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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한국문학시대》겨울호 / 윤승원 에세이<학해무애學海無涯>
- '사회적 거리두기' 시대, 인터넷 '서원(書院)식 문답'의 즐거움 -
■ 필자주 : 순수 종합문예지《한국문학시대》 2020겨울호에 발표한 글입니다. 본 원고는 사전에 고증과 학술적 접근이 필요한 부분이 있어 역사학자이신 낙암 정구복 교수님께 '최종 감수'를 바라는 초고를 이메일로 보내드렸더니, 자상하게 살펴주시고 따뜻한 조언도 주셨습니다.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에서 이루어졌던 문답식 토론 내용 전체를 가감 없이 수용하기에는 원고 분량이 넘쳐 많이 줄였습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 그림과 사진 자료까지 추가함으로써 문학지 귀한 지면을 10쪽(원고지 40장)이나 차지했습니다. ▲문단에서 '백일장'은 작품선발 제도 중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제도이므로 '장원' 표기에 대한 문인들과 독자들의 관심도 역시 높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시대'에 <인터넷 書院식> 문답 토론 방식 역시 문단에서 관심이 크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정구복 교수님이 운영하는<올사모 카페>의 유익성, 다양성, 학문적 흥미로움도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분량이 긴 글임에도 학술적 가치를 고려하여 귀한 지면에 반영해 주신 계간《한국문학시대》 편집진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아울러 본 원고 작성에 고견을 주시고 귀한 자료를 제공해 주신 전문 분야 학자님들께도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윤승원] |
※ <문답식 토론> 날짜별 상세한 원문은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 카페 <한국사 문답>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에세이
학해무애(學海无涯)
윤승원 수필문학인(1990,한국문학) / 전)대전수필문학회장 / 전)금강일보 논설위원 / 『문학관에서 만난 나의 수필』 외
비대면(非對面) ‘거리두기 시대’에 유익한 소통의 장이 ‘인터넷 글 마당’이다. 저명 역사학자가 운영하는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올사모]’에 특별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모임에는 한국사 관련 학술적인 토론과 지식 나눔뿐만 아니라 ‘창작 글’ 공간도 있어 수필문학을 공부해 온 나는 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시와 수필 형식으로 써왔다.
이 카페에 글을 올리면 좋은 점이 있다. 학계 저명인사의 해박한 견해가 담긴 소감을 댓글로 만날 수 있다. 궁금증이 있으면 ‘한국사 문답’코너에 질문도 한다. 형식적인 인사치레 식 답변이 아니라 깊이 있는 학문적 식견과 전문적인 연구 자료를 토대로 진지하면서도 성의 있는 답을 구할 수 있다.
그 옛날 서원(書院)이나 향교(鄕校), 서당(書堂)에서도 이 같은 형식의 문답이 있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질의응답을 통해 귀한 깨달음을 얻었고, 번뜩이는 지혜와 학설도 나왔다.
최근에 전문 분야 학자에게 질의해 보고 싶은 궁금증 하나가 생겼다. 시대적 화두를 바탕으로 한 거대 담론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품게 된 사소한 의문에 대한 개인적인 질문이었다.
‘올사모’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역사학자 낙암 정구복 박사(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와의 문답은 무려 15일간에 걸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역사학자, 국문학자, 한문학자 등 관계 전문분야 교수들이 적극 동참하여 고견을 주거나 귀한 학술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나의 처음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 ‘장원(壯元)’ 한자 표기에 대한 질의[질의자 윤승원]
최근에 유튜브에서 한학에 능한 어느 학자풍의 선비 한 분이 우리가 현재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장원(壯元)’의 한자를 ‘장원(狀元)’으로 써야 맞고, ‘壯’자를 쓰면 틀린다고 단호하게 주장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미 200년 전에『아언각비(雅言覺非,1819년 : 백성들의 문자와 언어생활을 바로 잡기 위해 지은 국어책.』에서 지적했다고 합니다. 한학자는 덧붙여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라는 말이 있듯이 잘못이 있으면 즉시 고쳐야 함에도 아직도 고치지 않고 있다고 개탄했습니다. 일리(一理)가 있어 보입니다.
