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2천년 시간여행 글, 편집이 거의 끝나고 마지막 피치를 올리는데 부득 박항서 감독 때문 글을 수정해야 했습니다. 출판사가 무척 싫어하겠지요...... 3월초 출간 기념회를 할까.... LA에서 오신다면 출간기념회 합니다.!!! 회갑기념 책도 무료로 전하고...4박5일 심양록 ,,,, 글 마무리를 위해 다시 심양으로 놀러갈까 고민중..... 다른 글 테마를 하나 잡기는 잡았는데....다 쓰고 ㅎㅎㅎㅎ
53. 호치민의 베트남을 어찌 볼 것인가에 대하여
내가 베트남을 정서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들을 동경한 것은 바오 닌의 단편소설 '0시의 하노이'를 우연한 기회에 접하고서부터다. 베트남 전쟁이 시작될 무렵 4번지 집에 모여 사는 사람들, 가난한 이들의 설날 준비, 열일곱 소녀 짱을 두고 한 판 주먹다짐을 벌이는 쭝과 펫. 설날 저녁 모닥불 가에 모여 앉은 아이들을 그림으로 남겨는 화가 남씨, 척박한 생활고 속에서도 따스하게 스미는 정과 사랑하는 마음이 배경에 깔린 그들의 따뜻한 정서. 나는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이란 소설이 바로 떠올랐다. 어쩌면 이 환경은 일본이나 중국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애틋하며 소소한 배경이다. 전장이 준 피해의식 만큼이나 그들과 우리는 분명 우수어린 어느 동질성이 있다. *2016년 3회 심훈문학대상 수상자는 베트남 작가 바오 닌(Bao Ninhㆍ64)이 선정됐다. 그는 (20. 응우엔주 거리에서) 에 나오는 응우옌주 문학 학교에 입학하여 글쓰기를 시작하였으며, 1991년 첫 장편 《전쟁의 슬픔》을 발표하였다.*
시중에 그들을 얕잡아 보는 것 같은 시선이 실로 당혹스럽다. 정말 그들을 잘 모르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돌이켜 볼 그들 닮은 우리의 과거를 깡그리 무시하는 처사와 똑같은 것이다. 호치민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는 그들로서 우리를 보는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베트남에서 그의 위상은 자타 다 아는 바이지만 그래도 우리로서는 과거 반공이 주름잡던 때와는 환경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평가가 여전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는 공산주의자이다. 그를 보는 관점에 대한 화두는 여전히 우리에게는 기나 긴 숙제다.
영웅에 대한 맹목적 숭배나 신격화가 역사를 왜곡하고 퇴보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가 걸어온 인생을 보자면, 집념으로 뭉친 인간의 끝없는 전진 앞에서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젊은 청년이 소련에서 열린 코민테른에서 식민지가 된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을 의제 화 시키려는 노력은 가히 눈물겹기 까지 하다. 절차와 순서를 뛰어넘어 헤쳐 나가는 과정은 사명감이 아니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동조하고 뭉쳐가며 세를 확장해야하는 조직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가야할 길을 결코 잊지 않았다.
숱한 위장과 탈출, 극한 긴장과 도망이 연속된 삶이었지만, 경직된 사고가 아니라 유연하고 실용적인 태도를 견지한 점은 호치민의 반대편에 선 이들에게도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그로부터 나는 베트남 전쟁의 이면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도 되었다. 중국과 소련의 공산주의 두령을 향한 경쟁과 경계, 사이공 정권의 무능, 아이젠하워, 케네디, 린든 B 존슨, 닉슨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실책, 호치민과 레두안 등 북베트남의 차세대 권력 지형의 변동, 한국 전쟁과 분단 들이 얽히고 얽히며 만들어낸 사안들은 단견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의 위험성이 얼마나 일 편적인지 다시 한 번 실감시켰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던 시정에 급히 도망하게 될 때에는 다른 소지품은 못 가져가도 목민심서만큼은 꼭 들고 도망하였다고 한다. 백성 돌보기를 어버이가 자식 돌보듯이 하라는 다산의 목민정신이 지금 이 시대에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우리 현실이 아닌가.
