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스탕은 앞서 본 것과 같이 고고도에서 적 전투기와 맞서 싸우는 전투기가 아니라, P-40을 대체할 만한 저고도 전투 및 지상공격용 전투기로써 개발되었다. 그러나 미군과 영국군이 보기에 무스탕의 고고도 비행능력이 부족은 분명 아쉬운 점이었다.
어째서 무스탕은 이렇게 고고도 비행능력이 떨어지는 것일까? 이는 무스탕에 탑재된 엔진인 엘리슨의 V1710이 저고도에 특화되어 있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최대 1150마력의 힘을 낼 수 있는 이 V1710은, 최대 출력만 놓고 보자면 동시기의 다른 전투기들이 사용하던 엔진에 비해 특별히 약한 편이 아니었지만 비행고도만 높아지면 힘이 약해졌다. V1710은 고고도 비행을 그리 중요시 하지 않고 설계된 엔진이다 보니 수퍼차저의 성능이 높지 않았다(수퍼차저에 대해서는 본문 뒤의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을 참조).
1942년 4월, 영국 롤스 로이스의 테스트 파일럿인 하커(Ronald W. Harker)도 무스탕을 타본 뒤로 이 전투기의 고고도 비행성능 부족을 아쉽게 여겼다. 당시 영국 공군의 주력전투기였던 스핏파이어(그중에서도 Mk.V 모델)은 거의 비슷한 출력의 엔진을 탑재하고도 저고도에서는 무스탕보다 50km/h정도 속도가 더 느렸다. 심지어 스핏파이어는 무스탕보다 3배는 더 가벼운 전투기였는데도 말이다. 하커는 만약 무스탕에 고고도에서도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는 엔진을 달아준다면 매우 훌륭한 전투기가 될 것이라고 보고 했다.
물론 무스탕의 부족한 고고도 비행성능을 아쉬워한 것은 영국뿐만이 아니었다. 무스탕의 제작사인 노스 아메리칸 역시 자신들의 전투기가 고고도에서도 우수한 성능을 발휘하기를 원했다. 이들은 처음에 P-38 전투기처럼 고성능 터보 수퍼차저가 달린 버전의 앨리슨 엔진을 사용할 생각을 했다. 문제는 터보 수퍼차저 시스템은 매우 크고 무겁기 때문에 P-51 같은 소형전투기에는 부적합했다.
[P-38 라이트닝. 미국이 본토로 공습해오는 적 폭격기를 막는 고고도 요격기로 개발한 전투기다. ]
2차대전 초기에 등장한 다른 미육군의 주력전투기들과 달리, 이 P-38은 비교적 고성능인 터보 수퍼차저를 탑재하여 고고도 비행성능이 탁월한 편이었다(그런데 유럽에서는 독일군 전투기에 비해서는 고고도 성능이 부족하여 주로 공중전 임무 보다는 지상공격 임무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태평양에서는 일본 전투기에 비해 고고도 성능이 탁월하여 고고도에서 일본군 전투기를 상대로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런데 이 전투기가 왠지 눈에 익은 독자분들은 없으신지? 바로 게임 1942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1942는 일본의 게임회사에서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P-38을 타고 일본군을 물리치는 내용이다.(물론 일본의 주력전투기가 주인공으로 나와서 연합군을 물리치는 내용의 게임이 나와도 곤란하지만)
고도만 높아지면 숨이 차오르는 무스탕을 위한 해결 방법으로 영국과 미국은 서로 정보교환을 하지 않았음에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무스탕용 엔진으로 앨리슨 엔진 대신 더 고고도 비행에 적합한 롤스 로이스의 멀린 엔진을 사용하는 것이다.
멀린(Merlin)엔진은 종종 영국의 아서왕 전설에 나오는 마법사 멀린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오해를 받지만, 사실 이 이름은 쇠황조롱이라는 뜻이다. 롤스 로이스사는 전통적으로 항공기용 왕복엔진에 맹금류의 이름을 붙여왔는데 공교롭게도 이 엔진에 붙은 멀린이란 이름이 마법사의 이름과 철자가 같았던 것이다(물론 마법사 멀린은 영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워낙 유명하므로 엔진 이름을 정할 때 롤스 로이스가 전혀 모르고 멀린이란 이름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롤스로이스는 1925년에 케스트럴(Kestrel : 황조롱이) V-12라는 엔진을 개발하였다. 꽤나 다양한 항공사에서 이 케스트럴 엔진을 가져다 자신들의 항공기에 탑재한덕에 롤스 로이스는 꽤 많은 수익을 올렸다. 이후 롤스 로이스는 케스트럴 엔진을 토대로 버저드(Buzzard : 말똥가리)라는 엔진을 개발하였으며, 수퍼마린사(Supermarine)에서 개발한 경주용 수상비행기 S-6는 이 버저드 엔진을 탑재하고 1929년에 열린 슈나이더 컵 수상비행기 경주대회에서 항공기 속도부분의 세계 신기록을 갈아치워 버렸다.
롤스로이스는 이 버저드 엔진을 토대로 1933년에 군용 엔진으로 쓰기에 더 적합한 엔진을 개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멀린 엔진이었다. 이렇게 개발된 멀린 엔진은 스핏파이어, 디파이언트, 허리케인, 모스키토, 보파이터 같은 전투기는 물론 랭카스터나 핼리펙스 같은 대형 폭격기에도 쓰이는 등, 영국이 운용하던 군용 항공기 대부분에 폭 넓게 쓰였다(물론 개발 연도에 따라, 또 항공기 기종 및 비행환경에 따라 최적화 된 멀린 엔진이 필요했기 때문에 각각의 항공기가 쓰는 멀린은 세부 모델이 달랐다).
