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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72:1-6 하나님이여
다윗은 교회의 이름으로 자기가 약속받은 나라의 영원한 번영을 주께 간구합니다.
동시에 다윗은 거룩한 자의 진정한 복이란 하늘의 정하심에 따라 세워진 임금의 통치 아래 머무는 것임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줍니다.
1. 이 시편의 표제는 “솔로몬의 시” 입니다.
이 시의 표제만 가지고는 저자가 누구인지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맨 마지막에 ‘다윗의 기도가 필(畢)하다’ 는 분명한 말씀이 있는 것을 볼 때 이 시는 다윗의 후계자인 솔로몬의 작품이라기보다 다윗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이 시를 좀 더 널리 알려지게 하고자 또 백성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토록 자기 아버지의 기도를 시적인 방법으로 표현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ל(라멧)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솔로몬을 위해 솔로몬을 대신해 쓰여졌다고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여러 세대를 통해 이어 온 왕국이 개인의 인격하에 이해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조심스레 살펴보건대 이 기도는 다윗이 임종시에 드린 것을 그의 아들에게 영원히 기억시키려는 마음에서 시의 형식으로 기술한 것이라는 추측을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에 다윗이 기도를 필했다고 밝힌 것은 이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 신자들로 보다 성실하게 자기들의 기도를 이 거룩한 왕의 탁월한 기도에 연합시키기 위함입니다.
솔로몬은 자기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들을 단지 시의 형식만 바꾼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감 받은 시의 원저자는 다윗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시를 단순히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고 있는 자들은 이론적 근거가 못되는 말들을 근거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유대인들에게만 외치고 있다는 말을 조심해야 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직접적으로 관련된 말이 아닌 것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킨다면 이는 괴변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던 다윗은 자기의 후손이 그 왕국을 소유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조건하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았습니다.
곧 그 왕국의 능력과 지배는 결국 그리스도에게 미쳐야만 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시편 72 편
더우기 다윗은 백성들의 현세적인 아름다운 것들이 자기와 후손들에 의해 지켜질 나라 안에 포함되어 있는 장래의 것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과 이러한 것들은 단지 훗날에 있을 더 우월한 어떤 것, 즉 영적이고도 영원한 복을 나타내는 그림자요 모형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 모든 것들을 알고 있었기에 마땅히 이러한 나라의 영원한 지속을 가장 갈망했고 또 이것을 위해 가장 진지하게 간구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최후의 순간에도 자신의 기도를 되풀이함으로서 자기가 바라던 모든 것들 중에서 이것이 가장 큰 것이었음을 분명히 증거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영원한 통치는 한 사람이나 혹은 몇몇 사람, 또는 한 20세대 정도까지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영원하신 통치는 종말까지 계승될 것과 그 완전한 성취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을 이 시편 말씀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2. 본문 1절은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입니다.
다윗은 임종시에 자기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릴 아들에게 이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을 주시라고 아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다윗은 교회의 신실한 자는 한분 되시는 머리 아래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순조롭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경의와 모든 순종을 이러한 합법적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이 모형 되는 나라를 통해 성도들은 그리스도께 인도되리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택한 왕에게 정의와 지혜의 영 부어 주시기 바라는 기도입니다.
다윗은 “의”와 “판단력”의 말로 바르고 정당히 다스려지는 나라의 통치를 노래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포악한 왕들이 자기들의 소원을 따라 반역적이고 난폭한 방종에 빠지는 것을 싫어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사 직분을 맡겨 주신 이스라엘의 거룩한 왕은 세상의 다른 왕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어떻든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지시하심이나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는 세상의 통치는 올바르게 행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왕들이 스스로가 온전하게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다윗은 그들 안에 이미 갖추고 있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기도로 간구하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의와 심판이 왕들에게 임하기를 간구함으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손으로 빚어지지 않고서는 존귀하게 될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왕들에게 깨우쳐 줍니다.
시편 72 편
솔로몬의 잠언에서 지혜가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잠8:15)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정부가 뛰어난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것을 만드신 분임을 알게 하려 함이요, 정부에 대한 모든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도록 하심임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 이 말씀은 결코 이상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 의미보다는 좀 더 특별한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합법적인 정부를 세우시고 유지시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역이기에 하나님이 그가 다른 모든 나라보다 우선 택하신 거룩한 나라를 유지하시고 보호하시기 위해 특별하신 성령의 은혜를 베푸시는 일은 더욱 더 필요한 것입니다.
“왕의 아들”이라는 말은 다윗이 자기 후계자를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동시에 다윗은 “네 몸의 소생을 네 위에 둘지라”(시132:11) 하신 약속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다윗의 후계자에게서 성취되었다고 해석하는 것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때에 성취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솔로몬이 죽은 후에 왕국의 위엄이 땅에 떨어지고 백성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올 때까지 그 나라의 재물은 손상을 입었으며 굴욕적인 죽음이 그들의 왕을 괴롭혔고 나라가 완전히 파멸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그들의 회복은 먼 훗날 이새의 마른 가지에서 그리스도가 일어날 때까지는 그들이 큰 소망을 가지고 바라던 것과 같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들 중에 첫 번째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3. 본문 2-3절은 “(2)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 하리니
(3)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오 저가 판단하소서 ..........’라고 기원형식으로 번역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미래 시제를 반대하고 이 말씀이 예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중간 입장을 취해 그 함축된 의미의 보다 정확한 해석에 접근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왕에 관한 모든 말씀들은 1절에서 간구했던 복들이 그 왕에게 베풀어졌다는 가정에서 나온 말씀들입니다.
