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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 만해대상 수상자 ] | ||||
이현채 글꾼(iris6589@hanmail.net) | ||||
2010년 7월 3일 토요일, 안성시 미양면 보체리 정진규 시인 자택
장석원(녹취:이현채)
만해대상과 일상 장석원 : 먼저 만해대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정진규 : 예, 감사합니다. 장석원 : 선생님의 시력에 걸 맞는 아주 큰 상이라 생각합니다. 먼저 수상 소감 부탁드릴께요. 정진규 : 글쎄, 상이라는 게 즐거운 게 아닙니까, 그간에 상복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는데, 타고 싶은 상을 타서 글쎄 주변에 자랑스럽기도 하고, 제자신도 즐겁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만해는 우리 시문학사에서 거봉이시니까, 그 어른의 이름으로 상을 탄다는 게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좀 전에는 이상(李箱)의 이름으로 상을 탔어요. 만해라는 이름으로 상을 타니까 이게 무슨 축복인가 싶습니다. 장석원 : 이상하고 만해면 상당한 거리가 있는데, 양쪽을 아우르는 큰 상을 타셔서 굉장히 행복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정진규 : 본래 여기 내려오기 전까지는 건강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늘 예민하게 관리를 해야 되는 그런 입장이었고, 지금도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야 하지만은 많이 좋아졌어요. 숲속이니까 공기도 좋고, 특히 이 소나무에서 나오는 무슨 기운이 있데요. 이 집 주변이 전부 소나무거든. 아침에 일어나서 마당에 서면 그 솔바람이 느껴져요. 시원하기도 하고. 해서 아주 건강이 좋아졌고, 건강이 좋아지니까 눈도 환해지고 머리도 환해지고 그러면 시안(詩眼)도 환해지고 시심(詩心)도 환해지고, 그러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장석원 : 낯색이 예전보다 좋아지셨어요. 피톤치드 덕분인가 봅니다.
정진규 : 좀 좋아진 편이에요. 장석원 : 오래전에 다치셨던 곳은 괜찮으시죠? 정진규 : 다친 게 다리거든. 이 다리에, 여기 뭐 쇠를 넣었잖아요. 이렇게 그냥 들어 있어요. 그게 체화된대요. 세월이 가면 완전 체화되어서, 의사 얘기로는 정상이 된다고 하는데, 절룩거리는 것은 아직도 약간…… 허허. 정석원 : 요즘 말로 선생님, 사이버보그시네요. (웃음). 주중에 서울로 출퇴근을 하시잖아요. 번거롭고 힘드실텐데, 버스에서 주무시기도 하실 것이고, 또 버스 안에서 특별하게 하시는 일 있으신지요. 정진규 : 글쎄 시인이니까 대개들 버스에서 명상을 하거나, 글씨 쓰기는 어려울테니까, 시를 쓸 것이라고 생각들 하시겠지만, 우선은 타면 자요. 잠이 오고. 꿈속에 꿈을 꾸지요. 꿈속에서 꿈을 꿔요. 시 꿈을 꿈니다. 그래서 꿈속에 있던 것을 깬 후에 옮겨놓으면 좋은데, 나중에 메모해야지 하다가 보면 잊어버리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허허. 장석원 : 3일 서울로 출․퇴근하시고 3일 댁에 머무시잖아요. 댁에서는 주로 무엇을 하시는지요.
정진규 : 집에서는 주로 내 시간을 보냅니다. 아무래도 서울의 3일은 ‘현대시학’을 중심으로 한 업무적인 일, 사회생활이란 것이 있잖아요, 대인관계 같은 것 때문에 내 시간을 갖기가 좀 어렵지요. 안성의 3일, 집에 있는 동안은 그야말로 100% 내 시간을 갖습니다. 주로 메모해 놓았던 작업도 하고. 뭐 매일 씁니까? 이 시골생활이라는 것은 아주 풀 뽑는 게 일이에요. 더군다나 체험을 안 해 보았는지 모르지만, 장마 때는 자고 나면 잡초가 일어서서 풀 뽑는 일이 참 큰일인데, 하도 뽑다 지쳐서 이제는, 에이 그래 같이 살자, 허허, 그렇게 여기고 그냥 놔두기도 하고 그래요. 텃밭을 보면 알겠지만, 채소 몇 가지들은 자급자족을 하고 있습니다. 장석원 : 선생님 탁자 위에 책이 많던데 쓰는 것 말고 읽는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요. 정진규 : 그렇지요, 읽는 시간이 더 많지요. 사실은 읽는 시간이 많고, 읽는 걸 또 원래 좋아하니까. 읽는 것이 왜 더 재미가 들리는가 하면, 읽는 동안 그 책의 내용에 대한 파악, 독해, 뭐 그런 것보다도 그 내용이 자극을 줘서 촉발되는 내 상상력의 확산, 그런 정신적 공간의 발견, 그런 것을 만나게 되니까 자꾸 읽게 되요. 결국은 시를 쓴 다는 것이, 일상의 체험도 매우 중요하고, 내가 여기 내려와 있으니까 자연에서의 생활 발견, 이런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독서, 그런 작업을 통한 상상력의 자극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어요. 장석원 : 제가 생각하기에 선생님 연세의 글쓰시는 어르신들 중에 선생님의 독서량을 손에 꼽을 수 있을 않을까 하는데요. 정진규 : 아하하…… 다른 전문적인 서적의 독서라고 할 건은 없고, 주로 시를 많이 읽지요. 아무래도 잡지를 하니까 창작 활동하는 사람들의 글에 대해서 제일 눈이 밝을 거예요.