[롤스 로이스의 멀린 엔진. 실린더가 좌우 6개씩 총 12개가 서로 60도 각도로 마주보고 있는 12기통 수랭식 엔진이다. 초기형 멀린은 890마력을 냈지만 계속 개량형이 등장, 나중에는 1710마력을 내는 버전도 나왔다.]
무스탕에 멀린 엔진을 장착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무스탕과 같은 앨리슨 엔진을 사용하던 미국의 전투기, P-40에 제작사인 커티스가 이미 멀린 엔진을 장착해보았으나 그렇게 성공적이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롤스 로이스와 노스 아메리칸은 P-40과 달리 P-51은 아직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 전투기에 멀린 엔진을 장착하는 시험을 각각 따로 진행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멀린 엔진을 장착한 P-51은 1942년이 끝나갈 무렵에 6.7km(2만2천 피트) 상공에서 696km/h(433mph)를 기록했다. 이는 P-51A은 물론 동시기의 다른 나라의 주력 전투기들보다도 빠른 속도였다. 2선급 전투기로 개발된 무스탕이 엔진을 바꿔주자 주력전투기로서도 손색없는 실력을 선보인 것이다.
[롤스 로이스에 손을 본 멀린엔진 장착형 무스탕. 추가적인 엔진 냉각을 위하여 기수아래쪽으로 공기흡입구를 새로 만들었다. 롤스로이스는 무스탕 X라는 프로젝트 명으로 멀린 엔진 장착을 무스탕에 대해 연구하였다.]
노스 아메리칸은 무스탕의 엔진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부분도 손을 보았다. 먼저 무스탕의 엔진을 바꿈에 따라 기수부분의 형상도 재설계해야 했다. 더불어 멀린 엔진의 냉각을 위하여 기수부분에도 추가적인 공기흡입구를 만들었다. 한편 배면에 달려 있던 라디에이터 및 냉각 시스템도 새 엔진에 맞춰 더 커졌다. 한편 노스 아메리칸은 강력해진 새엔진에 맞춰 새 무스탕의 기체강도도 종전의 무스탕보다 더 튼튼하게 재설계 하였으며 무스탕의 주날개 밑에는 최대 450kg(1천 파운드)급 폭탄도 달 수 있는 폭탄 장착대를 설치하였다.
[노스 아메리칸에서 제작한 P-51B 무스탕의 시제기. 똑같이 멀린 엔진을 탑재했지만 영국의 무스탕 X와는 기수형상이 많이 다르다. 노스 아메리칸은 기수 밑에는 조그만 공기흡입구만 만들고, 대신 배면에 달린 라디에이터를 재설계 해서 멀린 엔진의 냉각 문제를 해결했다.]
영국군과 미군 모두 이 새로운 무스탕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미군은 새로운 P-51에 P-51B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다. 처음 멀린 엔진을 달았던 시험용 무스탕보다도 더 성능이 개선된 P-51B는, 9km(3만 피트)상공 까지 올라가면 710km/h(441mph)의 속도로 비행이 가능했다. 종전 P-51A에 비하면 160km/h정도는 더 빠른 속력이었다. 또한 P-51B는 상승P-51A에 비해 두 배가 넘는 상승률을 자랑했다.
미 육군 항공대는 4백대의 P-51B를, 영국군은 무려 천 대의 P-51B를 구매하겠다고 나서자 노스 아메리칸은 이 수량을 맞춰 생산하느라 진땀을 빼야했다. 노스 아메리칸은 이미 만들고 있던 AT-6 훈련기와 B-25 경폭격기를 각각 새로 다른 지역에 공장을 지어서 생산하고 있었으며, L.A.에 원래 있던 공장에선 P-51B만을 생산했다. 이후 미 공군이 1350대의 P-51을 추가로 주문하자 노스 아메리칸은 AT-6 훈련기를 생산하던 달라스쪽 공장에서도 P-51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미 공군은 L.A.에서 생산한 무스탕은 P-51B, 달라스에서 생산한 무스탕은 P-51C라고 명명하였는데 사실 생산 공장만 다를 뿐 두 모델간의 특별히 큰 차이점은 없었다.
한편 P-51B 무스탕의 엔진은 최종적으로 V-1650-3으로 결정 났으며, 이는 멀린63 모델을 미국의 팩커드에서 라이센스 생산한 것이었다(원래 팩커드는 무스탕용 엔진을 생산하기 이전부터 멀린 엔진을 라이센스 생산하고 있었다). 갑자기 미국내에서 2000대가 넘는 무스탕이 제작되어야 하다 보니 팩커드 역시 일손이 달리기 시작했고, 이 부족한 일손을 보충하기 위해 다른 항공기 관련 회사인 콘티넨털에서 멀린 엔진을 추가로 라이센스 생산하기 시작했다.
[P-51C의 모습. 사실상 P-51B와 생산된 공장만 다를 뿐 항공기 자체는 큰 차이가 없다. 미 육군 항공대는 전쟁 중, 후반 무렵부터 사진처럼 항공기에 위장색을 칠하지 않았는데, 이는적의 눈에 잘 띄는 대신 중량 및 공기저항을 줄이는 효과가 있었다. ]
영국의 롤스(C.S. Rolls)와 로이스(Henry Royce)는 1906년 자신들의 이름을 따서 롤스 로이스라는 회사를 차렸다. 자동차를 만들던 이 회사는 1914년 항공기용 엔진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롤스 로이스는 현재도 항공기용 왕복엔진은 물론 각종 전투기 및 대형 여객기용 제트 엔진등을 제작중이다.