즉 그 왕이 의와 판단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간구는 ‘오 하나님이여! 우리들의 왕으로 하여금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다스려 주시옵소서’ 라고 해석하든지 ‘주께서 왕에게 주의 의를 베푸시면 그가 바르게 판단하게 될 것이니이다’ 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백성을 잘 다스린다는 것은 너무 고귀한 재능이기에 이 땅에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시편 72 편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적인 통치에 의해 모든 것들이 완전한 질서를 회복하게 되는 것은 하늘의 은사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윗은 1절에서 일반적인 모든 백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특별히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빈곤과 나약함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왕들은 이들을 위해 무장하고 이들이 부당하게 압제 당하게 되면 감싸주어야 할 자들입니다. 3절에는 “평강” 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평강”이라는 말을 ‘휴식’이나 ‘편안함’을 가리킬 때만 사용하지 않고 ‘부유함’을 가리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이 말씀을 통해 나라의 행사가 의의 원리에 의해 행해질 때 백성들이 부유함과 진정한 복을 즐기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평강을 주며” 라는 말씀은 땅의 비옥함에서 취한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하리로다”라는 말씀의 의미는 그 나라의 어떤 구석도 심지어는 가장 가망이 없어 보이는 부분까지도 적에게 이기지 못하는 곳이 없을 산들, 즉 일반적으로 불모지로 알려지거나 최소한 계곡처럼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들일 수 없는 곳으로 알려진 장소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평강”과 “의” 라는 말이 한 구절에 서로 연결되어 두 번씩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공의로 말미암는 평강이 세상 모든 부분까지 확대되어야 할 것을 의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의로 인하여” 대신에 단순히 ‘공의’라고 번역하면서 여기서 자주 반복되는 ב (베트)라는 문자를 무시해 버리고 있습니다.
4. 본문 4절은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의로운 통치의 결과와 그 열매에 대해 묘사하면서 자기가 짤막하게 언급했던 백성들 중에 핍박을 당하는 자에 관해 보다 더 길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왕들이 공의와 공평으로 자신을 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붙잡힐 때라는 진리를 마음 속에 간직해야 됩니다.
만약 왕들이 하늘에서 주시는 의의 영으로 지배받지 않게 되면 그들의 통치는 전제정치와 폭군정치로 전락되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돌보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왕을 위해 드리는 기도 가운데 이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가난한 자를 위로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실로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시편 72 편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을 다른사람들보다 더 특별히 보살펴 주시는 것은 아무 까닭없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손해와 탈취를 많이 당했기에 보살펴 주시는 것입니다 율법과 공의 시행이 없다면 힘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형제들을 더 압제할 것입니다.
다윗은 특별히 왕에게 판사의 보호를 받음으로만 안심할 수 있는 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이 부당하고 그릇되게 희생당할 때는 그들의 원수를 갚아 주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궁핍한 자의 자손”은 히브리인들이 “궁핍한 자”를 말할 때 흔히 사용했던 말입니다.
때대로 헬라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υἱους ἰατρων(휘우스 이아트론 ; 의사의 아들들)이라는 말로 ‘의사들’을 가리킨 것을 볼 때에 알 수 있습니다.
왕은 다윗이 자기에게 지워 준 가난한 자들을 구해 주고 보호해 줄 의무를 수행하려면 권위와 칼의 위력을 가지고 악한 자들을 억제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 구절 끝에 의가 다스리게 되면 ‘핍박하는 자’ 혹은 ‘강탈하는 자들은 산산조각이 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자리를 내놓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자기들의 뻔뻔스러움과 악함을 더 이상 계속하지 못하도록 칼로 말미암아 압제를 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왕이 지혜로운 자 되어 포악하고 사악한 자들을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온유하며 질서를 잘 지키는 자들이 손해받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일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엄격하게 보호와 억제를 시행하는 일을 배우지 않는 자는 결코 백성들을 다스리는 자로 합당치 못합니다.
나약하고 소극적인 통치하에서 혹은 너무 얌전하여 참고 넘기기만 하는 성격을 가진 사람 밑에서는 필연적으로 방종이 일어납니다.
모든 일을 너그럽게 하는 것만 옳게 여기는 임금 밑에 사는 것보다 아무것도 전혀 행할 자유가 없는 폭군 밑에 사는 것이 더 낫다는 옛 말에는 많은 진리가 있습니다.
5. 본문 5절은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입니다.
이 말씀을 호칭으로 보든지, 인칭을 바꾸어 번역하면 왕을 이해함에서 그 의미가 더 명확해집니다.
