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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직한 회장님이 쓴 묵직한 역사책
['未明 36년 12768일' 등 역사서 3질 쓴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
이중근(74) 부영그룹 회장을 만나 “건강은 어떠십니까”라고 인사했을 때 그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삽니다”라고 답했다.
인터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침이 말랐다.
사실 부영그룹 사옥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런 감(感)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층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유리문이 아니라 철문으로 닫혀 있었다. 사무실 배치는 1990년대식에 머물러 있었다. 창 쪽에 간부들의 사무실이 일렬로 자리했고 그 앞에는 팀장석이 있었다. 모든 여직원은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으며 남직원들을 검은색 점퍼를 입었다. 한마디로 ‘올드’했다.
▲ 부영그룹 남직원들은 ‘근무복’이라는 점퍼를 입고 일하고 여직원들도 유니폼을 입는다.
이중근 회장 역시 출근하면 양복 윗도리를 벗고 근무복으로 갈아입는다.
일터를 놀이터처럼 꾸미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추구하는 기업들의 트렌드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지만,
그것이 부영의 힘이자 이 회장의 뚝심이기도 하다. /이태경 기자
이 회장은 최근 몇 년 새 3질의 역사서를 출판해 무상 배포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역사를 기록한 ‘미명(未明) 36년 12768일’, 1945년 광복부터 6·25전쟁 직전까지를 다룬 ‘광복 1775일’, 1950년 6월 25일부터 휴전협정까지를 기록한 ‘6·25전쟁 1129일’이 그것이다. 그 분량이 어마어마해서 5권으로 나뉜 ‘미명 36년’의 경우 총 2713쪽이나 된다. ‘광복’은 2544쪽, ‘6·25전쟁’은 1051쪽이다. 지질(紙質)도 매우 고급이어서 ‘미명 36년’ 세트는 여성 혼자 들기 어려울 만큼 무겁다. 그는 “어떤 역사를 며칠간이나 겪었는지 되짚어보자는 의미로 ‘0일’이라는 부제를 붙였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10년 전쯤 이 책들을 내기로 결심하고 ‘우정문고’라는 출판법인도 세웠다. ‘6·25전쟁’은 400여쪽짜리 요약본으로 재편집해 전국 학교와 군, 정부기관, 사회단체 등에 무상 배포해왔는데 그 수가 920만부를 넘어섰다. 한국 출판 사상 유례 없는 일이다.
-좋은 뜻으로 시작했지만 무척 힘이 드셨겠군요.
“힘이 든 게 아니라 돈이 들었습니다.”
-돈은 많으신 것 같은데요.
“많으니까 했지요. 허허허.”
“잘 모르겠습니다” 또는 “그냥 했습니다” 같은 대답을 들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몇 년 몇 월 며칠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식의 편년체로 기술한 이유가 있습니까.
“편년체만은 아닙니다. 실록처럼 쓴 부분도 있고 당시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같은 것도 곁들였기 때문에 ‘우정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우정(宇庭)은 그의 아호다.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은 일절 배제하고 오로지 사실만 기록한 것이 특이합니다.
“역사는 모순(矛盾)과 함께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석이 각각일 수 있어도 사실은 바뀔 수 없어요.
그랬더니 역사 교과서 논란 중에도 저한테는 시비 거는 사람이 없습니다.”
-역사가 모순과 함께 발전한다니요.
“어떤 방패도 뚫는 창(矛)과 어떤 창도 막는 방패(盾)를 한 사람이 팔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역사란 그런 것이거든요. 창과 방패를 각각 다른 사람이 팔았더라면 서로 자기가 옳다고 하지 않았겠어요? 아무리 완전해 보이는 것도 문제가 생기고 모순에 의해 변증법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역사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역사 교과서 논란도 창과 방패를 각각 파는 사람들끼리 벌이고 있습니까.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완전한 창이나 방패가 없다는 걸 알면서 그저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이 회장은 조선 정조 이후 1910년 한일합방까지의 역사와 1953년 7월 휴전협정 이후 2013년까지 60년사를 각각 준비하고 있다.
“기업인이나 정치인, 목사 같은 직업은 다 일종의 자기도취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직업입니다. 저도 자기도취가 된 모양인데, 이를테면 6·25전쟁을 북침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고 저 책을 읽는 사람이 있는 한 무상으로 보급하겠다고 한 거죠.”
-오랫동안 역사 공부를 하면서 깨달은 게 있습니까.
