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샛별 정재원이 지난 10월 종목별 선수권대회에서 역주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지난 10월 18일 서울 태릉 국제빙상장에서는 2017~2018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스피드스케이팅 월드컵 파견 국가대표 선발전 남자 5000m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여기서 전문가들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변이 벌어졌다. 베테랑 이승훈이 6분31초04로 여유있게 1위를 차지한 가운데 2위의 주인공이 예상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무명의 고교생 정재원(16·동북고)이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2관왕을 차지한 김민석(18·평촌고)을 제치고 6분34초82의 기록으로 2위를 차지했다. 대한빙상경기연맹 관계자는 "괴물의 탄생이었다"고 감탄을 했다.
그날 이후 불과 두어달 사이 정재원의 입지는 말 그대로 상전벽해가 됐다. 무명의 고교생에서 국가대표 발탁, 그리고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한국빙상이 전략적으로 메달을 노리고 있는 남자 팀추월과 매스스타트에서 이승훈의 파트너로 결정됐다. 이어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던 스피드 스케이팅 월드컵 1~4차 대회의 결과로 가려진 평창행 티켓을 당당하게 따냈다. 내년에 17살이 되는 소년이 조국에서 벌어지는 동계올림픽에서 팀추월과 매스스타트 두 종목 출전을 확정지은 것이다. 두달 동안 벌어진 '작은 기적'이었다.
정재원은 월드컵 4차 대회 일정을 모두 마치고 12일 귀국해 가진 기자회견에서 "세계 수준의 선수들을 경험했다. (평창 올림픽 출전은)영광이다. 운동선수로서 쉽게 오지 않는 기회를 잡았는데 실수하지 않고 싶다"고 말했다. 또 "월드컵 1차 대회 때는 준비를 많이 해서 기록도 잘 나오고 순위도 좋았다. 올림픽까지 남은 기간 동안, 좋은 성적을 낸 1차 월드컵만큼 열심히 준비하겠다"면서 각오를 다졌다. 그는 자신의 시니어 대회 데뷔 무대였던 월드컵 1차 대회에서 이승훈 김민석과 호흡을 맞추면서 팀 추월 1위를 차지했고, 매스스타트에서도 이승훈의 금메달을 도우면서 자신은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마도 평창에서 스스로가 기대할 수 있는 최대의 결과치가 나온 대회였는지도 모른다.
'괴물 소년'은 아직 말이 어눌한 편이었다. 질문에 대한 대답도 단답형이 많았다. 하지만 자신의 소신을 밝힐 때는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평창을 넘어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기량이 더욱 만개할 것으로 기대되는 정재원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었다.
<정재원은 최근 브라보앤뉴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었다. 사진=브라보앤뉴 제공>
-원래 두살 터울 형(동북고에 같이 다니고 있는 정재웅이 그의 형이다. 지난 대표 선발전에서 형과 동생이 동시에 대표팀에 발탁됐다)을 따라다니다가 신현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스케이트를 시작했다고 하던데요.
사실 어릴 적 기억은 잘 안나요. 처음 나간 대회가 무슨 '꿈나무 대회'였어요. 초등학교 규모에서는 굉장히 큰 대회였어요. 거기서 (1학년때)종합우승을 하면서 계속 (스케이트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한 6개월 정도 타고 나서 바로 1등을 했던 것같아요. 그때는 대회가 1~2학년이 같이 타고 3~4학년과 5~6학년이 같이 타는 형식이었는데 항상 한살 위 형들하고도 경쟁해 일등을 하고 그랬어요. 형들이나 누나들이 '너 참 잘탄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했죠(웃음). 초등학교때 1학년부터 6학년때까지 꿈나무 대회에서는 항상 우승했구요, 소년체전에서도 4학년부터 메달따서 5,6학년은 금메달도 따고 그랬죠.
-원래 부모님이 형제들이 함께 운동하는 것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밀어주신건가요.
네, 그랬어요. 내가 재밌다고 하니까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라고 하셨어요. 엄마 아빠도 스케이트를 재밌어 하셨어요. 아 그런데, 운동을 직접 하시는 것을 좋아하신 것은 아니구요, 보는 것을 좋아하신 거죠. 형은 초등학교 1학년때 스케이트 현장 체험 학습을 갔다와서 너무 재밌으니 스케이트를 사달라고 졸랐다고 하더라구요.