서중유시 속의 비백과 시수 장석원 : 선생님 글씨 얘기도 잠깐 하고 싶은데요. 선생님의 글씨는 세간에 정평이 자자합니다. 좋은 글씨로, 예술품으로. 그래서 선생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서예하고 선생님의 시하고 어떻게 관련되는지요. 정진규 : 아주 밀접합니다. 내 글씨라는 것은 안진경이니 누구니 하는 분들의 법첩에 의해서 수련 받은 글씨는 절대 아니에요. 그냥 혼자서 자기 수련을 통해서 터득한 글씨지요. 그러다 보니까 글씨체가 아주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서예가들이 볼 때는 그것도 글씨냐 그렇게 말 할 수가 있어요. 법첩에 의해서 쓴 글씨가 아니지만 스님들이 내 글씨를 좋아합니다. 스님들이 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초월적인 것, 대자유를 희구하잖아요. 매인 격, 그런 격식을 스님들이 싫어하거든. 그러다 보니까 내 글씨를 좋아해요. 그래서 절에 가면 내 글씨가 좀 있습니다. 현판 글씨도 좀 있고…… 글씨와 시는 옛날부터 시서화(詩書畵),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고 그러잖아요. 선비들에게는 기본이지요. 화중유시(畵中有詩), 시중유화(詩中有畵) 같은 말도 있지요. 그림 중에 시가 있고, 시 중에 그림이 있다. 현대시의 입장에서 얘기한다면 그것이 소위 이미지를 얘기하는 것이겠지요. 서중유시(書中有詩), 시중유서(詩中有書)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지요. 글씨와 글씨가 가지고 있는 어떤 이미지의 세계, 글씨와 시는 밀접한 면이 있고. 특히 내가 그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은, 혼자서 글씨를 쓰다가 스스로 터득하기도 했지만은, 운필(運筆)이란 것 있잖아요, 그 운필의 리듬이 시를 쓸 때 감성의 흐름하고 일치되는 순간, “야! 이것이다”라고 느꼈어요. 리듬이 안 잡히면 시도 안 써지듯이 글씨도 리듬이 안 잡히면 안 나가요, 안 나가. 참 재미났던 것은 내가 하나 치료를 한 것인데, 시 가지고 난 치료를 한 사람이에요. 시 치료라는 말이 요즘 쓰이기도 하지요? 시 치료가 유행이어서 정신 치료니 뭐도 한다고 그러는데, 나는 내 위장병을 치료했어요. 시를 쓰고 나면 배가 고파져. 젊었을 때 위장병이 있었거든. 또 글씨 쓰고 나도 배가 고파집니다. 아주 소화가 잘 돼. 그런 게 있어요. 허허…… 그게 아마 집중을 하다 보니까 그만큼 힘이 드는 모양이에요. 시 치료, 서 치료, 이런 말이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치료 역할도 시서가 한다, 그래서 선비들이 운동도 안하고 만날 앉아서 읽고 쓰고 하면서도 건강이 유지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도 있어요. 시와 서를 매우 가깝게 느끼고 있고, 나는 법칙에 의해 글씨 쓰는 것이 아니고 자유롭게 쓰기 때문에, 거기서 시의 어떤 초월성 같은 것을 느껴요. 시 쓰다 보면 표현되지 않은 공간, 행간 그 자체에서 황홀을 느낄 때가 있잖아요. 글씨도 마찬가지예요. 가시적으로 그려 넣은 것이 보이지 않는 그 황홀한 공간을 그 행간에 만들어내요. 그게 예술이지요. 글씨 쓰는 사람들이나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그 표현되지 않은 공간을 비백이라고 그러기도 하지요. 비백, ‘날을 비(飛)자, 흰 백(白)자’의 그 비백(飛白)을 만들어낸다는 말이에요. 시에도 보이지 않는 심상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듯한 그런 것이 있어요. 그래서 글씨와 시는 아주 밀접하다도 생각하고, 시서화를 하다 보면 선비로서의 어떤 격, 득격(得格)을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해요. 만해 선생도 그 말씀하셨고, 추사 선생도 그 얘기를 한 것이예요. 난을 치면서, 글씨를 쓰면서, 시수(詩瘦)라는 말을 쓰셨단 말이에요. 살찌고 다이어트가 안 되고, 그러면 안 된다, 말라야 된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공간이 있어야 된다는 소리지, 살이 잔뜩 찌면 공간이 없으니까. 만해 상을 탔으니까 만해 선생 얘기를 할게요. 만해 선생이 60세에 쓴 한시가 있는데, 그 한시를 보면, 당신이 평생 시를 쓰느냐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고, 비쩍 마르고 그런 줄 알았더니, 그게 소위 시수라고 생각했는데, 환갑 되고 생각해보니까, 당신이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이름을 썼더라, 시를 위해서 그렇게 고민하고 아파하고 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름을 좀 날려 볼까 하고 욕심을 낸 것이더라, 거짓 시를 통해서……, 이건 시수가 아니다, 시수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시고는, 만해선생은 이것을 성병이라 그러셨어요. ‘성병(聲病)’, 명성(名聲)의 소리 聲자, 성병, 발음이 좀 이상하지만, 성병이라 그러셨어. 성병, 그러니까 이름병이 있다 이거야. 시수에 진짜 걸려서 시를 쓰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요. 대개가 다 그 명예병, 이름병에 걸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나도 그 중 하나지. 만해 선생은 60에 그것을 깨달았는데, 난 70이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못 깨달았어요. 말은 아는데, 아직도 이름 석 자가 더 중요한 그런 느낌을 갖을 때가 더 많아! 허허.