독일의 BMW는 1916년 BFW(바이예른 항공)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으며 본래 항공기 엔진을 제작하던 회사였다. 이후 BMW라는 이름으로 개칭한 뒤에도 각종 항공기 엔진을 제작하였으다. 사실 BMW의 로고는 회전하고 있는 항공기 프로펠러를 상징화 한 것이다. 우리는 BMW를 자동차 회사로 더 잘 알고 있지만, 이 회사가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28년으로, 다른 자동차 회사를 인수 하여 Dixi라는 소형차를 생산한 것이 BMW가 처음 자동차를 만든 시초다.
또 다른 유명한 독일의 자동차 회사, 벤츠도 2차 세계 대전 당시 많은 항공기 엔진을 제작하였다.
스웨덴의 사브도 항공기를 제작하던 회사이며, 현재도 JAS39 그리펜 전투기 같은 항공기를 개발하고 있다(물론 자동차 사업부와 항공기 사업부는 나뉘어져 있다).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자동차 회사들은 항공기내지 항공기 엔진을 제작하던 경우가 적지 않다. 제트기가 등장하기 이전 시절의 항공기들이 사용하던 왕복엔진은, 사실 자동차 엔진과 구조면에서 거의 비슷했기 때문에 고성능 자동차 엔진을 만들 수 있는 회사라면 고성능 항공기 엔진 역시 만들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엔진의 스펙에 써있는 최대마력은, 해면고도, 즉 고도 0에서 낼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실제로는 고도가 높아질수록 연료를 태우기 위한 산소가 급격히 줄어들게 되므로, 엔진의 힘 역시 줄어들게 된다. 이점은 자동차라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항공기라면 큰 문제가 된다. 즉 고도가 높아질수록 엔진의 힘이 떨어져서 항공기가 제성능을 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수퍼차저(Super Charger, 우리말로 과급기라고도 한다)다. 수퍼차저는 일종의 압축기로, 엔진의 구동축에 연결된 압축기를 돌려서 공기를 압축한 다음 엔진에 보내는 장치다. 즉 주변 공기를 강제로 빨아들여 압축한 다음 엔진에 보내므로, 일정 고도로 올라가도 엔진에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있으며, 높은 고도로 올라가도 수퍼차저가 없을 때 보다는 훨씬 엔진이 원활하게 산소를 공급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수퍼차저는 엔진으로부터 힘을 받으므로, 결과적으로 엔진의 힘 일부는 프로펠러가 아니라 이 수퍼차저를 돌리는데 써야한다. 이점을 못 마땅하게 여긴 개발자들은 엔진의 힘 대신 버리는 힘, 즉 엔진의 배기가스에서 힘을 압축기를 돌리는데 사용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엔진 내에서 연소과정을 거치고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배기가스는 제법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엔진 개발자들은 이 배기가스를 모아서 터빈(일종의 소형 풍차)를 돌리게 했다. 터보수퍼차저란 바로 이 터빈에서 얻은 힘으로 수퍼차저를 돌리는 시스템을 말한다. 다만 터빈으로만 모든 공기를 압축하려고 할 경우, 엔진이 작은 힘을 내고 있거나 기타의 이유로 배기가스가 많이 나오지 않으면 그만큼 터보수퍼차저의 힘이 약해지므로, 대개의 경우에는 터보수퍼차저를 사용하는 항공기 엔진이라 하더라도 작은 수퍼차저가 함께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즉 수퍼차저와 터보수퍼차저를 이용하여 두 단계에 걸쳐 공기를 압축하는 것이다).
터보수퍼차저는 분명 효율적이지만, 그 시스템 자체가 크고 무겁기 때문에 소형 엔진에 쓰기는 어렵고 주로 대형폭격기용 엔진등에 사용되었다(드물게 대형 전투기인 P-38이나 P-47 같은 전투기들은 이 터보수퍼차저 시스템을 사용하였다).
참고로 자동차에도 이 수퍼차저내지 터보수퍼차저가 달려 있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흔히 터보가 달렸다고 하는 차량이 바로 이 터보수퍼차저 시스템이 달린 차량이다. 또한 자동차에 붙어 있는 인터쿨러라는 것은 터보수퍼차저를 거쳐서 압력과 함께 온도가 올라간 공기를 다시 식혀주는 시스템이다. 물론 이 인터쿨러는 자동차용 터보수퍼차저 뿐만 아니라 항공기용에도 들어가 있는 시스템이다.
슈나이더컵은 유럽에서 벌어지던 수상비행기 경주대회로 1913년부터 1931년까지 총 11회 개최되었다. 이 경기는 수상비행기를 타고 삼각형으로 된 코스(처음엔 280km, 이후엔 350km)를 누가 가장 빨리 완주하는가를 경쟁하는 속도경기였다. 이 대회는 당시 매우 인기가 많았으며 이를 보기 위해 20만 관중이 모이기도 했다. 이 경기대회의 우승기록을 보면 이 20년 남짓한 시기에 항공기의 성능이 얼마나 비약적으로 발전했는지 알 수 있다. 1회 대회때 우승한 프랑스의 드페르뒤생(Deperdussin) 항공기는 전체 코스를 평균 73km/h의 속도로 비행했다. 이 기록은 최대속도가 아닌 평균속도라고는 해도, 거의 현재의 자동차의 경제속도 밖에 안 돼는 수준이다. 그러나 1931년 열린 마지막 슈나이더 컵 대회에서 영국의 S.6B가 세운 기록은 평균속도만 547km/h였으며 최대속도는 655km/h에 달했다.
