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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 2022년 여름호
청년 임화 : 여섯 번째 이야기
‘네거리의 순이’와 행복한 청춘
이형권(문학평론가)
임화는 거리에서 태어나 거리에서 살았다. 종로 네거리 출신인 그는 홈 패인 공간인 집보다는 매끄러운 공간인 거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언제나 거리를 배회하면서 문학적, 사상적으로 전위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다. 그가 추구한 거리의 삶은 1925년 17세의 나이에 보성중학교를 중퇴하면서 교육마저도 포기한 데서 출발한다. 임화가 독학의 길로 들어선 이후, 1927년에는 자애로웠던 어머니와 사별하면서 그의 삶은 집에서 더 멀어져 갔다. 가령 “20세 전후의 청년 시대 중학교를 5년급에 접어 던지고 난 지 2년 후 어머니도 돌아가고 자산도 파하고 나는 집에도 안 들어가고 서울 거리를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헤매었습니다. 괴로운 때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강한 행복에 불탔습니다.”라는 고백에는 그러한 사정이 드러난다. 그의 가출은 ‘행복한 괴로움’의 시기를 살아가는 한 청년의 하릴없는 삶의 방식이었다. 개인의 집이 파산한 동시에 공동체의 집인 나라마저 부재하던 일제강점기에, 그는 거리에서 행복을 찾아 나섰다.
임화의 가출은 하나의 문학적 상징이다. 그의 가출은 집을 부정하고 거리의 문학을 지향하는 계기였는데, 이때 거리의 문학은 광장의 문학 혹은 프롤레타리아를 옹호하기 위한 진보주의 문학과 다르지 않다. 임화의 작품에서 이러한 거리의 문학이 본격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네거리 계열의 시편들을 주목할 만하다. 「네거리의 순이」(1929년), 「다시 네거리에서」(1935), 「9월 12일-1945년, 또다시 네거리에서」(1945년) 등이 그것이다. 네거리 시편들은 임화 문학의 원점회귀 단위라고 할 정도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임화에게 종로 네거리는 아련한 유년의 추억이 남아있는 삶과 문학의 원적지로서 인생의 중요한 국면마다 그곳을 찾았다. 그곳은 그의 삶과 시를 지배했던 노동 투쟁의 결의와 행복감, 노동 운동의 좌절감과 그 극복 의지, 사회주의 계급투쟁을 위한 용기 등이 배태된 장소였다.
임화의 시 가운데 종로 네거리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네거리의 순이」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29년은 자본주의의 어두운 그림자로서 세계적인 대공황이 시작되고, 국내에서는 산업별 노조 운동이 전국적인 조직의 단일조직을 결성하여 전국적 연대와 단결을 기반으로 한 투쟁을 전개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은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를 배경으로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채택한 조직의 변화(소부르주아 지식인과 학생 중심에서 노동자와 빈농을 중심으로)와 관계된다.이즈음에 우리나라에서 전개된 노동 운동은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받으려는 민족운동이자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위한 계급 운동이었다. 임화의 시 「네거리의 순이」는 이러한 사회 상황을 배경으로 삼는다.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 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
그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쌍한 도시 종로 복판에 순이야!
너와 나는 지나간 꽃 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 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었지!
그리하여 너는 이 믿지 못할 얼굴 하얀 오빠를 염려하고,
오빠는 가냘픈 너를 근심하는,
서글프고 가난한 그 날 속에서도,
순이야,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었고,
내 사랑하는 동무는……
청년의 연인 근로하는 여자 너를 가졌었다.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에 우는 아픈 그 시절,
기계 소리에 말려 흩어지는 우리들의 참새 너희들의 콧노래와
언 눈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와 더불어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청년과 너의 따듯한 귓속 다정한 웃음으로
우리들의 청춘은 참말로 꽃다웠고,
언 밥이 주림보다도 쓰리게
가난한 청춘을 울리는 날,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따듯한 품속에 안아주던 것은
오직 하나 거리에서 만나 거리에서 헤어지며,
골목 뒤에서 중얼대고 일터에서 충성되던
꺼질 줄 모르는 청춘의 정열 그것이었다.