율려의 세계 장석원 : 서예 얘기 하다가 선생님께서 벌써 시의 본질 같은 것들을 말씀해 주신 것 같습니다. 언뜻 기억나는 것이 있어요. 2007년인가요. 고대 국문과 60주년 기념 서예 퍼포먼스하셨을 때, 그 글씨가 떠오르는데, 서예의 리듬과 시의 음악이 연관된다는 이런 말씀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선생님께서 만해 선생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에 관련된 질문을 하겠습니다. 만해와 만해 시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일단 여쭙고 싶구요. 유심에 실린 수상 소감에 “<님의 침묵>이 지닌 사설체, 그 신비한 트릭, 내포된 사상을 나의 시가 그간 궁구해 온 산문체의 연원으로 감히 높게 받들어오기도 했다”는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만해의 시에 영향 받은 것이 있다면, 님의 침묵이 산문체 아닙니까?, 산문체를 포함하셔서 만해와의 연관성이라든지, 만해 시의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정진규 : 소감에도 밝혔듯이 산문체가 직접적으로 만해로부터 받았다고는 할 수는 없어요. 쓰다 보니까 만해의 「님의 침묵」 같은 행갈이가 안 된 산문체, 뿐만 아니라 그런 것들을 「알 수 없어요」 등의 작품을 통해서 만나게 되었어요. 처음부터 만해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니고, 쓰다 보니까 그런 만해를 만나게 된 것이지요. 사설체, 그것이 내 산문체와 같은 호흡의 것이란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시에 있어서 어떤 깨달음이라는 것, 창작적인 깨달음이라는 것은 전제된 텍스트에 의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후행적인 깨달음이라고 생각해요. 자율적인 깨달음이 먼저예요. 자율적이 깨달음이 이루어진 후에야 후행적으로 그런 텍스트를 만나게 되는 게 아닌가, 정리하자면 그렇게 말이 되겠네요. 그런 것 때문에 바로 만해를 만난 것이고, 지용의 산문체도 그렇게 해서 만난 것이고, 또 쭉 내려와서 미당의 산문체도 그래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이고. 중요한 시들의 산문 형식을 그렇게 해서 만났어요. 물론 왜 산문체를 했느냐, 그것을 따지고 들어가면 얘기가 또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행과 연을 가른다는 것이 시의 기본 형식이 되어 있지만, 현대시라는 것이 꼭 그런 정해진 것을 따르는 정형적인 방법을 가지고는 세계의 표현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어요. 행과 연을 가르는 것으로부터 좀 벗어나고 싶어서 산문체를 택했고. 또 하나 이유가 있어요. 삶에 있어서 사회적인 시, 또는 일상적인 생활의 시, 이런 것을 시에 담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이야기체, 그런 것이 개입되기 시작하더라구요. 이야기체를 시 형식으로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 궁리하다 보니까 산문체가 나온 것입니다. 구체화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냥 이야기체로 끌어가면 그것은 사설체가 되니까, 그것을 보다 현대시의 이미지 추구 경향과 일치시키고, 시의 본래 음악성과도 일치시키고, 이렇게 함으로써 산문체가 산문에 떨어지지 않는 시의 형식이 될 수 있겠다 해서 찾다 보니까 마침 보들레르도 이런 말을 했더라고. 뭐라고 얘기했냐면, 산문체 시에는 ‘환상의 파도와 그 어떤 정서의 운율’이 있어야 된다, 그러니까 ‘환상의 파도’라는 얘기는 이미지 얘기이고, ‘운율’이라고 하는 것은 가시적인 리듬 얘기예요. 내면적 리듬도 가시적인 리듬도 얘기한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항상 그것을 염두하면서, 소감에서도 얘기했듯이, 만해의 시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흔히 만해의 시에 지사적인, 민족적인 면모가 강하다 보니까 소위 서정시가적인 향기를 외면한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난 다른 시선으로, 내면적으로, 만해 시를 만나 왔다고 말할 수 있어요. 장석원 : 선생님께서 만해 시에서 영향 받은 산문체를 말씀하셨는데 한국 현대시는 정형시로부터 탈피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까. 주요한의 「불놀이」도 산문체였고, 1925년에 나온 만해의 님의 침묵이 산문체였고, 또 말씀하셨듯이 정지용, 백석, 서정주…… 이런 식으로 가보면 산문체시가 한국 현대시의 중요한 전통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 서정적 리듬과 환상의 파도가 한 몸을 이루는 율려의 세계라고 선생님 시를 말씀하시면서 산문체의 영향을 지적해주셨는데, 그렇다면 산문체 시가 시의 음악인 리듬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산문시와 리듬, 그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정진규 : 우리가 그냥 형식, 외형적인 어떤 그런 면에서만 리듬을 생각할 게 아니라고 봐요. 현대시라는 것이, 자유시라는 것이 바로 리듬의 자율적인 전개, 그런 것을 추구해온 것 아니에요? 산문시의 궁극이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산문시의 리듬이, 해오면서 보니까 알게 되었는데, 요즘에 내가 율려(律呂)라는 말을 쓰고 있듯이, 바로 율려가 거기에 있습니다. 동양적 관념으로 얘기하면 율려라는 것은 음(陰)과 양(陽)이에요. 음과 양의 리듬이란 말이에요. 음과 양의 리듬, 24절기가 돌아가는 우주의 원리가 그 리듬으로 분류되어 있어요. 명칭이 다 있어요. 육율(六律) 육려(六呂) 해서 12로 되었어요. 양의 여섯 가지가 기술적으로 분류되어 있고, 음의 여섯 가지가 기술적으로 분류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 두 가지가 맞아 떨어질 때, 우주적인 변환 질서가 이루어진다, 거기에서 율려라는 그 해석이 나온 거지요. 우주도 하나의 흐름입니다. 음과 양이 맞아 떨어지는 우주 순환의 리듬이 결국 율려입니다. 율려, 그것이 어느 한쪽 음에만 기울어지고 양에만 기울어지고, 이러지를 않고 두 가지가 맞아 떨어지다 보면, 이게 하나의 산문체가 되어 나오더라구, 산문체의 리듬이. 가시적으로 행과 연을 끊고, 이렇게 해서 하는 게 아니라, 두 가지가 맞아 떨어지는 그런 것으로. 서양 음악의 악보를 보면 동양적인 이 윤리하고 맞아 들어가는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악보를 보면 ‘레가토’라는 기호가 있잖아요. 음과 음을 이어서 연주하라는 레카토, 음과 양이 맞아 떨어지게 하는 거예요. 어느 경우에는 끊어라, 스타카토, 스타카토라는 말을 하잖아요. 그 스타카토는 끊는 것이 아니고 끊음으로써, 끊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보이지 않게 공백의 흐름을 만듦으로써, A와 B가 맞아 들어가는 것이지. 잘못 해석하면, 끊어서 연주하라, 이렇게 되는데, 끊는 형식을 통해서 이어줘라, 보이지 않는 리듬을 찾아줘라, 이런 것이거든. 음악의 그것이 산문체 시가의 리듬에도 적용되는 것이지요. 리듬, 항상 이어지는 흐름, 불이, 불가(佛家)의 정신과 일치하는, 불이의 정신과도 일치하는 리듬, 우주의 질서, 우주가 그냥 돌아가는 게 아니거든요, 모두 항상 이어져 있단 말이에요. 항상 이어져 있어요. 끊어지는 순간이 없어요. 언제나 이어져 있어요. 그러한 리듬의 원천적 질서, 이런 것이 산문시의 형식 속에 들어 있어요. 제가 요새 추구하는 율려라는 말도 거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애기할 수가 있어요. 장석원 : 시의 음악, 리듬에 대한 선생님 말씀을 듣다 보니까 많은 것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리듬을 3음보, 4음보, 7.5조 등으로 정형화시키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리듬을 시의 어떤 움직임, 유동체로서 시가 지녀야 할 시간에 대한 질서로 리듬의 폭을 넓게 펼쳐 놓으시려는 것 같습니다. 정진규 : 심지어는 요즘 젊은이들의 음악활동을 봐도 그것이 그대로 나타나요. 장난 같지만, 요즘 애들이 하는 랩 같은 것을 보면 그 이어져가는 것 있잖아요. 그 속을 보면 율려가 있다니깐. 음과 양이 그냥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가는, 들숨과 날숨이 이어지는, 그게 요즘 애들의 음악에서조차 느껴져요. 시의 리듬, 현대시로서의 시의 리듬은 매우 중요해요. 과거에 물론 해 왔던 일도 중요한 것이지만, 그러한 우주적 질서로서의 생체적인, 우리 몸이 항상 움직였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산문시의 리듬은 매우 중요합니다. 장석원 : 세계가 에너지의 흐름이다. 기의 흐름이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세계관과 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리듬에 대한 그런 의견이 유사한 측면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진규 : 나의 불이 정신하고, 리듬의 율려라는 시관(詩觀)하고 일치하는 겁니다. 장석원 : 산문시를 쓸 때, 형식을 선택하는 순간 찾아오는, 어떤 소리질서에 대한 자유 같은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이라고 생각을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선생님 이제 시의 내용 측면을 여쭈어 보려고 하는데요. 대낮이라는 시에 보면 “얼굴이 없는 바다가 알몸으로 / 와서 나를 겁탈한다. 내가 최초로 압도된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정진규 : 옛날 시인데 그 작품. 장석원 : 거대한 자연 그리고 자연과 맞서고 있는 시인으로서의 시인을 대표하는 몸, 그 사이에 두 존재 관계가 압도라는 말로 바뀌어 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을 선생님 ‘숭고’ 개념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정진규 : 그렇지요. 바로 그것이지요.