이 경기는 각국의 항공기술을 뽐내는 장이었으며, 한편으로는 각국의 항공기술을 발전시키는 한가지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마지막 대회에 사용된 영국의 S.6B를 설계하면서 얻은 노하우는 이후 2차 대전 중 영국의 주력전투기인 스핏파이어를 개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S.6B와 스핏파이어는 모두 영국의 항공사인 수퍼마린에서 설계하였으며, 둘 다 이 회사의 수석 설계사인 미첼(Reginald Mitchell)이 개발을 담당했다.) 이탈리아의 항공사, 마키의 카스톨디(Mario Castoldi)역시 이 대회를 위해 여러 항공기를 개발하였으며(그중에도 M.39는 1926년에 우승컵을 거머쥐었다)이 노하우는 훗날 2차 대전 중 이탈리아의 주력 전투기인 MC. 202에 녹아들어갔다. 한편 1925년 미국 커티스에서 설계한 R3C-2를 조종하여 우승을 차지했던 두리틀(Jame Doolittle)은 훗날 미국이 일본에 진주만 공습을 당한 직후, 경폭격기를 이용해 보복공격을 했던 ‘두리틀 폭격대‘의 지휘를 담당했다.
이 대회는 1930년대 무렵부터 유럽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함에 따라 중단되어버렸다.
[수퍼마린의 S.6B. 슈나이더 컵용 항공기이므로 당연히 물에 뜰 수 있는 수상비행기다. 이 항공기는 스핏파이어의 개발에, 여기에 사용된 엔진은 멀린 엔진의 개발에 각각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장거리 전투기가 폭격기를 호위하며 하노버(독일 북부에 위치한 지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얼마 안가 이들이 베를린까지 올 것이란 것을 알았다.”
<전쟁이 끝난 뒤, 미 공군의 스파츠 장군의 ‘독일 공군이 언제 제공권을 잃었다고 생각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치 독일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의 대답>
2차 대전 당시 미군은 B-17, B-24와 같은 4발의 대형 폭격기를 가지고 영국에서 출발, 독일 본토를 폭격했다. 이들 폭격기들은 무장 탑재량이 비슷한 체구의 영국 전투기들의 절반밖에 안되었으나, 대신 사방으로 방어기총을 설치하여 적 전투기를 막아냈다. 특히 폭격기들은 수 십대가 오밀조밀하게 뭉쳐 다니며 서로가 서로의 사각지대를 보호해 줬기 때문에 독일 공군으로서는 이 폭격기들을 공격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처음 미군 폭격기들을 접한 독일 공군 조종사들은 그 크기에 놀랐으며 (영국의 4발 폭격기보다도 대체로 더 컸다) 사방에 설치된 방어기총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러나 처음에는 미군 폭격기를 요격하는데 고생하던 독일 공군도 나름대로 꾸준히 전술을 연구하여 미군의 폭격기 편대를 좀 더 효율적으로 요격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미군 폭격기의 손실은 눈에 띄게 늘어갔다.
[비행운을 남기며 편대비행중인 B-17 폭격기 편대. 이들은 한 대당 10정 이상의 방어용 기총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진처럼 밀집비행을 하며 서로의 사각을 지켜주었다. 독일의 경험 많은 베테랑 전투기 조종사들서도 이 폭격기 편대는 요격이 녹록치 않은 상대였다.]
그래서 독일 본토까지 갔다 오는 폭격기 편대에 호위 전투기를 붙여야 할 상황이었는데, 문제는 1943년까지 미 육군 항공대가 가지고 있던 전투기들로는 독일 본토까지 폭격기를 호위하기는 무리였다는 점이다. 당시 미 육군의 주력 전투기인 P-38과 P-47은 모두 대형 기체여서 상당한 연료를 탑재한 덕에 제법 비행거리가 긴 편이었음에도 말이다.
[최근의 에어쇼에서 편대 비행중인 P-47D 썬더볼트 편대. P-47은 덩치가 상당히 커서 이 전투기를 처음 본 영국인들은 이 기종이 폭격기나 지상공격기인줄 알았다고 한다. P-47은 고고도 비행을 위해 고성능 터보수퍼차저를 탑재했고 (덩치가 큰 것도 이 때문), 무려 8문의 12.7mm 기관총을 탑재한데다가 조종사와 엔진 등을 보호하기 위해 곳곳에 두터운 방탄판을 덧댄 전투기였다. 덩치가 커서 선회력 자체는 떨어지지만 2000마력 짜리 대형 엔진 덕에 속도가 꽤 빠른 편이었고, 롤 성능(기체를 좌, 우로 뒤집는 성능)이 좋다보니 모의 전투에서는 2차대전 전투기들 중에서도 상당히 기동성이 좋은 편인 스핏파이어를 상대로 이긴 적도 있다. 이런 강한 화력과 맷집, 빠른 속력, 뛰어난 고고도 비행성능 등을 겸비한 P-47은 고고도로 비행하는 폭격기 호위용 전투기로 주목받았으나 결정적으로 비행거리가 짧아서 독일 본토 까지 폭격기들을 호위해주지 못했다(그런데 눈치 채신 분들이 있으려나...필자의 블로그 아이디가 바로 이 전투기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들 미 육군의 전투기들은 보통 프랑스 상공까지는 폭격기들을 호위할 수 있었으나, 독일 본토 근처까지 가면 연료 문제로 돌아가 버려야 했다. 독일 요격기들은 일부러 프랑스 상공에서는 이들 폭격기 편대를 공격하지 않다가 미군의 호위 전투기들이 돌아갈 때 즈음 요격을 시작했다. 폭격기 부대는 그저 자신들의 기관총만으로 스스로의 몸을 지켜야 했으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일군의 전술이 날이 갈수록 개선됨에 따라 이것만으로는 독일 공군의 전투기들을 물리치기에 한계가 있었다.
