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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희생”을 기억하며 금식하던 전통에서 유래 된 사순절은,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절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더 경건한 삶을 살기로 결심하는 엄숙함과 자기 성찰의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성탄절, 부활절과 함께 교회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올 2023년 사순절이 언제 시작했는지 아십니까? 지난 2월 22일입니다. 이때부터 6주 뒤인 4월 8일 고난주간까지가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지내신 마지막 40일을 묵상하며 지내는 기간입니다. 그러기에 이 기간 동안에는, 대인관계에서의 대화는 줄이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묵언기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끔 성도들 가운데, 자신의 신앙이 약하다면서, 더욱 강한 신앙, 강한 믿음 갖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겸손의 말인지? 게으름의 말인지? 핑계의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경험한 만큼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남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미국 성공회 사제인 “플레밍 러틀리지”는 그의 저서 “예수와 십자가 처형”에서, “오래 전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죽음이 지금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이 커다란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그처럼 특이하고 끔찍한 방식으로 죽을 필요가 있었는가?”라고 합니다. 여러분, 터널과 동굴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입구가 좁고, 깊숙한 땅 속의 캄캄한 세계로 인도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터널과 동굴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동굴은 그 끝을 알 수 없지만, 터널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터널인 “인제양양터널”은, 그 길이가 무려 10,965m로, 약 11km이며, 세계에서 20번째로 긴 터널입니다. 이 터널을 통과하는 시간은, 고속도로의 제한 속도인 100Km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약 6분 40초 정도가 소요됩니다. 이처럼, 터널의 길이가 워낙 길어서, 운전자들이 지루함을 느끼거나 혹, 졸음운전을 할 수 있기에 터널 내부에는 다양한 장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준비된 긴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그 끝이 보이지 않아도, 운전자는 안전운전과 이 터널에는 반드시 출구가 있음을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 본문의 욥과 같이 고난의 순간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지나온 과거를 돌아봐도 그러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고난의 끝자락이 언제인지, 그 끝이 보이지 않아 탄식하며, 좌절하고 절망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마치 캄캄한 동굴과도 같은 고난 속이라도 그 끝을 열어놓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인도한 것과 같습니다. 이 시간 예배드리는 분 가운데, 고난을 반가워할 분 계십니까? 우리 뿐 아니라, 세상의 그 누구도 고난을 반기지 않을 겁니다. 본문의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평가를 받았던 사람이지만, 그가 당한 고난은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욥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았고, 그러한 하나님 앞에 있는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 자였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앞에서 오직 겸허하게 청종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래적 위치를 분명하게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했다면, 이제는 눈으로 주님을 뵙는다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의 참된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고, 하나님을 보는 겁니다. 이전까지 하나님에 대해 들었고, 하나님에 대해 말했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 갈수록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온전히 자리잡아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을 보내는 동안,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뵙게 하시며,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라며 묵상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복된 사순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 - 2을 보시면,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자입니다.
본문에서 욥은 단적으로,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자요 절대주권자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며, 하나님의 계획은 정확하게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의 인간 실존을 받아들이지 않는 가운데, “불평과 원망”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신 분도 아니고, 우리 삶에 무관심한 분도 아닙니다. 다만, 고난 속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원망이, 우리의 눈을 가리워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짙은 안개와도 같은 고난이 지나면, 고난 이전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이러한 신앙연단의 과정을 욥기가 잘 보여줍니다. 본문에서의 욥은 지금, 하나님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가깝게 느끼고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나서 처음으로 고백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라는 겁니다. 고통 이전의 욥은,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자신의 뜻과 맞아야 한다고 은연 중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욥의 만족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는, 자기중심적인 신앙의 삶을 살았던 겁니다. 그랬기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을 향해, 왜 자신의 뜻과 다른 삶을 주셨냐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겁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심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을 통해 가장 먼저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고난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체험하는 “고난도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고난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아예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삶 속에서 두려움이 없었다면, 하나님을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은, 연약한 우리의 한계를 깨닫게 함과 동시에, 하나님을 의존하는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는 최고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의 교만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토기장이에게 자기가 만든 토기에 대한 권리가 있듯, 하나님 역시, 하나님의 일에 대한 권리가 있습니다. 욥은 이제까지,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악인은 반드시 벌해야 하고, 의인은 반드시 보호하고 보상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뵙고는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앞의 40: 7 - 8을 보시면, 하나님이 욥에게,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라고 묻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 절대주권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왜 위대합니까? 