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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 | |||
1. 머리말 2. 조선 전기의 매화시 | 3. 조선 중기의 매화시 4. 조선 후기의 매화시 |
1. 머리말
매화는 동아시아의 문학과 예술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 꽃으로 동양적 정신의 표상물로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특히 추운 겨울을 견디며 꽃망울을 터트리는 속성으로 인해 봄을 알리는 대표적인 꽃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러한 생태적 특성이 성리학적 사유와 결합하여 ‘生生之理’를 가장 잘 구현한 식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매화는 사대부로부터 은일과 지조의 상징으로 인식되며 추앙되어 왔다.
성리학적 자연관에 바탕해 각별한 의미를 부여받은 매화는 조선의 사대부에게 가장 품격이 높은 화초로 여겨졌다. 강희안의 養花小錄을 보면 매화는 난초, 국화와 함께 아홉 등급 중 가장 높은 등급에 올라있거니와, ‘梅仙’, ‘梅兄’, ‘梅君’ 등의 매화에 대한 호칭 또한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역대의 사대부 문인들은 매화를 읊은 시를 대부분 한두 수 이상 남기고 있으며, 그 중에는 수십 수 이상씩 남긴 이들도 적지 않다.
이처럼 사대부 계급으로부터 널리 사랑받은 매화는 사대부 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한시의 주요 제재가 되며 다양한 모습으로 노래되었다. 시와 함께 그림의 소재로도 널리 수용되어 조선시대에는 梅花圖 또한 많이 그려지게 된다. 詩畵 방면에서 매화를 제재로 한 많은 작품이 남겨져 있기에, 이에 관한 연구 또한 적지 않게 축적되어 왔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연구는 특정 작가, 또는 시대에 대한 개별 연구에 머물고 있으며, 조선시대 전반을 통시적으로 고찰한 연구는 매우 드문 형편이다. 매화를 열쇠말 삼아 한중일 삼국의 문화 전통에서 매화가 차지하는 위상을 해명한 업적이 제출된바 있고, 문화콘텐츠로써 매화의 활용 가능성을 모색하는 연구 또한 시도된바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하면서 조선조의 매화시 전체를 대상으로 그 특징을 고찰하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조선 시대를 전기․중기․후기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하는데, 이는 사대부 계급의 분화와 변모에 상응하여 출현한 매화시의 변모 양상에 유의하고자 한 것이다. 아울러 한시에 한정하여 다루고자 하니, 시조나 잡가 등의 국문시가에도 매화를 제재로 한 시가가 일부 보이나 그 양이 매우 미미하고, 문예적 성취 또한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이다. 대상 작가의 선정은 우선 기존 연구를 참조하여 매화시를 많이 남긴 작가에 주목해 살펴보았고, 기존 연구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으나 한구한시사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시인의 경우 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를 검색해 매화시를 많이 남긴 작가를 함께 다루기로 한다.
2. 조선 전기의 매화시 (14세기 말~16세기 중반)
이 시기의 사대부 계급은 훈구파와 사림파, 그리고 방외인 집단의 세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들 세 집단은 상이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사대부로서의 정체성 또한 서로 다른 면모를 보인다.
훈구파 문인 중에서 徐居正(1420~1488)은 80수에 이르는 많은 매화시를 남겼다. 그가 雲城府院君 朴從愚의 저택에서 베푼 연회에서 지은 서문에는 훈구문인들의 매화 감상의 풍조가 잘 드러나 있다.
계미년(1463, 세조9) 겨울 11월에 주상께서 운성부원군 박공의 집에 잔치를 내려 주시고, 종친, 공신, 장군, 재상들에게 명하여 가서 위로하게 하셨다. 참석한 사람들의 자리가 정해지고 나서, 공이 매화분 하나를 자리 오른쪽에 두었다. 하얀 꽃잎이 경쾌하고 맑은 향기가 은은하니, 풍류를 즐기는 부귀한 자들 가운데 또한 文雅한 자가 함께 있는 형상이었다. 國老 河東 鄭公(鄭麟趾)이 신병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고 시를 지어 사과하는 뜻을 담아 보냈는데, 여러 사람들이 모두 화운하고 거정에게 詩軸의 서문을 짓게 하였다. …… 매화는 유독 서리가 오고 눈이 와도 당당히 버티고 서서, 잡다한 생물들의 싹이 트기 전에 하얀 꽃을 찬란하게 피워,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는 마음을 먼저 얻으니, 이것이 어찌 보통의 초목이 비길 수 있는 바이겠는가. 대개 그 성품은 정결하고 그 마음은 淸淨하고 그 덕은 향기로워 초목들 중에서 우뚝 빼어나니, 성인 중에서 맑은 풍모를 얻은 꽃이다. 이런 까닭으로 옛사람이 많이들 사랑하였고, 사랑하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시를 지었고, 시로도 부족하여 형제에 가탁하기도 하고 丈人으로 일컫기도 하고 端人正士라 이름 짓기도 하였다. 또 “급박하고 구차한 아주 짧은 사이라도 반드시 매화에 마음을 두며, 엎어지고 자빠지는 어려움에 처한 상황이라도 반드시 매화에 마음을 둔다.”라고 한 자도 있었다. ……
저 천지의 도를 살펴보자면, 하나의 음과 하나의 양일 따름이다. 사람에게는 군자와 소인의 나뉨이 있고, 사물에 미루어 나가도 또한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仲冬의 달에 一陽이 회복되면 매화가 이에 피어나니, 陽의 象이다. 온갖 꽃들이 봄 석달 양이 무르익는 시절에 붉은색, 흰색을 다투어 뽐내는데, 매화는 우뚝 홀로 서서 정결함과 청백함을 지키니, 군자의 상이다.
박종우는 태종의 첫째 딸 貞惠翁主와 혼인하였으며, 1453년(단종1)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운 공로로 운성부원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주상께서 잔치를 내려 주시고 종친, 공신, 장군, 재상들에게 명하여 가서 위로하게 하셨다”는 말로 보아 세조 때의 훈구공신들이 모인 연회였음을 알 수 있다. 연회 자리에 매화분을 놓아두고 이를 소재로 시를 짓고 시축으로 만들면서 서문을 쓰게 하였다고 했는바, 당시 훈구공신들의 잔치 자리에서 분매를 감상하며 매화시를 짓는 현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서거정의 매화시 중 「畫梅二十韻, 奉敎製」는 매화 그림을 보고 교지를 받들어 지은 20운 장편시로 매화의 자태를 다각적으로 묘사했으며, 「盧宣城宅梅花詩」는 칠언율시 40수의 연작시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꽃을 사랑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매화 말고는 천지간에 다른 꽃 없으니, 나처럼 유별나게 사랑한 이도 많지 않으리.(除梅天地更無花, 奇愛如予亦不多)”라고 할 만큼 여러 꽃 중에서도 유독 매화를 가장 사랑한 것으로 자부했다. 「盧宣城宅梅花詩」 40수 연작시중의 한 수를 보도록 하자.
옥 같이 어여쁜 자태 본래 말이 없거늘玉立俜婷自不言
어찌 이처럼 맑은 향기 사모케 하는고.如何使我揖淸芬
맑은 병에 꺾꽂이해 놓고 눈 씻고 보다가淡甁斜揷初揩眼
가랑눈 날리기 시작해 또 사립문을 닫네. 小雪纔飛又掩門
홀로 앉아 하늘을 보니 한적한 세계요獨坐觀天閑世界
때로 주역을 읽으니 고요한 천지로구나.時來讀易靜乾坤
은은한 향 성긴 그림자란 말 모두 찌꺼기거니暗香疎影皆糟粕
모름지기 염옹의 태극론을 가지고 볼 일일세.須把濂翁太極論
수련에서는 앞의 시처럼 매화의 청진한 자태와 맑은 향기를 말하였다. 함연에서 눈 오늘 날 집안에 들어앉아 화병에 꽂아놓고 완상한다고 하였는데, 홀로 앉아 하늘을 보고 주역을 읽는 것에 비유하였다. 이른 봄에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는 天機의 운행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징표로 여겨졌고, 이에 주역의 원리를 표상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김수온은 주역과 매화의 밀접한 상관성에 대해 “절정에 달한 陰의 시기를 당하여 절정에 이르는 陽의 온화함을 가졌으니, 이는 주역을 연구하는 학자가 여기에서 하늘과 땅의 마음을 발견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완상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의 문인 孫舜孝(1427~1497)의 「對梅讀易」이라는 시에서는 매화를 들여다보며 주역의 이치를 본격적으로 탐색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니, 조선 전기에 매화를 보며 易理를 탐색하는 모습이 시구 속에 빈번하게 등장함을 알 수 있다.
경련은 매화를 들여다보며 천지만물의 생생변화의 이치를 완상한다는 것인데, 이를 한적한 세계요 고요한 천지라고 하였다. 미련 전구에서 “은은한 향 성긴 그림자”는 매화를 노래한 임포의 시구 “성긴 그림자 말고 얇은 물 위에 드리우고, 그윽한 향기 황혼녁 달빛 속에 감도네(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를 말한다. 매화를 보며 천지만물 생생변화의 이치를 완상하노라니 임포의 그 유명한 명구조차 한낱 찌꺼기로 여겨진다고 한 것이다. 후구에서 濂翁은 濂溪 周敦頤를 말하니, 그가 저술한「太極圖說」은 천지 만물의 근원이 되는 우주의 원리를 易理에 맞추어 해설한 것이다. 매화가 지닌 지극한 도를 체득하는 데에 매화 감상의 참된 요체가 있음을 강조하며 끝맺은 것이다.
조선 전기 서거정과 함께 매화시의 작가로 주목되는 또 다른 인물은 金安老(1481∼1537)이니, 그는 10제 34수의 화시를 남겼다. 34수에 달하는 김안로의 매화시 중에는 유달리 제화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10수의 연작시 두 편이 모두 제화시이며, 이 외에 「題八畫, 地主求得延城筆, 仍索余題甚勤, 書以還」이라는 제목에 실린 ‘古梅’와 ‘梅花’라는 두 수의 시와 「梅月圖, 又以謔語戲書」라는 시 또한 제화시이다. 회화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수집벽도 있었던 그의 취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중에서 매화 병풍 그림 가운데 疏梅에 쓴 시를 한 수 보기로 한다.