이 말씀의 뜻은 왕이 백성들에게서 절대적인 경의를 받을 수 있는 요인이나 특성이란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권리를 누리도록 보호해 주어야 하며 항상 가난하고 비참한 자들을 구하기 위한 인본주의의 정신으로 준비해야 하며 아울러 악한 자의 뻔뻔스러움을 멸하려는 준엄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72 편
그러나 인칭을 바꾸지 않고 하나님 자신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사람들이 피차 공평이 유지되는 것은 측량할 수 없이 크신 복입니다.
그렇지만 이것보다도 더욱 고귀한 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거룩하고 의로운 통치의 복된 열매를 매우 적절히 말하면서 잇달아 참된 종교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여기서부터 나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바울은 왕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기도 중에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딤전2:2) 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세상 정부가 무너지면 종교가 파괴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 폐기될 위험이 적지 않기에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왕을 지켜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또 다윗은 이 말씀을 통해서 열왕들에게 자기들의 의무를 기억나게 합니다.
동시에 다윗은 백성들에게는 기도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간구와 기도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화롭게 함을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은 진실로 다른 무엇보다도 귀한 일입니다.
참된 종교는 다른 어떤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세상 끝까지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길 것을 말합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에 대한 염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6. 본문 6절은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리니”입니다
이 비유는 처음 언뜻 대하면 약간 어색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선하고 공평한 나라의 체제에서 모든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커다란 이점을 재치 있고 적절하게 나타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풀을 베는 시기는 더위가 맹위를 떨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새로운 습기를 섭취할 수 없으며 풀포기의 뿌리마저도 메마르고 갈한 토지의 상태로 말라 버리는 초여름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햇빛으로 뜨거워진 대지를 비를 내리사 보존하시는 것과 같이, 교회의 복도 이러한 방법으로 예비하시며 왕의 통치아래서 유지되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이 예언은 은밀하신 은총으로 교회를 흡족케 하사 열매를 맺게 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의 성취를 이루셨습니다.
시편 72 편
시72:7-11 저의 날에
이 시편은 솔로몬 왕을 모형으로 한 그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예언합니다.
여기 기록된 말씀은 땅 위의 이상적 임금(理想的君主)의 사역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역 성격을 반영시킵니다.
(1) 땅 위의 이상적인 임금이 의로 택하신 그의 백성을 통치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무궁한 “의”를 가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십니다(1-5).
(2) 이상적 임금이 그 백성에게 만족을 주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는 가뭄에 단비처럼 자신의 백성을 살려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영적 생명을 택하신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심지어 원수들까지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십니다(6-11).
1. 본문 7절은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입니다.
이 말씀은 1절에 연결된 말씀이므로 설명한 것을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다윗은 왕에게 의와 판단력을 채우사 흥왕케 하시어 백성을 공정하게 다스릴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실로 솔로몬이 해야 할 의무는 의인을 보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의롭게 만드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가지신 것을 각 사람들에게 내어 주실 뿐 아니라 자신의 영이 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각 사람을 새롭게 해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의인을 만들어 주시는 것이 마치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자들을 포로된 자리에서 돌아오게 해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의인이 흥왕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범사가 그리스도 아래서 볼 때는 복과 경사의 표징임을 깨닫고 기뻐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평강”을 더 적합하고 함축된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할지라도 우리는 반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란 대부분 전쟁의 와중과 치열함 속에서는 모든 소유물이 쓸모없이 파괴되어 버릴 것에 불과하므로 풍부하게 소유하기를 다 싫어하는 것은 복된 삶의 극치란 평강이외에 아무것도 더 바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72 편
또 다윗은 왕의 생명이 세상 끝날까지 계속하리라고 한 말 속에서 단지 세상적인 보좌를 차지하게 될 자기의 후계자만을 묘사하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사 스스로 하늘의 생명과 영광을 취하고 영원히 자신의 교회를 다스리게 될 그리스도까지를 내다보고 말하는 사실도 매우 분명한 사실입니다.
2. 본문 8-9절은 “(8)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끝까지 다스리리니 (9)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입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실 때, 이와 같은 사방의 경계를 세우셨습니다(창15:18).
그러기에 다윗은 신실한 자들에게 왕국이 계속 존재하는 한 그 약속받은 땅을 마침내 온전하게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또 다윗은 이 나라가 흥왕하게 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복이 완전하게 성취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리스도가 홍해, 즉 애굽의 세력이 미치고 있는 바다에서부터 블레셋 바다라고 불리는 수리아의 바다까지를 그리고 유브라데스강에서부터 그 큰 광야까지를 다스리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좁은 경계는 해뜨는 곳에서부터 해지는 곳까지 이르는 그리스도의 나라 범위와 부합되지 않는다고 반대하는 자들이 있다면 우리는 다윗이 아직 완전하게 계시되지 않았기에 아직 보지 못했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그 당시 자기가 사용하던 언어로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답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율법과 선지서에 잘 알려졌고 흔히 사용되었던 어법(語法)으로 출발합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까지도 자기가 다스리던 제한된 통치 구역을 들어 그리스도의 나라의 경계가 땅끝 가장 먼 곳까지 미치고 있음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110편 2절은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곧이어 이 왕이 다스릴 왕국의 범위를 확대하여 바다 건너에 있는 왕들도 그에게 공물을 드리며 광야에 거하는 자들도 그의 멍에를 메게 될 것이라 합니다.