북베트남군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B52 맹폭 속에서도 주먹 밥 한 덩이와 소금 한줌을 허리춤에 넣고 수 백 킬로 호치민 루트를 따라 묵묵히 전진했다. 이런 인고와 극기가 가능한 마음의 자세는 어디에서부터 비롯한 것일까. 마치 메뚜기와 코끼리 사이의 싸움에 비유할 수 있을 월맹과 미국 간의 전쟁, 그것도 승리로 이어진 데는 호치민의 인격과 지도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남, 북 월남이 서로 전쟁을 하던 중에도 생일이 되면 당시 월남에서도 국민들이 가게 문을 닫고 그의 생일을 기릴 만큼 전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죽게 하면서도 궁전을 지은 북녘의 지도자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공산주의자다.
그는 최고 지도자이었을 때에도 자신을 위해서 특권을 누리지 않았다. 국민들과 동고동락함으로써 이로써 쌓은 국민적 신뢰감을 바탕으로 국가통일까지 이루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게 하였다. 하노이가 해방된 후에도 통독부로 사용되던 관저 건물을 마다하고 소박한 목조건물에서 일생을 살았던 호치민. 그는 늘 고무슬리퍼를 신고 지냈는데, 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할 때도 같은 신발을 신었다. 베트남 민중들에게 '호 아저씨'로 통하던 호치민 주석은 가히 전설 같은 지도자다.
그럼에도 이데올로기 그늘아래 갇힌 우리가 그를 순수한 개념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호치민을 공산주의자로 볼 것인가, 민족주의자로 볼 것인가는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이다.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실현하기 위해 베트남의 독립을 지향했다기보다는 베트남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를 이용한 특면이 있는데다, 단순한 민족주의자로 치부하기에도 사실 아쉬움이 있다. 애국심을 고취하거나 베트남 민족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데도 일부 열중했지만, 국제적공산주의 연대를 구상하는데도 상당히 열심을 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에게 배울 것은 '베트남 독립'이라는 목표 앞에서, 끊임없이 현장과 현실을 돌아보는 한편 국외적으로는 냉정한 평정심을 바탕으로 유려한 외교를 펼쳤으며, 안으로는 소탈한 지도자로서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내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균형감각을 보여줬다는 그런 점이다. 사심 없이 민족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호치민 같은 지도자가 우리에게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요즘 같아서는 가슴에 묵직한 돌이 얹어진 기분이다.
하지만 이제 냉전을 말하는 시대는 사라지고 없다. 70킬로그램 자전거 부대를 동원하여 디 엔 비엔푸로 호치민 루트로 치닫던 시대가 종말을 고한지 40년도 넘는다. 이제는 베트남은 자유와 희망 그리고 한적한 편안함이 엿보인다. 그들의 다양한 모습 속에서 오랜 세월 알고지낸 것 같은 친근함도 따라나선다. 머리 희끗한 우리를 보자 젊은이들은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여 씩 웃고 한국말을 선보이며 잘 하느냐고 되묻기도 하는 발랄한 젊은이들이 인도차이나에 있다.
얼마 전 베트남 총리 응우옌 쑤언 푹은 중국과 갈등을 빚는 남중국해 영유권 사태와 관련,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지지를 요청했다. 이런 베트남 정부의 지지 요청은 한국과 중국이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사드)의 한반도 배치를 놓고 갈등을 빚는 가운데 나와 주목된다. 외교가에서는 한국이 북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대응해 베트남의 적극적인 대북제재 동참을 요청하자 베트남은 그에 상응해 남중국해 사태에 대한 한국의 지지를 당부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현재의 우리와 베트남의 관계이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보다 통일을 이루어 어느 면 현한 입장이다.
