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강화나들이
자유기고가 김원중
그토록 지긋지긋한 무더위가 지나 갔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태풍과 폭우가 번갈아 덮쳐서 많은 피해를 가져 왔지만 계절의 변화에는 어쩔 수 없는지 이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부는 초가을이 되었음을 느끼게 한다.
압구정역을 출발한 아이넷 관광버스는 시끌벅적한 서울 시내를 빠져나와 한강변을 따라 자유로 위를 시원스럽게 달렸다. 한강에서 임진강 쪽으로 오랜 세월동안 둘러 처졌던 철조망이 걷혀져서 가슴이 확 뚤리는 것 같았다.
강화대교를 건너서 처음 도착한 곳은 고려왕궁이 있었다는 龍興宮공원이었다. 거기에서 강화군청의 문화해설사가 우리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해설사의 안내로 강화 유수부 東軒인 明威軒(조선시대 관청)앞에 서서 강화도에 관한 역사와 문화를 전반적으로 듣게 되었다.
고려왕궁(사적133호)은 고려고종 19년(1232년)6월 몽고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 당시의 武臣 최우의 주장에 따라 도읍을 송도(開城)에서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로 옮겼다.
이때 옮겨온 곳이 고려왕궁터로서 원종11년(1270년)5월 개성으로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사용 사용하였다.
또한 경내에 있는 外奎章閣을 둘러보았다. 外奎章閣은 1782년 2월 조선왕조의 正祖가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도서관역할을 하였다. 규장각 설치 이후 왕실이나 국가주요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儀軌(의궤)를 비롯하여 모두1000권이 넘는 서적을 보관하였으나 고종3년(1866)병인양요 때 프랑스군대가 강화도를 침공하여 298권의 서적을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에 타 없어졌다.그 후 100년이 넘도록 의궤의 행방을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파리국립도서관에 근무하셨던 故박병선박사님이 이 의궤를 찾아내어 계속 해서 반환을 요구해 왔으나 프랑스정부측에서는 협상을 지연시키는 등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다가 2011년 11월 20일 서울에서 열린G20정상회의 때 韓佛兩國 대통령간의 합의로 2011년6월11일 마침내 145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내려오는 길에 강화문화관 2층으로 올라가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출신의 수필가 趙敬姬先生의 수필문학의 진수와 흐름도 엿보았다.또한 문화관 1층에는 조선시대 李奎報 선생의 漢詩
花笑聲未聽 (화소성미청) 꽃은 피어도 소리는 들리지 않고
鳥啼淚難看 (조제루난간) 새는 울어도 눈물을 보기 어럽네그야말로 자연 그대로의 시상이 아닐까?...,이어서 1900년에 조선전통한옥으로 지어진 영국성공회 성당을 찾았는데 때마침 미사를 거행하고 있어서 건물외부만을 한 바퀴 돌아보았는데 건물기둥에 한문으로 길게 내려써 있는 글귀가 우리나라 사찰과 흡사해서 특이한 느낌을 받았다. 성공회 성당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江華도령(조선왕조25대 철종)이 소년시절 살았다는 오두막집을 찾았다.
이곳에서 세상물정 모른 체 뛰어놀던 시골소년이 어느 날 갑자기 임금님이 되었다는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니 흥미로웠다.이곳저곳 돌러 보는 동안 어느덧 배꼽시계가 창후리에 있는 西海 홧집으로 향하게 해 주었다.西海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횟집2층에는 요즘 제맛을 자랑하는 전어. 그리고 광어, 우럭. 새우가 젓가락을 집도록 유혹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바다건너 교동도는 그 옛날 천하를 호령하고 부귀여화를 누렸던 연산군, 광해군이 유배 생활끝에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고 하니 人生無常이라고나 할까!...,다시 버스에 올라타고 화도면 장화리 낙조마을 바닷가에 있는 서울대 김문환 명예교수님 (철학박사,신학박사)의 전원주택으로 향했다. 서해의 저녁노을이 특히 아름답다는 정원에 앉아 한강포럼 이용규회원의 “朝鮮의 陽明學과 江華學派” 에 관한 특강을 경청했다.
이제껏 王守仁의 陽明學과 朱熹의 朱子學에 관해서는 유학의 兩大學派 정도로밖에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기회에 그 개요나마 접할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사람이라면 누구나 노후에는 경치 좋고 조용한곳에서 남어지 인생을 한가롭게 보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데 老敎授님 부부의 悠悠自適하시는 모습이 한없이 부럽고 존경스러웠다.특히 교수님 내외분의 정성어린 환대에 감사드리면서 다시 버스에 올라 귀경길에 들어셨다.