비할 데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 우리의 머리 위에 빛났더냐?
그러나 이 가장 귀중한 너 나의 사이에서
한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느냐?
어찌 된 일이냐?
순이야, 이것은……
너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멀쩡한 사실이 아니냐?
보아라!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
이 눈물 나는 가난한 젊은 날이 가진
불쌍한 즐거움을 노리는 마음하고,
그 조그만 참말로 풍선보다 엷은 숨을 안 깨치려는 간지런 마음하고,
말하여 보아라, 이곳에 가득 찬 고마운 젊은이들아!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 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또 이거 봐라, 어서.
이 사내도 네 커다란 오빠를……
남은 것이라고는 때 묻은 넥타이 하나뿐이 아니냐!
오오, 눈보라는 ‘트럭’처럼 길거리를 휘몰아 간다.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냐!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여자의 연인을 위하여……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네거리의 순이」 전문)
이 시는 조선지광 1929년 1월호에 발표된 것이다.시간적 배경은 겨울이고, 공간적 배경은 종로 네거리이다. 겨울은 보통 시련을 상징하는 계절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나”와 “너(누이동생)”와 “청년”은 노동 운동을 하면서 겨울과 같이 많은 시련을 겪고 있다. “나”와 “너”는 가난과 소외 속에서 그러한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열렬한 투쟁을 실천하고 있는 청년들이다. 그들이 전개하는 투쟁의 사연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시의 곳곳에 투쟁 의지를 강렬하다는 사실만은 또렷이 드러나 있다. 또한, 공간적 배경으로 종로 네거리를 택한 이유는 그곳이 임화 시인의 고향인 동시에 당시 우리나라 노동 운동의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종로에는 온갖 사회단체가 극성을 이루었고, ‘신사회 건설’과 ‘계급투쟁’이란 구호가 난무하고, 이를 알리는 삐라와 벽보가 휘날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집회가 열렸”던 장소이다.
「네거리의 순이」는 모두 7연으로 구성되었다. 그 내용은 “나”가 전해주는 “너”(누이)와 “청년”의 사랑과 노동 운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점은 대체적으로는 현재이지만, 2연과 3연은 과거의 시점으로 진술되고 있다.
1연 : 용감한 청년의 수감과 누이의 슬픔(현재)
2연 : 누이의 시련과 청년을 향한 사랑(과거)
3연 : 노동 운동의 열정과 즐거움(과거)
4연 : 청년의 부재와 노동자 탄압에 대한 비판(현재)
5연 : 감방에 갇힌 청년과 노동 운동의 위축(현재)
6연 : 청년의 노동 운동을 계승하려는 의지(현재)
7연 : 노동 운동으로 행복한 청춘(현재)
이 시는 “너와 나의 청춘은 행복하다”라는 주제로 귀결된다. 1연에서 6연까지는 “너와 나”가 행복한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1연은 “나”가 누이동생인 “너”를 위로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사랑하는 애인인 “청년”을 감방으로 보내고 난 누이동생은 마음의 방황을 하고 있다. 첫 구절 “어디를 간단 말이야”라고 묻는 것은 오빠로서 누이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감방에 간 “청년”을 찾아 헤매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며 누이동생의 방황을 만류하고 있다. 끝 구절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역시 누이동생의 심란한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말이다. “나”는 지금 감옥에 갇혀서 돌아올 수 없는 “청년”을 상기시키면서 슬픔에 빠진 누이동생을 위로하고 있다.