-지금은 형이 단거리 전문이고 정재원 선수는 장거리로 나눠졌지만 초등학교때는 형제간에 경쟁 의식도 꽤 있었을 것같은데요.
음…, 어렸을 때는 두살 차이면 굉장히 크잖아요. 초등학교때는 형이 항상 나를 이겼어요. 하지만 나중에 따져보니 동학년때 기록은 내가 형보다 조금 앞섰던 것같네요. 중학교 들어가서는 단거리, 장거리 나눠져서 (같이 경기할 일이)거의 없었어요.
-둘이 그냥 재미로라도 레이스를 하고 그러지는 않았나요.
그렇게는 안해봤어요. 재미라도 안했어요.
-운동하면서 부상이나 위기는 없었나요.
초등학교 5학년때 스피드 스케이팅을 했지만 쇼트트랙 훈련도 병행했어요. 코너링 연습을 위해서요. 쇼트를 처음 탄게 5학년때인데 그만 코너를 돌다가 넘어져서 오른쪽 발목이 부러졌어요. 깁스를 하고 재활하면서 석달 정도 쉬었어요. 야, 이게 위험한 운동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제 그만해야 하나 고민도 했죠. 중학교 1학년때 다시 쇼트를 하면서 무섭기도 하고 그래서 하기 싫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또 타다보니 잘 타지고 그랬어요. 다시 마음을 잡고 운동을 하다가 쇼트 코너링을 하면서 또 넘어져서 다쳤어요. 석달 가까이 쉬었죠. 두번이나 그러니 쇼트를 다시 타기가 엄청 무섭더라구요. 겁이 나면 안해야 하는데 용기를 내서 그해 쇼트트랙 대회까지 출전했어요. 스피드 대회를 포기하고 쇼트 대회를 나간거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무서움이 조금씩 없어졌어요. 쇼트 대회 출전을 위해서 쇼트를 오히려 많이 타다보니 무서움이 덜어진 거죠. 포기하고 싶은 생각보다는 다시 잘 타자, 항상 그렇게 마음을 먹었던 것같네요.
-형하고 불암중~동북고를 계속 같이 다녔네요.
빙상부가 있으니 형이 2년전에 먼저 가고, 나중에 내가 자연스럽게 가고 그랬죠. 아마도 같은 학교에 다녀야 부모님들도 관리가 편하셨겠죠(웃음). 중학교때도 전국대회에서 1등하는 수준이었어요. 중 3때 스케이팅하는 자세를 많이 바꿨는데 초반에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5등까지 했어요. 중 3치고는 정말 잘한건데, 시즌 중반부터는 자세가 많이 틀어져서 당연히 1등해야 하는 (동급)대회를 놓치고 그랬죠. 올해 2월부터 쇼트를 타면서 다시 자세를 잡고 하면서 3월부터 고1 대회에서 다시 1등을 하고 그랬어요.
-고등학교 1학년이 국가대표팀에 뽑히는 거는 쉬운 일은 아니죠.
드물죠. 가장 최근에는 (김)민석이형이 그랬던 것같구요. 옛날에는 이규혁 이상화 이런 선배님들이 중학교때부터 됐다고 하더라구요. 소치 올림픽이 열렸을 때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어요. 그래서 그때 계산해보니 평창때 고등학교 1학년인데, 그때는 대표선수가 될 것이라고는 감히 생각도 못했고 대학 가기 전까지는 대표선수가 한번 됐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는 했죠.
-그럼 소치 올림픽때 스스로 상상했던 국가대표의 꿈이 앞당겨서 이뤄진 거네요.
그러게요, 그냥 실감이 안났어요. 마냥 좋기도 하고. 그래도 이왕 됐으니 잘하자, 특히 올림픽에서 잘해야 하니까 긴장도 되고 그러죠.
-일찍 출세한 건데, 친구들은 뭐라고 하나요.
거의 비슷한 반응이예요. 대단하다, 멋있다, 부럽다 등등 그런거죠. 제가 먼저 대표가 확정되고 형이 조금 나중에 됐는데, 형이 됐을 때 정말 좋았어요. 내가 됐을 때만큼이나 기뻤어요. 엄마 아빠도 '그동안 두명 데리고 운동시키면서 고생했는데 이제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같다'고 하셨죠.
-지난 월드컵 국가대표 파견전에서 김민석 선배를 제쳤을 때의 기분이 기억나나요.