“광야에 거하는 자”라고 번역한 ציים(치임)은 가나안 땅에서 남쪽으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사는 자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다윗은 또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라는 말로 그들이 경배를 드리게 될 모습을 곧이어 덧붙입니다.
이런 모습은 고대 중동 지방의 나라들에서 행해진 습관적 예식으로 잘 알려졌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동방 나라들을 정복한 후 그 나라들에게 이런 예식을 강요했습니다.
시편 72 편
그러나 마게도냐 사람들은 피지배국의 이와 같은 노예적이요, 불명예스러운 표지에 복종하기를 거절하고 경멸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유다에게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왕이 멀리 있는 모든 원수들을 쳐부수고 완전하게 승리를 거둠으로 그들은 겸손히 왕께 충성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3. 본문 10절은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스바와 시바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입니다.
다윗은 앞절에 언급했던 왕국의 범위에 대해 계속 말합니다.
히브리인들은 길리기아로 향하는 모든 항구들을 “다시스”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섬”은 길리기아에서 그리스로 향하는 모든 지중해의 항구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네 나라에서 생산되는 물건들로 만족하였기에 다른 나라나 먼 지방으로 여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 백성들이 낯선 습관들로 인해 타락하지 못하도록 자기들 나라 영토 안에서 머물기를 원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바다 건너편에 있는 나라들을 “섬”으로 불렀습니다.
구브로, 그레데 외의 다른 섬들도 이 이름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이 지중해 건너에 위치한 모든 나라들도 가리킨다고 확신합니다
“공세”라는 מנחה(미느하)와 “예물”이란 אשכד(에쉬카르)는 자진해서 드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어떤 의무나 습관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원수들을 지배하게 된 표지나 증거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명칭은 이같이 커다란 정복의 징표에 당연히 따르는 증오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이곳에서 의도적으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영감을 받은 저자가 종속(從屬)들이 왕에게 바쳐진 공세를 몰래 탈취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듯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שבא(스바)는 아라비아를 סבא(시바)는 에디오피아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שבא(스바)는 아프리카 쪽을 향해서 위치한 모든 아라비아의 늪지대를 가리킨 것이요, ס(싸멕)이라는 문자가 있는 סבא는 살기 좋고 소출이 많이 나는 나라인 시바를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두 가지 중 후자가 더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로마 교회가 이 구절에 대해 왜곡하고 있는 어리석음의 정도가 얼마나 심한가를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편 72 편
단지 그들이 이 구절을 그리스도께 경배하기 위해 나오는 철학자나 현명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봄으로서 열왕들에 대한 말씀을 순식간에 자기들이 확보하고 있는 철학자들의 능력에 관한 것으로 날조한 결과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는 결과는 세상의 4분의 1을 바꾸거나 동을 남이나 서로 만드는 것과 같은 일일 것입니다.
4. 본문 11절은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 입니다.
이 구절은 온 세상이 그리스도의 권위로 다스림 받게 될 사실을 보다 명확히 말합니다
유다 왕국은 분명히 솔로몬이 통치를 할 때보다 더 번영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임금에게 공물을 바쳤던 왕들의 숫자는 매우 적었습니다.
또 그들이 솔로몬에게 드린 예물의 분량도 매우 하찮은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또 이 예물은 자신들의 법 아래 자유를 누리며 살 것이 허락된 조건 하에 바쳤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들과 또 그 아들의 자손에 대해서 말하기를 시작할 때에 예견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을 예언했습니다.
이 점은 우리가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된 것도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기로 이미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교회, 즉 그리스도의 양무리 속에는 열왕들을 위한 장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열왕들을 교회 안으로 모으려고 무장 해제나 면류관을 빼앗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발 앞에 부복한 상태에서 모든 위엄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72 편
시72:12-15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의로 다스리는 임금이 특별히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주심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를 구원해 주십니다(12-15).
“가난한 자”란 말은 특별히 시편에서 성도를 가리킵니다.
성도는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땅의 것을 가지고 즐기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는 하나님을 위하여 악인들에게서 핍박을 받는 일도 많습니다.
1. 본문 12-14절은 “(12)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13)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14)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 저희 피가 그 목전에 귀하리로다”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그렇게도 크게 확장시킨 나라가 결코 반역적이거나 잔인한 나라가 되지 않을 것임을 또다시 확언합니다.
대개 왕들은 일반 대중의 복지는 도외시하고 사적 관심에 마음이 온통 사로잡혔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왕들은 그 백성들의 비참한 종속을 무자비하게 억압합니다.
심지어는 그 행위가 잔혹하고 그 탐욕이 담대하면 담대할수록 그만큼 더 훌륭하고 뛰어난 왕으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왕은 매우 다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라는 말은 온 인류에게 적용되는 잠언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실을 자기와 가까이 있는 왕들에게 보여주시지 않았을리 만무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랑하는 왕은 마땅히 공의와 공평을 지켜야 할 뿐 아니라 가장 멸시당하는 자를 구원할 수 있도록 자비하고 인자한 자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성품은 자신의 영달에만 눈이 어두워 가난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들과는 거리를 멀리하는 통치자들에게서는 매우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들은 이런 일을 무익하고 가치없이 여기고 왕권을 사용해 자기 욕심만 채웁니다.