삼천 제자가 새롭게 변모해 간 것三千在點化
공자의 크나큰 덕화 가운데였지.孔子元氣中
증점이 봄날의 기상을 지녔지만點也春氣像
뉘라서 안빈낙도하던 안현만 하리. 孰若陋巷空
몸은 말랐어도 뜻은 유독 높았고形槁意獨勝
증점은 천기와 통하였다네. 點與天機通
꽃망울이 성글게 달려 있는 疏梅를 공자의 제자인 顔回의 덕성에 견주어 칭송하는 내용이다. 시의 비유적 의미를 풀어서 설명한 산문이 이어서 수록되어 있는바, 아마도 그림에는 시 다음에 적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자신의 시가 지닌 뜻을 풀이해주고 있다.
천만가지 화초가 하나의 기운에 의해 태어나 자라고 무성히 꽃 피움은 마치 공자가 삼천 제자를 새롭게 교화시킨 것과 같다. 曾點은 새 봄옷을 입고 舞雩에서 바람 쐬며 즐기고 오겠다는 기상을 지녔는데, 顔子가 자주 끼니를 거르며 초췌한 모습으로 지내면서도 홀로 부자의 은미한 뜻을 깨달은 것만은 못하다. 아리땁고 사랑스런 붉은 꽃들이 부려하지 않음은 아니지만 이 어찌 차가운 향기에 성근 꽃망울로 뭇 꽃에 앞서 피어나 홀로 빼어난 자태를 지닌 매화만 하겠는가! 매화의 맑고 여윈 자태는 나물밥에 맹물을 마시던 안회의 청빈함과 비슷하다.
○ 山谷의 「接花詩」에 “옹야는 본디 얼룩소의 새끼였고, 중유는 원래 시정잡배였지. 마루에 오르고 방까지 들어감이 단지 도끼 한번 휘두름에 있었다네.(雍也本犁子, 仲由元鄙人. 升堂與入室, 只在一揮斤.)”라고 했으니, 이러한 체재는 산곡으로부터 처음 시작된 것이다.
나물밥에 맹물을 마시며 자주 끼니를 거르며 초췌한 안회에 성글게 피어난 매화를 비유하였다. 천기가 유행하는 봄날의 기상을 안 증점도 훌륭하지만 안빈낙도하던 안회만은 못하다고 하면서 소매의 여윈 자태를 추켜세운 것이다. 이처럼 시의 뜻을 자세히 설명하고 나서는 꽃을 접붙이는 것을 노래한 황정견의 시를 예시하면서, 이 시의 수법이 황정견을 본뜬 것임까지 말하였다. 황정견의 시는 본래의 제목이 「和師厚接花」인데, 瀛奎律髓에서 方回는 이 시를 평하여 “산곡은 용사에 매우 뛰어났다. 공자의 문하에서 옹야와 중유가 변화된 것으로 접붙이는 것을 비유하고 싹이 트는 것을 장자에 나오는 匠石이 도끼 휘두르는 말로 그려냈으니, 이 점이 강서시파의 뛰어난 면모이다.”라고 특기할 만큼 용사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한 시이다. 황정견은 출신이 미천했던 중유와 자로가 공자의 훈도로 도의 심오한 경지를 체득함에 화초의 접붙이기를 비유했는데, 이러한 수법을 활용해 자신은 안빈낙도 하던 안회에 매화를 비유했음을 말한 것이다. 김안로의 매화시는 이처럼 유희적 성격을 지닌 것이 대부분이다.
金宗直(1431∼1492)의 점필재집에는 18제 27수의 매화시가 전하는데, 이 중 동짓날에 매화를 읊은 시 한 수를 보기로 한다.
우물 밑에 숨은 양이 칠일 만에 돌아와 井底潛陽七日回
만물의 원기가 찬 매화에 스며들었구나.一元消息透寒梅
빛나는 하늘의 마음 가지에 가득 꿈틀대고天心昭灼盈枝動
무성한 봄의 소식 마음 가득 펼쳐지네.春信丰茸滿意開
향기와 그림자 은은히 궤안에 스며들고香影微微侵棐几
정기와 신태는 자주 금술잔에 잠기는구려.精神故故蘸金杯
이로부터 생생의 이치 자세히 완상할진대從玆細翫生生理
다만 주역 부연할 재주 없는게 한이로다.只恨曾無演易才
우물 밑에 숨은 양이란 동지에 양기가 움트는 것을 말하고, 칠일 만에 돌아온다는 것은 양기가 다 없어졌다가 다시 회복됨을 말한다. 여기서 日은 月과 같은 뜻으로 오월(初爻에 음이 처음 나타나는 姤卦에 해당함)부터 양이 사라지기 시작하여 다 없어졌다가, 7개월 만인 동짓달 십일월(초효에 양이 처음 나타나는 復卦에 해당함)에 이르러 양이 다시 생기기 시작하여 회복됨을 뜻한다. 수련은 곧 동짓달에 양기가 회복되기 시작하니, 일 년 중에서 가장 추운 동짓달 만물이 얼어붙어 있는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부활하고 있는 것을 매화를 통해 본다는 것이다. 함연에서는 만물을 소생시키는 하늘의 마음을 담은 봄소식을 매화가 펼쳐 보인다 하였고, 경련은 방안에서 분매를 대하여 매화의 향기와 그림자, 정기와 神態를 가까이 하고 있음을 말하였다. 결연에서는 매화가 펼쳐 보이는 이 생생의 이치를 자세히 살펴 천지만물의 변화를 설명하는 주역의 이치를 자세히 설명하고 싶은데 재주가 모자란다는 아쉬움으로 끝맺었다. 김종직이 젊은 시절 지은 이 시에는 매화가 피는 것을 지켜보면서 천기의 운행을 관조하며 주역의 이치를 떠올리는 사림파 문인의 성정이 잘 드러나 있다.
1470년(성종 1) 김종직은 모친의 봉양을 위해 咸陽郡守로 나가게 되는데, 이 때 그는 學士樓 곁에 있는 古梅를 무척 사랑하여 이를 소재로 많은 매화시를 짓는다. 김종직은 매화를 늘 가까이 하며 즐겨 꽃을 볼 수 없을 때엔 그림으로 그려보기도 하고, 善山 군수를 지낼 때엔 海平縣에서 分糴을 할 때에 백성의 집에서 꺾은 매화 가지를 병에 꽂아 놓고 감상하기도 하는 등 매화를 상당히 애호한 면모가 보인다.
金時習(1435~1493)은 평생을 방랑과 기행으로 일관한 방외인의 삶을 산 인물이다. 梅月堂이라는 호가 말해주듯 매화를 유난히 사랑한 김시습은 8제 23수의 적잖은 매화시를 남겼다. 그의 매화시의 특징으로는 유난히 探梅詩가 많다는 것이니, 「探梅」라는 제목의 14수의 연작시를 비롯해 「雪裏騎牛探梅」, 「和還江陵夜行途中--金鼇月夜探梅, 途中作」이 있어 도합 16수의 탐매시를 남겼다.
한밤중 험한 산길을 마다않고 매화를 찾아가는 김시습에게 있어 매화는 그냥 기르거나, 감상하거나,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찾아가는 대상’이었다. 매화의 참모습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세속적인 가치 기준이나 私心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뿐 아니라, 대상에 대한 진정하고도 간곡한 관심이 있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김시습은 매화의 참된 모습을 진정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방안이나 뜰에 핀 ‘盆梅’나 ‘庭梅’가 아니라 대지에 자생하는 ‘地梅’를 직접 찾아가서 만나야 한다고 여겼는바, 이것이 그의 매화시 중 탐매시가 많은 이유이다.
세상 사람들 화병에 매화를 꽂아 기르며世人培養膽甁中
紙帳 둘러 창가에 두고 종일토록 함께하네.紙帳明窓竟日同
자주 사귀다보면 저도 모르게 한만해지기 쉬운 법不覺數交多取謾
눈 내리는 진창길 힘들게 걸어 찾아감만 못하네.何如苦訪雪泥融
사람들은 화병에 매화를 꽂아두고 찬바람을 막기 위해 종이로 휘장을 만들어 감싸주며 애지중지 키운다. 김시습이 보기에 이는 매화의 참모습을 대하는 자세가 아니다. 방안에 놓아두고 종일 대하다 보면 진정성이 결여되어 참다운 뜻을 잃게 될 수 있다고 하였다. 玩物喪志에 빠지게 됨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시습이 추위에 떨며 힘들게 찾아가 만나는 매화의 참된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인가? 아래 시에서 우리는 그러한 일면을 포착할 수 있다.
눈길로 그대 찾아 홀로 지팡이 끌고 가니雪路尋君獨杖藜
그 속의 참된 志趣 깨달은 듯하다 도로 아득해져,箇中眞趣悟還迷
有心이 도리어 無心의 부림을 받아有心却被無心使
參星이 비끼고 달이 서편으로 기울도록 있네.直到參橫月在西
지팡이 짚고 눈길을 헤치고 가서 눈발 속에 피어난 매화를 발견하고 시인은 그 참된 지취를 일순간 깨달은 듯하다가 다시 아득해지고 만다. ‘有心’은 시인 자신을 말하고, ‘無心’은 매화를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유심한 인간으로 하여금 그 곁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 무심한 매화의 眞趣는 무엇이었을까? 일순간 깨달은 듯 하다가 도로 아득해졌다고 했으니, 김시습 자신도 무어라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나 보다. 그렇지만 달이 지도록 그 곁을 떠나지 못한다고 하였는바, “매화를 보는 동안 시간의 흐름이 멈추고 물아의 분별조차 사라져 나무의 정신과 시인의 정신이 넘나들며 하나가 되었다”고 하겠다. 이 시에서 작자는 매화와의 진정한 만남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언명하고 있지 않다. 다만 힘들게 찾아서 만난 매화와 깊은 교감을 나누며 물아일체의 경지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오히려 매화를 대하는 그의 진정성과 참모습을 찾으려는 깊이를 보여준다.
김시습에게 매화는 화분에 심어 창가에 놔두고 벗들과 시주를 즐기며 감상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뜨락을 거닐며 한가로이 자신의 속마음을 토로하는 다정한 모습도 아니다. 그에게 매화는 깊은 산중에 홀로 있으면서 달만을 벗으로 여기면서 고독하게 지내는 존재이다. 이는 세상과 단절하여 철저하게 자신을 고립시키고 세속과 타협하기를 거부하며 고독하게 자아를 지키고자 한 方外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김시습의 매화시는 훈구파나 사림파의 문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상으로 방외인의 표상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魚無迹은 그가 살던 김해에서 매화나무에까지 무리한 세금을 부과하자, 어느 백성이 매화나무를 도끼로 찍어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는 「斫梅賦」라는 시를 지어 관리의 횡포를 규탄했는데, 이로 인해 관장의 분노를 사서 도망가다가 驛舍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는 사대부의 고상한 정취를 노래한 일반적인 매화시와는 달리 매화를 소재로 하여 부패한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에 기인하는 참담한 정경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수작이다.