2연은 “너”와 “나”의 시련, 즉 “꽃 피는 봄에 사랑하는 한 어머니를/ 눈물 나는 가난 속에서 여의”던 사실을 떠올리고 있다. “어머니”의 상실은 삶의 중심을 잃어버린 것인데, 그 배경이 “눈물 나는 가난”이라는 사실은 그 상실감을 더욱 강조하는 구실을 한다. 이는 임화 자신이 실제로 겪은 가난한 생활과 어머니와의 사별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나”는 고통스러운 상실감 속에서도 “너는 마음을 맡길 믿음성 있는 이곳 청년을 가졌”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나”는 “너”가 “근로하는 여자”로서 그 “용감한 사내”의 애인이라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시련에 빠진 누이동생을 위로하고자 하는 오빠의 따뜻한 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3연은 “겨울날 찬 눈보라”와 같은 고난의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청년”이 감옥으로 들어가기 전에 노동 운동을 하던 때를 떠올린 것이다. “아픈 그 시절”은 비록 “가난한 청춘”으로 살았을지라도 노동 운동을 향한 열정이 불타오르던 때였다. 더구나 그때는 “청년과 너의 따뜻한 귓속 다정한 웃음”이 피어나던 사랑의 시간이었다. 하여 그 시간에 피어나던 “우리들의 청춘은 참말로 꽃다웠”다고 한다. 노동 운동을 위해 “거리에서 만나 거리에서 헤어지며” “청춘의 정열”을 불태웠던 아름다운 시절을 떠올리는 것이다. 하여 “나”는 그동안의 노동 투쟁에 대해 “비할 데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얼마나 큰 즐거움이” 컸는지를 생각하면서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4연은 “청년”이 감옥에 갇힌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다. 3연에서처럼 “너”와 “나”가 함께 노동 운동을 했던 “한 청년은 대체 어디로 갔느냐?” 묻고 있다. 노동자로서 자신의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던 “청년”을 감옥으로 보낸 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 혹은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는 부르주아 계급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청년”으로 대변되는 노동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앗아간 존재이다. 그들은 노동자가 누릴 기본적 생존권을 빼앗아 자신들의 이기적 욕망을 채우는 자들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삶을 요구하는 수많은 조선의 “청년”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감옥으로 보내졌다. “나”는 이러한 사실에 강하게 분노하면서 “어느 누가 참말로 도적놈이냐?”라고 묻고 있다. 감옥에 가야 할 “도적놈”은 노동자들은 착취하고 핍박한 그들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5연에서는 “청년”을 감옥 생활을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나”는 “청년”이 “젊은 날을 부지런한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낸다. 출소할 날을 손꼽으면서 “달력”의 날짜를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청년”의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다. 마음이 더 아픈 것은 “청년”이 억울하게 갇혀 있지만, “나”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남은 것이라고는 때 묻은 넥타이 하나뿐”인 무력하고 가난한 지식인일 뿐이다. 그저 “눈보라”만 휘몰아치는 종로 네거리를 망연히 바라고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다.
6연은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새로운 투쟁의 의지를 다진다. “나”는 노동 투쟁의 장소인 “종로 네거리”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곳은 “청년”과 함께 노동 투쟁을 가열하게 실천했던, 아직도 수많은 노동자의 열정이 살아 숨 쉬는 장소이다. “나”는 그곳이 현재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시련을 겪고 있지만, 다시 투쟁의 불길이 타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너와 나는 번개처럼두 손을 잡고,/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라고 한다. 이 청유는 그동안 열렬하게 실천해온 “청년”의 노동 투쟁을 계승하여 미래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나”는 그것만이 감옥에 갇힌 “네 사내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강조한다. 이 대목은 이 시 전체적인 흐름을 반전시킨다. 패배주의에 함몰된 절망적인 현재를 벗어나 새로운 노동 투쟁을 통해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희망의 미래를 추구하는 것이다.
