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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959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숙명여대 국문과 및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이중주'가 당선됐고, 같은 해 첫 장편소설 '새의 선물'로 문학동네 소설상을,
1997년 첫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로 동서문학상을, 1998년 단편소설 '아내의 상자'로 이상문학상을,
2000년 단편소설 '내가 살았던 집'으로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그것은 꿈이었을까', '마이너리그'와 소설집'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등이 있다.
잠이 안 올 때 싱글 몰트 위스키를 마시고 기분좋은 날에는 혼자서 단맛이 적은 레드 와인을, 친구들과는 주로 생맥주로 폭음한다.
우울한 날엔 마시지 않기로 하고 있지만 유연하게 대처한다. 정장이 안 어울린다는 핑계로 청바지와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는다.
하이힐을 신고도 웬만한 등산에 지장이 없다.
만리장성 포함. 하프 마라톤을 여러 번 완주했지만 조금이라도 폐를 끼치는 존재가 될까봐 여럿이 함께 하는 운동은 하지 못한다.
동료들이 재미삼아 ‘개그 소녀상’을 줄 만큼 농담을 좋아하는데 사회적 교양을 저버리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린다.
글을 쓰기 위해 자주 낯선 곳에 가고, 도착하면 맨 먼저 커피집과 산책로를 알아본다.
나무와 나무 이름에 관심이 많지만 집에 화분은 두지 않는다.
3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영화를 보고 3일이 있으면 여행계획을 짠다. 유럽 도시의 카페와 로키산맥 캠핑장 모두 좋아한다.
개콘과 소지섭과 못 밴드와 키비를 좋아하고, 예쁜 사람들을 편애한다. 무신경하고 무례한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평소에 쇼핑을 즐기지 않기 때문에 급히 물건을 비싸게 산다.
정교하거나 독창적인 물건을 좋아하며 마음에 안 드는 건 갖지 않기 때문에 가진 게 별로 없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 마시며 여행계획 짤 때가 가장 즐겁다. 마음에 드는 소설을 썼을 때는 빼고.
<출판사 서평>
이번 두번째 소설집 [행복한 사람은...]에서 작가는 인물에 대한 섬세한 심리묘사와 속도감있는 문체, 치밀한 구성이라는
자신만의 특기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특히 유부남과의 관계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 여성이 사랑과 삶의 의미와 한계를 가늠하고 이로써 사랑의 쓸쓸한 이면을 이해하는
과정을 세밀화처럼 보여주는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은 작가의 득의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유부남은, 결혼이라는 제도의 이점에 스스로의 삶을 기대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권태를 느끼며 일탈욕을 갖는
우리 사회 소시민의 전형이다.
그런 유부남을 사랑하는 스물아홉살의 '나'는 결혼에 대한 허무감을 갖고 있지만 낙태수술 이후 그의 청혼을 받고 자신에게도 가정을
꾸리고자 하는 정서가 있음에 잠시 혼란을 느낀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의 이혼소동에 대해 하소연하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으면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그의 여자이며 그의 아내의 연적이었다. 나는 그의 아내였다. 그고 나다, 나는."이란 깨달음은 '나'로 하여금
유부남과 떠나 홀로 서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
표제작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역시 '이룰 수 없는 사랑' 내지 '결혼제도에 대한 허무감'으로 읽을 수 있다.
사랑하던 두 사람이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해 배다른 남매임을 알고 보이는 태도는 남녀 각기 상이하다.
자살하는 남자는 근친상간에 대한 우리 사회의 통상적인 생각을 드러내나 그를 사랑하는 여성화자는 그런 사회적 통념에 굴하지 않고 남자가 죽은 후에도 그에 대한 사랑을 다짐한다.
이 두 작품은 결혼·가족제도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인생과 사회에 대한 대조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멍]과 [서정시대]가 있다.
[멍]은 인생을 '서정적'으로 대하는 이들에 대해 드물게 작가가 공감을 표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대학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화자를 내세워 작가는, 남편 뒷바라지와 아이의 양육으로 지친 화자의 아내와,
한때 운동권이었지만 부랑자같이 쓸모없는 인생을 살다 간 대학동창 심영규의 아내 한현정의 삶 모두에 애정을 드러낸다.
반면 작가의 '자전소설'이란 이름이 붙기도 했던 [서정시대]는 인생을 진지하고 '서정적'으로 대했던 '나'가 첫사랑의 실패라는 경험을 통해, 냉혹한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는 '농담'이라는 포즈를 취하며 영악해질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뛰어난 두 작품은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이중적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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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연을 끊겠다는 사람일수록 마음 깊이에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강하다.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집착의 대상을 찾는 것이 인간이 견뎌야 할 고독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2. 그녀가 더브(dove)콤플렉스에 대해 말해주었다. 비둘기 암컷은 수컷한테 그렇게 헌신적이래.
그런데 일찍 죽는단다. 자기도 사랑받고 싶었는데 주기만 하니까 허기 때문에 속병이 든 거지.