생명, 불이와 ‘당길심’의 둥글고 바알간 알 장석원 : 선생님 초기 시에 보면 “비애의 어깨”나 “비애의 장신” 같은 구절들이 나오거든요. 선생님께서는 ‘비애’라는 단어를 쓰시면서 무엇을 떠올리셨나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비애, 도대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좀 알고 싶어서요. 정진규 : 비애, 나에게 비애는 감성적인, 그러한 의미라고나 할까. 어떤 비극적 상처라든지, 사회적 상처라든지 그런 것도 비애의 요인이 되겠지만, 내 비애의 관념은 근원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생각해요. 오히려 긍정적인 의미가 있었다고 봐요. 비애는 우리에게 아픔을 주는 그런 형상이기보다는, 불가에서 얘기하는 비(悲), 자비(慈悲)의 비(悲), 그 슬픔, 말하자면 아주 원형적이고 근원적인 사랑, 그런 것을 우리가 느낄 때 감지되는 어떤 정서와 일치한다고 나는 생각했어요. 바로 뭔지 모르게 슬퍼지는 것, 엄마를 생각하면 슬퍼지고, 사랑을 생각하면 슬퍼지고, 더 합일되고 싶은데, 충족되지 않는 사랑에 대한 갈망이 비애의 형태로 오지 않았는가, 그렇게 느껴져요. 사회적인 비애하고는 다른 것이라고 느껴지는데, 그래도 사회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기도 했어요. ‘비애의 어깨’를 쓸 때, 그 당시 60년대는 개인과 집단의 관계, 우리의 사회적 현실이 매우 첨예해서 소외와 갈등을 많이 느끼고 살아야 했던 시대였어요. 그때가 개인적으로 소외감이 좀 강했던 시절이에요. 왜 소외감이 강했냐면, 그 당시 나는 집단적인 의식보다는 개인적인 의식이 강했었거든. 그래서 그 소외된 존재로서의 비애, 그때 비가 내리는데, 그 비가 내리면서 젖는 것이 일종의 비애의 어깨다, 이런 이미지로 다가왔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근원적으로 나는 그렇게 해서 비애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사회적인 문제하고도 만나서 민감하게 작용을 했던 게 아닌가 그렇게 느껴져요.. 장석원 : 선생님 시의 제재들은 초기 시부터 밥, 몸, 이것들이 핵이라는 단어로 전이되고요. 이것과 연결되는 소재로 임신부, 달, 먹는 것 등등이 있습니다. 전체가 어머니랑 연결이 되구요. 이것들이 또 생명으로 귀결되는데요. 정진규 : 그런 시어들, 그런 대상들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것은, 지금 얘기 나왔듯이, 생명과 연관되는 어떤 것의 추구 속에 내가 있었기 때문에 그와 동격 이미지를 갖는 시어들이 그렇게 나왔던 거지요. 좀 더 근원을 얘기하자면 생명에 대한 의식은 어렸을 때부터 하나, 합일의 추구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그런 불이의 세계는 계속 추구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곧 생명의 실체다, 이런 것을 느껴 왔고, 감성과 이성으로 대표되는 이원적인 것, 나누어져 있는 것들에 대한 고뇌와 갈등이 많았어요. 감정과 이성, 고전과 낭만, 육체와 정신, 이렇게 나누어져 있는 관념, 그것이 우리 생명의 실체를 분해․와해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것이 합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교합․교직되어야 해요. 경계가 없을 정도로 무봉(無縫)으로. 꾸민 자리가 없이 무봉으로 교합되어야 된다는 뜻으로 ‘알’이라는 말도 썼습니다. 그런 추구를 하다 보니까 생명의 실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 중에 소위 ‘몸시’니 ‘알시’니 ‘껍질’이니 ‘본색’이니 하는, 지금까지도 생명의 실체, 하나가 되는 생명과 연관된 시어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요.