7연은 한 문장의 짧은 시구에 불과하지만, 시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이 너와 나의 행복된 청춘이 아니냐?”는 질문 속에는 ‘그렇다’라는 긍정의 답변이 내포되어 있다. 이 문장에서 “이것”의 함의는 중요하다. “이것”은 “나”의 동지이자 “너” 연인인 “청년”이 감옥으로 가고, “나”와 “너”의 노동 운동이 시련 속에 있을지라도, 희망을 잃지 않고 노동 투쟁을 계승해 나가는 일을 일컫는다. 즉 “이것”은 계급 해방이라는 이상을 지향하면서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가 “너”와 “청년”이 “행복된 청춘”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이 시는 강고한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서정시 특유의 정서적 울림을 확보하고 있다. 그것은 편지글 형식을 취하면서 감정적 언어를 빈도 높게 활용하는 표현 방식과 관련된다. 편지글의 화자인 “나”는 창백한 지식인으로서 노동 운동가이고, 청자는 “너”는 “나”의 누이동생이다. 노동 투쟁을 주제로 하면서도 편지글이 지니는 친근하고 진솔한 분위기에 감정의 차원이 결합하면서 서정성을 고양하고 있다. 가령 “서글프고 가난한 그날”, “가난한 청춘을 울리는, 눈물 나는 가난한 젊은 날”, “비할 데 없는 괴로움”, “이곳에 가득 찬 고마운 젊은이들아!” 등과 같이 서글픔, 슬픔, 괴로움, 고마움과 같은 감정이 직접 드러난다. 이들은 이데올로기 시가 지닌 관념성과 경직성을 순화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다양한 수사법도 활용도 이 시의 서정성을 고양하는 데 일조한다. 예컨대 “겨울날 찬 눈보라가 유리창에 우는”의 의인법, “오오”나 “!”의 영탄법, “너와 나는 번개처럼, 눈보라는 트럭처럼”의 직유법, “순이야”의 돈호법 등이 그것이다. “얼마나 큰 즐거움이 우리의 머리 위에서 빛났더냐?”와 같은 설의법도 여러 차례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장치들은 문학적 감성을 고조시키면서 청중이나 독자를 이념적으로 선동하고자 하는 이 시의 목적에 효과적으로 부합한다.
그러나, 이 시에 등장하는 이야기나 계급의식이 구체성을 갖추지 못한 채, 개괄적이고 인상적인 진술에 머물러 버리고 말았다는 점에서 아쉽다. 즉 이야기의 중심인 “순이”와 “청년”, 그리고 “나”의 정체성이나 그들의 노동 투쟁이 서사성을 충실히 획득하고 있지 못하다. “순이”와 “청년”의 사랑 이야기도 그렇다. 본래 서사시의 사건은 구체적 형상성을 띠면서 그것이 현실 문제를 상징하거나 알레고리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사건은 막연하고 암시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 이런 점은 이어서 발표한 「우리 오빠와 화로」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우리 오빠와 화로의 “오빠”는 인쇄소에 근무하는 청년노동자로서 노동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다. “나”는 동생 “영남이”와 옥바라지를 위해 봉투를 붙이는 일을 하고 있다. 이처럼 구체성을 확보하면서도 깨진 “화로”와 “화젓가락”을 통해 노동 투쟁으로 인한 시련과 그 극복 의지라는 상징성을 확보하고 있다.
「네거리의 순이」에서 들려준 거리의 이야기는 「다시 네거리에서」로 이어진다. 이 작품은 「네거리의 순이」 이후 6년만인 1935년에 발표된 것이다. 이 시기는 카프가 해산된 해로서 임화의 문학적 여정에 깊은 상처를 입었던 때이다. 카프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될 당시 카프의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다. 카프 해산은 맹원에 대한 1, 2차 검거의 과정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1931년의 1차 검거 사건에 이은 1934년의 2차 검거 사건으로 카프는 존립이 불가할 정도의 타격을 입는다. 이듬해 여름까지 80여 명이 검거되고, 병중이었던 임화를 비롯하여 박영희, 한설야, 백철, 이기영 등 23명이 기소되었다. 1935년 10월의 공판에서 대부분 집행 유예가 선고되었으나,일제강점기 최대의 문학단체였던 카프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임화는 카프 해산의 아쉬움 속에서 고향인 종로 네거리를 다시 찾는다. 「다시 네거리」에 와서 “오오 그리운 내 고향의 거리여! 여기는 종로 네거리,/ 나는 왔다. 멀리 낙산 밑 오막살이를 나와 오직/ 네가 네가 보고 싶은 마음에” 왔다고 노래한다. 그러나 그 “마음”은 「네거리의 순이」에서 보였던 강고한 투쟁 의지와 거리가 멀다. “낙산 오막살이”의 집을 나와 종로 네거리로 나온 것은 그 흔적만 남은 지난날의 투쟁을 회억하면서 아쉬워할 따름이다.