[B-17 폭격기 편대 뒤로 호위전투기들이 비행운을 남기며 이리저리 비행하고 있다. 폭격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속도가 빠른 호위 전투기들은, 속도를 맞추기 위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거나 최적의 순항속도 보다 느린 속도로 비행해야 했기 때문에 평소 비행시보다 호위임무시에 연료소모가 더 심했다. ]
그런 의미에서 P-51B의 등장은 미 육군 항공대의 전투기 부대보다도 폭격기 부대에게 더 큰 축복이었다.
처음에 미군이 P-51B를 얻었을 때는 아직도 이 전투기는 2선급 지원용 전투기라는 인상이 남아있었는지, 이 전투기들을 전투폭격기 부대 (즉 공중전보다는 지상공격을 우선으로 하는 부대)에 배치시켰다. 그러나 곧 P-51B를 폭격기 호위 임무에 붙이기 시작했다.
P-51B/C가 이전 P-51A와 달랐던 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변화는 늘어난 연료량이었다. 무스탕은 그 이전 버전만 해도 영국에서 출발하여 독일 본토의 루르지방을 정찰하고 돌아올 정도로 비행거리가 길었다. P-51B/C는 기존 무스탕과 달리 조종석 뒤쪽 동체에 추가로 연료탱크를 집어넣어 비행거리를 더욱 늘렸다. 결과적으로 P-51B/C는 날개 밑에 보조 연료탱크까지 달면 독일 본토 깊숙이 있는 베를린도 왕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장거리 비행성능 덕에 P-51B/C는 폭격기 호위 임무에 제격이었다.
이제 폭격기 부대는 그들의 ‘작은 친구들’, 즉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으며 독일 본토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독일 공군의 전투기들이 사방으로 방어기총이 돋아나 있는 미군 폭격기들을 상대로 그나마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폭격기들에게 호위 전투기가 붙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B-17 폭격기를 호위하고 있는 P-51 무스탕. 이 당시 전투기 편대는 폭격기 편대를 큰 친구들(Big Friends), 폭격기 편대는 전투기 편대를 작은 친구들(Little Friends)이라 불렀다.]
P-51B 무스탕이 최초로 폭격기와 함께 독일 본토에 들이 닥친 것은 1943년 12월 11일의 일로, 이때는 독일 공군이 전투기를 출격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무스탕 부대는 별다른 공중전을 펼치지 않고 영국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2일 뒤인 13일, 이번엔 영국으로부터 780km 떨어진 독일의 킬에 위치한 잠수함 생산시설을 폭격하기 위해 미군의 폭격기들이 날아들었다. 물론 무스탕과 함께.
독일군은 Bf110 대기 중이던 전투기들을 발진시켰다. Bf110은 쌍발의 대형 전투기로, 많은 기관포를 탑재하여 화력이 막강하였으나 느리고 둔하여 전투기와의 싸움에는 쓸모가 없어서 일찌감치 전투기와의 공중전 임무에서 퇴출당한 기종이었다. 다만 영국 본토로부터 먼 킬 지역까지 연합군의 호위 전투기가 도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 공군은 이 지역에 폭격기 요격용으로 Bf110을 배치시켜 놨던 것이다.
[독일의 Bf110 전투기. 2차대전 초반, 독일 공군은 폭격기 편대의 호위임무를 위해 비행거리가 긴 쌍발 대형 전투기로서 이 Bf110을 개발했다. 그러나 예상보다 실망스러운 공중전 성능 때문에 폭격기를 호위하기는커녕 영국의 전투기들에게 쫓겨 다니기 바쁘다보니 후방으로 빼서 연합군 폭격기를 상대하는 요격기로 운용했다. ]
그러나 이제 독일 공군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 되었다. Bf110 편대는 미군의 폭격기를 요격하기는커녕, P-51B를 보자마자 달아났다. 글렌 이글스톤(Glenn Eagleston) 중위가 P-51B를 몰고 이들 Bf110을 추격하여 심각한 손상을 입혔으나, 끝내 격추시키지는 못하고 다시 폭격기를 호위하기 위해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3일 뒤인 16일, 찰스 검(Charles Gumm) 중위가 폭격기를 요격하기 위해 달려드는 Bf110을 격추하였다. 이는 P-51B가 세운 최초의 격추 기록이었다.
이 후 P-51B 독일 공군은 미군의 폭격기뿐만 아니라 전투기도 상대해야 하는 괴로운 상황에 놓였다. 게다가 P-51B는 단순히 비행거리만 긴 것이 아니라, 전투기로서의 성능 자체도 뛰어났다.
P-51B를 타고 에이스(적 항공기를 5대 이상 격추시킨 조종사)가 된 이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유명한 제임스 하워드 (James H. Howard) 소령의 일화를 살펴보자.