다윗은 흔히 미천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반 백성들의 피를 하늘에 계신 임금께서는 매우 값진 것으로 여기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72 편
“저희 ..... 구속하리니” 라는 말은 불변성과 너그러움을 뜻합니다.
왕이 해야 할 의무는 단순히 사기나 강탈을 미워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단호하게 이 같은 죄악들을 벌하고 압제당하는 자들을 지켜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압박”과 “강포”는 모든 종류의 그릇된 행위를 가리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사자나 혹은 여우와 같은 자입니다.
어떤 자들은 심한 분노를 발하고 어떤 자들은 은밀한 방법으로 악을 저지릅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점과(마28:18), 권세를 가진 자들은 백성들이 모든 고통에서 건짐을 받을 때까지 일시적인 모든 위험 뿐만 아니라 특별히 사단의 모든 공격과 괴롭힘에서 보호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2. 본문 15절은 “저희가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저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저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존하여”가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하는데 무리입니다.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왕이 오래 사는 복을 받으리라는 것과 이 장수(長壽)는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복 중에서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다음 계속되는 말은 특정한 사람을 지적하지 않고 막연하게 지칭한 말입니다.
이 구절은 아라비아의 황금을 저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모든 곳에서 저의 번영을 위해 기도할 것이라는 뜻으로 앞서 저의 권세에 대해 한 말을 반복한 것입니다.
만일 아라비아가 저에게 공물을 바쳤다면 수많은 인접 국가들로부터 모아드린 재물의 분량이 얼마나 막대하였겠는가!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황금을 쌓아두시지는 않지만 다윗은 이 비유를 통해서 가장 먼 곳의 나라까지라도 저에게 복종하며 모든 소유물들을 바침과 같이 그리스도께 충성을 바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그리스도 왕국의 영광을 외면적으로 나타나는 호화스러운 모습으로 묘사한 것은 별로 특이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성경 말씀이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입장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 영적인 성격상 재물과 구분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교황주의자들이 이 구절을 곡해함으로서 세상의 썩어질 재물을 긁어 모으기 위해 애쓰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사악하며 터무니없는 짓인가를 보여줍니다.
시편 72 편
다윗은 사람들이 일반적인 기도로 하나님의 보살펴 주심으로 왕이 번성하기를 간구할 것이라는 말에서 백성들이 저의 백성이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여길 것이라는 점과 그들은 왕의 권위 앞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가장 바람직하게 여길 것이라는 점을 암시합니다.
많은 자들이 자신의 멍에 매기를 거부하고, 위선자들은 초조해 하며 마음 속으로 불평을 내뱉고 할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기억을 기꺼이 떨쳐 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언되고 있는 높으신 이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관심은 모든 참된 성도들이 갖추고자 하는 성품입니다.
이 기도는 이 땅의 왕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마땅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드리는 기도일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를 바라고 이 나라에 하나님의 엄위가 비취며 또 자기들의 재물과 복도 여기에 포함되기를 특별한 열심으로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18편 25절에서 모든 교회가 본받아야 할 기도의 모형을 찾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종들에게 참된 경건의 증거를 요구하심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72 편
시72:16-19 산꼭대기의 땅에도
주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해 주신 결과는 그들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합니다(16-19).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찬송하기 위한 것입니다.
1. 본문 16절은 “산꼭대기의 땅에도 화곡이 풍성하고 그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같이 왕성하리로다” 입니다.
“풍성하고” 가 적게 뿌린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자들의 견해는 일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여기 두 가지 실례는 진귀하고 흔하지 않은 비옥한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손으로 쥘 수 있는 정도의 매우 적은 양의 곡식이 뿌려졌고 그것도 대부분 열매를 거둬들일 수 없는 산꼭대기에 뿌려졌지만 매우 풍성하게 자라게 되어 그 이삭이 마치 레바논의 나무들같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물결을 이루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이 씨 뿌릴 때와 추수할 때를 한꺼번에 비교하여 그렇게 말했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단순하게 산출할 것이 너무 많아 산꼭대기에서 거두게 될 곡식이 풍성해져서 손에 가득히 베어 들이게 될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복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즐기게 될 모든 좋은 것들이 지극히 풍성함을 묘사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녀들의 번성함도 첨부됩니다.
땅의 소출은 모든 갖가지 열매들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같이 왕성하리로다” 라는 말씀과 같이 성읍 사람의 번성함도 그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레바논”이라는 말을 주격대신 소유격으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약간 거칠게 표현된 대로 레바논이란 산의 이름은 그 산에 있는 나무들 대신에 환유법으로 사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본문 17절은 “그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입니다.
1) 성령의 감동으로 다윗은 이 나라의 영구적 지속에 대해 반복합니다.
