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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송화가족 원문보기 글쓴이: 송화.
10월 15일 새벽 3시 기상하여 충남 보령시 부여군 서천군 청양군 13곳 사찰 성지순례 다녀왔습니다.
이번에 다닌 사찰 중 무량사 무진암을 회원님들 성지순례지로 소개합니다.
이번 성지순례 날짜가 음력 초하루 어느 사찰을 가니 경내가 조용하다 부처님에게 삼배를 올리고 경내를 돌아 다니면서 사진 촬영을 하는데 스님 신도들이 한분도 안게신다
마침 보살한 분이 보여 절이 이리조용합니까.
보살님 말씀 주지스님은 출타 중이고 산이 너무 험해 신도들이 오질 않는다 하신다
보살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뉘고 돌아서는 발길이 무겁다
다른 사찰에는 신도들이 5-10여명 되는데 이절은 공양주 한분이 절을 지킨다
순례를 면서 사찰입구에서 발길을 돌린 사찰도 있다
개가 얼마나 요란하게 짖는지 정신이 없고 사찰입구 자물통으로 채워져 있다
개소리에 창문으로 사람 얼굴만 보이고 해서 다음 목적지로 출발...
이번 성지순례는 다녀온 뒤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 마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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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사
충청남도 청양군 장평면 화산리 칠갑산(七甲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841년(문성왕 3) 진감 혜소(眞鑑 慧昭)가 창건했다고 한다.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과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 梵宇攷≫에는 ‘정혜사(淨慧寺)’라고 나와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휴정(休靜)이 의승병의 도량으로 이용했다.
1908년 의병과 일본군과의 전투 중에 전소했으나 불상만은 화를 면했다. 같은 해에 월파(月波)가 중창했다. 1930년 불상을 개금한 기록이 있는데, 이 때에는 절 이름이 ‘정혜사(定慧寺)’라고 나와 있다.
부속 암자로는 혜림암(惠林庵 : 일명 中庵)과 석굴암(石窟庵), 서암(西庵)이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칠성각, 요사채가 있다. 유물로는 칠성탱화와 아미타래영도(阿彌陀來迎圖), 혜림암 탱화, 부도 2기, 부도비 1기가 있다. 칠성탱화는 대웅전의 아미타불 후불탱화인데, 1885년(고종 22)에 제작된 것이다.
아미타래영도는 칠성각에 있으며, 1911년에 제작된 것이다. 혜림암 탱화는 1868년(고종 5)에 제작된 것이다. 또한 부도비는 혜월(慧月)의 것으로 1815년(순조 15)에 부도와 함께 세워졌다. 절 일원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왕사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금성산 조왕사(朝王寺)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 높이 1.27m, 대좌 높이 0.96m.
이 석조비로자나불은 1913년 절 뒤편 금성산 남쪽 기슭의 폐사지(廢寺址)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수습한 것이다. 치병(治病)과 득남(得男)에 영험하다 하여 민간에서 꾸준하게 예배되어 오다가 1919년 지금의 조왕사를 짓고 주불(主佛)로 모셔졌다고 한다.
반쯤 뜬 두 눈은 눈두덩의 경계가 분명하며, 그려 넣은 눈자위가 다소 위로 몰린 듯하여 생경한 느낌을 준다. 코는 미간에서부터 길게 내리뻗었으며, 인중(人中)은 아래위를 살짝 눌러 우묵하게 하였다.가느다란 얇은 입술은 양 끝을 조금씩 당겨 모으고 있으며, 귓밥이 묵직하게 늘어진 귀는 어깨까지 내려온다. 살찐 양 볼이 탄력 있어 보이고 아래턱에도 살짝 주름이 졌다. 삼도(三道)는 생략되었다.
체구는 얼굴에 비해 다소 작은 편이며 결가부좌한(結跏趺坐)한 다리의 너비와 어깨 너비가 거의 같아 전체적으로 보아 경직된 조형감을 보여 주고 있다. 아래로 처진 듯한 좁은 어깨가 다소 왜소한 감을 주며 옷자락으로 뒤덮여 감추어진 양 무릎 또한 양감이 결여된 비사실적인 윤곽을 보여 준다. 수인(手印)은 양손을 몸 앞에서 모아 왼손을 위로 하여 오른손 검지를 감싼 지권인(智拳印)을 결하고 있다. 통통한 손등과 손목에 반해 무릎 위로 포갠 발의 표현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착의 형식은 우견 편단(右肩偏袒 : 오른쪽 어깨가 드러남)한 대의(大衣 : 설법을 하거나 걸식을 할 때 입는 중의 옷)의 양 자락이 길게 무릎 위로 흘러내린다. 그리고 성글게 새겨 넣은 옷자락 무늬의 표현이 소략하다 못해 다소 빈약한 느낌을 주며 상당히 형식화되었다.대좌는 상·중·하대석이 모두 방형으로 각기 연꽃잎과 안상(眼像)을 새겨 장식하였다. 불상을 이전하는 도중 백제 양식을 보여 주는 금동불입상 1구가 출토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이관된 바 있다.