지나는 곳곳에 들어서 있는 멋진 팬션들, 강화도의 명동이라고 한다는 동막골 일대는 이곳이 유럽인가? 아니면 홍콩의 환락가가 아닌가? 할 정도의 착각까지 일으키게 했다.마지막으로 江華學派의 거두 정재두. 이건창선생의 墓所 및 生家參拜를 마치고 이미 황혼이 짙어 전등사관광은 다음기회로 넘기고 보람 있는 하루 여행길을 끝내기로 했다.
옛匠人의 魂이 깃든 고려청자
자유기고가 김원중
古稀를 넘어 아침잠을 설친 끝에 조선일보의 문화면을 펼쳐보니 “天下第一의 翡色靑瓷展” 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는 기사가 눈에 번쩍 뜨였다.때마침 광주에서 올라온 친구 (정순보장로)를 용산역 앞에서 만나 점심을 함께 한 후 전시회장으로 향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겐 가을하늘은 天高馬肥之秋라는 속담 그대로였다.마치 몇 년 전에 이천, 광주, 여주세계도자기축제의 행사장을 찾아갔던 추억이 되살아났다.
입장권 매표소에서 경로우대표를 달라고 했더니 그냥 들어가시라고 공짜표를 받아 들고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약간 어두운 듯한 전시실 안에 들어가서 화살표시를 따라 천천히 좌우를 살피면서 감상하기 시작했다. 고려청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국보18점, 보물11점, 일본의 중요문화재2점을 비롯하여 350여점의 최상급청자를 볼 수 있는 뜻깊은 전시회이다. 특히 도꼬국립박물관등 일본의 5개 박물관에서도 청자20점을 빌려와서 전시하고 있다. 거북이나 석류모양의 硯滴(연적),연꽃넝쿨무늬 붓꽂이, 벼루 같은 문방구, 원숭이 모양을 하고 있는 향꽂이와 인장 같은 일상용품부터 청자기와, 지붕양식으로 추정되는 연꽃봉우리 모양청자, 벽에 장식용타일처럼 걸었을 것으로 보이는 모란무늬 청자판 같은 쓰임새를 만나볼 수 있었다.청자로 표현한 여러가지 모양의 인물, 동물상들이 볼거리이고 엄마의 볼을 아이가 쓰다듬는 원숭이 모양의 연적(국보270호:간송미술관소장)이나 새한마리를 풍속에 안은 천진난만한 아이의 얼굴을 담은 남자아이 모양의 연적(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소장)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특히 귀여운 토끼 세 마리가 떠받치고 있는 칠보무늬향로(국보95호)는 澗松(간송)전형필선생이 1935년 당시 기와집20채 값을 주고 구입했다는 구름학무늬 매화병(국보68)은 천하일품이라 하겠다. 강경남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는 “비색을 만드는 데에는 청자를 만드는 흙인 胎土(태토)와 유약. 가마에서 불꽃을 조절하는 기술이 연관되어 있다.”고 말한다. 유약은 일종의 천연잿물, 나무를 태우고 남은재에 냇가의 차돌을 태운 뒤 곱게 빻은 가루를 섞는다.
유약과 흙의 철분 함유량이 각각2~3%이라야 비색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이 유약을 표면에 두껍게 바른 뒤, 섭씨1200도의 가마에서 구우면 반투명의 녹청색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가마 속의 위치에 따라 같은 성분의 유약을 발라도 색깔이 달라진다.고려시대 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에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의 두 곳에서만 왕실의 지원아래 천하제일의 翡色(비색)청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신비스러울 비색을 재현하기 위하여 수많은 도공과 연구자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지만 아직 까가지도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고려시대의 청자에 관한 문헌이나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고려시대의 詩人(시인)으로서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쳐 던 李奎報(이규보)(1168-1241)의 文集(東國李相國集)에는 고려청자를 예찬하는 詩句가 수록되어 있다.여기에 소개하면
낙목동남산(落木童南山) 나무를 베어 남녘산이 벗겨지고
방화연폐일(放火烟蔽日) 불을 지펴 연기가 해를 가리웠지
도출녹자배(陶出綠瓷杯) 푸른색 자기 술잔을 구워내
간선십취일(揀選十取一) 열에서 골라 하나를 얻었네
영연벽옥광(瑩然碧玉光) 선명하게 푸른 옥 빛나니
기피청매몰(幾被靑煤沒) 몇 번이나 짙은 연기 속에 묻혔었나
영롱초수정(玲瓏肖水精) 영롱하기 맑은 물을 닮고
견경적산골(堅硬敵山骨) 단단하기 바위와 맞먹네
내지연전공(迺知埏塡功) 이제 알겠네 술잔 만든 솜씨를
사차천공술(似借天工術) 하늘의 조화를 빌었나 보네
미미점화문(微微點花紋) 가는 게 꽃무늬를 점 찍었는데
묘핍단청필(妙逼丹靑筆) 묘하게 정성스런 그림 같네그윽하고 우아한 漢詩 接하고보니 어쩐지 뭔가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