▲ 다산 정약용의 ‘아언각비’(일러스트 윤종운)
제가 벼슬 등용문인 ‘장원급제(壯元及第)’는 아니어도 문단에서 권위 있는 문학지의 지상(誌上) 백일장에서 영예스럽게도 ‘장원(壯元)’에 당선돼 과분한 상을 받은 적이 있어, ‘장원(壯元)’이란 두 글자만 보면 예사로 보이지 않습니다. 남모르게 가슴 설레게 했던 글자였기 때문이지요. 문단에서 글을 선발하는 여러 가지 제도가 있지만 ‘백일장’은 무엇보다 ‘공개경쟁’이라는 측면에서 전통적으로 신뢰도가 높은 공정하고 투명한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壯元’을 ‘狀元’으로 써야 한다는 한학자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힘셀 壯’자는 장사(壯士) 씨름대회에서 1등을 뽑을 때나 어울리는 글자이지, 글을 잘 써 1등으로 뽑혔거나 퀴즈 프로그램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1등을 한 사람에게 붙여주는 명칭으로는 ‘문서 狀’자를 써서 ‘狀元’이라고 해야 맞는다는 것이지요.
과거 인기 TV프로그램 ‘장학퀴즈’를 처음 제작한 SK그룹이 중국에 진출해서도 장학퀴즈 프로그램 ‘SK장원방(狀元 榜)’을 방영하여 크게 히트를 쳤다는데, 그곳에서는 프로그램 이름[간판]과 1등 장원을 ‘狀元’이라고 표기했다고 합니다.
한자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의 1등을 ‘狀元’이라고 쓰지, ‘壯元’으로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중국TV 장학퀴즈 - ‘장원방(狀元榜)’
우리나라 과거시험 제도 하에서 임금이 최종적으로 두루마리 형태의 장원 급제자 명단을 펼쳐 볼 때, 돌돌 말린 서류 맨 첫머리에 ‘1등 아무개’가 보이게 되므로, 이를 일컬어 ‘으뜸 원(元)자’를 넣어 ‘장원(壯元)’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어떤 유래로 ‘壯元’이라는 글자[용어]를 쓰게 됐는지, ▲ 왜 과거시험이라는 뜻에 부합하는 ‘문서 장(狀)’자를 쓰지 않고, 무사(武士)나 역사(力士)의 뜻을 가진 ‘힘셀 장(壯)’자로 쓰게 됐는지, ▲ 꼭 그렇게 써야 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역사 기록’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한평생 한국사를 깊이 있게 연구해온 정구복 교수의 답변은 신속했다. 필자가 질문을 한 지 불과 한 나절 만에 1차 답이 올라왔다. ‘1차 답’이란 궁금증을 가진 질문자가 신속한 답을 기다리고 있을 것을 감안하여 세심한 배려 차원에서 속보(續報)처럼 우선 답을 주는 방식을 말한다.
비록 한나절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올라온 답이지만, 전문 학자는 성의 있는 답을 구하기 위해 기본적인 지식 이외도 학계 다양한 경로를 통해 고증 자료를 수집하고, 미흡한 부분은 해당 분야 권위자에게 다시 자문(諮問)도 했을 것이다. 1차 답변에 이어 역사학자의 후속 답변도 계속 이어졌다.
■ ‘장원(壯元)’한자 표기에 대한 답변[정구복,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저도 이제야 장원을 ‘狀元’으로 쓴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몰랐던 사실을 질의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래서 조사해 본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 당나라에서 과거제도가 실시되었는데 중국에서는 과거 급제자 1등을 狀元으로 표시했고, 중국의 한자사전에는 壯元이라는 사용 예는 보이지 않습니다.