1944년 1월 11일, 미군의 B-17 폭격기 편대가 다시 독일 상공에 나타났다. 이들이 폭탄을 투하할 때 즈음 한 무리의 독일 전투기가 급상승하며 폭격기를 향해 솟구쳐 올라왔다. 제임스 하워드가 이끌던 P-51B 편대는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급강하하였고, 결국 1대의 아군 손실도 없이 9대의 독일군 요격기를 격추시켰다(제임스 하워드 본인도 Bf110 한 대를 격추). 혼전 와중에 제임스 하워드는 자신의 편대랑 떨어져 버렸기에 곧바로 다시 폭격기 편대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때 제임스 하워드는 P-51B 편대가 없는 틈을 타 다른 무리의 독일군 전투기들이 폭격기 편대를 공격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제임스 하워드 소령은 한 순간 고민했다. 동료 전투기들이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기엔 시간이 없어보였고, 그렇다고 단신으로 다 수의 독일군 전투기들과 뒤엉키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였다. 보통의 전투기 조종사들이라면 폭격기 편대가 방어총좌로 버티는 동안 아군 전투기들이 재집결하기를 바라며 바라만 보고 있었을 테지만, 제임스 하워드는 독일군 전투기와 뒤엉키는 쪽을 택했다(어쩌면 이런 저돌적인 성격은 그가 플라잉 타이거즈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서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대해선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코너를 참조).
하워드 소령의 눈앞에 먼저 들어온 것은 Bf110 전투기였다. 도망가는 Bf110을 쫓아서 강하를 하여 몇 번 사격을 가하여 이를 격추시켰다. 하워드의 다음 상대는 독일 공군의 주력 전투기 중 하나였던 Fw190이었다. 하워드가 다시 고도를 높이자 그 보다 아래에 있던 Fw190 한 대가 하워드의 P-51B를 발견, 급상승을 시도했다. 하워드 역시 강하를 하며 이 Fw190에 사격을 가했다. P-51B의 주날개가 거의 Fw190의 캐노피에 부딪힐 만큼 가까운 거리로 서로 스쳐 지나간 뒤 하워드가 뒤를 돌아보자, Fw190의 조종사는 자신의 전투기에 손상을 입었는지 탈출하여 낙하산을 펼치고 있었다.
[제임스 하워드 소령의 일화를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 제임스 하워드가 몰고 있는 P-51B가, 연기를 끌며 추락하는 Bf110을 스쳐지나가고 있다.]
다시 하워드는 선회하여 뒤쫓아 오고 있는 무스탕 편대와 합류하려 하였다. 이때 다시 자신의 앞쪽 아래에 날고 있는 독일군의 주력 전투기인 Bf109를 발견하였는데 이 독일 조종사 역시 하워드의 무스탕을 발견하였다. Bf109 조종사는 급히 엔진 출력을 낮춰 하워드의 P-51이 지나쳐버리게 만들려 하였으나 하워드는 여기에 속지 않았다. 두 전투기는 곧 바로 서로 교차하며 선회를 하는 상태가 되었고(가위 기동-Scissors Maneuver) 하워드는 더 급격히 선회를 하기 위하여 플랩을 20도 가까이 내렸다. Bf109는 불리함을 느끼고 급강하하기 시작하였고 하워드는 사격하기 좀 먼 거리였으나 몇 번 사격을 가하였다. 하워드는 자신이 쏜 기관총탄이 Bf109에 명중하는 것을 확인하였으나 추락했는지 끝까지 확인하진 않고 다시 기수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곧 하워드의 눈에 동료 P-51 한 대와 Bf109 한 대가 서로 뒤엉켜서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Bf109가 느리게 선회를 하는 틈에 동료 P-51은 선회전에서 빠져나왔고, 하워드가 대신 이 Bf109에 달려들었다. 워낙 짧은 순간에 급격히 일어난 일이라 하워드는 나중에 자신이 이 Bf109에 사격을 가했는지 아니었는지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하워드 소령이 다시 폭격기 편대쪽으로 돌아 와보니 이번엔 Bf110이 한 대 보였고, 그는 이 전투기에 사격을 가하였다. Bf110은 기관총탄을 얻어맞고 검고 흰 연기를 끌며 지상으로 강하하였으나 하워드는 이 전투기가 확실히 추락했는지 아니면 도망갔는지 확인하지 못했다(그러나 폭격기 승무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전투기는 지면에 추락했다).
하워드는 이 25분간 벌어진 전투에서 자신은 2대의 적기만 확실히 격추시켰다고 상부에 보고하였으나, 폭격기 승무원들을 비롯한 동료들의 증언에 따라 적기 4대를 격추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더불어 그는 단신으로 폭격기 편대를 구하기 위해 적 전투기 무리에 뛰어들고, 한 번의 전투에서 4대의 적기나 격추한 공로가 컸기에 미군 최고 훈장인 의회 훈장 (Medal of Honor)을 받았다.
공중전에서 P-51B/C는 뛰어난 성능을 보였으나, 물론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점은 잦은 기관총 고장현상이었다. P-51B에 장착된 4문의 기관총은 좁은 날개 안에 급탄 장치와 탄약통까지 함께 들어있는 상황에서 자리를 차지하다 보니 총이 수평으로 반듯하게 장착된 것이 아니라 모서리가 위로 올라오도록 비스듬히 장착되었다. 이 탓에 기관총이 발사 도중 총알이 걸려서 고장나는 경우가 많았다(앞서 언급한 제임스 하워드 소령도 공중전 도중 기관총 몇 개가 고장난 상태에서 공중전을 계속 벌였다).
[P-51B의 기관총 장착 방식을 보여주는 그림. 기관총이 바닥이 지상과 평평하게 놓인 것이 아니라, 대각선으로 기울어진 채로 장착되었다.]