시편 72 편
다윗은 조심스럽고도 명확하게 이 나라와 땅에 속한 나라들, 즉 순식간에 없어지든지 아니면 조만간 자기가 가진 힘에 짓눌려 멸망에 떨어짐으로서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견고한 것이 없으며 오래 지속되는 것도 없다는 사실을 자기들의 멸망으로 명백하게 증거해 주는 나라들과 구별합니다.
“그 이름이 영구함이여”라는 말씀은 마치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려는 자들이 자신의 이름이 자기 육체와 함께 묻혀 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죽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이름이 계속해서 남아있기를 단순하게 의미하고 있다고 해석될 수는 없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이 임금의 이름이 계속해서 유명해지며 영원히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한 말은 그 나라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해와 같이” 로 번역한 לפני-שמש(리프네 슈메쉬) 를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유다 왕들에게 부어 주실 영광이 햇빛과 찬란함을 능가하게 될 것을 나타낸다’ 고 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문맥상 서로 모순됩니다.
5절에 “해가 있을 동안에” 와 “달이 있을 동안에”라는 말씀의 의미는 이와 다릅니다.
2) 그러므로 다윗은 왕의 이름이 영원히 지속할 것을 말한 후에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라는 설명을 추가합니다.
이 말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그의 이름이 자녀들을 가질 것이라’ 입니다.
이 말의 히브리어 동사가 ‘아들’ 이라는 명사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계속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태양이 매일 떠올라 세상을 밝혀 주는 것처럼 이 왕의 힘이 날로 새로워져서 자자손손 영원토록 계속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로 해와 달을 영원한 것의 증인이라 부른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시89:37)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다윗 시대에 잠간 동안 꽃을 피웠다가 삼대 째에 그 힘을 잃어버렸고 얼마 안가서 수치스럽게 망해 버리고 말았던 이 땅에 속한 나라를 가리키는 말일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비록 그 나라가 모든 세상의 맹렬한 증오를 당하거나 가장 무시무시한 사단의 병기와 더불어 싸우게 될 때는 흔히 이 땅에서는 비틀거림을 당하지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놀랍게도 보존되고 붙들림을 받아 결코 완전히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의 이름이 복을 구하는 기도의 모형이나 방식으로 표현은 히브리어에 흔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은총과 자비하심을 다윗에게 부어주심과 같이 그렇게 해주시기를 구하는 신자라면 그 신자는 다윗과 더불어 스스로를 복되게 하는 자입니다.
반대로 소돔과 고모라의 이름은 어떤 저주를 하는 말로 쓰여 졌습니다.
시편 72 편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라는 말과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라는 말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왕을 속되다’ 라고 한 것은 ‘온 세상에서 칭송을 받을만하게 복된 처지에 있었던 이 하늘의 복을 받은 왕에게 임하였던 그 복과 똑같은 번영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기어이 이 두 가지 표현을 구별하려고 생각한다면 ‘어떤 사람이 왕을 복되다’고 한 것은 그 왕에게서 복을 찾고자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모든 열방들이 그에게서 율법과 명령을 받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본문 18절은 “홀로 기사를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입니다.
다윗은 자기 후계자들의 번영을 위해 기도한 다음에 하나님께 찬송을 터뜨립니다.
이유는 자기 기도가 하나님의 계시로 인해 헛되지 않게 될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윗이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것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면 그의 기쁨은 한낱 헛된 물거품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만이 “홀로 기사를 행하신다” 고 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탁월함을 말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그런 것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시는 신기하고도 놀라운 능력을 행해 주시도록 기도하게 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이 말을 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보좌가 결단코 떨어지지 않으리라고 한 말씀은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파멸하고 말았던 다윗의 후손들을 두고 한 말씀이 아닌 것도 분명합니다.
솔로몬이 당했던 가장 수치스러운 반역은 쓰라린 멸망을 가르쳐 주지 않는가?
또 요시아, 히스기야, 여호사밧 기타 몇몇 사람을 빼놓고는 다윗의 모든 후계자들은 마치 조상들보다 더욱 악해지려고 기를 쓴 것처럼 점점 더 악해져서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멸망하기 위해 분노의 벼락을 즉각적으로 때리시지 않은 것은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닌가?
예언의 영을 부여받았던 다윗은 사단이 교회가 잘 되는 일에 항상 잔인스러운 원수가 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기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히 보존되도록 크고도 험난한 어려움들을 막아내 주시리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후일에 일어날 사건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많은 이적들을 행하신 것에 의해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편 72 편
4. 본문 19절은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 입니다.
이 말씀은 솔로몬이 뜻 없이 공연히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앞서 살폈습니다.
다윗이 시적인 구문을 맞추기 위해 이 말을 하게 된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솔로몬이 자기 아버지가 받아야 할 찬양을 자기에게 속한 것인양 속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또 다윗이 최후 순간까지 계속 같은 기도, 즉 교회가 번영하도록 하나님께 더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말을 했다고 봄이 타당합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가 인자의 통치 아래서 유지되고 보호함을 받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거짓 없는 진실과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기도의 의무가 우리에게 지워졌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다윗의 아비 “이새”가 소개된 것은 다윗의 근원을 기억하게 합니다.