“역사라는 게 어떤 일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과거의 일이 현재로 이어지더군요. 우리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고 청나라가 새로 일어나는데 광해군이 친명파에 의해 쫓겨났지요. 그렇게 친명파가 득세해서 자기들끼리 다 해먹더니 병자호란을 불러들인 거죠. 그런 것을 가르치고, 아니 저는 가르칠 생각은 없고 이해시켜 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이 딱 광해 시대입니다. 이런 때 지도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나라의 운명이 달라지는 겁니다.”
-미국과 중국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을 말씀하십니까.
“미국과 중국도 있고 온 나라들과 FTA도 해야 하고 일본도 있고 북한도 있고 광해 때보다 훨씬 더 복잡한 광해 시대지요. 병자호란 때 임금이 꿇어앉아 이마를 세 번 땅바닥에 찧고 여자들은 다 잡혀갔다가 환향녀(還鄕女)가 되고 그렇게 완전히 항복한 것은 우리 역사상 그때뿐이었어요. 파벌 싸움으로 득세한 자들이 다 해먹고 결국 나라를 망하게 했죠. 정치가는 국가와 민족에 대한 소명의식이 있어야 해요. 자기 파가 득세하는 것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지금이 광해 시대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 회장은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하는 것으로 이름났다. 설과 추석 당일에도 사무실에 들른다. 고향(전남 순천)에 성묘하러 갔다가도 근처에 있는 부영 아파트 건설 현장에 들러 점검한다. 재작년 추석에 심한 기침으로 이틀간 입원하느라 출근 못 한 것이 손으로 꼽힐 정도다.
“출근한다기보다 그저 습관이에요.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의 구분이 없을 뿐이지요.
30대 초반에 ‘우진건설’ 시작할 때부터 몸에 익은 거니까 한 45년 그렇게 했죠.”
-부하 직원들이 싫어할 것 같습니다.
“워낙 그런 줄 알아서 싫어하지 않아요. 직원들이야 주 5일제 근무를 하죠.
다만 비서실 직원들과 운전기사는 주말에 2교대를 하면서 쉬어요.”
그의 역사책 저술을 돕고 있는 김명호 성공회대 교수는 “이 회장은 휴일에도 출근하는 것에 대해 ‘밥 먹을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누군가 밥하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 아닌가’라고 말하곤 한다”고 전했다.
이 회장은 1989년 순천 부영초등학교 교사(校舍)를 지어 기증한 것을 시작으로 학교 설립과 학교 건물 신축을 통한 사회공헌을 26년째 계속 해오고 있다. 도서관과 강당, 체육관, 아동복지시설, 노인 관련시설, 마을회관 등 그간 신축해서 기증한 건물이 169채나 되는데, 그중 가장 많은 것은 74곳에 이르는 학교 기숙사다.
-기숙사를 특히 많이 지어주는 이유가 있습니까.
“순천에서 중학교 다닐 때 한 20~30리를 매일 걸어서 다녔어요. 요즘 다섯 시만 되면 어두워지잖아요. 학교 수업 다섯 시에 끝나 두세 시간 걸어서 집에 오면 한밤중에 집에 도착하곤 했지요. 그래서 지방 도시 고등학교에 기숙사를 많이 지어주자 했던 겁니다.”
-첫 사회공헌사업으로 학교 짓는 일을 택한 이유도 따로 있습니까.
“학교를 잘 못 다녀봐서 학교 해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는 대학(건국대 정외과)을 1학기만 다니고 군에 입대했다. 군 제대 후 서울 청계천에서 집 수리해주는 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30대 초반에 ‘우진건설’이란 회사를 설립했으나 7년여 만에 부도를 내고 회사가 망하는 시련을 겪었다. 이후 1983년 부영그룹으로 다시 출발, 2015년 현재 계열사 15개 자산 규모 16조8000억원의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부영은 민간기업 기준 재계 16위에 올라 있다. 그는 30대 대기업 회장 중 창업주로 아직도 직접 경영하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회장은 부영이 본궤도에 올라서자 1991년 늦깎이 공부를 시작해 행정학 독학사 자격을 취득했고, 2000년대 들어 고려대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와 박사를 땄다.
-건설회사 대표가 왜 행정학을 공부했습니까.
“행정학을 공부한 게 아니라 행정공무원들에 어떻게 적응해서 살아남을 것인가를 배웠습니다. 우진건설 때 국민주택기금을 건설부에 신청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허가가 안 나요. 그래서 ‘진달래 필 때 신청한 허가가 국화가 피어도 소식이 없습니다’ 하고 탄원을 냈더니 그 다음 날 건설부로 들어오래요. 그래서 갔더니 깔깔대고 웃으며 허가를 해주더군요. 그때 행정의 생태를 알아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경영 철학으로 ‘세발자전거론’을 말씀한다던데요.