정각사
정각사는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 정각리 태조산 서쪽 기슭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이다.
정각사가 소재해 있는 석성면은 부여군의 남동단에 위치하여 논산과 인접해 있는 면이고 면소재지는 증산리이다. 본래 석성현의 읍내에 있어서 현내면이라 하다가 1914년 이후 옛 현의 이름을 따서 석성면으로 하였다.
자연환경은 서쪽으로 금강에 연하여 있고 동쪽의 봉황산, 등골산 등의 낮은 구릉성 산지가 조성되어 있으나, 이곳들을 제외하고는 석성천과 그 지류유역에 접해 있어서 충적범람원이 발달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과 보리이고 무, 배추, 토마토, 딸기 등의 채소와 과일이 생산되고 있으며, 양송이 재배도 도내 최고의 생산량을 이룬다.
용암사
강경읍 채산리 채운산 기슭에 용암사가 있다. 이 사찰은 조계종 6교구 속해 있는 절로 그 연혁을 확인할만한 사적기는 없지만 절과 관련된 자료자 전언에 따르면 백제 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전한다.
이 사찰은 백제 말엽인 660년에 채운향에 낙안사란 절이 있었는데 이 절이 용암사의 전신이었으며, 이 사찰은 고려 말기에 옥녀봉에 옮겨 세워졌고 절 명칭도 용암사라 부르게 되었는데 절의 이건후 5년만에 다시 부처의 가르침에 의해 본래의 위치로 환원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절에는 불사건물이 남아 있는데 모두 최근에 조성된 것이며, 건물은 모두 목조의 한옥 민가형으로 대웅전은 정면 5간, 측면 3간에 내부 불단은 약식으로 꾸며져 있다. 대웅전의 동쪽에는 7성각이 자리하고 있고 서쪽에 요사체가 있다. 이 용암사는 조계종 계통으로 비교적 오랜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사찰내의 유적,유물에 의해서는 이를 입증할만한 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
오덕사
종 목 |
보물 제133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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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오덕사괘불탱(五德寺掛佛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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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
유물 / 불교회화/ 탱화/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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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면적 |
1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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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
2002.0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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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충남 부여군 충화면 오덕로86번길 105 (오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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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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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유 자 |
오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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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리 자 |
오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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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 |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하는데 오덕사괘불탱은 꽃가지를 든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 사천왕상 등의 권속을 함께 그렸다. 오덕사에 있는 이 괘불의 크기는 길이 881㎝, 폭 584㎝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불의 삼세불, 10대제자, 범천과 제석, 사천왕상, 신중 등을 함께 그린 군도(群圖) 형식이다. |
봉서사
충남 서천 봉서사(한산면 호암리 198번지) 목조아미타여래 삼존불상이 다음해 1월21일자로 국가지정 보물로 지정된다.
서천 봉서사 목조아미타여래 삼존불상은 1994년 11월4일 충청남도문화재 자료 제334호로 지정된 바 있다.
이에 따라 서천군은 봉서사 인근에 ‘봉서사 템플스테이 체험관’을 2013년까지 건립키로 하고 전통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문화체험시설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현재 추진 중인 ‘문헌서원 숨 불어 넣기 사업’과 연계해 숙박체험 및 전통문화체험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문헌서원에서 기린봉, 고촌, 봉서사, 월남 이상재선생 생가지, 건지산성으로 이어지는 3시간 코스, 5㎞ 구간의 ‘솔바람길 조성사업’도 함께 추진키로 했다
영수암
서천군 서천읍 군사리 영수암에 소재한 목조보살좌상이 충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예고됐다
이 목조보살좌상은 높이 82.3cm, 어깨넓이 57.2cm 규모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평면적인 신체에 단순화된 옷 주름, 짧은 목과 함께 아랫배에 늘어진 옷자락이 중간에서 갈라지는 점, 오른쪽 어깨에 평행한 세 가닥 주름 등 조선후기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보살좌상은 조선후기 불상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불상 내부에서 16~17세기의 경전 7종이 발견돼 조선후기 경전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등 중요성을 감안해 충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한편 문화재자료는 시·도지사가 국가지정문화재 또는 시도지정문화재로 지정하지 않은 문화재 중 향토문화 보존에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시·도 조례에 따라 지정하는 문화재이다
금강암
조선 초기에 한성판윤 권홍과 그의 부인인 옹주 이씨의 원찰로서 창건되었다는 금강암. 조선후기에도 금강암의 기록이 계속 나오므로 창건 이래 지금까지 법등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금강암은 창건 당시의 금강암과는 다를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보령댐이 조성됨으로써 깊은 산 중에서 있었던 사찰이, 이제는 깊은 호수 주변에 위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강암은 도리어 호수 때문에 찾는 사람이 더 많아진 사찰일 것이다. 금강암을 찾기 위해 호숫길을 따라 갈 때에는 반드시 절을 찾아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만큼 보령호수는 아직 사람 때가 그다지 묻지 않아 아름답고, 그 맑고 깊은 호수를 바라보다보면 벌써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게 된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보면 자칫 절에 가는 길을 잃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찰이 생겼을 때에는 없었던 호수가 생기면서 고요하던 산사의 분위기를 새롭게 일신하고 있다. 차를 타고 이 곳을 한 바퀴 둘러보면 더할 나위 없이 멋진 풍광이 펼쳐져 계속 이 길을 따라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보고 싶은 그 곳에 금강암이 있다.