▲ 우리나라에서 고려시대의 금석문[묘지명]에 장원이라는 표현은 모두 狀元으로 썼습니다.(10건의 사례가 찾아짐)
▲ 우리나라에서 과거 급제자 1등을 壯元으로 기록한 예는 조선 태조실록부터 고종 실록까지 163건이 검색됩니다.
▲ 한국어한자사전(단국대 동양문화연구소 刊)에는 壯元으로 서술하고 ‘狀元’으로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이 중에 정약용의『아언각비(雅言覺非)』를 인용하여 임금에게 과거 합격자의 명단을 올릴 때 첫머리에 쓴 사람을 ‘狀元’으로 했다는 기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이희승의 국어사전에는 ‘壯元’에 대한 설명이 있을 뿐입니다.
▲ 왜 조선 초기부터 장원을 ‘壯元’으로 썼는지는 앞으로 연구되어야할 것입니다.
▲ 왜 조선 초기부터 고려시대 쓰던 ‘狀元’을 ‘壯元’으로 바꾸어 썼는지는 아직 연구된 바 없습니다.
※ 답변자 견해 :
▲ 저의 현재 소견은 다음과 같습니다. 壯자의 첫 번째 뜻은 ‘장사’라는 뜻 보다는 ‘크다’는 뜻의 ‘최고’라는 의미도 가집니다. 그런데 狀자의 첫 번째 뜻은 ‘형상’이라는 뜻과 ‘문장’, ‘문체’라는 뜻이 있는데, 후자의 경우 ‘장(狀)’이라고 읽습니다. 과거의 시험은 단순히 문장 시험만이 아니라 경전시험과 문장시험 두 가지가 있기 때문에 ‘狀元’을 문장시험을 보는 경우에 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조선 시대 과거제도를 일생동안 연구한 학자에게 문의했더니, 장원(壯元)을 ‘狀元’으로 표현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 조선 초기에 왜 실록에서 장원을 ‘壯元’으로 썼는지는 앞으로 연구해야할 과제입니다. 시험이나 선발에서 1등으로 뽑힌 사람을 ‘壯元’으로 표시한 역사는 조선 500년과 그 이후 100년의 역사를 가집니다.
※ 주위의 많은 사람이 이런 내용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질의에 대한 답변은 충분치가 않아서 국어학자들에게도 자료 조사를 의뢰하였습니다. 저의 1차 답변에 대한 윤 선생의 반응은 즉각적이었고, 본 질의응답 일련의 과정을 수필 형식으로 상세하게 정리해 주었으니, 아름다운 보자기로 감싸져 세상에 알려질 것입니다. 참으로 부지런하십니다. 인간에게 부지런함은 제1의 공덕이고, 더구나 예의가 바르심은 주위 분들로부터 도타운 우정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거기에 윤 선생의 문장력이 곁들여지니 윤 선생과 의견을 나눈 사람은 모두 어사화를 쓰고, 초헌을 태워주는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 필자의 감사의 답글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할 요소가 과제로 남아 있다는 정 박사님의 처음 답변에 그렇잖아도 2차 ‘후속 답변’이 이어지리라 내심 기다려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정 박사님은 제게 부지런하다고 따뜻한 인정으로 격려해 주셨습니다만, 제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본 질의응답을 수필 형식으로 곧바로 정리한 것은 다름 아닙니다. ‘잘못이 있으면 즉시 고쳐야 함[過則勿憚改]’에도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고 개탄하는 학자가 계신데, 수필문학을 공부해온 사람으로서 가치 있고 신선한 글감[素材]을 발견하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수는 없었습니다.
과거 공직에 있을 때 남들보다 빠른 정보보고서 작성을 위해 새벽에 출근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렇게 애써 작성한 보고서가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의 희열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모든 피로가 일시에 풀리지요. 언론사 기자는 특종을 보면 참을 수가 없고, 글을 쓰는 사람은 좋은 글감을 보면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정 박사님 답변 옥고 중에 과분하게도 “어사화를 쓰고, 초헌을 태워주는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초헌’이란 말은 보통 ‘초헌(初獻)’만 알고 써왔기에 ‘초헌(軺軒)’이란 뜻이 생소하여 찾아보았더니, ‘조선 시대, 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던 가마 형 수레’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이렇듯 정 박사님 댓글 한 줄에서도 새로운 지식과 더불어 재미있고 유익한 역사 공부를 하게 되니, 감사한 일입니다.