장석원 : 불이적인 것, 이원적인 것을 하나로 묶는 실체, 대립되는 두 가지를 다 생명으로 끌어안으시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 시 전체를 뚫고 있는 내용적인 측면과 형식적인 측면을 아우를 수 있는 관점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몸시 61」을 보면, “내 소멸의 빈 터에도 풀잎 하나 돋는구나 풀잎, 아기의 손을 쥐니 가득 조여 오는 생동!”이라는 구절이 있어요. 감동 깊게 읽은 구절인데, 선생님의 시 세계를 휘황한 아름다움으로 물들이는 생명과 몸, 그 뜨거움을 ‘바알감’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이런 구절들이 생명과 선생님의 시 사이의 연관성을 잘 드러내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리듬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해주셨으니까, 이제 이미지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리듬의 뒤를 따르는 이미지에 대한 질문이 너무 뻔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장진규 : 그러니까 ‘빨간’이라 표현하지 않고 ‘바알간’ 했을 때, 바알간 그것이 순수원형이 되는 듯해요. 어렸을 때는 둘로 나누어져 있는 건 줄 알았어. 그래서 자꾸 고민했던 거예요. 자꾸 합하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발견해 보니까, 깨닫고 보니까, 본래 하나이더라고. 본래 하나. 나누어진 것은 재귀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지. 생명이란 것은 근원적으로 하나더라고. 본래 하나. 생체라는 것도 원래 하나. 아까 얘기했듯이 무봉교합의 것이지. 알이라는 것, 다른 말로 하자면, 내 시론이라는 것은 바로 무봉교합의 원리 추구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불가적인 얘기로 하면 불이(不二) 정신이고. 내가 일반 생활어로 좋아하는 말은 ‘눈에 밟힌다’예요. 그것도 내 시론에 속하는 말이라고 봐요. ‘눈에 밟힌다’, 몹시 보고 싶으면 그 그리움이라는 추상심리가 실체로 체감된단 말이지. 여자들이 하는 말 중에 ‘새끼가 보고 싶으면 눈에 밟힌다’ 그렇게 말하잖아요. 그게 바로 내가 추구하는 생명원리라고 생각해요. ‘눈에 밟힌다’, 기가 막힌 말이지, 기가 막힌 말이여. 보고 싶으면 그게 실체로 느껴진다는 말이여. 그러니까 그건 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것이 하나를 이루는 생활 속의 불이(不二)여. 불이, 우주도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음과 양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사실은 사람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지. 음과 양이 있는데, 그것들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거예요. 결국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국 시에서도 떨어져 있는 음과 양을 내가 붙이는 것이 아니에요. 발견이란 것은 원래 그렇게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지요. 옛날에 서양 개념으로 시라는 것이, 시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그랬다는데, 만드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사람 같애. 발견하는 사람, 그 원형적인 하나의 세계를. 우리가 관념에 휘잡혀서 살다 보니까 이렇게 막 갈라지고, 여러 가지 분파가 생기고, 이렇게 된 것이란 말이에요. 원래는 하나인데. 그래서 그것을 발견해내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요즘 잘 쓰는 말 중에 ‘댕길심’이란 말이 있어, 댕길심. 시골에 내려와서부터 쓰기 시작한 말인데, ‘댕길심’은 사투리인데, 표준어는 ‘당길심’이지. 당기는 힘이다, 이렇게들 해석을 하지. 누구나 다 자기 당길심이 있다잖아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아전인수지 뭐. 모두에게 당길심이 있지요. 사전을 찾아보면 아시겠지만, 그 단어 자체도 재미있는 단어예요. 당길 힘, ‘힘 력’(力)의 그 힘이 아니고, ‘마음 심(心)’이에요. 한자어와 순수 국어가 합성된 단어예요. 그게 당기는 마음, 농촌 사람들은 다 그것을 마음으로 느껴. 힘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도시 사람들은 잡아당기는 힘으로 느끼더라구. 힘 력 자로 알지만, 농사 짓는 사람들은 심으로 느껴요. 모든 곡식이 자기가 노동해서 힘으로 얻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농사 짓는 사람들은,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뭐라고 얘기했냐 하면, 곡식들은 다가서는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그래요. 곡식들조차도 사람의 다가서는 발자국소리를 듣는다는 것이지요. 농사짓는 사람들은 다 그래요.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요. 그리고 또 이렇게 하는 것이 묘덕으로 하는 것이지요. 묘덕(妙德), 묘덕이 있다 그러잖아요. 뭐 심고 어쩌고 하는 것도 힘으로 심고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묘덕으로 하는 것이라고 그래요. 그래야 힘이 안 든다고도 해요. 가끔 내가 일하는 것을 보다가 동네 영감탱이 친구들이, 그렇게 힘들여가지고 하면 되냐고, 그냥 자연스럽게 마음으로 해야지, 이런 말을 해요. 그것이 묘덕이래요. 지게 지는 것도 묘덕으로 지게를 지면 지게가 딱 등에 붙어요. 그런데 힘으로 지려고 하면 뒤로 자빠져요. 실제로 해본 사람이라야 지게도 지고 그런다고. 근데 그 사람들은 힘으로 하지를 않아요. 묘덕으로 한다구요. 마음으로 해요. 당길심. 그래서 이것을 저 사람들이 어디서 배운 것일까 하고 살펴보았어요. 곡식들이 발소리를 듣고서 자란다고 그랬잖아요. 그게 마음이란 말이에요. 우리들 생각에는, 자연이 우리를 위해서 다 주고,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희생해주고, 뭐 이렇게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있잖아요. 자연은 참 아름답다, 이 말 역시 자연미의 정의를 사람들이 잘못 내리고 있는 틀린 말입디다. 왜 아름다우냐? 우리 인간에게 공기를 주고 좋은 것을 주고 먹을 것을 주고, 뭐 이러니까 아름답다, 이렇게 본단 말이에요. 아녀, 내려와서 심고 돌보면서 보니께 지가 필요한 것은 챙기기를 아주 100% 챙겨요. 우리한테만 주는 것이 아니더라구. 저 살 궁리 다 하더라구. 그래서 그게 당길심이여 당길심. 자연의 당길심. 그러니까 아름다움이라는 것, 그것도 생명에 연관이 되더라구. 아름다움이란 것은 희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희생, 이것입니다. 그래서 음과 양의 합일도 거기에 있다. 인제 그렇게 보는 것이지요. 요렇게 햇빛 비치는 것, 바람 부는 것, 이것에 따라서 가지 뻗는 것, 이파리 피는 것, 농도와 크기가 싹 달라져요. 말하자면 조금만 햇빛이 좋으면 더 싱싱해지고, 비가 또 내리면 더 싹이 잘 트고. 물을 암만 주어야 소용없어. 비가 내려야 싹이 터요. 그게 그런 거야. 그래서 당길심, 이것이 생명의 근원이다, 그것이 없으면 생명의 질서가 안 생긴다, 그런 생각을 해요.
