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과 20150581 김현진 - 수당고택, 추사고택을 다녀와서.hwp
<조선시대 생활사 답사 레포트>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을 찾아서
-수당고택과 추사고택을 다녀와서-
역사학과 20150581 김현진
Ⅰ. 들어가며
‘field가 선생이다!’ 박경하 교수님께서 수업 시간에 늘 하시는 말씀이다. 역사는 사료를 읽고 분석, 비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남아있는 역사 현장을 가서 배우는 것이 가장 오래 남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항상 역사 현장을 강조하시는 교수님께서는 이번 조선시대 생활사 수업에서 3번의 답사 현장을 제공해주셨다. 필자는 그 중 2번째인 예산 수당고택과 추사고택을 선택하여 답사를 다녀왔다.
현재는 2016년 21세기 사회로 과거 조선시대의 흔적을 자세히 찾지 않으면 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역사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는 현장을 찾아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현장을 찾아가도 문화재 등 형태, 정적으로만 남아 있어 제공해주는 정보로 상상하는 것이 전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에 찾아가게 되는 2가지의 유적지 중 수당고택은 마치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분이 조선시대를 생생히 이야기 해주실 분이 계셨다. 수업시간에 배운 조선시대의 양반은 자그마한 족보를 가지며 자신의 집안과 비교하며 관련이 있는지 확인하고, 자신의 조상, 집안을 이야기하며 지냈다. 지금은 간혹 어르신들이 성씨, 본관을 묻기는 하지만 위에 언급한 조선시대의 풍속은 거의 없어졌다. 요즘 세대의 생각으로 ‘혈통이 뭐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족보를 비교한다고 해서 형식적이고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조상을 섬기고, 자랑스러워하는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지배적인 사상. 선비정신을 책으로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가 현장의 분위기를 느낀다는 생각에 기대 되었다.
Ⅱ. 수당고택
약 3시간에 걸쳐 도착한 곳은 충남예산에 위치한 수당고택이었다. 버스에서 자느라 정신없었던 필자는 버스에 내리자 현실과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정면에는 고택이 보이고 그 주위에는 산으로 둘러싼 자연이었기 때문이다. 고택 앞에는 자그마한 텃밭도 있고 속세와 분리되어 있는 듯 했다. 고택을 향해 조금씩 걷자 수당 기념관 앞에 마치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분이라고 이야기 한 ‘이문원 교수님’이 계셨다. 현재 수당고택과 기념관이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이문원 교수님의 노력덕분이었다. 원래 이 지역은 저수지를 만들 목적으로 물에 잠길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문원 교수님께서는 조상들의 얼을 지키고자 항의하여 물에 잠기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중앙대학교 교육학과의 교수에서 퇴직하시고 찾아주는 제자, 방문객을 위하여 서울에 집을 두고 여기서 생활하신다고 하셨다. 이 설명은 이문원 교수님께서 직접 하지 않으셨지만 이 모습이 바로 선비정신이고 조상에 대한 존경심을 대단히 느낄 수 있었다.
수당기념관은 1대 수당 이남규 선생부터 4대 이장원 까지 모셔둔 곳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굴복하지 않은 항일정신을 보관한 곳이다. 이 4대는 안타깝지만 자랑스럽게도 항일을 하시다가 순국하셨다. 1대 이남규 와 2대 이충구는 함께 돌아가셨는데, 이충구는 일본의 칼부림에 아버지인 이남규를 지키다가 돌아가셨고, 곳이어 이남규도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3대 이승복은 연해주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귀국 후 신간회에서 활동을 하였고 4대는 해병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6·25 전쟁 때 순국하셨다. 양반가로서 4대 모두가 항일운동을 하기는 쉽지 않은데 집안 대대로 이어온 정신을 기릴 수밖에 없었다. 이문원 교수님께서 그토록 고택이 물에 잠기는 것을 막고 여든이 다 되었어도 이곳에 남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기념관을 다 둘러보고 사랑채에 왔을 때에는 이문원 교수님이 우리 모두가 앉을 수 있도록 대부분의 문을 열어 올리셨다. 수당 고택 사랑채만의 특징은 2층 기단이었다. 사랑채 내부가 2층 기단으로 구성되어 수업 시에는 2층에 선생님, 훈장님이 앉으시고 아래층에 학생들이 앉아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2층에도 아래층과 구분 지을 수 있도록 문이 있어 분리하여 생활의 공간으로도 쓸 수 있었다. 2층에 이문원 교수님이 앉으셔서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맞받아치는 시원한 바람도 맡고 탁 트인 산도 보며 조선시대 양반의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 1 - 분리한 위패의 내부>
이문원 교수님께서는 사당을 보여주신다며 안채를 지나 현재 교수님께서 지내시는 가택으로 건너갔다. 사당은 돌아가신 조상을 기리며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따로 건물을 지어 모시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집안의 사당은 집안에 위치하여 특이한 점으로 꼽을 수 있었다. 책에서는 사당을 공부하면서 사진으로 볼 수 있었지만 실제로 그 내부까지 자세히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곳은 조상을 모시는 귀한 곳으로 여기까지 보여줄 생각은 없으셨으나 교수님께서 사당 내부 까지 보여주셨다.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 사당 내부에는 네 분의 위패를 모시는 신주가 있었다. ‘사당 내부까지는 보여주셔도 설마 위패까지 다 보여줄까?’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문원 교수님께서는 과감히 위패를 보여주셨다. 가운데는 옴폭 파여 있고 양옆에 한자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이 신주는 뒤로 분리가 되는 특이한 형태였다. 아무리 대학교 제자들이라고 하지만, 사당의 위패, 그리고 그 내부까지 자세히 보여주는 이문원 교수님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위패의 한자를 설명해주시면서, 4대조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는 자부심, 선비정신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사진 2 - 이문원 교수님과 함께>