▲ 조선시대 가마형 수레 - 초헌(軺軒)
학문이란 모름지기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즐거움도 있지만, 정 박사님이 제게 들려주시는 자상한 해석이 담긴 답변이야말로 쉽게 얻기 어려운 값진 선물로 느껴집니다. 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하여 무한 깊이가 느껴지는 고찰(考察), 분석, 방대한 자료조사와 더불어, 고증(考證)이 더 필요로 하는 자료는 또 다른 전문 학자에게 자문하여 답변해 주시는 성의에 감탄합니다. 앞으로 학계에서 좀 더 연구해야 할 과제라면서 정 박사님이 특별히 지적하여 언급해 주신 대목만으로도 질문자로서는 값진 수확입니다.
마치 그 옛날 충남 청양 저의 시골집 사랑채 마루에서 부친과 한학에 조예가 깊으셨던 숙부님이 논어(論語) 한 대목을 놓고 질의응답 형식으로 열띤 토론을 벌이시던 흥미진진한 광경이 문득 떠오릅니다.
※ 원고 분량이 넘쳐 관계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와 고증 자료 등 상세한 후속 답변은 생략한다. 다만 역사학자인 낙암 정구복 박사는 “조선시대 한자는 중국문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자였다. 글자의 읽는 음은 한국과 일본이 각기 자기 식으로 읽고 썼다는 것을 ‘장원’이라는 기록을 통해 지식인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본 원고 작성에 도움을 주신 권중달 교수, 홍윤표 교수, 박병호 교수, 유풍연 교수 등 여러 학자에게 감사드리며, 이 문제는 앞으로 더 깊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좋은 질문을 해주신 윤승원 선생에게 감사드린다. 처음 문제를 제기한 한문학자 김언종 박사에게도 본 문답 내용을 전해주었다니 감사하다. 그 분 덕에 중국과 한국에서의 사용 실례(實例)를 알게 된 점 감사드린다.”는 인사 말씀도 전해 왔음을 밝힌다.
끝으로, 처음 문제 제기한 한문학자 김언종 박사(고려대학교 한문학과 명예교수, 전 한국고전번역학회장)와의 이메일 대화도 흥미롭기에 소개한다.
필자가 먼저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김 박사에게 보냈다.『‘한문을 잘 알려 드림[한잘알]’제목으로 온 국민을 대상으로 유익한 영상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계신 한문학의 대가 김언종 박사님께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윤승원]』
그러자 평소 유머와 농담을 즐기는 김 박사는 겸손하면서도 상대를 즐겁게 하는 재미있는 답을 보내왔다.
『저는 ★볼일 없는 사람이고 어물거리다 맞은 정년 후에 하도 할일이 없고 심심해서 ‘한잘알’이란 괴이한 이름으로 유튜버질을 하고 있습니다. ‘壯元’이라 쓰면 안 된다는 것도 정약용 선생의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본 것일 뿐입니다. 제가 ‘한문학의 대가’가 맞기는 한데 ‘돌’자와 ‘리’자를 대가의 앞과 뒤에 배치해야 정확한 말이 됩니다. 연세도 적지 않으실듯한데 공부를 좋아하시는 것을 보면 不知老之將至라고 했던 분과 많이 닮은 분들이시군요. 活到老, 學到老. 生命不止, 學習不止.[김언종]』
*부지로지장지(不知老之將至): 앞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늙음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부정보다는 긍정의 힘을 가진 단어
*활도로, 학도로(活到老, 學到老): 늙을 때까지 사는 것은 늙을 때까지 배우는 것이다.
*생명부지 학습부지(生命不止, 學習不止): 생명이 그치지 않기까지는 학습을 그칠 수 없다.