[P-51B에 탄약을 장착중인 미 육군 항공대의 정비사. 자세히는 안보이지만 기울어진 채로 장착된 기관총의 뒷부분이 보인다. 흑백사진이어서 잘 알 수 없지만 사진 두의 P-51B는 기수와 꼬리가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 부대는 유일하게 모든 조종사가 흑인으로 구성된 부대로, 당시 인종차별이 남아있던 미국으로서는 이례적인 부대였다(흑인 및 유색인종은 공을 세울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전선에 투입하지 않았다. 베트남전 배경 영화와 달리 2차 세계대전 배경 영화에 흑인이 거의 나오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
또 P-51B/C의 후방시야가 매우 안 좋았던 점도 문제였다. 레이저 백(Razor Back : 뾰족한 등이란 뜻) 형태라 불리는 P-51B/C의 캐노피 및 후방동체는 마치 한 몸체인 것처럼 뒤로 길게 이어지는데, 이는 공기저항 감소에 좋았으나 후방동체가 뒤를 가려서 조종사가 뒤쪽을 보기 불편했다. 이 문제점 때문에 영국군은 자신들의 무스탕 Mk.III(미군의 P-51B/C에 해당)에 말콤 후드(Malcomb Hood, Malcomb 이란 제작사에서 만든 물건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음)라는 캐노피를 달았다. 이것은 본래 영국군의 주력 전투기인 스핏파이어 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캐노피가 좌우로 불룩 튀어나와서 조종사가 고개를 옆으로 빼서 뒤를 볼 수 있게 만든 물건이었다.
[사진은 스핏파이어의 말콤 후드이지만, P-51B에 적용된 것도 이와 거의 유사하다. 잘 보면 조종석 캐노피 부분이 마치 어항처럼 옆으로 둥그렇게 튀어나온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종사가 고개를 바깥으로 빼서 뒤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한편 사진 상에서 캐노피 위에 달린 동그란 물체는 뒤를 살피기 위해 장착해 놓은 거울이다.]
P-51B/C의 동체 후방 연료탱크는 P-51B/C의 비행거리를 크게 늘려주었으나, 한편으로는 비행성능에 악영향을 주었다. 이 연료탱크가 꽉 채워진 상태에서는 P-51B/C의 무게중심이 원래보다 많이 뒤로 가는데 이런 상태에서는 P-51B/C가 불안정해서 잘못하면 기수가 갑자기 위로 들려서 비행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P-51B/C의 교범에는 절대로 이 후방 연료탱크에 연료가 채워진 상태에서는 급기동을 하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쓰여 있을 지경이었다. 또한 일반 전투기들은 외부에 다는 보조 연료탱크를 먼저 써 버렸지만, 무스탕 조종사들은 동체 후방 연료탱크를 먼저 써버린 다음 외부 보조 연료탱크의 연료를 썼다.
미군이 운용하던 폭격기들은 대부분 10정 이상의 방어용 기관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영국군의 폭격기들 보다 훨씬 덩치가 큼에도 불구하고 폭탄 탑재량은 절반 정도 밖에 안됐다. 미군은 일종의 기계식 계산기로 작동하는 노던(Norden) 폭격 조준기를 사용해서 정밀 폭격을 하려면 목표물이 잘 보이는 낮에 폭격을 해야 하므로 스스로를 지킬 방어총좌를 많이 가질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반면 목표물만 정확히 폭격할 것이므로 폭탄 탑재량이 적어도 상관 없다고 여겼다.
영국군 폭격기 부대는 방어총좌로 자신들을 보호하는 대신 어둠으로 자신들을 가리는 전술을 썼다. 즉 야간에 독일 주요시설을 폭격하여 적 조종사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찾기 쉽지 않게 했는데 문제는 영국 폭격기 부대 역시 목표물을 정확히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보통 수 은 폭격기가 한 번에 출격, 특정 건물을 정확히 조준하여 폭격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이 있는 지역 일대를 폭탄으로 뒤덮어 버리는 융단폭격 전술을 사용했다.
이 때문에 독일은 낮에는 미군에게, 밤에는 영국군에게 폭격을 당했다. 그야말로 밤낮 없이 폭격을 당하는 상황이었으며 이는 독일의 전쟁 지속능력 저하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미 육군 항공대는 25회 작전을 펼치고 돌아온 폭격기 승무원들을 후방근무로 돌려 이들을 전투에 혹사시키기 보다는 쉴 틈을 주거나 혹은 신참 승무원들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활동하도록 했다. 최초로 25회의 작전을 무사히 완수한 폭격기가 바로 멤피스 벨이었고, 영화 멤피스 벨은 이들 폭격기 승무원들의 내용을 그린 영화다(다만 영화에서와 달리 실제로 멤피스 벨의 마지막 25회 임무는 별 다른 피해 없이 끝났다).
이 영화에서는 호위 전투기로 P-51이 등장하는데 독일 국경에 다다르면 이들 P-51이 연료가 부족해서 돌아가고 곧이어 독일군 전투기들이 들이닥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이 당시에는 P-51이 아직 폭격기 호위를 맡기 전이었으며, 실제로는 P-38이나 P-47 같은 전투기가 나와야 했다. 그러나 요즘처럼 정교한 CG가 없던 시절 제작된 이 영화에서는 모든 항공기를 실제 항공기를 사용했는데(일부 위험한 장면은 대형 R/C 모형 항공기로 대체) 영화 촬영용으로 비행 가능한 P-38이나 P-47를 구하기 힘들었는지 P-51이 호위 전투기로 등장했다. P-51은 2차 대전 이후에도 미군이 한동안 전투기로 사용한 덕에 현재도 비행 가능한 기체가 많이 남은 반면, P-38과 P-47은 전쟁 직후 대부분 폐기되거나 다른 나라에 팔려서 미국 내에도 현재까지 비행 가능한 기체가 상대적으로 적다. 만약 실제로 멤피스 벨을 P-51이 호위했다면 영화에서와는 달리 연료가 부족하다고 돌아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영화 멤피스벨의 포스터. 지금도 가끔 케이블TV에서 해줄 때가 있다. 관심있는 분들은 TV 편성표를 눈여겨 보시길]
미국이 아직 일본과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기 직전, 일본은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중국은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미국도 일본이 계속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 못 마땅하였으므로 중국을 돕고 싶었으나, 그렇다고 눈에 띄게 도우면 일본과 전쟁 상황에 치달을 위험이 있었다(미국은 어떻게든 전쟁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미국은 중국을 도울 전투기 부대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플라잉 타이거즈(Flying Tigers)다. 당시 중국에 군사고문으로 있던 쉐놀트 대령은 일단 퇴역하여 미군 신분을 벗어 버린 다음, 이 플라잉 타이거즈의 대장이 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원래 영국에 팔기로 되어 있던 P-40 전투기 일부를 ‘영국이 구매를 거절함에 따라 하는 수 없이’ 중국에 팔았다(물론 이는 사전에 영국 및 중국과 조율이 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또 많은 미군 소속 조종사들이 마찬가지로 퇴역하여 민간인 신분이 된 다음, 이 플라잉 타이거즈에 용병으로서 가담했다.
