 사람은 드디어 안나푸르나 정상을 밟았다.
갑자기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고 있는 듯 고양된 기분을 느꼈다.
정상 눈밭에는 며칠 전 북벽으로 등정한 영국 육군 등반대의 발자취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곧 안나푸르나 동봉을 제외하고 모든 파노라마가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해스턴은 50m 길이의 자일로 어려운 구간을 자일 하강한 후,
등반대가 제2캠프에서 록밴드 위쪽까지 4,500m 길이의 고정 자일을 설치한 노력의 상징물로
그 고정 자일을 그곳에 그냥 남겨 두었다.
전 대원들이 하산 중에 가슴 아픈 비극이 발생했다.
갑자기 눈사태가 덮쳐 다른 대원들은 재빨리 대피했으나
, 눈사태의 여파로 제2캠프 아래쪽 빙탑이 붕괴되며
그 밑에 있던 이안 클러프 대원이 얼음더미에 매몰되어 사망했다.
영국대의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 후 11년이 지난 1981년 5월 23일
폴란드의 차피르츠키(R. Szafirski) 대장이 이끄는 등반대의
베르베카(Maciei Berbeka)와 프로불스키(Boguslaw Probulski) 두 대원이 안나푸르나 남벽의 우측 스퍼로 중앙봉을 등정했다.
그 해 가을 일본의 요시노 대장이 이끄는 등반대의 아오타 대원과
야나기사와 대원이 중앙 스퍼의 상부에서 주봉(8,091m) 쪽으로 등로를 바꾸어 등정했는데,
한 명의 대원이 사망했다.
영국대 루트와 폴란드대 루트는
중간에 기나긴 얼음 능선을 끼고 있어서 등반에 많은 시일을 요하고 안전한 하산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알파인 스타일 등반방식이 부적합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2년 영국 산악인 매킨타이어는 프랑스 산악인 르네 길리니 대원과
알파인 스타일로 폴란드 루트 좌측의 거대한 곡선 람페(ramp·비탈길)에 신 루트 개척에 나섰다.
매킨타이어는 평소대로 완고한 등반방식을 고수해 최소한의 필수 장비, 아이스 스크루 한 개와 피톤 3개만 휴대하는 만용을 부렸다.
그와 동료 길리니가 7,150m 지점의 가파른 록밴드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장비 부족으로 그곳의 돌파가 불가능해 퇴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람페 하부까지 하산했을 때 매킨타이어는 단 하나의 낙석을 맞고 추락하여 절명했다.
장래가 촉망되던 알파인 스타일 등반법의 귀재(鬼才)는 이렇게 허망하게 우리들의 곁을 떠났다.
1984년 8월 스페인의 두 명의 카탈로니아 산악인인 닐 보이가스와 엔릭 루카스가
매킨타이어의 모험정신을 계승해 안나푸르나 남벽을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하려고
연락장교 한 명 그리고 바르셀로나 출신의 두 친구들과 함께 안나푸르나 성소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매킨타이어와 길리니의 선례(先例)를 따라
9월 말 주변의 봉우리 플루티드피크와 텐트피크에서 고소적응 훈련을 마쳤다.
그들은 여러 개의 루트가 뒤얽히고 등반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칼날 능선이 포함된
폴란드대 루트의 우측 광활한 설사면을 좌측 대각선 방향으로 가르는 구부러진 람페,
즉 매킨타이어가 시도했던 루트를 택했다.
그들의 예정루트는 악명 높은 낙석들의 포격이 난무해
알파인 스타일로 안전하게 오르려면 빠른 등반 속도가 필수적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체력이 최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등반을 중단하고 휴식을 취하며 기다린 뒤
낙석의 위험이 가장 큰 루트 하부를 야간 등반하기로 했다.
그들은 남벽 밑 5,800m 지점에 위치한 베르그슈룬트 속에서 비박하고 밤 10시 등반을 시작했다.
그들은 알프스 드로아트(the Droites)봉 북벽의 루트와 흡사한 벽 하부를
등반 속도를 내기 위해 자일도 묶지 않고 쏜살같이 올랐다.
새벽녘에 그들은 고도 6,800m 지점에 도달했는데,
그때서야 낙석의 위세가 수그러들었다.
루카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야간인데도 그 지점까지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수많은 낙석들이 소낙비처럼 퍼부었다고 한다.
알파인스타일로 6일 만에 남벽 타고 중앙봉 등정
람페가 좌측으로 구부러지자 루트는 안전해졌으나 경사도가 더욱 가팔라졌고,
곧 2년 전 길리니와 매킨타이어가 좌절을 겪었던 7,150m 지점의 가파른 암벽지대,
즉 록밴드가 나타났다.
매킨타이어가 등반할 때보다 더 많은 양의 얼음이 매끄러운 암벽을 뒤덮고 있어 등반이 더 수월해 보였고,
그들은 매킨타이어보다 약간 더 많은 피톤을 휴대하고 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록밴드 밑에서 비박을 끝내고 등반을 시작하고 나서야
의외로 등반이 극도의 난코스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최대의 난코스를 돌파하기 위해 25kg 나가는 그들의 배낭을 벗어 놓고 맨몸으로 등반을 했지만,
세 번씩이나 추락을 겪었다. 그들이 50m를 두 피치로 나누어 등반하는 데 하루 종일이 걸렸다.
암벽 난이도는 V+, A2였고 빙벽은 경사도가 최소한 80도였다.
그들이 록밴드를 돌파하자 7,200m 지점에서 7,600m 지점까지의 루트 전체가 빙벽이었다.
그들은 낙석의 방패막이 구실을 할 수 있는 7,460m 지점의 세락(빙탑) 밑, 7,300m 지점에서 네 번째 비박을 했다.