중대암
고찰인 중대암과 상대암의 마애불, 도화담약수와 함께 보령 2대 약수로 치는 영천약수와 만나게 된다. 중대암과 상대암은 신라 헌강왕 4년(879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이 중대암을 창건하면서 산이름을 아미산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고려 숙종 21년에 중수하면서 남쪽과 서쪽에다 지장암과 미타암을 더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입으로 모두 전소됐다고 한다.
이 때 인근 주민들이 중대암 계곡으로 피난했는데, 사찰이 불타면서 왜군들로부터 피해를 보아 계곡 이름을 적시골이라 지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조 중종 17년(1522년)에 김기(金奇), 최삼오(崔三悟) 등 두 선사가 중건했고, 1988년 전통 보존 사찰로 지정된 중대암과 상대암의 현재 건물들은 지난 1996년에 새로 지은 것들이다
무진암
석탑재는 무량사의 부도군과 함께 있다. 무량사 일주문 왼쪽 언덕, 무진암을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있는 8기의 부도들과 함께 있는 석탑재이다. 이들 석탑재는 모두 옥개석 4매 분량의 것으로 소형 석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 조성된 대웅전은 정면 3칸에 측면 3칸이며 다포계의 팔작지붕의 목조와가이다. 전각 정면에는 ‘대웅전’이라는 편액이, 주련은 총 4개가 걸려 있다. 화려한 단청이 채색되어 있으며 외벽화에는 팔상도가 그려져 있다. 화려한 단청으로 장엄된 내부의 천정에는 닫집이 높게 만들어져 있다.
대웅전 내부의 본존불은 석가여래좌상을 비롯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의 삼존불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 하단에는 세로 417 x 가로 114 x 높이 60cm의 수미단이 조성되어 있다. 앞 쪽에는 스님들이 설법을 하는 조각이 잘 갖춰진 법상이 마련되어 있다. 삼존불 뒤에는 석가후불탱이 그려져 놓여 있고, 불상의 왼쪽으로는 칠성탱이, 오른쪽으로는 신중탱이 배치되어 있다.
무량사
종 목 |
보물 제35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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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부여 무량사 극락전(扶餘 無量寺 極樂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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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불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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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량/면적 |
1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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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정 일 |
1963.0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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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
충남 부여군 외산면 무량로 203, 무량사 (만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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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대 |
조선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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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유 자 |
무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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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리 자 |
무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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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 |
무량사는 신라 말에 범일이 세워 여러 차례 공사를 거쳤으나 자세한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신라말 고승 무염대사가 일시 머물렀고, 고려시대에 크게 다시 지었으며, 김시습이 이 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
백운사
백운사는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35-2번지 성주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이다.
서해안 고속도로 대천IC로 나와 보령시내 수청사거리에서 시청, 시의회 방면으로 우회전을 해서 21번 국도로 들어가 대천중학교와 한내초등학교를 지나 40번국도 보령시청 방면으로 접어든다.
성주사지 간판을 보고 계속 달린다.성주사지를 지나 아름다운 계곡을 즐기며 약 2km쯤 오르면 왼쪽으로 길이 나 있고 백운사 간판이 있다. 산속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오른다. 계곡을 따라 1.5km쯤 산길을 따라가면 숲속을 즐기는 기분이 만만치 않다. 곧 산의 중상단부가 나오는데 이곳 동쪽 구릉에 절이 있다.
선림사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585년(신라 진평왕 7) 담화(曇和)가 창건하고, 1860년(조선 철종 11) 박행원(朴行遠)이 산신각을 중수한 바 있다. 1984년 법용이 주지로 부임한 후 절의 모습을 크게 바꾸었다. 1987년 대웅전, 1989년 삼성각을 각각 중수했으며 1991년에 일주문을 세웠고, 1992년에는 요사채를 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원통전과 적묵당·삼성각·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원통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 석가삼존불상을 비롯하여 후불탱화와 신중탱화가 전하고 동종도 남아 있다. 삼성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내부에 산신상·칠성상·독성상과 탱화가 걸려 있다. 이곳에도 동종이 놓여 있다.
첫댓글 좋은 하루 되시길요 ^^ _()()()_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