3. 조선 중기의 매화시 (16세기 후반~18세기 초반)
조선 중기는 사림 세력이 집권하고, 이후 당파 간의 분화를 일으키면서 붕당정치가 정착된 시기이다. 한편으로 임진왜란과 병좌호란의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전란이 발생해 조선왕조의 근간이 뿌리 채 뒤흔들린 격변의 기간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매화시는 매우 다기한 양상으로 창작되어 그 흐름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서는 대략 16세기 중후반, 17세기 초중반, 17세기 말엽에서 18세기 초반의 세 시기로 나누어 각 시기를 대표하는 매화시 창작의 흐름을 살펴보기로 한다.
3-1. 이황과 김인후의 매화시
조선조 전시기에 걸쳐 退溪 李滉(1501~1570)만큼 매화를 아끼고 사랑하며 많은 시를 창작한 문인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무려 72제 107수의 매화시를 지었으며, 이 중 62제 91수는 이황의 말년 그의 손에 의해 따로 책으로 묶었는데 그것이 梅花詩帖이다.
이황은 매화와 관련해서 여러 일화를 남겼다. 추위를 견디며 달빛에 비친 매화를 감상하기 위해 전용 의자를 만들었는데, 안에는 불을 때는 온돌 기능이 있다고 한다. 스스로 ‘참으로 매화를 아는 사람(眞知梅者)’라 칭했고, 술상 가운데 매화를 올려놓고 대작을 하기도 했다. 스승 퇴계의 매화 사랑이 각별함을 안 문인 金就礪는 서울에 두고 온 매화분을 스승의 손자 安道 편에 부쳐 배에 실어 내려 보냈으며, 퇴계는 이때도 시를 읊어 그 기쁨을 표현했다. 말년에 몸이 쇠하여 병으로 누워서는 “매형에게 누추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고 하며 매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기도록 했고, 절명하는 순간에도 매화분에 물을 주라고 했다. 이황의 각별한 매화 사랑에 대해서는 단양군수 시절 퇴계를 모신 기생 杜香이 매화분을 바친 것이 인연이 되었다는 해석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황은 벼슬길을 굳이 마다하고 재야에서 수양과 학문에 정진하는 삶을 살았다. “중앙의 官學的 아카데미즘의 전통을 물려받기를 거절하고 성리학의 토착화와 출세주의 ․ 공리주의를 떠나 올바른 인재를 양성하는 것으로 자기 사명을 삼았던” 이황은 고향에서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거나, 서울로 올라가 환로에 있을 때나 늘 매화를 가까이 하며 많은 시를 지었다. 그는 또 매화와 묻고 답하는 형식의 梅花問答詩를 창안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우리 매화시의 고유한 시적 전통으로 후대에 널리 계승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도산의 매화를 즐기는 그의 흥취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뜨락을 거니는데 달이 사람을 따르고步屧中庭月趁人
매화 곁을 돌기 몇 차례나 되었던고.梅邊行遶幾回巡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길 잊었는데夜深坐久渾忘起
향기는 옷에 가득하고 그림자는 몸에 찼네.香滿衣巾影滿身
도산서당에서 달 밝은 밤에 매화를 감상하는 정경이다. 환한 달빛에 빛나는 매화의 모습은 한낮과는 다른 흥취를 발하고, 흥취에 취해 차마 떠나지 못해 몇 번이나 돌았는지 모를 정도이다. 밤늦도록 매화 곁을 떠나지 못하고 있노라니, 매화의 향기와 그림자가 온몸에 가득하다. 달과 매화, 그리고 이황은 청진(淸眞)한 경계 속에 하나로 융화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다음으로는 그의 매화시의 개성적 면모를 잘 드러내주는 매화문답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황은 5제 12수의 매화문답시를 남겼는데, 이는 주로 진퇴의 어려움에 대해 매화에게 묻고 답하는 내용이다. 다음은 1569년, 그의 나이 70세의 고령으로 벼슬살이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 한양에서 키우던 분매와 작별하는 내용의 시이다.
쓸쓸한 나를 짝한 梅仙이 고마워라頓荷梅仙伴我凉
소쇄한 객창에 꿈속 혼이 향기롭네. 客窓瀟灑夢魂香
그대 끌고 동으로 가지 못해 한이로세東歸恨未携君去
서울이라 먼지 속에 부디 고이 보전하게.京洛塵中好艶藏
말 들으니 陶仙도 우리마냥 쓸쓸한 이聞說陶仙我輩凉
임 가실 땔 기다려 天香을 풍기리다.待公歸去發天香
여보소 우리 님 대할 때나 그릴 때나願公相對相思處
玉雪과 淸眞을 고이 잘 간직하세玉雪淸眞共善藏
서울 객지에서 잠시 벼슬살이하면서도 퇴계는 도산을 잊지 못하고 있다. 분매에게 묻는 시에서 퇴계는 방안에 놓인 분매 역시 고향인 예안 땅 도산에 있어야 마땅할 존재인데, 자신으로 인해 진세에 처해 있음을 안쓰러워하고 있다. 답시에서 분매는 도선—도산의 매화—도 지기인 퇴계를 잃고 쓸쓸히 지낼 터이고, 임 돌아오는 날 천향을 풍길 것이라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다. 아울러 떨어져 있을 때라도 옥설과 청진을 지닌 도산매의 자태를 간직하여 맑은 행실을 지닐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래야 훗날 도산에서 상봉할 때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객지에서 잠시 함께 생활한 분매이지만 함께 돌아가지 못하고 헤어지는 아쉬움을 절절하게 노래했는바, 매화에 대한 이황의 애정을 잘 보여주는 시이다. 서울의 이 분매는 훗날 서울에 있는 제자 金就礪가 퇴계의 손자 편에 배에 실어 내려보낸다. 이황은 이를 받고 그 기쁨을 시로 노래한다. 위의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매화는 퇴계에게 있어 그가 추구해 마지않던 ‘인간 내면의 청진’ 그 자체의 상징이었다”고 하겠다.
퇴계가 처음으로 창안한 매화문답시는 奇大升 ․ 權好文 ․ 李逡 등 퇴계의 문인 제자들에 의해 차운되었을 뿐 아니라 후대의 문인 학자들에게 널리 계승되었다. 金壽增․ 金昌翕 ․ 李眞望 등이 여러 수의 매화문답시를 남기고 있는 것이 그 실례이다. 이들의 매화문답시에 공통적으로 깔려있는 지향은 매화를 대상으로 내면의 청진(淸眞)을 되새기며 출처의 의리를 자문자답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이황의 매화문답시가 형식적 측면뿐만 아니라 내용까지도 계승돠었음을 말해준다.
한편 이 시기 전남 장성 출신의 金麟厚(1510∼1560)는 16수의 매화시를 남겼는데, 이중 「戲梅」는 매화를 소재로 지은 장편의 유선시로 이채로운 작품이다. 작자는 매화 곁에서 술을 마시다 꿈에 매화를 만나는데 매화는 세속을 떠나 홀로 살며 정절을 지키는 여인으로 그려져 있다. 이에 매화의 고독한 처지를 동정해 매화를 위해 천상의 궁궐에서 서로 의지하며 지내다가, 갑자기 사라진 매화를 찾다가 꿈에서 깨어난다는 서사로 이루어져 있다. 작자와 매화가 의지하며 지내다가 매화를 잃고 꿈에서 깨어나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바람에 드높이 나부끼는 노을 빛 옷자락飄飄高擧紫霞裾
맑은 이슬을 마음껏 마시고 구름을 누대로 삼으니,飮盡沆瀣雲爲臺
인간 세상 팔만 칠천 년이 人間八萬七千秋
번개 치고 우레 따라 울리는 순간도 못 된다네.不啻驚電隨風雷
맑은 향기 갑자기 가득 풍겨와淸香衮衮驀地來
나의 콧등 엄습하니 정을 금하기 어려구나.襲我鼻面情難裁
그대는 나를 의지하고 내 그대 의지해君依於我我依君
봉래산에서 온 신선을 짝하여 너울너울 춤추네.仙侶蹁躚自蓬萊
… <중략> …
몸 돌려 너를 봄에 간 곳을 알지 못하겠거니回身見汝不知處
네가 나이고 내가 매화일런가?爾爲我耶吾爲梅
부질없이 읊조리고 화표주로 날아 오니浪吟飛來華表柱
평원이 자욱이 깔려있고 큰 산은 허물어졌구나.平原靄靄丘山頽
상전이 벽해가 되고 바다가 육지로 변했으니桑田爲海海成陸
곤명의 검은 재처럼 다 싸늘하게 변했구려.冷盡昆明千劫灰
인용문 중 위 대목은 꿈속에서 만난 梅仙과 더불어 천상의 궁궐에서 노니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다. 紫霞는 仙宮에 낀다고 하는 붉은 놀을 말하고, 沆瀣은 밤에 맺힌 맑은 이슬을 이르는 말이다. 신선이 봄에는 아침노을을 삼키고 겨울에는 밤이슬을 마신다는 말이 있는바, 작자는 매화와 함께 신선이 되어 노닐고 있는 것이다. 인간 세상의 수만 년이 이곳에서는 찰나에 불과한데, 매화와 서로 의지하며 너울너울 춤을 춘다고 했다.
아래 대목은 꿈에서 깨어나 갑자기 매화가 사라져 간 곳을 알 수 혼자 인간 세상으로 돌아옴을 말한 것이다. 신선술을 배워 鶴으로 몸을 바꾸어 고향의 성문 華表柱에 내려와 앉았다는 丁令威의 고사를 용사해서 유선을 하고 돌아와 보니, 인간 세상은 상전벽해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 작품에서 매화는 신선으로 표상되며 작자는 매화와 함께 하는 유선의 체험을 서사적 구조를 갖춘 장편시를 통해 실감나게 그려내었다.