■ 언택트 시대, ‘인터넷 서원(書院)식’ 문답 소회
머리가 백발이라고 노인인가? 허리가 꼬부라졌다고 노인인가? 이제 우리 사회에서 ‘노인’이란 말은 슬그머니 사라지는 단어가 되고 있다. 거울을 보면 노인이고, 사진기를 들이대면 피하고 싶은 게 노인의 얼굴이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순간, 정신력만큼은 ‘만년청춘’이고 싶은 게 오늘 날 노인이다.
주말마다 신문에 연재되는 김형석 교수의 ‘100세 일기’를 빼놓지 않고 읽고 있고, 구순(九旬)을 훌쩍 넘긴 김동길 교수의 구수하고 유창한 유튜브 강의를 즐겨 듣고 있으며, 꼿꼿한 팔순(八旬)의 역사학자와 총기 좋은 구순(九旬)의 수필가와도 인터넷 카페에서 댓글 토론하고, 방금 전에는 카톡으로 팔순의 원로 문학평론가와 장문의 문자 대화를 나눴다. 그분들의 공통점은 노인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만년청춘의 학구적 풍모를 지녔다는 점이다.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으니, 이제는 편안한 여생(餘生)을 즐기시라’는 말 보다 더한 불효(不孝)는 없다고 한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 같지만 ‘별 볼 일 없는 노인’ 취급당하는 것이 싫은 것이다. ‘집안에 노인이 없거든 빌려오라’는 서양 속담도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오늘 날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백발의 70, 80노인들이 돋보기 쓰고 깨알 같은 서책을 뒤적이고 독수리 타법으로 힘들게 글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글자 하나에 매달려 기필코 합당한 답을 찾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끝없는 학구적 집념은 어디서 나오는가? 배움에서 낙(樂)을 찾는 일이다. 가치와 보람을 찾는 일이다. 하지만 학해무애(學海无涯)여라!
*학해무애(學海无涯, 배움의 바다[세계]는 끝이 없음) : 書山有路 勤爲徑 學海無涯 苦作舟(서산유로근위경 학해무애 고작주) 책으로 된 산[많은 책]을 오르는 데는 부지런함이 지름길이오, 끝없는 배움의 바다에서는 고난의 배[끝없는 노력]를 저어야 한다. ― 당대(唐代) 문필가 한유(韓愈 768~824)
※ 본 원고의 기초가 되는 <문답식 토론> 날짜별 상세한 원문은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 카페 <한국사 문답>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올사모]’ / 독후감 댓글 ■ 낙암 정구복 2020.12.09. 03:41 장천 윤승원 선생의 덕분에 '올사모'와 제가 문학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불교 용어를 빌리면 천상에 한번 태어났다가 인간세계로 태어난다는 ‘아라한(阿羅漢)’과에서 세 번 천상에 태어난다는 ‘사다함(斯多含)’과가 있는데, 마치 제가 장천 윤선생 덕분에 ‘사다함(斯多含)’과에 오른 기분입니다. 이는 지나친 표현이라 생각하오니, 그냥 저의 뜻만 취해주셨으면 합니다. ‘장원’이라는 용어가 조선 초 태조실록부터가 아니라 고려 말에 사용된 예를 찾았습니다. 즉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에 나오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승휴는 장천 윤 선생처럼 충주에서 시험을 보는 데서 17세의 나이에 장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22세 때에 국자감시(國子監試 : 조선조의 소과시험과 같음)에서 장원을 했습니다. 동안거사집은 1359년(공민왕9)에 간행되었기에 고려시대 장원을 ‘壯元’으로 기록한 첫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전하는 동안거사집이 그 당시의 초판본이 아니므로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장원이라는 칭호가 조선조에 역과 의과 시험의 1등 합격자에도 사용되었다는 내용이 보완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문서학회에서 원고 수집을 하므로 고문서 용어풀이 란에 장원이라는 용어 표현에 대한 글을 써서 고문서를 하는 학자들에게도 알리고 싶은 생각입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새벽 3시입니다. 편안한 밤 되소서. {답} 윤승원 12.09. 