다음날 그들은 좌측으로 크게 트래버스하여 높이 200m인 화강암 암탑을 돌파하고 거대한 중앙 설원에 도달했다.
이제 그들의 루트는 폴란드대의 루트 상부와 만났다.
그들은 높이 160m, 난이도 V+의 화강암 벽을 돌파하고,
등반이 수월한 지역의 7,800m 지점에서 5번째 비박을 했다.
다음날 그들은 필수품만 휴대하고 5시간 동안 등반해 중앙봉과 동봉 사이의 능선에 도달하고
10월 3일 낮 12시 반에 안나푸르나 중앙봉(8,051m) 정상을 밟았다.
그들은 파김치가 된 몸으로 중앙봉의 100m 높이 수직 절벽을 자일하강하고 주봉으로 등반을 계속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중앙봉 정상에서 90분을 보내고 그들의 최고지점 비박지로 발길을 돌렸다.
다음날 그들은 휴대하고 있던 7mm 로프 80m와 8mm 로프 80m를 이용하여
폴란드 루트로 대담하게 자일 하강하다가 우측 설사면으로 하산하여 16시간 만에 베이스캠프로 귀환했다.
그들은 남벽에 붙어 6일 만에 중앙봉을 등정하고 하루 만에 하산을 완료해,
히말라야에서 가장 훌륭한 알파인 스타일 등정을 성취했다.
비록 그들이 안나푸르나 주봉을 밟지는 못했지만,
안나푸르나 주봉 남벽의 최대 위험지대인 제1빙원과 제2빙원을 돌파하며 남벽에 네 번째 신루트를 개척했고,
최대 난코스의 알파인 스타일 등반을 성취했기 때문에
폴란드 산악인 쿠르티카가 이룩한 가셔브룸 4봉 서벽 등반과 다울라기리 동벽 등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비록 산 정상을 밟지 못했어도 가장 위대한 등반의 하나로 평가된다.
1987년 12월 20일
일본대의 노보루 이마다, 야슈히라 사이토, 테루 새구사, 토시유키 고바야시 4명이 영국대 루트로 동계 초등에 성공했으나
2명의 대원이 사망했다.
히말라야 8,000m 봉우리 14봉을 두 번째로 완등한 폴란드 산악인 예지 쿠쿠츠카는
1988년 10월 13일 동료 아르투르 하이체르(Artur Hajzer)와
안나푸르나 1봉 남벽의 맨 우측 가장자리의 스퍼에서 2회,
동릉에 오른 후 1회 도합 3회의 비박 끝에 동봉을 등정해 안나푸르나 남벽에 5번째 루트를 개척했다.
1991년 국제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대를 이끈 폴란드 산악인 비엘리츠키(후에 5번째 8,000m 14봉 완등자)가
10월 21일 보그단 스테프코와 영국대 루트로 등정했고,
이 때 폴란드 여성 산악인 반다 루트키에비츠도 최종 캠프에서 단독으로 등정에 성공했다.
극한 등반가들은 안나푸르나 1봉 남벽의 눈사태와 낙석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스퍼 루트 대신 빠른 속도의 등반이 가능한, 광활한 설사면과 스퍼의 측면에 루트를 개척하려고 시도했다.
1992년 프랑스의 유명 산악인 피에르 베갱과 장크리스토프 라파예(Jean-Christophe Laffaille)는
안나푸르나 1봉 남벽의 두 개의 스퍼,
즉 영국대 루트와 일본대 루트 스퍼 사이의 깔대기형 설벽을 등반 중에 폭풍과 조우했다.
그들은 급히 하산 중에 자일하강용 앵커가 빠지면서 베갱이 추락사했고,
라파예는 혼자 낙석의 포격 속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다가,
겨우 10m 길이의 끊어진 자일 토막을 이용해 자일 하강하며 사투를 벌인 끝에 구사일생으로 귀환했다.
1999년까지 안나푸르나 1봉에는
북쪽에서 6개의 루트, 남벽에 5개의 루트, 동릉 트래버스 루트 1개 도합 12개의 루트가 개척되었다.
안나푸르나 북쪽에서 1974년 스페인대가 프랑스대 초등루트 좌측의 북동 리지 루트로 동봉을 초등했으며,
1977년 네덜란드대가 프랑스 루트 하부에 변형루트를 개척했고,
1980년 독일대가 프랑스대와 스페인대 루트 사이로 중앙봉을 초등했으나
스노 브리지도 없는 커다란 크레바스를 돌파하지 못해 주봉은 밟지 못했다.
1984년 스위스 산악인 에라르 로레탕과 유스 두 사람은 동쪽의 록루아르(7,485m)를 오르고
동릉으로 등반을 계속해 3일 만에 동봉을 등정하고,
중앙봉의 100m 수직 벽을 자일 하강한 후 주봉의 안부에 짐을 벗어놓고 등정해
알파인 스타일로 안나푸르나 1봉의 3개 봉을 트래버스한 후
북벽의 네덜란드 루트로 하산, 역사적인 위대한 등반에 성공했다.
1985년 라인홀트 메스너와 한스 카멀랜더가 북서벽의 가파른 빙벽을 돌파하고 웨스트숄더에 올라 서릉으로 등정했고,
1996년 폴란드·우크라이나·미국 산악인들로 구성된 국제대의 두 대원이 북서필라 루트로 등정했다.
1997년 12월 히말라야의 8,000m 급 11개 봉을 등정한 카자흐스탄 출신의 유명 산악인 아나톨리 부크레예프는
12번째의 8,000m 봉우리 안나푸르나 1봉의 남벽 등반을 시도했으나,
눈사태의 위험 때문에 등반을 포기하고 서릉으로 등반 도중 눈처마가 무너지며 일으킨 눈사태에 휩쓸려 사망했다.
이창기 전 강릉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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