3-2. 이정구와 고부천이 명나라에서 얻어 온 매화
이정구는 중국어에 능통하여 임진왜란을 겪은 국난의 시기에 여러 차례 명나라를 다녀오며 중요한 외교적 활약을 했다. 이에 그는 중국의 문사들과 널리 교류하며, 중국 문사들의 요청에 의해 朝天紀行錄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정구는 명나라 사행시에 熊御使와 내기 바둑을 두어 만력 황제가 하사했다는 분매 하나를 얻어 귀국한 일이 있었다. 18세기의 성리학자 蔡之洪(1638~1741)은 이를 소재로 시를 지으면서 이 분매는 월사의 문인 閔後騫에게 주어졌는데, 그 후 다시 黃以章의 소유가 되었다가 1737년 월사의 후손 李鼎輔(1693~1766)에게 돌아오게 되었다고 그 내력을 기록하고 시를 지은바 있다. 채지홍의 시를 보면 월사가 중국에서 얻어 온 분매는 조선 후기에 대명의리 의식과 결부되어 중화 문물을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申緯의 “단엽 홍매는 온 나라 안에 없는데, 월사 사당 앞에 한 그루뿐이라네(紅梅單葉國中無, 月沙祠前但一株)”라는 시구로 보아, 이 분매는 홍매로 상당히 귀한 품종이었으며 이정보가 되찾은 뒤에 이정구의 사당 앞에 옮겨 심은 것 같다.
이정구 외에 당시 명나라 황제로부터 분매를 얻어온 이가 또 있었으니, 月峯 高傅川(1578~1636)이 그 사람이다. 그는 1621년 명의 광종이 즉위한지 한달 만에 죽자 조정에서 파견된 조문사절단의 서장관으로 연행했는데, 막 즉위한 명 憙宗으로부터 銀畫盃, 顧氏畫譜와 함께 紅梅 한 분을 하사받았다. 고부천은 귀국하여 이 홍매를 담양에 있는 자신의 고향집에 심는다. 이정구와 고부천이 명나라에서 얻어온 홍매는 이시기 조선과 명의 문화 교류의 이채로운 일면을 보여준다.
月象溪澤으로 불리는 이정구‧신흠‧장유·이식은 각기 몇 수의 매화시를 남겼는데, 여기에서는 잡체시의 형식으로 지어진 權鞸(1569∼1612)의 매화시를 보기로 한다. 그는 「甁梅」와 「梅」라는 제목의 매화시 2수를 남겼는데, 다음은 이 중 「매」라는 제목의 시이다.
매화여梅
매화여.梅
얼음처럼 맑은 뼈氷骨
옥처럼 깨끗한 뺨.玉顋
섣달도 이제 다 가고臘將盡
봄이 돌아오려 할 제,春欲廻
북쪽 땅은 아직도 추운데北陸未暖
남쪽 가지에 홀연 꽃 피었네.南枝忽開
안개 낀 아침에는 빛이 가려 담담하고煙朝光掩淡
달이 뜬 저녁에는 그림자가 배회하도다.月夕影徘徊
차가운 꽃망울 대숲 언덕에 뻗어 피어있고冷蘂斜侵竹塢
그윽한 향기 날아서 금 술잔에 들어오누나.暗香飛入金罍
처음에 잔설을 능가하는 환한 빛 사랑스럽더니始憐的皪凌殘雪
어느덧 푸른 이끼에 떨어지는 꽃잎이 아깝구나.更惜飄颻點綠苔
이에 굳센 절개가 맑은 선비에 비길 줄 알겠노니從知勁節可比淸士
그 높은 풍모를 말한다면 어찌 범상한 사람이리오.若語高標豈是凡才
그윽이 은거함 좋아하지만 시인이 보는 것은 용납하고愛幽獨尙容詩人看去
시끄러움 싫어해 미친 나비 찾아오는 것은 허락치 않네.厭喧鬧不許狂蝶尋來
시험삼아 묻노니 낭묘에 올라 솥의 음식 조미하는 그대여
試問登廟廊而調鼎鼐者
서호의 고산 모퉁이에 있는 임포와 어찌 같다 하리.
何似西湖之上孤山之隈
1자에서 시작해서 매연마다 한 자씩 늘어나 10자로 끝나는 ‘自一言至十言’ 형식의 雜體詩이다. 잡체시의 다양한 형식 중에서 層詩라 불리는 형식인데, 말 그대로 한 층 한 층 늘려가서 시각적인 효과가 돋보이는 시체이다. 권필은 梅와 함께 松・竹・菊・蓮 또한 이 형식으로 지어 모두 5수의 층시를 남겼는데,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창작 동기를 밝혔다.
식물 가운데 가지가 어여쁜 것이 둘이니 소나무와 대나무요, 꽃이 어여쁜 것은 매화와 국화다. 꽃과 잎이 모두 어여쁜 것이 하나니 연꽃이다. 내가 평생 이 다섯 가지를 매우 좋아했는데, 우연히 이백의 三五七言을 부연해서 一言에서 十言에 이르러 그쳤는데, 다섯 편을 이루었다. 대략 아름다운 운치를 서술하고 아울러 이로써 기탁하고자 한 것이지, 감히 形色을 묘사하여 기이한 말을 구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기해년 윤 4월 14일에 석주 懶隱이 쓴다.
기해년(선조 23, 1599)에 지었다고 했는데, ‘懶隱’이라 자호하고 있는 데에서 江都(강화도)에 우거하고 있으면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깨끗한(氷骨玉顋)” 자태를 지니고 추위를 무릅쓰고 피어난 매화의 굳센 절개[勁節]을 노래했다. 조용히 은거함을 좋아해 시인이 보는 것은 용납하지만 미친 나비가 찾는 것은 허락지 않는다고 했다. 추운 겨울에 피어나기에 나비가 있지 않는 것을 이렇게 말한 것이다. 권필의 잡체 매화시는 그의 뛰어난 시적 재능과 함께 유희적 측면이 농후한 것이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대상을 관념화함으로써 현실과의 갈등과 좌절을 극복하려 한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운치를 대략 서술하면서 자신의 뜻을 의탁했다(略敍佳致, 兼用自託)”고 창작 동기를 밝힌 것을 염두에 두면 권필은 매화에서 衝寒犯雪하는 頸質態度를 보았다고 할 것이다.
3-3. 安東 一門—김수증‧김창협‧김창흡—의 매화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이르는 시기는 현종, 숙종, 경종 연간을 거쳐 정조 초반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주자학의 명분론과 예론 논쟁을 계기로 서인과 남인 간의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이에 대한 대처 방식을 두고 서인 내에서도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17세기 중후반 현종 대에 벌어진 기해예송(1649)과 갑인예송(1674)을 비롯하여 숙종 대에 일어난 기사환국(1689)과 갑술환국(1694)을 거치면서 붕당정치의 기본 원리는 심각하게 훼손되게 된다. 이러한 살벌한 정쟁에 심각한 회의를 느낀 일부 사대부들은 철저하게 은거하여 정치 현실과 격절된 공간 속에서 학문과 문예에 침잠하게 되는데, 이 시기 매화시는 ‘眞隱’을 추구하는 이들에 의해 활발하게 창작되었다. 김수증, 김창협, 김창흡 一門의 은거와 수많은 매화시의 창작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金壽增(1624~1701)은 1제 8수의 매화시를 남겼는데, 「石室의 분매가 꽃봉오리를 머금고 있는 모습이 매우 고왔다. 병석에 누워 있다가 새벽에 일어났는데, 우연히 퇴계의 매화문답시가 기억나 그 체재를 본떠 희롱삼아 지었다.(石室盆梅, 蓓蕾正姸, 病臥曉起, 偶記退溪梅花問答詩, 遂效其體戲賦)」라는 제목의 시이다. 그런데 이 시는 작자와 매화가 뭄고 답하는 것이 아니라 매화끼리 문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섯 수는 石室梅와 華陰梅의 문답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두 수는 開花梅와 未開梅가 묻고 답하는 것이다. 석실매란 경기도 양주군 渼陰에 있던 석실의 매화를 말하고, 화음매는 기사환국 후 김수증이 은거한 華蔭洞 정사에 있는 매화를 말한다. 석실은 조부 金尙憲이 청나라 심양에서 돌아와 말년까지 은거하였던 곳으로 그의 사후에 석실서원이 세워져 안동 김씨 세도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다음은 석실매와 화음매의 문답시 중 첫 번째 것이다.
송백당 안에 고운 모습 간직한 누각 있어松柏堂中藏艶閣
성긴 가지 차가운 꽃망울 병풍 사이에 있네.疏枝冷蕊寢屛間
화음의 매화 한 그루 비웃게 되나니 華陰一樹還堪笑
홀로 산승 대한 채 한겨울을 보내는구려.獨伴山僧度歲寒
외로운 뿌리 속세의 번화한 자취 가까이함 싫어해孤根厭近囂塵跡
맑은 꽃송이 적막한 개울가가 의당 어울린다네.淸艶端宜寂寞濱
지금 출처는 각기 천성에 따를 것이니今日行藏各天性
온 산에 풍설 가득한데 한 가닥 봄빛 지녔다오.萬山風雪一枝春
松柏堂은 石室書院 경내에 있던 집의 堂號이니, 그 안의 석실매는 병풍 사이에서 주인을 대하며 꽃을 피우며 안온하게 지내고 있다. 이에 알아주는 주인 없이 산승만 대한 채 한겨울을 보낸다고 화음매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화음매는 속세의 번화함을 멀리 하고 적막한 산속에 있음이 나의 천성이라 하며, 풍설 가득한 산 속에서 봄소식을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석실과 화음을 오가며 학문에 정진했던 김수증이 은거 생활에서 늘 매화를 가까이 했음을 알려준다.
金昌協(1651∼1708)은 7제 27수의 매화시를 남겼는데, 이 중에는 아우 김창흡과 주고받은 것이 많다. 이 중 석실에 은거하던 김창흡이 보내온 매화시를 읽고 차운하여 지은 시 중 한 수를 보기로 한다.
꽃 피자 나무 아래 일천 번을 맴도니花開繞樹欲千巡
그대의 매화벽은 따를 사람 없으리.梅癖應無似爾人
복희씨 이전의 고상한 안목을 지니고高著羲皇以上眼
꾀꼬리, 제비도 알지 못하는 봄을 홀로 보는구려.獨觀鸎燕未知春
맑은 창에 드리운 그림자 가지마다 생기 있고晴窓畫影枝枝活
새벽녘 베갯머리에는 향기가 날로 새롭나니曉枕生香日日新
서호의 삼백 그루 부러울 게 무어 있나?豈必西湖三百樹
매화 화분이 또한 몸 곁에 늘 있는 걸.一盆也好鎭隨身
김창흡의 매화벽은 따를 자가 없다 하고, 복희씨 이전의 안목으로 꾀꼬리나 제비도 알지 못하는 봄을 먼저 본다고 했다. 복희씨는 주역의 팔괘를 처음으로 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송나라의 邵雍은 복희씨의 역을 先天易이라 하고, 이에 기반한 점복술을 창안하고 이를 梅花易數라 칭했다. 이러한 명칭은 소옹이 매화를 완상하던 중 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수를 계산하여 미래를 예측했다는 일화에서 유래하였다. 陰陽消長 하는 우주자연의 理法을 탐구하여 변화운동의 易理를 통찰하고자 하는 방편으로 매화를 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복희씨 이전의 안목이란 소옹이 선천역을 통해 탐구하고자 했던 자연의 이법을 넘어선, 우주 태초의 근원적인 이법을 김창흡이 매화를 통해 통찰하고자 했음을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꾀꼬리 제비도 알지 못하는 봄”이란 이러한 우주 태초의 근원적인 이법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며, 이를 홀로 본다는 것은 김창흡이 매화를 통해 우주자연의 이법을 깊이 체인했음을 말한 것이다. 이하에서는 석실에 은거하며 매화와 늘 함께 지내는 김창흡의 탈속적 정취를 노래했다.