간판이 죽 매어 달렸던 낯익은 저 이계(二階)
지금은 신문사의 흰 기(旗)가 죽지를 늘인 너른 마당에,
장꾼같이 웅성대며, 확 불처럼 흩어지는 네 옛 친구들도
아마 대부분은 멀리 가버렸을지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순이(順伊)의 어린 딸이 죽어간 것처럼 쓰러져 갔을지도 모를 것이다.
허나, 일찍이 우리가 안 몇 사람의 위대한 청년들과 같이,
진실로 용감한 영웅의 단(熱) 한 발자국이 네 위에 끊인 적이 있었는가?
나는 이들 모든 새 세대의 얼굴을 하나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건재하라! 그대들의 쓰라린 앞길에 광영이 있으라”고
원컨대 거리여! 그들 모두에게 전하여다오!
잘 있거라! 고향의 거리여!
그리고 그들 청년들에게 은혜로우라.
지금 돌아가 내 다시 일어나지를 못한 채 죽어가도
불쌍한 도시! 종로 네거리여! 사랑하는 내 순이야!
나는 뉘우침도 부탁도 아무것도 유언장 위에 적지 않으리라.(「다시 네거리에서」 부분)
이 시에서 종로 네거리는 “불쌍한 도시!”이다. 그곳의 주인공 순이는 「네거리의 순이」와 같이 열렬한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노동 운동가가 아니다. 순이는 노동 운동을 하다가 “어린 딸”을 잃어버린 비극의 주인공이다. 종로 네거리는 “순이”와 함께 투쟁했던 “옛 친구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공허한 장소이다. 한 시절 “진실로 “했던 열렬한 영웅”의 장소였던 종로 네거리가 이제는 낯선 “새 세대의 얼굴들”이 배회하는 장소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새로운 “얼굴들”에게 “정말 건재하라”, “앞길에 광영이 있으라” 염원하지만, 「네거리의 순이」에서 보여주었던 투쟁의 의지는 약해진 모습이다. “나”는 이제 투쟁의 주인공이 아니라 관망자의 위치에 머물고 있다. “내 다시 일어나지 못해 죽어가도” 하릴없이 순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하여 죽음의 순간이 다가온다 해도 “뉘우침도 부탁도 아무것도 유언장 위에 적지 않으리라”라고 한다. 이념이나 삶에 대한 애착이 사라진 채 낙담한 모습이다. 이때 “나”는 표정에는 카프 해산 이후 파시즘이 강화되는 1930년대 후반 무력해진 임화의 모습이 겹친다.
임화가 종로 네거리를 다시 찾은 것은 광복 직후이다. 이 시기 임화는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설립하여 좌익 문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민족 문학 건설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는 강고한 계급주의 노선만을 고집하지 않으면서 인민적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그래서 강고한 카프 노선을 온전히 되살리려는 비해소파 문인들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임화는 여전히 계급주의 문학을 추구하면서 박헌영의 남조선 노동당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활동한다. 네거리 계열의 마지막 시인 「9월 12일-1945년, 또다시 네거리에서」는 그러한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이 시에서 “나”가 그토록 사랑하던 누이동생 순이는 노동 투쟁의 과정에서 죽은 것으로 소개된다.
