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10월 30일 월요일 맑음
‘어라, 삼성초에서 전화가 왔네. 웬일이냐. 창의놀이 때문인가 ?’
반가운 전화다. ‘창의놀이 재료가 부족하다는 얘기겠지.’
“교장선생님 저 정숩니다.” “응, 교무부장, 잘있었나 ? 학교도 편안하고 ?”
“예. 교장선생님 제자 중에 이성신이라고 아세요” 이거 원, 난데없이 성신이는.... “응 있지. 양지초등학교 제잔데....” “그 사람이 교장선생님을 뵙고 싶다고, 교육청에 전화를 했더니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알려줄 수 없다고 해서 학교로 전화를 했어요. 그래서 교장선생님 연락처를 알려주어도 되나 해서요”
“그럼 얼른 알려줘” “제가 그 분 전화번호를 알려드릴테니 전화해 보세요”
아침 일찍 거름을 실어다 놓고, 아침밥을 차려 먹은 후 한숨 돌릴 때였다.
이성신이, 양지에서 육상을 했던 제자다. 얼굴에 크고 긴 흉터가 있어 걱정되던 아이다. “선생님 저 성신이예요” 내 목소리를 알아듣고 환희에 찬 음성이다.
“저 경찰 시험에 합격해서 인천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대전에 내려 온 김에 선생님 뵙고 싶어서요” ‘경찰, 그것도 고신데.... 이 취직이 어려운 세상에서....’ 눈이 확 커진다.
“이야, 우리 성신이 정말 잘했다. 너 굉장한 개구쟁이였는데....” “그래요. 선생님속 많이 썩여 드렸지요. 지금 어디 계세요 ?” “나 집에 있지” “주소 좀 알려 주세요. 금방 찾아 뵐게요” ‘야 이놈 봐라. 어떻게 변했을까 ?’ 가슴까지 콩콩댄다. 얼마 후 아파트 앞에 왔다는 연락을 받고, 버선발로 뛰어나갔지.
“선생님”하면서 와락 안긴다. 나보다 더 크고 우람한 놈이.... 내가 안긴 거지.
경찰 정복이 이렇게 보기 좋은 적은 처음이었다. “성신아 너 얼굴 흉터는 ?”
“예, 한 번 성형수술을 했어요.” “야, 잘했다. 싹 없어졌는데.” “예, 그래도 약간은 남았어요. 한 번 더 해야 돼요” “들어가자. 우리집이 지저분한데....”
“괜찮아요” 성신이를 얼싸안고 집으로 들어섰다. “성신아 커피 한잔 하자”
커피를 마시면서 옛날 얘기로 돌아갔다. 둘 만의 목소린데도 왁자지껄 했다.
“선생님, 저 3개월 전부터 인천 신흥지구대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아직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선생님 말씀을 들으러 왔어요” “그래, 성신아 너는 어려서 많이 까불고 개구쟁이였지만 바르고 곧은 아이였어. 네가 경찰직에 들어선 게 정말 잘됐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몇 가지만 얘기 하마” 이렇게 시작한 얘기가 한참동안 이어졌지.
“먼저 네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너는 앞으로 국민의 안녕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일에 네 모든 것을 바쳐야 해. 작은 일에도 소홀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야 해.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커다란 일이 맡겨지는 법이야. ”
“예, 알았습니다” 성신이가 진지하게 듣는다. 많이 컸구나. 흐뭇하다.
“진리가 다른 데 있는 게 아냐.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거기에 진리가 있는거야. 나는 교직에 있을 때 하루 일을 마치면 매일 반성을 했지. 그날 가르친 일에서 무엇이 부족했는지, 어떻게 했으면 더 잘 할 수 있었겠는지, 내일은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더 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어. 그러면 그 다음 날에는 변화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어.”
“예, 선생님 양지에서 운동할 때 선생님께서는 저녁밥도 해서 먹이셨고, 열시 반까지 공부도 가르치셨잖아요. 운동선수도 공부해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가 다 간 후에도 아침까지 밤 새워 공부를 하셨고요” “그래 다 생각이 나나 보다. 밤을 꼬박 새우고, 중간 중간 10분씩 몇 번을 눈을 붙이면 피로가 풀렸지. 그만큼 정신력, 의지가 중요한 거야.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없는 거야.” “예, 알겠습니다. 선생님”
“다음은 공정하고 청렴한 사람이 돼야 해. 권력기관인 경찰은 더욱 그렇지. 청렴하지 못해서 문제가 되는 일이 흔하잖니.” “예, 그래요”
“내가 땀 흘려 노력해서 번 돈이 가치가 있게 쓰여지지. 쉽게 들어온 공돈은 아무 소용이 없고, 내 몸과 마음만 망치게 해.” “맞아요. 선생님”
“남의 눈치를 보지 말고 꿋꿋하게 나가야 해” “그 게 무슨 말씀이죠 ?”