장석원 : 네. 선생님 말씀을 들어 보니까 선생님의 시 세계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감지됩니다. 아까 말씀하셨던 리듬이 마음의 유동, 조화, 자연스러운 생명으로 연결이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선생님 시에 몸과 알이 같이 나오잖아요. 합쳐져 알몸이 되기도 하구요. 이런 개념어들에서 공통적으로 추출할 수 있는 형용사가 하나 있는데 바로 ‘둥글다’(정진규 : ‘둥글다’입니다.)입니다. 이 말은 모성과 연결되는 형용사라고 보는데요. 자궁도 둥글고 눈물도 둥글고. 선생님께서 어머니 말씀도 하셨고, 생명 말씀도 계속 하고 계시는데, 모성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정진규 : 그래요. ‘어머니’를 입에 담으면, 눈물이여, 눈물이 나요. 아까 비애라는 말도 나왔지만, 비애의 그 어깨 같은 것, 깡패들의 어깨가 아니라, 어머니의 어깨가 비애의 어깨여. 쪼그리고 앉아서 무엇을 잡수신다든지, 나물을 다듬는다든지, 앉아 있는 어머니의 어깨를 어렸을 때 보면, 그냥 눈물이 나는 것이었어요. 그냥. 그리고 눈물의 형상 역시 ‘둥글다’와 이미지가 상통해요. 소통으로 이해돼요, 소통. 혹은 요즘 말하듯이 회통(會通). 두루 통한다, 그게 둥글다는 것이에요. 보면 둥근 것은 막히지를 않았어. 이리 들어가고 이리 나오고, 저리 들어가고 저리 나가기도 하는. 교통이 된단 말이야. 소통, 회통의 형상이 ‘둥글다’ 아니겠어요. 그리고 체감의 온도로서 ‘둥글다’는 따뜻함을 품고 있어요. 이래서 어머니의 이미지하고도 일치하는 것이고. 그리고 눈물도 둥글잖아요. 눈물 방울, 둥글잖아요. 완벽하게 둥글잖아요. 그리고 어쨌건 간에, 과학적으로 어떻게 증명이 되든 간에, 우주의 형상이란 것 역시 둥근 것이 아닌가요. 요즘 현대시에서는 가시적인 어떤 비극성, 상처, 단절적인 죽음 그런 것이 중요 의식으로 다루어지기도 하지만, 현실구조 자체가 그러니까, 그러나 그런 절망의 선택보다는 ‘둥글다’는 말이 품고 있는 희망의 선택이 필요하다고 봐요. 현대시를 다루는 이론가들이 그것을 두고 평면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안일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는 눈도 없지는 않은데, 나는 그렇게 생각을 안해요. 희망적인 선택이라는 것은, 내가 얘기했던 내 시의 불이 정신하고 일치하는 것입니다. 등글다는 것은 하나가 되는 형상이니까, 알의 형상이니까, 무봉 교합의 형상이니까. 모든 알은 둥급니다.
심검하라, 마음의 칼을 찾아라 장석원 : 선생님 시어 중에 ‘심검’ 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심검, ‘칼을 찾아라’ (정진규:尋劍堂, 절의 심검당)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저는 선생님께서 시에서 찾아내신 칼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심검을 ‘마음의 칼’, 이런 식으로 한자를 바꾸어 보았어요. (정진규 : 찾을 심 자인데~) 물론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시를 쓰실 때 겨누고 있는 ‘마음(心)의 칼(劍)’은 무엇입니까? 정진규 : 얘기했듯이 그 검은 마음의 칼입니다. 마음의 칼을 찾는 거예요. 절에 가면 심검당이, 큰 절에는 심검당이 다 있어요. 수덕사 말사 개심사에 가면 심검당이 있다구요. 백제시대 지은 법당이어서 상당한 역사를 지닌 그런 요사체이지요. ‘심검당’의 그 칼은, 불가(佛家)에서 얘기하는 검은, 전쟁에 쓰이는, 생명을 단절시키는 칼이 아니라 오히려 이어주는 칼입니다. 왜 이어주는 칼인고 하니, 끊어야 할 것은 끊음으로 해서 그것이 아름다워지고, 완전해지고, 생명이 찾아진다는 것이지요. 불가에서는 절제, 비우다, 버리다, 이런 것을 좋아하잖아요. 불가에서는 그런 것의 상징어가 검이에요. 그 칼을 다른 말로 뭐라고 하냐면, 불가에서 그것을 반야검(般若劍)이라고 해요. 반야검, 반야심경(般若心經)의 반야(般若) 있지, 바로 그 반야검이라고 해요. 그 칼이 설화적으로 얘기할 때 어느 정도 날카로우냐 하면, 번개 같은 칼, 싹 지나가면 놓여있는 머리칼도 싹 비어지는 칼, 그래서 반야검인데, 그렇게 깨끗하게 버릴 수 있는, 끊을 수 있는 칼, 내가 해석하는 반야검은 어머니의 칼입니다. 어머니는 버림으로써, 끊음으로써 생명을 이어주는 칼을 사용하시는 분이지요. 지금은 병원에 가서 아기를 낳지만, 옛날에는 집에서 아기를 낳고 탯줄을 끊었잖아요. 그 탯줄을 끊는 것, 그것도 칼이지. 탯줄을 끊음으로써 생명의 지속을 가능하게 한단 말이에요. 어머니의 칼, 그게 반야검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들이 음식하실 때 칼을 쓰시는 것을 보면 어쩌면 그리 능숙할까 몰라. 허허. 하! 섬세하잖아, 리듬 있고. 여자의 칼이라는 것은 대단한 칼이지요. 그래서 심검이란 말을 좋아하는 것이지요.