“제가 부도내 본 사람입니다. 대한민국에 부도내 보고 다시 기업을 하는 사람 몇 없습니다. 우진은 공개기업이었습니다.
부영은 아니지만요. 공개기업을 부도내 보니까 회장이고 경비원이고 없더군요. 사실 우진 때 일취월장(日就月將)했어요.
금방 상장하고 또 해외 진출도 하고. 그런데 사업이 갑자기 안 되고 부도가 나서 월급을 못 주니까 경비원이 ‘회장 너 왜 월급 안 줘?’ 해도 할 말이 없어요. 우리 회사 주식 샀던 사람 다 망하게 해서 여러 사람 괴롭히고. 그러니까 기업은 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발자전거처럼 잘 못 가더라도 절대 넘어지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부영을 상장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런 데에 있지요.”
부영이 짓는 아파트의 90%가량은 임대아파트다. 전세든 월세든 일단 임대로 들어가 5년을 살면 비로소 분양받을 수 있다. 부영은 또 도급공사를 절대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회장이 부영을 ‘건설회사’라고 하지 않고 ‘부동산과 건설, 금융업’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주(地主)이자 시행사이면서 시공사이기 때문이다. 또 임대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금융업의 역할도 하게 된다.
-우진건설의 부도에서 많은 것을 배웠군요.
“젊을 때 배운 것을 늙어서 써먹는 것이지요. 오늘 월급 줘야 하는 사람에게 ‘지난달에 많이 줬잖느냐’고 말해 봐야 소용없어요. 그건 ‘점심 많이 먹었으니까 저녁은 먹지 마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죠.”
-부영은 ‘富榮’입니까.
“한학 하시는 분이 지어준 이름입니다. 한 20년간 써보고 맘에 안 들면 바꾸라고 했는데 벌써 30년 넘게 썼네요.”
-우진건설의 한자는 무엇인가요.
“우주 우(宇)에 나아갈 진(進)이었죠. 창공으로 비상해보겠다는 뜻이었는데, 회사가 우주로 나가버렸어요. 허허허.”
그의 아호 우정(宇庭)도 ‘우주의 정원’이란 뜻이다.
-그래서 ‘1등보다는 최선을 다한다’고 말씀하는 겁니까.
“우리 회사에서는 최고, 최대, 최상 이런 말을 전혀 안 합니다. 최고 최상 같은 게 있을 수 있어요? 그건 순간적으로 맛보고 마는 거지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거죠. 1등 하기가 얼마나 힘들고 또 1등 유지하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지금 삼성도 얼마나 힘들어요? 그래서 우리 회사에 최고 최대 최상, 하여튼 ‘최(最)’자는 없습니다.”
-누군가 ‘최고의 아파트를 짓겠다’고 보고하면 뭐라고 합니까.
“그건 불가능하니까 남 보기에 손색없고 그럴듯한 아파트를 짓자고 합니다. 나쁘다는 소리는 듣지 말자는 거죠.”
-대부분의 기업이 물건 팔 때 ‘최고의 제품’이라고 광고하잖습니까.
“그게 바로 아까 말한 ‘모순’과 똑같은 거예요. 그런 게 없다는 걸 알면서 말로 그러는 거죠.”
부영아파트의 브랜드는 ‘사랑으로’다. 아파트 벽면에 크게 원앙 한 쌍 그림과 함께 ‘사랑으로’라고 쓰여 있다. 영어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온갖 단어조합으로 세련되다 못해 해괴한 이름을 짓는 요즘 아파트들에 비하면 촌스럽기에 앞서 이상한 뚝심이 느껴진다.
“내가 직접 지은 거죠. 사랑해, 사랑, 사랑으로 여러 가지 생각하다가 ‘사랑으로’가 그다음을 유추할 수도 있고 가장 자연스러운 표현이라고 생각했어요.”
-세련돼 보이지는 않는데요.
“지금도 ‘사랑으로’ 빼자는 소리가 있고 또 세련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에요. 그래도 시골에 계신 어머니같이 느껴져요. 멋쟁이 어머니는 아니죠. 푸근하고 좋아요.”
-부영아파트는 여전히 일자로 나란히 늘어선 판상형(板狀型)으로 짓더군요.
“언론에서 그걸 두고 뭐 성냥갑이라 하고 비하하고 하는데, 성냥갑처럼 똑바로 생긴 건 사실이지요. 똑바로 생겨야 환기가 되고 좋습니다. 디자인 촌스럽다, 사랑으로 촌스럽다 하는데 판상형으로 만들어 앞뒤로 창을 내야 환기가 잘 됩니다. 국민 건강을 위해서도 반드시 판상형으로 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양주에 짓고 있는 것은 타워형처럼 생겼던데요.