“내 42년 교직 생활에서 제일 어려웠던 게 눈치 보기였어.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할 때, 그걸 보고 잘한다고 칭찬해주는 사람은 드물어.” “그렇죠. 질투하고, 시기하고....” “그래 그런 사람이 더 많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기 부류가 되길 바래. 악한 사람은 상대도 같이 악해지기를 원하지. 옳고 바른 사람을 따라하기 보다 질투, 시기하기가 쉬워. 왕따도 많이 당했었지. 그 걸 이겨나가기가 힘이 들었어. 그래도 꿋꿋하게 앞만 보고 걸어 나갈 수 있어야 돼”
“예, 알겠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야. 가시밭길이 될 수 있어. 그러나 그 열매는 달아. 좁은문이지. 그렇지만 묵묵히 가야 돼. 나는 교장일 때도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학교, 제일 힘드는 학교를 지원해서 찾아 다녔어. 거기에 가면 내가 할 일이 있거던.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일하면 안 돼. 그저 옳은 길을 꾸준히 나가다 보면 반드시 그 보답이 오는 법이야. 나는 제1회 대한민국스승상이란 걸 받았어. 훈장과 함께 상금도 많이 받았지. 전국의 초등학교 선생님 중 3명이 뽑혔지. 내가 기대하지도 않았었는데, 받게 된 거야. 내가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충분한 보답을 받은 거지.” “선생님이 꼭 받으셨어야 할 상이었어요. 제가 커가는 동안 많은 선생님을 만났지만 선생님 같으신 분은 뵙질 못했어요. 엄마도 항상 말씀하셔요.” “그래 엄마는 안녕하시냐 ?” “예 선생님께서 너 경찰이 된 걸 아시면 굉장히 기뻐하실 거라고 하셨어요” “그럼 선생에게는 제자가 잘 되는 것이 제일 기쁜 일이지. 정말 고맙다. 성신아”
“선생님, 제가 삼 개월째 근무를 하는데 무얼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죠 ?”
“모르는 게 당연해. 우선 네 업무의 선임자가 남겨놓은 공문철을 자세히 봐. 언제 무슨 일을 했고, 어떻게 했는지 알아보고, 우선은 그대로 따라서 해, 일 년. 한 사이클을 돌아보면 대충은 알게 될거야. 그 다음부터는 같은 일이라도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궁리해 보고.... 너는 말을 아끼고, 남의 말을 잘 들어야 돼. 술 한 잔 하다 얼근해지면 자기 자랑이 나오게 되거던. 네 동료나 선배들이 잘했다는 얘기, 자랑거리를 말하면 예사로 듣지 말고, 꽁꽁 묶어서 네 것으로 만들어. 몇 년을 그렇게 하다 보면 기본이 갖춰진 순경이 되는 거야” “예, 그렇게 할 게요”
“내가 작년 8월에 정년을 했어. 42년이란 청춘을 다 바친 교직을 떠나는데도 조금도 서운하지가 않았어. 남들은 얼마나 서운하냐고 물었지만 난 아니었지.
그래서 내가 왜 이럴까 ? 생각해 보니 그 이유가 있었어. 내가 42년이란 교직생활 동안 원 없이 최선을 다했던 것이 바로 그 이유였어. 내가 선생을 하면서 이렇게 하면 아이들에게 좋겠다 생각되는 일이 생각나면, 내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어려움이 닥쳐도 망설이지 않았어. 너희들에게 영양보충을 위해서는 직접 밥을 해 먹여야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장을 보고, 밥을 해 먹였잖아. 그것도 3년 동안이나 변함없이.... 그 때 정말 힘들었어. 그렇지만 그 때 전국대회 금메달을 많이 땄잖아. 그런데 너희들에게만 그랬던 게 아니야. 42년 동안 어디에 있어서도 꼭 같았어. 그렇게 원 없이 했더니 교직을 떠날 때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던 거야. 퇴임식 때 이런 말을 했어. 퇴직을 하면서 한 가지 배운 게 있다. 나중에 늙어서 누구든지 가야할 죽음의 길에서도, 서운하지 않게 미련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그것은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간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이야. 내 몸을 아끼지 마. 어려운 일이 생기면 네가 먼저 나서서 해. 사람의 몸은 쓰면 쓸수록 강해지고 발전하지. 내가 갈 길이라 생각되면 몸 전체를 던져. 그러면 네가 경찰에서 물러나는 날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는 너를 발견하게 될 거야“ 성신이는 말 없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성신아. 네가 순경으로 시작을 해도, 경찰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네 맡은 임무 최선을 다하다 보면, 너에게 상상도 못할 커다란 영광이 올 수도 있는 거야. 꿈도 크게 가져야 돼” “예, 지금 청장님도 순경으로 시작하신 분이예요” 성신이가 알아 듣는다.
“성신아 너 바쁘다고 했지 ?” “예, 선생님 그만 일어날 게요. 오늘 너무 좋은 말씀 들었어요. 선생님 말씀대로 좋은 경찰이 될 게요”
주차장까지 나가 떠나는 차를 배웅했다.
훌륭한 경찰이 한 명 탄생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그 뒤로도 성신이 생각을 한참 동안 했었다.
오후 5시. 내동초등학교 체육관을 찾았다. 교대 동기들의 정기 배구모임이다.
일에 떠밀려서 몇 달 동안 얼굴을 내밀지 못했지.
“야, 반갑다 건표야. 그동안 고생했지 ?” 나를 이만큼 반겨줄 데가 얼마나 있을까 ? “이게 진짜 고구마야. 호박이지. 요새 뭐 뭐하는 신품종이 나왔다지만 이만한 게 없어. 맛있다” 내가 구워간 고구미를 맛있게 먹는다.
‘내년에는 고구마 품종을 바꾸려고 했는데.... 그냥 심어야 하나 ?’
배구를 끝내고, 회식 자리에서 정년 후 처음으로 고주망태가 되었다.
어떻게 쓰러졌는지도 모르고 골아 떨어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