시와 연애하기, 쉬지 않고 쓰기, 젊은 시 되기 장석원 : 선생님 시가 젊게 느껴져요. 「플러그」 같은 시를 봤더니 현대적이고 세련, ‘세련’은 제가 말을 좀 잘못하는 것 같고, 굉장히 젊다, 이런 느낌이 들었는데, 연세와 상관없이 점점 젊어지는 특별한 감각의 비결 내지 동력은 무엇입니까? 정진규 : 그런 질문은 최근에 와서 더 많이 받는데, 비례적인 것 같아요. 이제 나이를 먹어가니까 자꾸 나이하고 내 시를 비교를 하는 모양이야. 나이가 들면 대개 둔화되고 평면화되고, 좋게 변화되는 경우는 심화된다고 해야 할까, 그래야 되잖아. 그런데 내 시는 글쎄 뭐 둔화나 평면화 하고는 좀 거리가 있다는 얘기겠고. 글쎄 모르겠어, 심화하고 거리가 있다고 그러면 그거 큰일 아니여. 너무 깊이가 없다고 그러면 안되잖어. 거기에 대해서 걱정이여. 그렇게 새롭다면 심화하고 거리가 있다는 것. 그러면 안되잖어. 나이가 들수록 사유도 깊어져야 되고 깨달음도 깊어져야 될 것 아니어. 내 시를 그런 면에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반성도 하고 그래요. 가벼워져서는 안 되겠다, 젊은 것은 좋은데, 실험시로 가는 것도 좋은데, 사유의 깊이, 이런 것이 내 시에서 자꾸 적어져 간다, 그건 아니잖냐, 내가 거부하고 있지요. 누구한테 내가 물었어. 그럼 심화의 대목은 어떠냐. 그랬더니 그것도 괜찮다고 그래요. 다행으로 생각해요. 비결이랄 것은 없어요. 시는 비결이 아니고, 하나의 진정성의 예술적 추구다, 그리고 지속적인 작업의 순발력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끊임없이 계속 해야 돌아가지, 안하다 하면 둔화되요. 하이데거가 한 말 중에 손의 기능이 있지. 존재라 것도 손의 기능이고. 핸드크래프트(handcraft)라는 말이 있잖아요. 손의 작업이란 말이에요. 안 하면 손이 둔화되는 것이에요. 가만히 보면, 손이 둔화되는 거예요. 손이 못 따라가, 손이 못 따라가더라구. 한참 안하다 하면 엉뚱한 소리 하고, 하던 소리 자꾸 하게 되고, 그렇게 되요. 항상 새로운 것을 쓰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작업을 계속하다 보면 앞으로 앞으로 나가요. 안하다 하려면 지나간 것을 뒤적거리게 되요. 답습한단 얘기가 있잖아요. 도습(蹈襲)한다고 하나 정확한 말로. 옛날 것을 다시 들쳐내게 되면, 그렇게 되면 평면화되는 것이고 둔화되는 것이지요. 내 경우에 가만히 돌아보니까, 소위 지속적인 작업의 순발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쉬지를 안했어요. 할 일이 없으니까. 내가 하는 것은 시밖에 없잖어. 내가 뭐 학문을 한 것도 아니고 논문을 쓴 것도 아니고 돈벌이를 한 것도 아니고. 일을 했다면 현대시학, 한 일이라고는 현대시학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돈 되는 것은 아니고, 그 일이 시와 관련되는 것이었고, 그러다 보니까 지속적인 작업의 소위 순발력이란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던가 해요. 더군다나 현대시학을 만들면서는 어떤 시적 충족감을, 창작의 충족감을 그 현대시학이 예인해 주었는데, 만들다 보니까 새 작품을 늘 대하게 되고, 젊은 사람들 작품을 읽게 되고, 그러다 보니 시의 독서량이 많아졌어요. 그러다 보니까 소위 새로운 것에 대한 분별과 탄력이 생긴 것이지요. 분별이란 것이 중요해요. 새로운 것이 자꾸 나오는데, 그것과 똑같은 것을 내가 써서는 안 되잖아요. 그것을 읽음으로써 창작적 분별이 생기더라구요. 그런 것이 하나의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또 하나 개인적인 성품상의 조건으로는, 조건이라면 조건이지요, 항상 연애감정에 빠져 있어요. 그게 시를 자극하는 거예요. 연애감정은 사람에 대한 연애감정이기도 하지만 사물에 대한, 대상에 대한, 독서에 대한, 이런 것이 내가 시를 쓰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고, 현실적인 여건으로서는 최근에 이곳으로 내려왔다는 것, 자연과 같이 할 수 있는 그런 조건이 뜻 아니하게 되었고…… 팔자지 뭐, 그것도 시만 쓰고 살라는 팔자인가 보다 생각해요. 가장 현실적인 팔자는 마누라. 마누라가 지금 내 생활 태도로 봐서는 벌써 도망갔어야 할 사람이지. 우리가 결혼 50주년을 앞에 두고 있어요. 금혼식을 앞에 두고 있는데, 살면서 나를 돕는 입장, 이해하는 입장에 늘 섰지, 내 기억으로는 한 번도 내 시를 가로막은 적이 없었어요. 허허. 내가 현실적으로는 아주 염치가 없는 사람이지요. 솔직하게 고백을 해요. 자식들도 스스로 공부를 했고, 스스로 유학도 갔다 왔고, 자기들 스스로 했어요. 내가 도와 준 것이 없어요. 그래서 자식들한테도 염치없는 사람이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두 쪽이 다 나를 미워하지 않아요. 자식들도 나를 안 미워하고, 마누라도 날 미워하지 않고, 웬일인지 모르겠어, 내가 무슨 복인지 모르겠어. 내가 참 복 받은 것이라고 생각해. 장석원 : 선생님께서 연애감정 얘기하셔서 재미있다 했더니, 연애감정의 대상이 사모님이셨네요. (정 : 하하하) 사랑 고백을 그렇게 하시는데, 이제 끝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22년 동안 한 호도 빠지지 않고 발간된 현대시학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정진규 : 그래요. 얘기하자면 내 생애에 있어서 여러 가지 모멸이라든가 상처라든가 이런 것이 있었다면 현대시학 때문에 있었고, 또 사랑이라든가 충만이라든가 그런 긍정적인 대목이란 것도 있었다면 그것도 현대시학 때문에 있었어요. 현대시학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기도 했고 충만을 느끼기도 했고 현대시학을 통해서 모멸 상처가 오기도 했습니다. 시라는 것의 속성과 사회적인 속성이 같더라구요. 우리가 시를 쓸 때는 좋잖아요. 충만감이 오고 몰입할 수도 있고. 한데 현실적으로 보면 그게 돈이 되길해요 뭐가 되길해요, 아무것도 안되잖아요. 요즘에 와서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은. 시 때문에 상처와 모멸이 오는 것을 나는 체험했어요, 현대시학을 만들면서. 거의 시 쓰는 사람들 때문에 그런 것이에요. 시 쓰는 사람들의 시 때문에 오는 개인적인 상처와 모멸, 그것이 현대시학을 통해서 나타나면, 현대시학으로 화살이 날아 오기도 하고 그러더라고. 쉽게 얘기하자면 자기가 현대시학을 통해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있을 것 아니에요. 그러면 그것 때문에 그냥 정진규가 과녁이 되는 것이지요.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말을 안 하고 지냈으나, 그냥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시를 쓰기 때문에 22년을 견딜 수 있었고, 또 현대시학을 만들 때의 행복과 충만, 만들고 나면 그런 모멸도 있었고 더불어 현실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도 따르고. 