05:26 정 박사님의 과분한 격려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올사모 카페’ 공간에서 얻어진 지식을 바탕으로 쓰여 진 글이라 활자로 인쇄된 지면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당초 원고 분량을 많이 줄이는 과정에서 아쉬움도 있었으나 ‘문답식 토론’ 과정을 생생하게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필자의 의도는 어느 정도 반영된 것으로 봅니다. 다만 보완이 필요한 부분을 추가로 어떻게 소개해야할 지에 대해선 고민해 보겠습니다. 전국 독자를 가진 본 문학지를 통해 ‘백일장 장원’ 표기의 역사적 근거가 새롭게 알려지면 문단과 학계에서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老年’과 ‘學海’의 의미도 ‘백세시대’에 흥미로운 문학적 소재로 확산되기를 기대합니다. 정 박사님 귀한 댓글 참으로 감사합니다. |
첫댓글 한 해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면서 돌아다보면 감사해야 할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귀한 지면에 글을 쓰도록 원고 청탁해 주신 문학지 관계자도 고맙고,
보잘 것 없는 필자의 글을 읽으시고 귀한 서평과 감상문을 보내주신 분들도 고맙습니다.
글이 발표될 때마다 편지와 댓글로 따뜻한 성원 보내주신 수많은 독자 여러분들도 고맙고,
친필 서예작품을 정성껏 보내주신 문인들도 한 해 제게 감동을 주신 분들입니다.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 지 몰라 이런 공간을 통하여 큰 절을 올립니다.
특히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 에서 제가 받은 과분한 사랑과 귀한 가르침은
저 개인적인 공부를 떠나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은 사회적인 가치도 많아
문학지 지면에도 소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귀한 가르침을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장천 윤선생의 덕분에 올사모와 제가 문학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는 불교 용어를 빌리면 천상에 한번 태어났다가 인간세계로 태어난다는
아라한과에서 세번 천상에 태어난다는 사다함과가 있는데 마치 제가 장천선생 덕분에 사다함과에 오른 기분입니다. 이는 지나친 표현이라 생각하오니 그냥 저의 뜻만 취해주셨으면 합니다.
장원이라는 용어가 조선 초 태조실록부터가 아니라 고려말에 사용된 예를 찾았습니다. 즉 이승휴(1224~1300)의 동안거사집에 나오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승휴는 장천선생처럼 충주에서
시험을 보는 데서 17세의 나이에 장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22세 때에 국자감시(조선조의 소과시험과 같음)에서 장원을 했습니다. 동안거사집은 1359년(공민왕9)에 간행되었기에
고려시대 장원을 壯元으로 기록한 첫 사례라고 할수 있습니다. 현전하는 동안거사집이 그 당시의 초판본이 아니므로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장원이라는 칭호가 조선조에 역과 의과 시험의 1등합격자에도 사용되었다는 내용이 보완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계속)
고문서학회에서 원고 수집을 하므로 고문서 용어풀이란에 장원이라는 용어 표현에 대한 글을 써서 고문서를 하는 학자들에게도 알리고 싶은 생각입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새벽 3시입니다. 편안한 밤 되소서.
정 박사님의 과분한 격려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올사모 카페> 공간에서 얻어진 지식을 바탕으로 쓰여진 글이라 활자로 인쇄된 지면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당초 원고 분량을 많이 줄이는 과정에서 아쉬움도 있었으나 <문답식 토론> 과정을 생생하게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필자의 의도는 어느 정도 반영된 것으로 봅니다.
다만 보완이 필요한 부분을 추가로 어떻게 소개해야할 지에 대해선 고민해 보겠습니다.
전국 독자를 가진 본 문학지를 통해 <백일장 장원> 표기의 역사적 근거가 새롭게 알려지면 문단과 학계에서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老年>과 <學海>의 의미도 '백세시대'에 흥미로운 문학적 소재로 확산되기를 기대합니다. 정 박사님 귀한 댓글 참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