金昌翕(1653∼1722)은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으나 영의정을 지낸 昌集, 예조판서를 지낸 昌協 등의 형들과는 달리 평생토록 은거를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무려 38제 76수에 이르는 많은 매화시를 창작하였다. 그의 많은 매화시 중에서 「松栢堂詠梅」는 총 16수의 연작시로 김창흡이 44세이던 1696년 겨울에 석실서원에 머물며 쓴 시이다. 이때는 그가 본격적으로 성리학에 몰입하던 시기로 시 창작에 있어서 사물을 관조하고 이면의 이치를 탐구하려는 태도가 나타나는데, 「송백당영매」는 이를 잘 드러내는 시편으로 평가된다. 다음은 그 중 한 수이다.
현묘한 조화 갈마들어 온기 끊임없으니玄化氤氳不輟溫
울밑 국화 시든 뒤에 다시 분매가 있구나.菊籬凋後又梅盆
눈얼음만 가득하여 위의를 볼 수 없고雪氷滿目嚴威缺
천지 무심하여 苦癖만 품었더니,天地無心苦癖存
가지 위에서 一元이 흰 꽃잎으로 흘러나와貞上一元流素蕊
허공중에 오묘한 빛 玄根에서 피어나네.虗中妙色發玄根
깊은 방에 들어앉아 참된 消息 탐구함에深房坐討眞消息
책상 앞이 맑아지매 작은 정원이로구나.床榻蕭然卽小園
수련에서 ‘氤氳’은 음양의 기운이 번갈아 만나며 화합하는 모습을 형용하는 말이다. 현묘한 조화란 천지를 생성시키고 변화를 추동하는 근원인 음양의 두 기운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니, 이들의 끊임없는 운행으로 국화가 시든 뒤에 분매가 피어난다고 했다. 눈얼음으로 가득하여 천지가 무심해 보이는 어느 겨울날 매화나무에 꽃이 피어났다. 경련은 이를 묘사한 것으로 만물을 생성시키는 태초의 원기가 흰 꽃잎으로 흘러나오고, 오묘한 빛이 玄根에서 피어났다고 했다. 여기에서 ‘검은 뿌리[玄根]’는 ‘흰 꽃잎[素蕊]’과 대를 이루면서 소옹의 역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天根’을 중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옹의 시문에서 天根은 음에서 양의 기운이 싹트는 復卦 및 동지와 관련되는 것으로, 소옹은 천근을 理의 極微라고 하며 이를 보는 것이 자연 만물의 이치를 아는 핵심이라고 여겼다. 천근은 太極의 오묘한 이치가 가장 잘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 참고할 때 6구의 현근에서 오묘한 빛깔의 꽃이 피어나는 모습은 一陽이 動하는 것이자 곧 靜에서 動으로 가는 미묘한 지점, 바로 소옹이 말한 바 理의 極微한 지점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참된 소식을 탐구한다”는 것은 곧 매화를 보며 태극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는 것에 다름 아니며, 책상 앞이 작은 정원[小園]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서책을 보는 공간이 아니라 천기가 유동하는 생생한 현장 그 자체로 변모함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매화를 보면서 그는 “묵은 책을 잠시 놓아두니, 생동하는 천기가 바로 예 있었구나(塵編且暫抛, 活機於斯存)”라고 하여, 서책보다 매화를 보며 천기의 유동함을 생생하게 느낀다고 한바 있다. 이를 염두에 두면 여기에서 책상 앞이 작은 정원이 된다는 것 또한 매화를 완상하며 천기를 더욱 생생하게 느낌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4. 조선 후기의 매화시 (18세기 중반~20세기 초반)
17세기에서 18세기 초반까지 이어졌던 사대부 계급의 살벌한 정쟁과 일당전제는 영정조의 탕평책에 의해 일시적으로 종식되며 정치적 안정을 찾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일련의 개혁정책이 추진되었으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해 문화 향유층 또한 대폭 확대되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모와 더불어 이 시기에 중인층은 詩社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며 여항문학을 형성하였으며, 서얼층 또한 通淸 운동과 더불어 문화적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 이러한 일련의 변모로 인해 18세기 중후반 서울은 도시적 분위기가 팽배하였으며, 양반층과 함께 중인‧서얼층의 매화시 창작 또한 활발하게 전개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적 면모이다.
19세기에는 정조의 뒤를 이어 어린 임금들이 연달아 등극함에 따라 절대적인 왕권이 사라지면서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의 형태로 변질되었다. 이는 선조 이후 오랫동안 조선의 정치권력의 기본 구조였던 붕당정치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반동적인 세도정치의 등장과 함께 이 시기의 문화적 분위기 또한 유흥적, 탐미적인 성향이 강화되어 갔으며 이는 이 시기의 매화시에도 반영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차이점을 고려해서 여기에서는 조선 후기의 매화시를 18세기와 19세기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8세기에는 시사 집단의 매화시 창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점이 특징이다. ‘冰燈照賓筵’이라 이름 붙인 노론 계열 문사들의 매화시, 梅社 동인의 매화시, 그리고 후기 사가인 이덕무 일파의 蠟梅詩 창작 등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경향이었다. 19세기에는 신위, 정학연, 조병현, 이학규 등이 각기 수십 수에 달하는 많은 매화시를 남겼다. 여항문인의 매화시 창작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반에 걸쳐 활발히 진행되었다.
4-1. 18세기 후반 동인 집단의 매화시
李奎象(1727~1799)은 幷世才彦錄에서 李胤永(1714~1759)에 대해 소개하면서 “그의 집은 서울의 서쪽 盤松池 가에 있었는데, 연못 가까이 정자를 세우고, 선비 吳瓚・金尙黙・李麟祥 등 7,8인과 더불어 文會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겨울밤엔 얼음덩이를 잘라내어 그 속에 촛불을 두고 이름하여 ‘氷燈照賓筵’이라 하였고, 여름에는 연꽃을 병에 꽂아두고 벗들을 불렀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리고 전각에도 능했다.”고 하였다. 이윤영은 고기물 수집을 좋아하며 서화에 뛰어난 인물로 이인상과 평생 절친한 벗으로 지냈으며, 그림 역시 이인상의 그림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한 필치를 지녔다고 한다. 서화에 뛰어났으며 예술적 취향이 상통했던 이들은 文會를 즐겨 가졌는데, 그 문회에서 겨울밤이면 얼음덩이를 잘라내어 그 속에 촛불을 밝혀놓고 매화를 비추며 시를 짓곤 하였다. 이른바 ‘氷燈照賓筵’인데, 이윤영의 문집 丹陵遺稿에는 그 정경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지난 기사년(1749) 겨울 敬父(吳瓚)가 매화가 피었다고 기별해와 나는 元靈(李麟祥) 등 여러 사람과 더불어 山川齋(오찬의 서재 이름)로 가서 모임을 가졌다. 매화감 안에 둥근 원을 뚫어놓고 雲母로 가리어 놓았는데, 하얀 꽃송이가 빛나는 모습이 마치 달빛 속에 있는 듯 하였다. 그 곁에는 文王鼎이 놓여 있고, 다른 고기물 몇 가지가 있었는데 모두 맑고 깨끗하여 즐길 만 하였다. 서로 더불어 文史를 담론하다가 밤중에 이르자 경보가 커다란 백자 사발을 가지고 오더니 깨끗한 물을 가득 채워 지게문 밖에 놓아두었다. 한참 뒤에 보니 얼음의 두께가 2分 쯤 되었다. 그 속에 구멍을 뚫어 물을 쏟아내고 궤안 위에 사발을 엎어놓자 반짝이는 은빛 병 하나가 만들어졌다. 구멍 속으로 초를 밀어 넣고 불을 붙이자 붉고 밝은 기운이 환히 빛나는데, 투명한 빛이 무어라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돌아다보고 웃으며 술을 가져오라 하여 즐거움을 극진히 하였다.
이를 보면 반송지 가에 있었다는 이윤영의 집뿐만 아니라 오찬의 산천재에서도 빙등조빈연이 열렸음을 알 수 있다. 오찬은 영조 연간 문명이 높았던 月谷 吳瑗의 아우로 桂山洞의 집에서 여러 차례 문회를 열곤 하였다. 문왕정을 비롯하여 고기물 여러 가지가 놓여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문회는 골동품의 완상을 겸한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빙등조빈연은 단순한 문회가 아니라 서화 고동을 감상하고 품평하는 성격을 지녔던 것이다. 겨울밤 냉수를 얼려 얼음등을 만들고 그 속에 촛불을 놓아두고 매화꽃을 비추어보는 자리는 상상만으로도 아취가 느껴지는 모임이다. 빙등조빈연의 광경을 읊은 이윤영의 시 한 수를 들어본다.