왜 믿음의 조상입니까? 그는 하나님께, 바로 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던 인물입니다. 그랬기에, 100세 때 낳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욕심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사순절을 지내는 가운데, 우리의 삶을 진자리 마른자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시며, 우리의 소망을 주께 간구하심으로, 언제나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의 삶 속에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낮추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욥은 하나님께,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라며, 자신의 모든 행위가 어리석었다는 것과 사람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운 하나님의 섭리를 고백하며, 인정합니다. 본문을 쉬운 성경역으로 보시면, “‘무식한 말로 내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라고 물으셨지요? 정말 저는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였고, 깨닫지 못하는 일들을 아는 체 하였습니다”라고 합니다. 이는, 앞의 38: 2에서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며, 폭풍가운데서 하나님이 욥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사용한 겁니다. 욥이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무지한 말”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은, 욥이 하나님의 책망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또, 자신의 한계성, 자신의 무지함을 절실하게 느꼈다는 겁니다. 욥을 비롯한 세 친구들은, 욥의 알 수 없는 고통에 대해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을 피력하며, 이에 대한 불만과 불평, 하나님에 대한 원망만 가득히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를 가렸음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겁니다. 세 친구에 대한 욥의 주장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이처럼 극심한 고난에 처해질 만큼 죄 지은 일이 없다면서, 자신의 의를 지나치게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욥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오묘한 섭리에 대한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주장한 것이 얼마나 완악한 행동이었는지를 인정합니다. 여러분,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낮추는 겸손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내 뜻에 따라, 내 판단에 맞추어서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의지, 그 분의 계획에 따라 세상을 주관하시며, 나는 그것을 시시비비로 논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 순종해야 하는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에 대해 “듣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입니다. 욥은 이제껏, 자신이 처한 고난의 자리, 고난의 환경만을 바라봤습니다. 그랬기에, 자신이 고난당하는 것을 억울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자신을 옭아멘 고난의 문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말하거나 믿는 것 가운데, 욥과 같이, 우리의 생각과 판단 중심으로 말하거나 믿는 것은 없습니까? 이것이, 하나님 중심입니까? 내 중심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따라가는 겁니까? 하나님이 나를 따라오는 겁니까? 욥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그는, 자신이 깨닫지 못한 말을 하고, 하나님에 대해 무식한 말을 했다는 겁니다. 오직, 자기의 소견대로만 말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깨달은 욥의 정체성입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당할 때 두 가지의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불평하거나 낙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사순절 기간동안 우리가 꼭 지켜야 할 것이 있는 데, 그것은, 사람과의 소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소통이라는 겁니다. 전 5: 3을 보시면,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고 합니다. 말이 많아지면 반드시 우매자의 소리가 나오게 되어, 아무리 화목한 자리라도, 분쟁의 자리, 상처의 자리가 됩니다. 사순절 기간동안만이라도 묵언수행을 하시며, 오직,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내 곁에 계신 하나님, 불꽃같은 눈동자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 - 5을 보시면,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합니다.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은 엄청난 시련을 겪음으로, 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절실하게 경험합니다. 여기에,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된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하나님을 배워가는 학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계획하는 일들이 때때로 이루어지지 않아 좌절과 낙심 속에 있더라도, 우리 곁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광야를 지날 때, 많은 난관에 부딪힌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만난 난관은, 홍해가 가로막았고, 음식과 식수가 바닥났고, 이방의 적들이 공격을 한 겁니다. 그들은 애굽에서만 벗어나면 “고통 끝 행복시작”일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시는 지, 무엇을 행하시는지, 어디에 계시는 지 찾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난관들을 해결하셨습니다. 이를 보면서, 우리도 살아가는 동안 난관들이 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난관들을 어떻게 해결하시는지 바라봐야 합니다. 본문 5절에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합니다. 욥은 지금껏 하나님에 대해 “듣는” 수준에서만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과 사두개인, 바리새인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당대의 지식인이었고, 유대 사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들어서 안다고 하여, 신앙이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욥이 앞에서 고백하듯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이고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는 자”이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욥은 비로소, 하나님을 제대로 만났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안다고 할 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직접 그 사람을 대해서 아는 것으로,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들어서 아는 것으로, 지식적으로 아는 겁니다. 이것의 차이는 천지차이입니다. 그렇듯,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인격적으로 아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본문은 이런 의미에서 본서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했어도 경험이 없는 사람은, 신앙생활이 밋밋합니다. 그저, “좋은 것이 좋은 것이야”하는 식입니다. 하지만, 경험이 있는 성도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을 찾아 욥과 같이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고백하며,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