사람도 그래. 내가 주는 만큼 사실은 받고 싶은 거야. 그러니 한쪽에서 계속 받기만 하는 건 상대를
죽이는 짓이야. 인연을 맺는다는 건 참 끔찍하지 않니? - p.45
3. 네가 죽고 난 지금 그게 조금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야 왜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에게 관대하지?
모두들 죽음을 나쁜 소식이라고 안됐다고 말하는데, 죽었다는 것은 그 사람들에게 손해인가?
이 세상이 그렇게 좋은 곳이야? 물론 죽은 사람에게는 내일이라는 시간이 오지 않지.
모두들 내일이 온다는 말을 희망이 있다는 뜻으로 쓰고 있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리라,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 내일을 향해 뛴다......
그런데 내일이 오는 것,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희망이라는 걸까? . . .
4. 죽음이란 삶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바뀐것 뿐 사라진 건 아니야.
죽은 너를 사랑하는 일이 조금 외롭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런 건 두렵지 않아.
두려운 건 너를 잊는 일이야. 너를 잊게 되면 사랑을 잃는 거니까.
5. 이것은 모두 3년전의 일이다. 시간은 지나간다. 아니다. 시간은 정지해 있고 내가 그곁을 지나쳐 간다.
아침마다 사람들에게 휩쓸려서 특급호텔 주변의 건물들을 스쳐지나갔듯이.
그 건물의 수많은 방을 일일이 두드려 보지 않고 그냥 무심코 지나쳐 걸었듯이.
중요한 것은 뒤돌아 보지 않는 일이다.--- p.53
<스크랩>
내가 은희경님을 알게 된건 내 푸르름이 묻어있던 갓 20을 넘긴 아니면 두 세고개를 더 넘긴 나이였으리라..
창문사이로 비춰드는 햇빛을 스포트라이트인양 의식하며 그 속에서 책을 들여다보는 내가 마냥 드라마틱하다고 생각했던것 같다.
나만의 특별한 분위기,생각 등등 여느 사람과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였던 그때
내가 선택했던 게 아마도 풍부한 감수성과 때로는 이지적인 사고(思考)을 위해 책을 읽었던 것 같다.
그래서 참 많은 책을 읽었다..처음엔 대부분 여류작가들의 소설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많이 읽었었다.
(언젠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말할때가 있을 것이다. 그의 소설속의 인물들을 너무 너무 좋아한다.)
그중 은희경님의 ˝새의 선물˝을 읽고 은희경님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대개의 386세대 여성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80년대 아픔의 잔재라든가
매번 똑같은 불륜을 다루는 태도(예를 들면 얼마전 김윤진이 나왔던 밀애라는 영화의 원작 전경린의 ´내 생애에 꼭 하루뿐인 특별한 날´-개인적으론 좋아한다)
읽고나면 한없이 쓸쓸해지는 그런 비관적인 시각등이 있긴 하지만
은희경님은 남녀를 불문하고(´마이너리그´를 보면알수있다), 세상에서 격리된,혹은 타인과 단절되면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야기 한다.
그들은 친밀한 의사소통이 사라진 현실을 지극히 외로워하며 그 탈출을 시도하는 한편,
그 외로움과 단조로음을 받아들이고 타인에 대한 구차한 의존으로부터 벗어나려고도 한다.
그런 당돌하면서도 슬픈 그러나 또다른 희망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나면 왠지 모를 여운이 오랫동안 남아있다.
´나는 네 웃음소리를 좋아했어´라고 시작하는 이 소설은 죽은 남자를 향하고 있는 한 여자의 독백이다.
어머니가 암으로 죽어갈 때 만난 남자.
그 남자와 가까워졌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 남자가 공중전화부스에서 죽었고, 그 죽음은 자살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녀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죽은 남자를 향해 말한다.
죽었다고 해서 갑자기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냥 죽은 너를 사랑하겠다고,
너 없이 내일을 살아가야하는 내가 죽은 너보다 더 불행하고,
그리고 너를 얼마나 사랑했었는지에 관해 이야기하며 과거를 회상한다.
그 남자는 그녀가 어렸을 적 잠깐 만난 적이 있는 엄마 친구의 아들이고 사실은 그녀와 이복 남매라는 것이다.
결혼전 어머니가 사랑했던 남자의 약혼식에 갔던날 그녀가 생겼고 그녀의 죽은 애인은 아버지의 또다른 자식이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는 말은 그 남자가 죽던 날 그녀가 남자에게 한 이야기이다.
오래도록 비를 맞으며 걷고 집으로 돌아온 남자의 머리를 감겨주었을 때 문득 고개를 들어 몇시냐고 물어보는 남자를 향해
그녀는 농담처럼 말했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아라고.
불가항력적으로 다가오는 운명을 알지 못한, 찰나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인생의 아이러니가 극대화되는 순간이다.
처음 제목을 보고 생각한 것은 시간 가는 것을 모를 정도의 행복함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작품을 다 읽었을때는 제목에서 주는 따뜻함과는 반대로 상당히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항상 일정한 시간동안 일정한 간격을 움직여 변하지 않는 삶의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시계는 규칙적이고 정상적인 느낌을 준다.