추위를 무릅쓰고 매화 꽃송이 함께 하여凌寒梅蘂並
밤을 비추는 구슬의 광채와 빛을 다툰다.照夜珠輝爭
넘실넘실 환한 빛의 바다 배를 띄울 만하고 汎汎空明船
맑디맑은 푸른 물결 갓끈을 씻을 만 하네. 濯濯滄浪纓
주머니의 반딧불인 양 그 빛 주울 수 있을 듯 囊螢光可掇
거울 속의 꽃과 그 자태 똑같아 보이네.鏡花影欲平
비로소 알겠노라, 청명함 지니려면始覺淸明在
응당 비루한 싹 없애야 하리. 應消鄙吝萠
매화의 하얀 꽃송이와 얼음등의 하얀 빛이 어우러져 방 안 가득 환한 빛을 펼쳐놓는다. 환한 빛의 바다엔 배라도 띄울 수 있을 듯 하다. 흡사 명주 주머니 속에 담긴 반딧불인 양, 거울 속에 비친 하얀 꽃처럼 환상적인 밝음이다. 이처럼 순수한 빛은 세속의 비루함을 넘어선 청진함 그 자체이다. 冰燈照賓筵에서 얼음등이 비추는 손님(賓)은 곧 매화인바, 이들의 매화시에서 매화는 얼음등의 환상적인 빛에 짝하는 고결한 형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姜浚欽(1768~?)은 三溟詩話에서 18세기 문단의 특징적 양상들을 여러 가지 소개하였다. 그 중 洪鳳漢家의 落花詩 창작과 함께 趙載浩家의 매화시 창작에 대한 기사가 보이는데, 매화시 창작에 관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상국 조재호는 영조 갑술년(1754)병을 칭탁하고 물러나기를 구하면서 분매를 감상하는 모임을 가졌다. 그 조카 趙維鎭과 李鳳煥, 蔡希範, 南玉 등과 함께 매화가 처음 피어날 때부터 반쯤 피었을 때, 활짝 피었을 때, 시들어 갈 때, 다 떨어질 때까지 무릇 일곱 차례의 모임을 갖고 시 2백 편을 얻었다. 이를 梅社五詠이라 이름하고는 각기 집에 간직하였다. … 〔조재호 ․ 조유진 ․ 이봉환 ․ 채희범 ․ 남옥의 순으로 이들이 지은 시구를 소개하고 있음〕 … 시가 다 지어져 책으로 엮어졌을 때 남옥이 매화 한 송이를 가리키며 말하길 “우리들이 누차에 걸쳐 수십 편의 시를 지었지만 이 꽃의 참되고도 전일함에는 미치지 못하는 군요”라고 하자 좌중의 모든 사람들이 知言이라 하였다.
趙相(조재호)은 그가 차고 있는 命召를 어루만지고 한숨을 내쉬며 “내가 어찌하면 이를 벗어 던지고 그대들과 함께 청평산의 집으로 가서 소를 타고 왕래하며 이 모임을 계속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채희범이 말하길 “참으로 그러하신다면 나는 장차 공을 좇아 동쪽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조상은 관직에서 물러나와 춘천으로 돌아갔는데, 8년을 지내다가 임오년 사화에 연루되어 죽었다.
5인이 모여 각 40수씩의 시를 지어 총 2백수의 매화시를 얻고는 이를 책으로 엮어냈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다. 시사의 이름을 梅社라 한데서 알 수 있듯이 이들 동인의 모임은 전적으로 매화시 창작을 위한 것이었다. 위의 기록은 이들 동인의 매화시 창작의 정황을 소상히 알려주고 있거니와, 당시 사대부가에서는 분매를 완상하는 취미가 성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매사 모임의 경우 매화는 盒室에 보관하여 깁으로 감싸 추위를 피하고, 그 안에 金泥로 달을 그려 넣었으며 아침마다 동복을 시켜 물을 주게 하여 꽃을 기른 것이다. 그리고 수록된 시를 보면 매화 곁에 美人圖를 걸어놓고 미인에 견주어 매화를 노래한 경우도 보여, 京華巨族의 호사스런 심미 취향을 짐작케 한다. 일개 화원의 신분인 김홍도가 “二千錢을 들여 매화를 사고, 八百錢으로는 술 몇 되를 사서 동인들을 모아 梅花飮을 마련하였다”고 한 기록을 통해서도 당시 매화 완상의 풍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18세기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 속에서 분매를 완상하는 풍조가 성행했던 바, 사대부의 정신 경계 속에서 은일과 지조의 표상이었던 매화는 이제 하나의 심미적 완상물로 변모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매사의 동인들이 7차에 걸쳐 梅會를 갖고 200수에 이르는 매화시를 창작한 데에는 이러한 시대적 풍조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매사의 대표격 인물인 이봉환의 매화시 한 수를 보기로 한다.
두터운 정 뉘라서 날이 갈수록 쇠미하게 만드는가 濃情誰遣日趨微
번화했던 곳이 먼저 손에 닿아 날리네. 繁處先看觸手飛
빈 등걸 껴안고 태고로 쌓이는데擁得虛槎蟠太古
아직 남아있는 꽃받침 남은 빛 떨치네. 結留高萼奮餘輝
그윽한 향기 마음을 다해 핀 것 어여쁜데 終憐馥郁開心盡
청진함 간직한 채 무덤으로 돌아갈 것 생각하네.永抱淸眞到骨歸
쇠하고 흥하는 한 마당에서 세상 보는 눈 배우나니衰旺一場觀世眼
왔다 가는 공과 색의 이치가 곧 천기라네.往來空色只天機
지는 매화(落梅)를 노래한 것이다. 함연에는 권점을 찍고 ‘骯髒遒峻’이라 평했는데, 이는 기세가 강직하고 꿋꿋함을 뜻하는 말이다. 지는 꽃잎이 허공을 날아 태고로 돌아가는 순간과 함께 아직 가지에 맺혀 있는 꽃받침의 의젓한 자태를 대비시켜 그리고 있다. 이는 곧 의젓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로 ‘강직하고 꿋꿋한’ 모습이라 하겠으니, 이러한 의상을 염두에 두고 항장주준 하다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경련에서는 마지막까지 그윽한 향기를 발하고, 죽는 순간에도 청진한 자태를 잃지 않는 것으로 낙매를 그리었다. 이를 두고는 ‘한 번 읽고 세 번 탄식하게 되니 지사가 눈물을 떨군다[一唱三嘆 志士堪涕]’고 평한 것은 곧 매화의 꿋꿋한 자태를 보고 세상사의 흥망에 연연하지 않고 고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지사의 표상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미연에서 작자는 매화꽃이 피었다 지는 모습에서 세상사 흥망성쇠의 이치를 떠올렸다. 色卽是空의 이치로 모든 것이 곧 天機의 유행에 따른 것이라 하였다.
李德懋(1741~1793)는 젊은 시절 밀랍으로 매화를 빚어 만들고 그 내력을 소상히 기록한바 있다. 청장관전서 권62에 실린 「輪回梅十箋」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윤회매를 만드는 방법과 과정 및 윤회매에 관한 일화가 짤막한 열 편의 글을 통해 자세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덕무의 8수, 유득공의 시 5수, 박제가의 시 6수를 차례로 실어 놓았다. 시의 형식은 모두 칠언절구이다.
밀랍으로 빚어 만든 매화에 ‘윤회매’란 이름을 붙인 이유를 두고 이덕무는 “벌이 화정을 채취하여 꿀을 빚고 꿀에서 밀랍이 생기고 밀랍이 다시 매화가 되는데, 그것을 윤회매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꽃에서 꿀이 나오고, 꿀이 밀랍으로 되었다가 다시 꽃으로 만들어지는 순환의 이치를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이러한 명칭에 대해 이조원은 매우 ‘참신하고 법도에 맞다[新雅]’라고 하여 공감을 표시하였다.
윤회매는 18세기 들어 이덕무가 처음으로 창안하여 만든 것으로, 이덕무는 박제가와 유득공에게 그 법을 전수하기도 하였다. 이덕무는 윤회매를 만들어 놓고 친우들을 불러 술을 마시며 시를 짓기도 하고, 만든 윤회매를 팔기도 하였다.
다음은 이덕무가 지은 윤회매이다.
일찍이 벌집에서 맺은 윤회의 인연으로蜂衙夙結轉輪緣
쌍쌍이 짝을 지어 자매로 눈앞에 나타났네. 現了雙雙姊妹聯
만약에 참꽃이 피어 보게 되면 若使眞花開着眼
해맑은 같은 기상에 손자인 양 예뻐하리.澄鮮一氣肖孫憐
윤회매란 명칭은 곧 윤회로 이루어진 매화라는 뜻이다. 시상의 전개에서 불교의 윤회의 이치가 중심 제재가 됨은 자연스런 이치라 하겠다. 벌들이 꽃에서 꿀을 따서 저장하고, 밀랍이 만들어지는 벌집이야말로 윤회매에게 있어서는 태실이 된다 할 것이다. 그 태실을 기반으로 하여 줄줄이 태어난 올망졸망한 꽃망울은 흡사 자매처럼 보인다. 그리고 꽃에서 꿀로, 꿀에서 밀랍으로 윤회하는 것이기에 참꽃은 윤회매에게 할아버지뻘이 된다. 진짜 꽃이 본다면 손자인양 예뻐한다는 말은 외양의 흡사함을 넘어서 이러한 輪回轉成의 이치를 재치 있게 드러낸 말이다.
다음은 유득공의 시이다.
영롱한 그 자태 水晶人이라 불러 마땅하리 玲瓏合喚水晶人
현재의 몸은 지나간 춘광으로 이루어진 것. 現在身憑過去春
진랍과 회회족은 무엇으로 있게 되었나 眞蠟回回何隨有
多生에서 往生의 인연 맺기 바라노라.多生願結往生因
수정처럼 영롱한 납매의 모습은 지난 봄날의 공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전구에서 말한 진랍과 회회는 크메르족과 이슬람족을 말한다. 기승구에서 지난 해 봄날 꽃과 꿀에 인연하여 탄생한 납매의 아름다움을 말하더니, 돌연 이들 異族의 존재에 대해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결구에서 말한 多生을 염두에 둘 때 아마도 세상에 여러 다양한 종족이 있음을 말하기 위함이 아닌가 한다. 봄날 꽃을 인연하여 납매가 탄생할게 될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일이다. 진랍과 회회와 같은 이족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인연으로 해서 우리와는 다른 형상으로 이 세상에 있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시인은 윤회매가 탄생하게 된 인연을 생각해 보다가 불현듯 이런 생각을 떠올려 본 것이다. 그리고 종내에는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극락왕생 하라는 부처의 가르침을 되새겨본다. 이 시는 윤회매의 모습보다는 그것이 있게 된 이치를 탐색하는데 주안점을 두어 시상을 전개하였다.
이상에서 영정조 연간 시사 동인의 매화시 창작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 매화시의 전통적인 상징의 자장이 해체되는 조짐이 감지된다. 매화가 은일과 지조의 표상에서 벗어나 하나의 심미적 완상물로 애호되고 있는데, 이는 성리학적 사유의 퇴조와 맞물려 있는 현상으로 보인다. 빙등조빈연의 동인들이 얼음 등을 만들어 놓고 그 빛에 비추어보며 매화를 완상하는 모습, 매사의 동인들이 분매를 앞에 두고 7차에 걸친 梅會를 갖고 200수의 시를 화답하는 장면, 이덕무 일파가 밀랍으로 만든 윤회매를 감상하며 연작시를 짓는 일. 이들 동인의 모습에서 매화는 ‘美善一致’의 관점에서 벗어나 심미적 대상물로 경사되어 있다.