즉 일본이 미국이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고 항의해도 미국은 ‘우리의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중국을 돕기 위해 용병이 되는 것까지 국가가 막을 수는 없다. 전투기 판매 역시 상거래일 뿐, 국가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라고 발뺌할 셈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당시 미군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실력이 그다지 좋은 편이라 볼 수 없었던 데다가, 일부 용병 조종사들은 돈을 많이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플라잉 타이거즈에 들어왔다. 즉 이들은 사실 전투기 조종사가 아니라 폭격기, 수송기 조종사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오합지졸인 조종사들을 데리고 일본군 전투기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에, 쉐놀트는 러시아 조종사들이 일본군을 상대할 때 쓰던 전술에서 힌트를 얻어 일격 이탈 전술을 조종사들에게 가르쳤다.
즉 쉐놀트의 전술은 미리 일본군 항공기 보다 높은 고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보이면 급강하를 하면서 기총사격을 하고나서는 그대로 내빼는 것이었다. 다행히 일본군이 이 지역에서 사용하던 전투기는 A6M 제로센 같은 고성능 전투기가 아니라 Ki-27 같은 구식 전투기였기 때문에 급강하 한 뒤 도망치는 P-40을 따라잡지 못했다(설사 A6M이라 하더라도 급강하하여 도망치는 P-40은 따라잡기 쉽지 않았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플라잉 타이거즈의 P-40B 전투기. 플라잉 타이거즈의 전투기는 선명하게 그려진 상어 입 그림이 특징이다.]
플라잉 타이거즈의 조종사들은 하나 같이 규율을 지키지 않아서 군복을 입지 않고 야구 모자를 쓰고 다니거나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가 하면, 애완용 표범을 키우는 이들마저 있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일본군에게 계속 밀리는 상황에서도 플라잉 타이거즈는 착실하게 일본군을 상대로 큰 전과를 올리고 있었고(물론 전쟁이 지속되면서 플라잉 타이거즈의 손실도 적지는 않았다) 특히 플라잉 타이거즈의 조종사들은 당시 다른 미군 조종사들 보다 훨씬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았다.
결국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굳이 미국은 일본의 눈치를 보며 플라잉 타이거즈를 운용할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이들은 1942년에 미 육군 제23전대(Fighter Group)로 바뀌어 중국 방면을 담당한 미 육군 제 14 공군 소속이 되었다(미 육군 항공대는 그 휘하에 다시 큰 그룹으로 제 X 공군이라는 조직을 두었다). 그리고 이 제 14 공군은 군으로 복귀한 쉐놀트 장군이 지휘하였다(대령에서 진급).
쉐놀트는 조종사들을 설득하여 제 23전투 편대에 계속 남도록 권유하였으나 5명만이 이에 응했다. 나머지 조종사들은 미국으로 돌아가 민간인이 되거나, 혹은 중국군의 수송기를 몰거나 아니면 다시 원래 자신이 있던 부대로 돌아갔다(이를 테면 본문에서 보았던 제임스 하워드처럼).
제 23전대는 아직도 플라잉 타이거즈라는 이름으로 미 공군에 남아있으나 이들은 이제 전투기가 아닌 A-10 공격기를 운용하고 있다. 이 부대 소속 A-10 공격기는 타 부대의 것과 달리 입에 상어 입을 그려 넣고 있는데, 이는 플라잉 타이거즈가 처음 P-40을 몰던 시절부터 계속 내려오는 전통이다.
[제 23 전대의 A-10 공격기들. 현재 미군은 자신들의 전투기들에서 화려한 그림을 최대한 없애고 전투기 자체는 물론 각종 글자나 마크도 회색 톤으로 칠하고 있지만, 이 부대만은 이 강렬한 원색의 상어 입 그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한편 이 플라잉 타이거즈의 ‘실력은 있으나 거칠고 제멋대로인 용병’이란 이미지는 후일 일본의 만화 <에어리어88>의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첫댓글 아 정말 흥미 진진하군요. 플라잉 타이거즈의 유래로 에이텐이 샤크마우스를 하고 있었군요..그리고 무스탕은 롤스로이드 엔진을 달지 않았다면 정말 폭격용으로 대전을 마감했을지도 모를 일이네요
우연한 관심과 시도가 180도 인생을 바꾼 경우랄까~~ 플라잉 타이거스에 대해서는 언젠가 한번 다루지.. 아주 재밌다네~`
크 진짜 플라잉 타이거즈 기대되는데요^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