그런 어려움, 그런 것이 있는데, 이상하게 젊은 시인들의 시를 받아서 그 시가 지닌 싱싱함을 느낄 때의 행복,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예쁘게 앉힐까, 편집을 고민할 때의 그 재미, 재미라면 재미야. 쾌락이 있어요. 쾌락이 있고, 만들고 나면 ‘하~’하는 성취감이 있어요. 그게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22년을 해 온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나 좋아 한 짓이야. 결국은 내가 좋아서 한 짓이지. 이게 싫었다면 못했을 것이라구요. 희생과 봉사의 정신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라고 봐요. 좋으니까 하는 것이지. 그래서 어쩌다 흐르다 보니까, 이렇게 22년이 넘게 흐른 것이여. 내일 모레가 500호여, 500호인데 한 호의 결호도 없어요. 그렇게 했어요. 그것 하나는 내 평생에 현실적으로 참 칭찬받을 일했다, 나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칭찬받을 일이 또 있어요. 여기 저기 흩어진 조상들의 산소를 한군데 이렇게 모신 것, 그리고 내가 스스로 묘지기가 된 것. 그 두 가지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한 일이 아닌가! 달리 한 것이라면 자식들 낳은 것이겠지. 자식들 지들이 다 컸는데. 허 허 허. 장석원 : 선생님께서 현대시학을 해오시면서, 게재되는 시를 전부 읽으시면서, 선생님께서는 젊은 사람들 시를 보면서 늘 갱신하신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선생님께서는 소위 ‘미래파’라고 불렸던 2000년대의 젊은 시인들의 시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정진규 : 그 대목이 우리 시단의 큰 관심사이기도 하고, 우리 나이 되는 사람들의 관심사이기도 하고 그래요. 그래서 두 가지 측면이 있겠지요. 긍정적인 측면도 있고 비판적인 측면도 있다고 생각해요. 두 가지 면에서 다 인정을 해요. 비판적인 요소도 있고, 긍정적인 요소도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문제는 시라고 하는 본질과 그것의 전개 지향에 장애 요인 같은 것이 좀 보인다는 것. 왜냐하면 아까 얘기한 진정성, 예술의 진정성 같은 것이 좀 부족하지 않은가 하고 생각합니다. 요즘 시인들, 재주는 있는데 작품을 읽어보면 진중함이 느껴지지를 않아. 한 편의 작품을 두고 읽을 때도 그 생명적, 예술적 질서가 감지되어야 하는데 그런 질서와 진정성이 조금 외면되지 않나…… 표현은 다양해요. 그러고 창의적인 실험성도 우수하다고 볼 수 있어요. 다 읽고 나서 이 시가 결국은 나에게 무엇을 주느냐, 이 사람이 자기 추구를 어떻게 하고 있느냐, 이런 것을 들여다보면 그런 것이 많이 느껴져서 걱정이에요. 흔한 얘기를 하자면, 시를 쓰다가 안 써도 그만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시작(詩作)을 평생의 업으로 생각해야 되는데, 그것이 비록 현실적으로 보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해도, 그것을 바꿀 수도 있고 던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걱정이라면 걱정이에요. 다양성, 실험성, 능란한 기교 같은 것은 아주 좋은 저력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정성이 추구되지 않으면 그 특출한 능력이 한때의 재주에 떨어질 것이라고 봐요. 특히 여성시의 문제점이 보이는 것 같아요. 시의 초월성, 예술적 자율성 등등을 지향하는 것은 좋은데, 어떤 시들은 ‘격조 있게’라는 말을 싫어하는 듯해요. 보편적으로 말하면, ‘해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니 해체가 좋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유행한다는 것이 문제겠지요. 어떤 시들은 그 과격한 내용을 남성성과 차별화시키는 수단으로 봐요. 관음증, 그 자체가 하나의 흐름이 되었어요. 관음적 과격성을 보이여서 상대적 수월성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 같아 아쉬워요.
멈춤없이, 더 멀리 장석원 : 끝으로, 앞으로 선생님께서 추진하실 문학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나의 시탐(詩貪)은 벗어날 길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세요. 정진규 : 시론집을 낼 예정이에요. 오래전부터 조금씩 써왔던 것을 정리해서 곧 출간할 것입니다. 시론이 있는 시인이 되는 것이지요. 앞에서 말한 산문시, 율려 등등의 내용이 종합되고 정리될 것이에요. ‘문학동네’에서 동시집을 하자고 해서 동시집도 내기로 했어요. 지금 나는 글 빚쟁이에요. 동시 30~40편을 썼어요. 이곳에 와서 아이들과 친구가 되다 보니, 아이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옮겨 놓는 순간, 시가 되더라구요. 시의 원형을 이루는 근원적인 요소를 발견했어요. 동시집을 내야 되는 이유인즉슨, 이 동네 아이들이 내 서재에 와서 보고 하는 말이, “할아버지 가짜시인이지요? 할아버지 시 중에서 동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동시집을 내야겠다 생각했어요. 보체리 내 꼬마 친구들에게 선물하려구요. 다른 일로는 내 시집 껍질을 번역하겠다고 해서 영어로 해 달라고 했어요. 독일어는 있으니까. 이런 것들이 최근에 하려고 하는 일이에요. 간절한, 또 하나 바람이 있다면, 더 건강해져서 술을 신나게 먹어보았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계속 시를 쓰고 싶어요. 쉬지 않고, 멈춤없이, 손이 쉬지 않게, 젊은 시를, 계속 탐해야죠. 장석원 : 선생님의 시 정신, 그것을 현현하는 시의 몸을 체감하는 자리였습니다. 소중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빗방울도 잦아들었으니, 이제 맛있는 점심 잡수시러 가실까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 이현채 시인은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2008년 계간 <창작21> 여름호로 등단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문학in>>의 "따끈따끈한 시in"코너와 "오늘의 시" 코너 편집담당을 맡고 있으며, 현대시학, 애지문학회, 시와 세계, 시에문학회, 시산맥 회원이며 창작21 작가회 회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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