아울러 18세기 들어 매화시 창작의 열기가 과도할 정도로 고조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전과는 달리 동인들의 집단적인 매화시 창작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밀랍으로 매화를 만들며 즐기거나, 얼음 등에 비추어보며 완상하는 등 독특한 매화 감상의 방식 또한 등장하였다. 이들에게 있어 매화는 내면세계의 청진을 되새기는 매개물이라기보다는 독특한 예술 취향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姜世晃(1713∼1791)은 매화시의 범람으로 惡詩가 양산되고 있음을 비판하였으며, (李羲師(1728~1811)는 새로운 착상이나 시어가 없어 평생 매화시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이 있다. 그리고 朴趾源(1737∼1805)은 매화를 얘기하면서 梅實을 말하지 않고 꽃만을 거론하는 풍조를 비판하였다. 18세기 매화시 창작의 과도한 열기의 역기능을 비판한 이들의 말은 은일과 지조의 이미지가 퇴색되고 하나의 심미적 완상물로 전락한 매화시의 부정적 측면을 경계하고 있는 언급인 것이다.
4-2 「梅花百詠」과 신위․정학연의 매화시
申緯(1769∼1845)는 평생 매화를 가까이 하며 여러 소재의 매화시를 지었는데, 그가 남긴 매화시의 제목을 보면 그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매화를 즐기며 이를 시화했음을 알 수 있다. 신위는 직접 살구나무에 매화 가지를 접붙이고 이것이 살아난 기쁨을 말하였으며(「栽接花本」‧「老杏樹接梅枝得活, 戱吟長句」), 매화를 놓아둔 합실에 거울에 걸어놓고 비친 모습을 노래하기도 하고(「梅二首, 下篇咏鏡中景--時齋頭設鏡屛」, 꽃이 진 매화 가지를 화로에 불태우며 향을 즐기기도 하였으며(「爇梅」), 매화차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면서 매화 꽃잎을 섞어 넣어 향을 즐기며, 심지어는 매화 꽃잎을 생채로 씹어 먹기까지 하였다.(「啜梅」‧「吸梅」‧「嚼梅」) 이처럼 매화를 혹애하며 가까이 한 신위는 “시 읊조리는 모습 쓸쓸하다고 말하지 마소, 주인옹은 이미 하나의 매화가 되었다오(莫問詠詩涔寂况, 主翁而已一梅花)”라고 하여 자신이 매화가 일체가 되었다고 고백하기까지 했다.
그이 매화시 중 「梅花三十六詠」은 각종 자태의 매화를 칠언절구 형식으로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신위와 친밀하게 교류했던 정학연 또한 유사한 형식의 「梅花三十首」를 남기고 있어 주목된다. 신위는 서문에서 이 시가 지어진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날 仲圭 吳鎭은 기질이 강직하였는데, 젊어서는 검술을 좋아했고, 易理에 널리 통했다.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알아 禾中에 은거하며 집 주위에 매화 수십 그루를 심고 그 사이에서 혼자 시를 읊으며, 이로 인해 梅道人이라 자호하였다. 그가 벼루 씻던 곳이 한줄기 샘물이 솟아나는 데 있었는데, 그 물의 달고 차기가 보통 것과는 달라 梅花泉이라 이름 하였다. 샘물을 마시고자 하는 자가 上池의 봄 물 같이 많았는데, 공이 돌아가자 샘물도 절로 막혔으니 대개 하늘이 고사에게 내려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枝山 祝允明이 중규의 성품이 초탈하고 행적이 기이함을 사모하여 「梅花百詠」을 지었는데, 내가 이에 화운하여 36수를 얻었다.
오진(1280~1354)은 黃公望·倪瓚·王蒙과 함께 원나라 말기의 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화가이다. 박학다문한 그는 易學을 익혀 점치는 일을 업으로 삼았으며, 고고한 문인적 생활태도를 고수하며 한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신위는 매화를 가까이 하며 고결하게 생활한 오진의 인품과 행적을 사모하여 祝允明(1460~1526)이 「매화백영」을 지었는데, 자신의 시는 이를 화운한 것이라고 했다. 매화가 피어나는 시기 혹은 장소에 따라 다른 매화의 여러 모습을 시제로 삼아 巨篇의 연작시를 짓는 경향은 이 「매화백영」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唐代 후기부터 宋代에 이르기까지 과거에서 詩賦 100편을 짓게 하여 인재를 가려 뽑는 百篇科가 있었는데, 당시 매화를 제재로 삼아 시를 짓는 일이 성행했던 것과 맞물려 매화시 100편을 연작시로 짓는 경향이 생겨났다. 북송의 秦觀(1049~1100)이 지은 7언 율시의 매화시 100편이 그 시초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원대와 명대에 李伯玉, 張道洽, 馮子振, 釋名本, 文徵明), 李確 등에 의해 꾸준히 매화 연작시가 창작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일본에 파급되어 詩作의 한 경향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의 문인에게도 일찍부터 알려졌던 것으로 보이지만, 신위는 「매화백영」의 형식을 따랐음을 분명히 언급했으며,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양의 연작시를 지었다. 매화의 각종 자태를 이처럼 거편의 연작시로 읊는 것은 신위와 친밀하게 교류하며 杜陵詩社에서 함께 활동한 丁學淵의 「梅花三十首」가 유일한 것이다. 두 사람의 시는 동일하게 「매화백영」의 영향 아래 창작되었으며 서로 시작에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신위의 경우 7언 절구를 사용한 반면 정학연은 7언 율시의 형식으로 지었으며, 내용상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다음은 신위의 시 한 수이다.
관세음보살이 흰 옷을 입고 나타났거니 變現白衣觀世音
몇 차례의 생을 거쳐 지금에 이른 것인가?幾生修得到如今
티끌 한 점 물들지 않은 청정한 깨달음이오點塵不染皆禪悟
향기론 꽃잎 둥근 모습은 부처의 마음이구려.香瓣能圓是佛心
僧房에 핀 매화를 노래한 것인데, 관세음보살의 화신에 매화를 비유했다. 관세음보살은 세상을 교화함에 중생의 根機에 맞추어 여러 가지 형체로 나타나므로, 이를 普門示現이라 하며, 三十三身이 있다고 한다. 매화의 청진한 모습에서 청정한 깨달음과 원만한 자태를 지닌 불심을 본다고 하였다.
신위의 「梅花三十六詠」은 특정한 장소나 경물, 혹은 시기에 처한 매화의 모습을 다양한 시각에서 노래한 것으로, 다분히 유희적인 성향의 시작이라 하겠다. 일찍이 송대의 문인 張鎡는 자신의 집 주변에 매화나무 삼백여 그루를 심어 놓고 여기에 옥조당(玉照堂)이란 별채를 지어놓고 매화를 감상하며 매화와 잘 어울리는 것·잘 맞지 않는 것·영예로운 것·굴욕스러운 것의 네 가지 제목에 총 58개 조목을 마루 위에 걸어두고 경계로 삼았다. 장자는 매화와 잘 어우리는 것으로 26가지를 들고 있으니, “그늘, 새벽 해, 서늘함, 가랑비, 옅은 안개, 아름다운 달, 석양, 얇게 덮인 눈, 저녁노을, 진기한 새, 외로운 학, 맑은 시내, 작은 다리, 대숲 언저리, 소나무 밑, 환한 창가, 성긴 울타리, 푸르스름한 벼랑, 푸른 이끼, 구리 병, 종이, 숲속의 피리소리, 무릎 위에 가로놓인 비파, 돌판 위에 두는 바둑, 눈 쓸고 차 달이기, 아름다운 여인이 얇게 화장하고 비녀 꽂은 것”이 그것이다. 앞에서 중국에서 「매화백영」의 창작 전통이 송대에서 원대, 명대에 꾸준히 이어져 왔음을 보았거니와, 매화에 대한 애호가 성행하면서 특정한 경물과 결부된 매화의 운치를 감상하는 흐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丁學淵(1783~1859)은 茶山 丁若鏞의 장남으로 시문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농학과 의술 등에도 박통했던 인물이다. 李尙迪은 정학연에 대한 輓詩에서 “문장은 능히 나라를 빛낼 만했고 의술은 국가도 고칠 만했건만, 斯道는 어찌하여 이 둘을 다 적막하게 금했던고(文能華國醫醫國, 斯道爭禁兩寂寥)”라고 애석해하였다. 산전하는 그의 저작 중 鮮音에는 정학연 만년의 시가 16제 145수 실려 있는데, 여기에 「梅花詩三十首」라는 제목 하에 매화시 30수가 수록되어 있다. 동일한 시가 순리어필집에는 「同綾山咏槑」로, 丁酉山詩抄와 玉笈三山記에는 「同綾山詠梅」라는 이름으로 각각 25수씩 실려 있다.
정학연의「梅花詩三十首」의 제목을 보면 ‘雪梅’․‘月梅’․‘煙梅’․‘雨梅’․ ‘曉梅’․‘風梅’․‘野橋梅’․‘江村梅’․‘茅屋梅’․‘朱門梅’․‘驛樓梅’․‘官閣梅’․ ‘僧舍梅’․‘妓家梅’․‘燈前梅’․‘鏡中梅’․‘甁梅’․‘龕梅’․‘竹間梅’․‘松下梅’․ ‘紅梅’․‘墨梅’․‘半綻梅’․‘未開梅’․‘倒地梅’․‘疊枝梅’․‘別梅’․‘夢梅’․‘簪梅’ ․‘畵梅’로 각종 경물과 어우러진 매화의 자태나 매화가 피어난 상태 및 특정 상황과 결부하여 매화의 운치 등을 노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중 한 수를 들어본다.