Ⅲ. 추사고택
<사진 3 - 추사 기념관> <사진 4 - 추사 고택 안채에서 본 모습>
맛있는 메기 메운탕을 먹고 난 후, 추사고택을 향해 갔다. 추사고택의 동쪽 편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님의 기념관이 있었고 그 사이에는 추사묘가 있었고 우물, 월성위묘 등 추사 김정희 선생을 기리 것이 다양하게 있었다. 먼저, 추사 기념관을 들렀다. 추사 기념관에는 우리를 제외하고 문화해설사의 해설을 듣는 다른 관광객들도 많았다. ‘추사’ 김정희,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이다. 추사체, 명필가로 잘 알려진 추사 김정희 선생은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에서 태어나셨다. 추사의 고조부 김흥경은 영의정을 지냈고, 그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을 하였다. 김한신의 양자, 김이주가 김노영을 낳았고, 김정희가 바로 김노영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의 집안은 영의정, 부마로 지내면서 명문가로 올라섰다. 추사는 어릴 적부터 글씨에 소질을 보였으며, 후에 스승 옹방강과 완원의 가르침에 그의 글씨는 더욱 날개를 달기 시작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그의 집안은 명문가였고, 추사는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 아래에서 순탄하게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두 갈래로 나누자면, 유배 전과 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당쟁에 휘둘려 제주도와 함경도에서 10여 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인생은 바뀌었고, 그의 글씨까지 영향을 주었다. 유배를 가기 전에는 추사의 글에는 귀족적이고 귀풍이 넘쳤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신도 본인의 글씨에 심취하여, 다른 사람이 쓴 현판을 떼어 자신이 다시 써 달은 유명한 일화가 있다. 추사가 귀향을 가는 도중 원교가 쓴 대둔사 대웅보전의 현판을 보곤, 그 글씨를 비판하여 자신이 쓴 현판을 새로 달았다. 하지만 10여 년의 귀향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예전의 자신이 너무나도 경솔했다는 것을 깨우치고 다시 원교의 현판을 달았다고 한다. 유배생활을 하면서 추사의 글씨체 또한 변했다고 하는데 대둔사 대웅보전, 화암사 무량수각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귀향 가기 전 원교의 현판을 떼고 다시 쓴 대둔사 대웅보전 현판의 글씨는 날렵하고 귀족의 귀풍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귀향 후 화암사 무량수각 현판을 보면 날렵하던 그 글씨체는 어디가고 없고 그만의 글씨체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글씨체는 유배 전의 글씨체 보다는 날렵하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담백한 심성을 볼 수 있었다. 추사 김정희 기념관에서 영상을 하나 보고 추사 고택을 향해 갔다. 진짜 추사 고택은 지금 소실되고 없었고 다른 곳에 있는 고택을 들고 와 여기에 둔 것이라고 했다. 추사 고택을 처음 들어갔을 때에는 이게 다인가? 라고 생각할 정도로 작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다른 건물들이 나왔고, 처음의 생각과 다른 느낌이 들었다. 고택을 안으로 들어갈수록 느낀 것인데 이 고택이 있는 지형은 점차 높아졌다. 안채에 이르러 쉬었을 때에는 고택의 위치와 바로 앞 마당의 높이 차이가 났다. 그리고 넓게 드리워진 기와는 햇볕을 가려주고 그늘진 해의 그림자를 보면서 시간을 책정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단순히 고택을 지나가면서 그 형체만 보고 지나왔는데, 앉아서 하나 하나 감상을 하니, 그 안에는 과학이 있었고 선조들의 여유가 있었다.
Ⅳ. 마무리하며
역사학과 학도로서 매 학기 마다 3박 4일의 답사를 떠난다. 매 학기 마다 떠나는 정기답사는 3박 4일의 일정이기 때문에 다소 부담감이 느껴지고 계속 차를 타고 일정을 수행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지쳤었다. 박경하 교수님과 함께 가는 당일치기 답사도 지치지 않을 까 걱정하였는데, 3박 4일과는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박경하 교수님의 말씀처럼 역사의 배움은 현장이 중요하고, 직접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오래 남는다.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2학년이 반이 흐른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많은 답사지를 가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서울로 대학을 온다면 국립중앙박물관에 자주 가서 유물을 공부하자라는 다짐 또한 지키지 못하고 있다. 학기 중에는 학교 생활에 집중하여 다음에 가야지 하는 마음이 벌써 1년이 지나 2년을 향해 가고 있다. 하지만, 이번 충남 예산군의 답사를 통하여 다시 한 번 마음가짐을 다잡기로 하였다. 이문원 교수님께서는 자신의 선조의 역사를 보존하겠다는 마음으로 서울에서 내려와 이곳에서 생활하였고, 박경하 교수님께서는 이 답사를 포함하여 3번의 답사를 주관하셨다. 역사를 가르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있기 때문에, 몸이 지치더라도 일정들을 다 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한창 청춘인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미루고, 사실은 가기 귀찮아서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었던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귀찮다는 핑계로 인생을 미루지 않고, 생각이 나면 즉시 행동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이번 충남 예산군의 답사에서 선조들을 뵙고, 이문원 교수님과 박경하 교수님을 통하여 많은 가르침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