“그건 판상형 두 개를 ‘ㅅ’자 모양으로 붙여놓았지요. 하하하”
-뜻을 굽히지는 않았군요.
“굽히지는 않고 약간 꼬부렸죠. 하하하. 아파트 모양 때문에 애 많이 먹었어요. 단지의 3분의 1을 타워형으로 해라, 도시 미관을 해친다면서 건축허가를 안 해주려고 하고 말이죠.”
이 회장은 2004년부터 동남아 14개국과 아프리카 4개국에 초등학교 600여곳을 지어주고 칠판 60만여개와 디지털피아노 6만여대를 기증해오고 있다. 특히 디지털피아노에는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로 시작하는 졸업식 노래가 해당 국가 언어로 녹음돼 있어, 졸업식 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연주되게끔 세팅돼 있다. 이 가운데 부영이 진출한 나라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뿐이다.
▲ 이중근 회장은 동남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에 학교를 지어주고 디지털 피아노와 칠판을 기증해왔다.
태권도와 온돌 문화 확산에도 오래전부터 힘을 기울이고 있다.
-동남아와 아프리카 진출도 염두에 둔 기부 활동입니까.
“물론입니다. 그렇지만 꼭 우리 회사가 아니라 어느 회사라도 그 나라에서 잘되길 바랍니다. 낚시할 때 밑밥 줬다고 고기가 내 바늘만 물길 기다릴 수는 없죠. 사실 그건 기부 활동이면서 동시에 사업 비용이기도 한데, 국세청에서는 해외 기부는 세금 공제가 안 된다네요. 하하.”
-피아노를 기증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졸업식 노래는 문화를 전파하는 것이어서 언젠가는 효과를 볼 겁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문화침탈’이라고 생각해서 처음엔 꺼리기도 했어요. 그래서 최고지도자에게 노래 내용을 보여주고 허락을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라오스 수상은 그 노래 3절에 ‘냇물이 바다에서 다시 만나듯’을 보고 ‘우리는 바다가 없으니까 고쳐달라’ 해서 ‘작은 물이 큰물에서 다시 만나듯’으로 바꿔줬습니다.”
그는 이 밖에도 동남아에 태권도를 보급하거나 우리나라로 유학 온 외국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해왔다.
또 미국에 온돌문화를 전파하려고 서울대와 조지워싱턴대의 온돌 연구기금 100만달러를 내놓기도 했다.
-술도 안 마시고 골프도 안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골프는 아직 못 배웠어요. 이제 배워야죠. 술은 몸에서 안 받아서 마시지 않았고요.”
-골프 배우라는 사람이 주변에 많았을 텐데요.
“돈 벌자고 한 사람이 더 많았어요. 그 말이 더 솔깃하더라고요. 하하하.”
이 회장은 부인 나길순(74) 여사와 매일 아침 서울 한남동 자택을 나와 남산 산책을 한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계속 소곤소곤하면서 산책하더라’고 말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시나요.
“항상 야단 맞는 거지 이 나이에 뭘 소곤소곤하겠어요. 집사람이 뭐라고 잔소리하면 나는 그냥 듣고만 있는 거지. 듣고만 있어야 또 평화롭기도 하고요.”
이 회장은 인터뷰를 마치기 전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며 처음으로 역사관을 피력했다.
“6·25전쟁 직후에 북한이 남으로 밀고 내려오면서 점령 지역의 농지를 몰수해 논 없는 사람들에게 나눠줬어요. 남한에서 기껏 농지개혁 해서 주인 정해준 땅을 말이죠. 그랬더니 평생 자기 논 처음 갖게 돼서 그해 6월 처음 모내기한 사람들의 저항이 아주 컸어요. 그런데 인민군들이 그런 남한 사람들을 징집해서 전쟁에 투입했으니, 그 사람들이 전투를 열심히 했겠습니까. 땅만 빼앗지 않았어도 ‘북한도 살 만하겠구나’ 했을 텐데 말이에요. 그런 것 때문에 6·25전쟁에서 영향이 있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아무도 이런 얘기를 하지 않기에 꼭 하고 싶었어요.”
인사하고 헤어지는 길에 그는 과자 상자 하나를 선물로 건넸다.
나중에 열어보니 ‘센베이’라고 부르는, 아버지가 퇴근길에 사오시던 바로 그 과자였다.
(2015년 12월 12일 조선일보) / 글=한현우 기자 / 편집=최원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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