다윗은 보잘것없는 한 사람의 목동으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연약하다고 생각되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본 절은 다윗을 일으키사 가장 영광을 받을만한 높은 지위에 올리시고 택한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으로 만들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보다 쉽게 설명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본문 시편 72편 17-19절을 다 함께 읽습니다.
시73:1-3 “하나님이 참으로”
우리 하나님은 선 그 자체이시고 영원토록 그러하시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인식에 도달하기란 그리 용의치 않는 게 사실입니다.
Ⅰ. 우리는 본 시편의 서론에서 상당한 것을 살필 수 있습니다.
1. 우리는 먼저 본 시편의 내용의 대략을 살펴봅니다.
1) 이 시의 저자가 다윗이거나 도는 다른 누구든지 간에 그는 육적인 느낌과 생각으로 말미암은 판단과 싸우면서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선하심을 찬미하는 것으로 이 시를 시작합니다.
2) 그 다음으로 그는 악한 자가 매우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온갖 종류의 쾌락에 빠져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무례하게 하나님을 비웃으며 의로운 자를 잔인하게 괴롭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의를 행하기에 열중한 자들이 자기들의 염려와 비례해서 고통과 재난을 당하는 정도가 심해지는 것, 또한 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번민으로 나날을 보내고 고통과 슬픔에 짓눌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마치 게으르고 관심이 없는 자와 같이 하늘에 앉아 있으시면서 이런 무질서한 형편에 간섭하여 고치려 하지 않으신 것과 같은 상황을 또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자기는 너무나도 심한 충격을 받아 거의 하나님을 버리고 종교에 대한 모든 관심이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에서 떠나 버리려는 생각을 가졌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3) 세 번째로는 앞에서 자기가 단지 현세적인 상태만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판단했던 거칠고 성급한 잘못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은 결코 이러한 고통과 불안으로 말미암아 실망하지 않는다는 인내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4) 마지막으로 그는 결론짓기를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도록 예비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을 성취시켜 종국에는 매우 다른 면들을 보여주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의로운 자가 자기들의 보상을 빼앗기지 않게 되는 것은 물론 악한 자가 심판의 손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2. 이 시편의 저작자와 그 밖의 내용을 상당히 긴 서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이 시의 표제는 “아삽의 시” 입니다.
1) 이 시의 저자에 대해서 매우 만족할만한 결론은 내릴 수가 없습니다.
아삽의 이름이 서두에 나오는 것은 노래를 불러야 할 책임이 그에게 지워졌던 것에 불과합니다. 또 그런 이유에서 이 시의 참 저자인 다윗의 이름이 빠졌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어떤 것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때에는 보통 그 서두에다 굳이 그것에 대한 것을 밝히지 않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시 속에 들어있는 교훈을 상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은 비상할 정도로 참되고 경건한 믿음을 지녀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처한 미끄러운 땅위에서 비틀거리면서 발걸음을 가누기 너무 어려웠던 선지자의 예에서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의 앞에 시험으로 닥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온전한 마음 상태로 돌아오기까지는 거의 짐승과도 흡사할 만큼 우매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우리 경험도 하나님의 섭리를 얼마나 하찮게 여기고 있는가 하는 것을 증거 해 줍니다.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손에서 다스려진다는 것을 의심 없이 인정하여 찬동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우리 마음속에 깊게 뿌리를 박고 있다면 우리 믿음은 보다더 꿋꿋해지고 인내를 갖고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들을 헤쳐나가며 시험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극히 사소한 시험을 만났다고 해서 이러한 교훈을 우리 마음속에서 제하여 버린다면 이것은 우리가 아직도 이 진리를 참되고 아주 진지하게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뿐만 아니라 사단은 우리 눈을 부시게 하고 우리 마음을 어리둥절하게 할 수 있는 교묘한 책략을 무수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혼란을 일으켜서 짙은 안개를 일으킨 뒤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없도록 하여 버립니다. 또 불의한 자들이 대부분의 승리를 차지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노를 유유히 불러일으키고 그 분의 보복을 자극시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노를 사용하지 않으심으로 마치 그들이 조금도 하나님을 조롱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것처럼 여겨서 결코 이것 때문에 소환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반면에 의로운 자는 가난으로 궁지에 몰리고 수많은 고통에 짓눌리며 날로 늘어나는 잘못된 것들로 인하여 쉴새없이 괴로움을 당합니다.
수치와 비방 그리고 신음과 한숨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들은 끝까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선을 행하려고 애쓰는 그 정직함 때문에 악한 자가 뻔뻔스럽게도 그들의 인내를 마음대로 비방합니다.