紙閣에 따뜻하게 지내면서 술잔에 술이 가득紙閣溫存酒滿瓠
卿卿이라 부르며 이로부터 새 친구로 대한다네.卿卿從此定新交
비바람 치는 초라한 울타리에서도 성낸 일 없거든短籬風雨曾無慍
금문에서 연지분 바름에 뉘라서 감히 비웃으랴.脂粉金門孰敢嘲
얇은 비단에 쌓여 어렴풋이 여읜 자태 드러내고紗薄於烟看瘦影
밝은 창에 달빛 비치는 양 가지 옆으로 뻗치었네.窓明似月出橫梢
이제는 빙설의 지조일 랑 모두 잊어버려如今氷雪都相忘
푸른 옷소매 입은 이 문 두드리면 박대하진 않을런지.不後柴扉翠袖敲
감실에 놓인 매화를 읊은 시인데 풍자하는 뜻을 담았다. 卿卿은 아내가 남편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매화를 다정스럽게 부르는 칭호로 쓰였다. 金門(부귀가)에서는 감매를 종이 이불로 따뜻하게 감싸주고 자네라고 호칭하며 친구처럼 대한다. 함연은 매화의 말로 지난날 초라한 집에서 비바람 맞으면서도 화내지 않았거늘 이처럼 호사스런 대접을 받음에 이를 비웃을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말하는 매화는 이미 은일과 지조를 지키는 은자의 표상이랄 수는 없고 세속의 가치를 긍정하는 범부의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 경련은 비단에 쌓여 창의 불빛 속에 비친 매화를 그렸는데, ‘於烟’과 ‘似月’의 교묘한 대구를 통해 집안에서 자라는 감매의 모습을 절묘하게 포착하였다. 미련 전구에서는 작자의 직설적인 목소리로 한겨울 매서운 추위 속에서 절조를 지키는 정신을 잃어버린 감매를 질타하였다. 후구에서 푸른 옷소매(翠袖)는 두보의 「佳人」 시에 “날씨는 춥고 푸른 옷소매 얇은데, 저물녘 대나무 숲에 의지해 있노라.(天寒翠袖薄, 日暮倚脩竹)”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로 불우한 처지에서 자신을 알아줄 사람을 기다리며 참고 견딤을 의미한다. 두보의 시구를 점화해서 감매가 부귀가에서 지내면서 본연의 지조를 잃어버리고, 세속의 가치관에 젖어 한미한 선비를 박대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담은 것이다.
정학연의 이 시에서 감실의 매화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이는 매화시 중에서 매우 예외적인 것이다. 역대의 매화시에서 매화는 은일과 지조의 표상이거나 신선 세계의 선녀처럼 고결한 존재로 그려지며 늘 찬탄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런데 매화가 심미적 완상물로 유행되면서 본연의 정신을 잃고 완물상지의 대상으로 변질되는 경우도 출현했을 것이다. 앞에서 박지원이 매화를 얘기하면서 매실을 말하지 않고 꽃만을 거론하는 풍조를 비판한 것을 보았거니와, 李鈺의 白雲筆에서는 매화를 즐기면서 기이한 분매를 구하는 세태를 풍자하는 기사가 실려 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기에 趙秉鉉(1791∼1849)은 「梅詞」란 제목의 매화시 30수를 남겨 주목되는데, 자주에서 “세모에 밤에 술을 마시면서 매화를 감상하고 눈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희롱삼아 聚星堂의 고사를 모방해서 시 중에 ‘歲夜’ ․ ‘梅雪’ ․ ‘詩酒’ 등의 글자를 쓰는 것을 금했다”라고 하여 자신의 시가 취성당의 고사를 따라 지은 禁體詩의 형식으로 지어진 것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李學逵(1770∼1835)는 堂號를 甁花齋로 할 만큼 화훼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갖춘 인물로 다양한 방식으로 꽃을 노래한 시를 남기기도 했다.
4-3. 여항 문인의 매화시 창작
趙熙龍(1789~1866)은 壺山外記에서 여항의 인물인 金祏孫의 梅畵癖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金祏孫은 자가 伯升이다. 매화를 좋아하는 벽이 있어 매화 수십 그루를 심어 놓고 그 사이에서 휘파람을 불며 시를 읊조렸다. 한 시대의 시에 뛰어난 자들에게 매화시를 구하였는데, 여기에 응해주는 이들이 수천 명이 되었다. 무릇 시로써 이름이 난 사람이 있으면 신분의 높고 낮음과 귀하고 천함을 묻지 않고 그 문에 이르지 않음이 없어, 항상 급하게 서두르는 듯 보였다. 가로로 된 두루마리에 시를 기록한 것이 황소의 허리보다 더 컸으며, 비단으로 꾸미고 옥으로 축을 만들어 집에 간직하니, 사람들은 매화시에 미쳤다고 일컬었다. 그 빼어난 아취와 그윽한 운치는 范石湖가 매화의 족보를 만든 것과 고금에 정이 같지만 일을 좋아하는 것은 그보다 더 지나치다고 하겠다.
여항의 문인들 사이에서 매화에 대한 애호가 유행하면서 매화시 창작 또한 얼마 성행했는지 알려주는 자료이다. 조희룡은 여기에서 김석손의 아취를 지니긴 했지만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은근히 핀잔을 주고 있지만, 그 자신 또한 김석손 못지 않은 梅花癖을 지닌 인물이었다. 石友忘年錄을 보면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방 안에 둘러치고 매화를 읊은 시가 새겨져 있는 벼루와 梅花書屋藏烟이라는 먹을 사용했으며, 梅花詩百詠을 지어 큰 소리로 읊다가 목이 마르면 梅花片茶를 달여 먹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기 거처를 梅花百詠樓라 이름 짓고 자신의 호를 梅叟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조희룡의 매화 그림은 조선 후기 묵매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데, 海外讕墨에는 자신의 紅梅圖에 쓴 다음과 같은 제화시 한 편이 소개되어 있다.
신선이 靈藥을 씻는 곳에仙人洗藥處
丹液이 흐르는 샘물에 드네.丹液入流泉
초목이 모두 멍청히 서있는데草木皆癡鈍
오직 매화가 먼저 氣를 얻네.惟楳得氣先
홍매의 붉은 꽃잎을 신선의 불노장생약인 丹液에 비유하여 겨울철 초목이 잠든 계절에 매화만이 홀로 天氣를 얻었음을 말한 것이다.
崔潤昌(?~?)은 자가 晦之, 호는 東溪로 호조의 計士로 30년을 재직했으며 만년에는宮衛將을 제수받은 여항 시인이다. 그의 다음 시에서는 여항 문인들이 모여 분매를 감상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사처럼 굳센 지조 간직하다가貞操同高士
때에 맞춰 절로 피어났구나.須時故自開
휘장 너머엔 菊老가 누워있고隔紗菊老臥
눈 밟으며 溪翁이 오는구려.踏雪溪翁來
빙그레 웃으며 성긴 발 걷어 올리고一笑褰疎箔
유유히 큰 잔에 가득 술 따르오.悠然酌大盃
고요한 가운데 그림자 나누어 앉았다가靜中分影坐
달빛 아래 나귀 거구로 타고 돌아간다네.乘月倒騎迴
松石園詩社에서 매화를 노래하는 풍경을 그린 시이다. 시회의 모임에 맞춰 매화가 꽃을 피웠다. 일직 와서 누워 있다는 菊老는 菊山 嚴啓興을 가리키는 듯 한데, 溪翁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큰 잔에 가득 술을 마시고서는 시 짓기에 골몰하다가 돌아올 때는 대취해서 나귀를 거구로 타고 온다고 하였다. 송석원시사의 시회 풍경을 잘 보여주는 그림으로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여항 화가 石塘 李維新의 〈可軒觀梅圖〉를 들 수 있다.
朴允黙(1771~1849)은 자는 士執, 호는 存齋로 독서를 좋아하였고 글씨도 잘 써서 정조의 총애를 두터이 받은 인물이다. 오랫동안 규장각 서리로 봉직하면서 많은 서적의 간행에 참여하였으며 平薪僉使에 이르렀으며, 송석원시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핵심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다음 시에서 매화를 부처에 비유하고 있어 이채롭다.
옥 같이 고결한 풍모 참된 부처와 같으니玉骨如眞佛
응당 맑은 인연이 있었음 알겠네.知應有凈緣
문수보살이 선정에 든 듯 하고 文殊疑入定
유마거사가 참선을 행하는 듯도 하네.摩詰可參禪
혼이 돌아옴 어디로부터 인가?魂返從何地
맑은 향기는 자재천 이것이라네.香淸自在天
보배로운 감실은 꽃비 내리는 곳寶龕雨花處
너풀너풀 날리는 꽃잎이 꼭 맞는다네.正合共聯翩
‘眞佛’, ‘淨緣’, ‘文殊’, ‘入定’, ‘摩詰’, ‘參禪’, ‘自在天’, ‘雨花’ 등 대부분의 시어가 불교 용어로 이루어져 있는바, 선시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다. 매화의 청진한 모습은 불교에서 말하는 眞佛, 곧 청정한 本來面目에 견줄 만하고, 선정에 든 문수보살이나 참선을 행하는 유마거사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그리고 매화의 맑은 향기를 대천세계를 주관하며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난 自在天에 견주고, 떨어지는 매화 꽃잎을 부처님이 설법할 때 내렸다는 꽃비에 비유했다. 전편에 걸쳐 수미일관 불교적 심상으로 시상을 전개한 이 시는 박윤묵에게 매화는 불교 신앙과 관련해서도 애호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말 사대가로 불리는 姜瑋․李建昌․金澤榮․黃玹 은 강위 3제 7수, 황현 2수, 이건창 7제 14수, 김택영 10제 21수가 전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근대로의 전환기라는 시대적 성격을 반영해서인지 이들 사대가의 매화시 창작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 시기에 修堂 李南珪는 매화를 제재로 30수에 달하는 연작시를 남기고 있어 주목된다. 다음은 그 중 한 수로 눈 속에 피어난 설중매의 모습을 노래한 시이다.
모습 대하니 수척한 가는 허리가 어여쁜데對景偏憐瘦沈腰
시 읊는 어느 술자리에 너를 부를 수 있으랴.吟樽何處可招邀
바람에 함께 떨어지나 끝내 결백한 자 누구인가?隨風幷墮終誰潔
햇빛 받아 둘 다 고우나 홀로 녹지 않는다네. 照日俱姸獨不消
한 시대에 신교를 맺어 정토 세상 만들었는데幷世神交參淨土
한평생 마음은 함께 구름 위를 달렸네.一生心思共雲霄
우습구려, 홑옷 입은 자신의 추위를 잊고서單衣自笑忘吾凍
바보처럼 온기를 나누겠다고 앉아서 밤을 새우네.痴欲相溫坐竟宵
눈 속에 피어난 매화의 고운 자태는 술자리에 부를 수 있는 여느 미인과는 다른 고결함을 지녔다. 함연은 눈과 매화가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과 함께 눈과 달리 햇빛에 녹지 않는 매화의 모습을 말한 것이다. 경연에서는 눈과 매화로 뒤덮인 은빛 세계를 정토 세상에 비유하고, 세속의 더러움을 초월하려는 이들의 지향을 말하였다. 미연은 설중매를 바라보는 작자의 모습을 말한 것인데, 홑옷 입은 채 밤을 새우며 매화와 함께 하는 것으로 그렸다. 한겨울 눈 내리는 추위 속에서 피어난 매화의 굳센 절조가 밤새도록 매화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다. 여기에서도 매화는 고난 속에서 절조를 잃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바, 암울한 시대 현실 속에서 매화는 무엇보다 지조의 표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