저 사람의 이름 부르며
위대한 수령의 만세 부르며
개아미마냥 모여드는
천만의 사람
어데선가
외로이 죽은
나의 누이의 얼굴
찬 옥방(獄房)에 숨 지운
그리운 동무의 모습
모두 다 살아오는 날
그 밑에 전사하리라
노래 부르던 깃발
자꾸만 바라보며
자랑도 재물도 없는
두 아이와
가난한 안해여
가을비 차거운
길가에
노래처럼
죽는 생애의
마지막을 그리워
눈물짓는
한 사람을 위하여
원컨대 용기이어라.(「9월 12일—1945년, 또다시 네거리에서」 부분)
이 시는 1947년 발간한 시집 찬가에 실려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위대한 수령”은 박헌영이다. 시의 제목이 등장하는 “9월 12일”은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 주최로 미군 환영 시가행진이 있던 날이다. 1945년 그날 정오 무렵부터 시작된 이 행사는 20여 개 단체 10,000여 명이 참여했다. 서울 각 방면에서 광화문을 향해 모여든 이 행사에서는 미군 환영과 함께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과 조선공산당 재건을 축하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9월 6일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 인민대표자 대회를 열었고, 조선공산당은 9월 11일 재건되었다. 그래서 9월 12일의 행사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수립과 조선공산당 재건을 축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만 해도 조선인민공화국과 미군정청이 극단적인 갈등으로 나아가지는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인민공화국 처지에서는 미 군정이 건국의 과정에서 자신들의 주도적인 역할을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이 시에서 종로 네거리는 박헌영이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으면서 연설을 하는 장소이다.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종로 네거리에 “개아미처럼 모여드는 천만의 사람”을 보면서 임화는 벅찬 감격에 빠져든다. 그리고 “외로이 죽은/ 나의 누이의 얼굴”과 “찬 옥방(獄房)에 숨 지운/ 그리운 동무”에 대한 부끄럼을 토로한다.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을 했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였던 과거에 회오의 감정을 느끼면서 “모두 다 살아오는 날”을 위해 “전사하리라”고 다짐하고 있다.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는 미 군정청의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으로 임화에게 또 하나의 시련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광복 직후의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박헌영을 추종하면서 공산사회 건설을 위한 “용기”를 간절히 희구하고 있다. 이 희구는 “죽는 생애의/ 마지막을 그리워/ 눈물짓는/ 한 사람을 위”한 것인데, 이때 “한 사람”은 임화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임화의 처지에서 볼 때, 광복은 일제의 자리에 다시 미군이 대체된 것에 불과했을 터, 자본주의를 물리치고 공산사회 건설하기 위한 “용기”가 필요했던 셈이다.
이렇듯, 종로 네거리를 배경으로 하는 세 편의 시는 서정을 바탕으로 한 일련의 서사를 구성한다. 이들 시에서 종로 네거리는 임화가 추구했던 계급주의 문학의 세 꼭짓점이라 할 수 있다. 「네거리의 순이」는 계급주의 문학의 전성기에 창작한 것으로서 프롤레타리아의 노동 운동의 낙관적 전망을 드러낸 작품이고, 「다시 네거리에서」는 계급주의 문학의 쇠퇴기에 창작한 것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노동 운동의 퇴보를 안타까워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1945년, 9월 12일—또다시 네거리에서」는 계급주의 문학의 회복기에 창작한 것으로서 광복 이후의 혼란한 시대 배경 속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용기를 간절히 희구하는 작품이다. 시의 청자이자 주인공인 순이의 변화도 흥미롭다. 「네거리의 순이」에서의 순이는 마음 여린 소녀였으나, 「다시 네거리에서」에서는 어린 딸을 희생시킨 비극적 투사이며, 「9월 12일 1945년, 또다시 네거리에서」는 이미 죽은 실패한 혁명가이다. 그러나 순이는 행복한 청춘의 상징이다. 자신의 신념과 사랑을 위해 모든 열정을 바친 청춘은, 그 결과의 성패와 관계없이 행복한 존재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임화의 청춘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