섬유산업은 물론 전자, 자동차까지 물밀듯 베트남으로 향하는 지금, 의식도 닮아 갈수록 협력은 증가일로에 있다. 그들과는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가. 좋은 본보기가 마침 2018년 새해 벽두 벌어졌다. “I LOVE KOREA!” “김치 삼겹살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한국!“ ‘한국 사람이면 숙박비가 무료, 어떤 제품이든 무조건 할인!’ 한국을 향한 사랑의 외침이 가득하고 한국 사람만 받을 수 있는 파격적인 혜택이 쏟아진다. 베트남을 방문 중인 한국 관광객들 사이에 놀라운 경험담들이 넘쳐나고 있다. 어디를 가든 한국 사람이라는 말 한마디에 포옹을 해주고 하이 파이브를 한다.
이런 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건 지난 1월 23일, 2018 AFC U-23 (아시아 축구연맹 23세 이하 챔피언십) 4강전에서 베트남이 승리한 날이다. 베트남 축구역사상 국제대회에서 최고 성적을 이뤄낸 그 날, 베트남 전체가 들썩였다. 1975년 베트남이 통일된 이후 국민들이 이렇게까지 열광한 적은 없었고 이렇게 국민들이 하나가 된 것 또한 처음이라고 한다. 마치 2002년 월드컵 당시 우리나라를 떠올리게 하는 베트남의 축구 열기, 그 뒤엔 한국인 박항서 감독이 있었다. 베트남의 히딩크라는 의미로 ‘쌀딩크’, ‘박항서 매직’이라 불리며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박항서 감독!
베트남 축구팀은 FIFA랭킹 112위, 늘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하는 약한 팀이지만 축구를 향한 베트남 국민들의 사랑은 그 어느 나라보다 뜨겁다. 지난해 11월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 감독으로 부임하자 거의 무명에 가까운 한국인 지도자가 국가대표팀을 맡는다며 베트남 국민들은 축구협회를 비난했다. 하지만 AFC U-23 대회가 시작되면서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됐다. 강호 호주를 깨더니, 베트남 역사상 첫 아시아 8강, 4강에 이어 결승전까지 진출했기 때문이다. 1962년 베트남 축구 연맹 창립 이래 최초로 국제 대회 결승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자 경기를 중계하던 앵커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베트남 현지 언론은 박항서 감독을 향한 감사의 메시지를 전했고 베트남 민족의 지도자라 불리는 호치민의 사진 바로 아래에 박감독의 사진이 걸릴 정도로 그는 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심지어 뛰어난 업적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는 노동훈장까지 받으며 베트남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오랜 시간 베트남에서 살아온 교민들은 이렇게 변화된 분위기가 놀랍다고 했다.
그는 베트남에서 그 누구도 못했던 일들을 실현시켰다. 1975년 통일은 이룩했지만 남과 북 감정의 골과 앙금이 남아 있는 국민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지난달 17일 8강을 확정 지은 때로부터 결승전이 열린 27일까지 이 나라 국민들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열흘을 보냈다. 금성홍기로 붉게 물든 거리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베트남이 통일되던 43년 전의 그 날을 떠올렸다. 쩐 다이 꽝 베트남 국가주석은 박 감독에게 훈장으로 사의를 표했고, 응우옌 쑤언 푹 총리는 ‘개선장군’을 맞기 위해 5시간을 기다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푹 총리는 “총리가 된 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5시간을 기다린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고 했다.
그의 쾌거는 어느 실리적 외교보다 값진 가치이다. 이런 친선외교는 누가 억지로 만들래야 만들 수 없는 극적 실화이다. 경제적 가치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은 그들과 같이 공유하고 호흡하며 모두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절호의 찬스가 아닐 수 없다. 젊은이들은 한류열품의 땅 베트남으로 향해야한다. 그들과 같이 호흡하며 하나 되어 창출을 이루어야 한다. 성장 동력이 강한 베트남이 바로 우리 눈앞에 있다. 그 정도 경제속도라 한다면 머지않아 풍족한 나라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본고는 단순히 물질적 문명의 잣대로서가 아니라 여행을 하며 느낀 그들의 정서, 역사 문화 사회 등을 솔직하게 고루 표현했다. 자연적으로 독자들은 그들의 교육열, 성실성, 유교사상 등등으로서 우리 정서 그대로 닮았음을 이해하고 그들을 제대로 알아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 그대로 그들은 성숙하고 인내심 강한 민족주의자들이다. 우리가 또한 그렇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