그런점에서 이 작품속의 인물들은 시계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자신쪽으로 자꾸 되돌아오는 시계바늘에 찔려 가슴에 푸른 멍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운명과 싸울수도 없고 운명을 거부할 수도 없고,
같은 아픔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상처를 치유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것이 인생의 잔혹함인 것일까..
예전에 읽었지만 다시 한번 더 보게 된 이유가 있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요즘의 나는 시계를 자주 본다.
시간에 쫓겨 머리속 생각은 바쁜데 나의 몸은 앞으로 나가지 않는 그런 꿈을. 얼마전에 꾸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봄처녀 바람난다는 그 봄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진한 사랑에 생각 두근거리는 것일수도...
<스크랩> <은희경, 특유의 글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책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언제부터인가 전화를 할 때마다 시계를 보는 습관이 있다.
상대의 시간을 너무 축내지 않나 싶은 초초감에 시달리곤 한다.
무엇이 나를 초초하게 했는지 글쎄 정확하게 꼬집지는 못하지만 나는 여유롭고 다른 모든 이는 언제나 바쁘다는 것이리라.
은희경의 소설을 읽는 것은 내게 큰 즐거움이다. 이 소설집에 대한 소리는 더구나 나쁘지 않았다.
나는 시계를 자주 보는 사람인데 행복하지 않는 사람일까?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
부도덕한이라는 단어로도 충분하게 옳지 않음이라는 말을 전하고 있는데 명백하게 라는 말을 덧붙임은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진정한 옳음이었을까?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나, 그런 남편을 둔 어머니.
어머니와 나의 대화 속에서 주인공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그러나 결국은 그 모든 것에 속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불행을 몰고 오는지를 새삼 깨닭는다.
사실, 극히 흔한 소재이고 진부한 소재이기도 하다.
마흔이라는 시간적 제약을 두지 않더라고 누구나 사람은 삶속에서 지루해하고 무언가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꿈꾸기도 한다.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집착의 대상을 찾는 것이 인간이 견뎌야 할 고독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17쪽)
이것이 사랑을 찾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인지 생각하게 한다.
[나는 어머니의 딸이며 어머니의 연적이었다. 나는 그의 여자이며 그의 아내의 연적이었다. 나는 그의 아내였다.] (53쪽)
이 글은 왠지 모르게 내게 큰 위안을 주었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방백형태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결말이 너무 쉽게 드러나 있어서 읽는 이에게 실망을 안겨주지 싶다.
혼자 남겨진 주인공의 방백은 신선했지만 스토리의 구성력은 너무 약하게 느껴졌다.
서정시대.
제목에서 풍기는 그 자체로 얼마 전에 읽은 날씨와 생활과 비슷하게 다가왔다. 왜 그랬을까?
소녀의 이미지로 부각되는 주인공의 머리핀 때문이었을까?
성공한 중년 소설가는 은희경의 자전적인 모습인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하게 만든다.
처음이라는 이름으로 붙여지면 괜스레 소중하고 숭고해 보이는 사랑에 대한 시선을 달리하게 된다.
내가 당신에게 가진 의미도 당신이 나에게 같은 의미는 서로 다르다는 것은 많은 시간이 지나야만 보인다.
지구 반대쪽.
지금이 지금이 아닌 그 어떤 곳에서의 시간의 흐름이 주인공을 혼돈스럽게 한다.
꿈속에서 만나는 나와 닮은 그녀를 만난다.
알 수 없는 곳에서 그 곳의 시간으로 시계를 맞추는 대로 살아간다면 과거의 내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인지 주인공은 고민한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이라는 소설은 머리도 없어 보이고 꼬리도 없어 보이는 그녀의 몽환적인 냄새가 짙게 배어나온다.
여름은 길지 않다.
이 이야기는 작가의 새로운 어투가 엿보였다. 뭐랄까? 슬프지만 웃고 있는 피에로 같은 왠지 그렇게 느껴졌다.
세 남자와 한 여자의 반나절 동안의 발칙한 대화와 일탈이 낯설지만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꿈꾸는 동경이 아닐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과의 대화는 가끔 진실한 대화를 길어 올리기 때문이리라.
인 마이 라이프와 멍은 내게는 깊게 다가오지 못했다.
멍은 고민하는 듯하지만, 그저 평범한 우리네 삶의 모습이 엿보였고 인 마이 라이프는 추억을 이야기하고 사랑의 의미를 말하는 듯
보이지만 이 역시 끼워 맞춘 추억과 사랑이라는 게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강하게 들어왔다.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낯설지만 따듯한 무언가가 있다.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책이었다.
먼저 읽은 최근의 소설집보다 먼저 읽었더라면 더 달콤한 맛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같은 맥락으로 이어지는 듯한 몇 편의 글들을 만나게 되니 살짝 씁쓸한 맛도 나지만
어쩜 그것이 그녀의 책으로 나를 이끌게 하는 강한 자석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