사실 그 경기에서 국가대표되는 것이 확정된 것인데, 일단 실감이 안나고 그랬죠. 민석이 형하고는 첫 대결이었어요. 그동안 열심히 훈련했고 내 몸상태는 내가 아니까, 어느 정도 기대는 하고 있었죠. 그런데 민석이형도 몸이 좋아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이길 확률은 30%쯤 되겠나? 그런 생각을 했죠.
-고1때 갑자기 국가대표급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요.
코치 선생님이 (국가대표 선발전에)들어가기 전에 해주신 말씀이 있어요. '지난 여름 동안 너는 전세계 스피드 스케이팅 장거리 선수 가운데 가장 많은 훈련을 소화한거다. 자신감을 가져라'는 말을 해줬어요. 정말 심하게 훈련했던 것같아요. 훈련 시간의 양도 양이지만, 강도가 정말 높았어요.
-원래는 지난 시즌 말에 대표 선수로 뽑혔는데 포기했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요.
지난 3월에 일단 뽑히긴 했는데 (새 시즌 월드컵에 나설)국가대표 선발전이 10월에 열리니까, 내 몸 상태를 (선발전에 맞춰서)최고로 만들기 위해서는 여름 동안 국가대표 훈련에 들어가는 것이 좋을 수도 있고, 지금 하던대로 개인 훈련을 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고, 그래서 한달 동안 고민을 한거죠. 결국 원래대로 준비해서 새 시즌을 하자, 이렇게 결정을 했던 거죠.
<남자 팀추월은 평창에서 한국 빙상이 가장 유력하게 금메달을 노리는 종목이다. 올시즌 월드컵 1차대회에서 금메달을 합작한뒤 기뻐하는 한국 팀추월 대표팀의 김민석 이승훈 정재원(왼쪽부터). 사진=연합뉴스>
-지난 여름에는 한체대에서 훈련하면서 그때부터 이승훈 선배와 함께 트레이닝을 했다고 하던데요.
같이 훈련을 했어요. 정말 하늘같은 선배인데, 보면 그냥 대단하다는 생각만 들어요.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도 안 지쳐보이고, 운동적인 면에서 엄청난거 같아요. 승훈이 형이 스케이팅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냥 따라만 해도 도움이 많이 되는 거죠.
-훈련을 그렇게 많이 하면, 한창 놀고 싶은 나이인데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요.
사실 놀 시간도 별로 없어요. 간혹 시간이 나면 친구들 만나서 PC방도 가고 밥도 먹고 그냥 그래요.
-스스로 판단하는 선수로서의 장단점은 무엇인가요.
일단 체력이 좋아요. 어렸을 때부터 쇼트를 많이 타서 코너링도 잘 하는 편이죠. 막판 스퍼트도 좋아요. 경기를 하면 막판에 치고 나가는 스타일이예요. 보완할 점은 빠른 속도로 계속 타는 훈련이 필요한 것같아요.
-평창 올림픽 출전(팀추월, 매스스타트)이 확정됐는데 이렇게 어린 나이에 올림픽에 나서는 기분은 어떤가요.
(이전에는)당연히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죠. 기쁘기도 하지만 긴장이 되고,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죠. 팀추월과 매스스타트 모두 개인종목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단체 종목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대표팀 전체에 누를 끼치면 안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매스스타트는 코너링이 중요한데, 내가 쇼트 경험이 많으니 어떻게 경기를 풀어가야 하는지 아는 편이죠. 팀추월은 이전에는 체전에서 해본 경험이 있구요.
<정재원이 올시즌 월드컵 1~4차 대회를 모두 마친뒤 귀국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매스스타트 이승훈의 금메달, 정재원에게 달렸다' 이런 제목의 기사도 나오던데요.
아이쿠, 그런 제목이 붙으면 큰일났는데요…. 이거 정말 부담이 되는 거죠. 그냥 잘 연습하고,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이예요.
-정재원 선수는 원래 평창 보다는 4년뒤 베이징에서 열리는 2022 동계올림픽에 대한 기대가 더 컸던 것인데요,어떤가요.
평창은 출전 자체가 일단 영광이죠. 나중에 베이징에서는 꼭 (개인종목)메달을 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로서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요.
주종목인 5000m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것입니다.
-5000m에서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목표를 언제쯤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나요.
베이징에서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마도 베이징 보다는 그 다음 대회가 더 승산이 있을 것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