우리는 불의 한 생각으로 인해 전혀 유혹이나 괴로움을 당해 보지 않은 자를 만날 때 ‘세상의 일들은 제멋대로 뒤엉켜 있다거나 우연에 의해서 다스려진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착각에 빠집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와 같은 생각은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영생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는 불신자들의 마음속에 분명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솔로몬이 마음속에 불경스러운 것들로 가득 찬 사람들의 자손과 하나님을 묵상하는 사람들의 자손을 가리켜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전9:2)고 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이러한 말을 한 것은 하나님의 지도와 통치 아래서는 모든 일들이 그처럼 혼돈 되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3) 이교 철학자들 중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기도 하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진리를 진지하고 철저하게 확신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기대하던 것과 반대되는 일들이 터지게 되면 이전에 자기들이 말했던 것을 공공연하게 부인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브루투스(Brutus)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용기에 있어서 그를 능가할 만한 사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리고 그와 친숙한 사람들은 모두가 그는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고 증거 합니다.
스토아 철학자들 부류에 속한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찬양하는 명언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에 안토니우스에게 정복을 당하게 되자 자기가 미덕이라고 믿었던 것은 모두가 진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간 생각에 불과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고결하고 정직하게 살기 위해서 당하는 모든 고통은 단지 그만큼 수고를 낭비하는 것에 불과하며 인간들의 모든 행위는 운명에 지배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영웅적인 용사는 미덕을 포기하고 그 이름 아래서 하나님을 저주하는 데 놀라운 결심을 보여주고는 수치스럽게 떨어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은 악한 자의 말이 사태 변동에 따라 얼마나 잘 변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지 못한 이방인들이 어찌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들 마음에 파고드는 동일한 유혹을 막아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의 도우심을 간구 할 때처럼 같은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윗이 자기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한 것같이 그들이 때로는 그 시험으로 인하여 비틀거리고 거의 쓰러지게 될 때에 그와 같은 힘있고 거센 공격에 견뎌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Ⅱ. 그러면 이제 이 시편의 말씀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십시다.
1. 본문 1절은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입니다.
1) 부사 וא(아크)는 단순히 ‘명확하게’ 확실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럼에도’ ‘.......에도 불구하고’ 또는 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관사는 여기서 매우 흥미는 가지고 있지만 결론을 내리기에 대단히 힘든 곤란한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시편 기자의 경우에는 희망과 절망의 중간 상태인데 전자의 입장으로 강하게 기울어지고 있다.”
다윗이 이처럼 당돌하게 이 시의 서두를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가 이것들을 말로 옮기기 전에 그의 마음이 많은 의심과 서로 상반되는 생각들로 격동하고 있었다는 특별히 주목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용감하고 영웅적인 사람과도 같이 다윗은 매우 고통스러운 몸부림과 유혹을 당했습니다.
그는 오랜 노력으로 마침내 모든 좋지 못한 생각을 흔들어 떨쳐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자기 종들에게 은혜로우시고 그들 행복의 신실한 보호자이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속에는 사단이 그에게 가져다 준 더러운 생각과 이제 그가 스스로 용기를 얻어 육신을 따라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가지게 된 참된 종교를 좋아하는 증거 사이에 무언의 대조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인의 절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철학자들이 하듯 논쟁하는 자리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리석은 웅변 형식으로 자기 말을 늘어놓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치 지옥에서 도피하는 것처럼 열렬한 감정으로 자기가 승리를 얻었다는 것을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그가 보여준 예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그가 말로 표현한 어려움과 심각한 번민들은 그의 마음과 폐부를 나타내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결론은 감각과 이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이 그의 종들을 돌보시기에 게으른 것 같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항상 자기 종들을 은혜로 감싸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찬송하고 특별히 참된 성도들에게 그 섭리의 범위를 넓혀서 다른 피조물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할 뿐만 아니라 마치 가장이 자기 식구들을 위해서 모든 것들을 주의 깊게 마련해 주고 식구들을 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특별한 관심으로 그들의 축복을 감찰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교회를 위해서는 더욱 밀접하고 특별하신 보살핌으로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뻐하며 교회를 유지하고 보호하십니다.
2) 선지자가 왜 ‘이스라엘’ 이라고 특별히 말했으며, 또 곧 이어서 앞 문장에서 말한 자들 중에서 뽑아 낸 자들인 “마음이 정결한 자”라고 그 이름을 제한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에돔 족속임을 구실로 마치 교회의 뛰어난 존재들인 양 이스라엘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부르짖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모든 아브라함의 변질된 후손들을 경건한 자들의 범주에서 말살해 버리려는 의도에서 하나님을 순전하고 올바르게 경배하는 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스라엘에 속한 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다음과 같은 의도로,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선을 행하신다고 내가 말한 것은 단지 이스라엘 족속의 이름만을 만족하게 여길 뿐 정당하게 그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자들 모두를 가리킨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신실한 사랑을 하나님께 바치는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을 말한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반절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선을 행하신다” 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가리키고 하반절의 “마음이 정결한 자” 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참된 의의 길을 걷도록 만들어 주신 이방인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억지 해석이므로 다음과 같은 해석을 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윗은 택한 백성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선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함에서 떠난 많은 위선자들을 반드시 자기들의 숫자에서 삭제시켜야 하고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버지같이 보살펴 주시는 은혜를 기뻐할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다나엘에게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 라고 하신 말씀이 이 말씀과 일치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거의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이 ‘손에 할례를 받은 자’ 다시 말해서 외부의 할례 받은 자들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참 아브라함의 자손과 위선자들 사이에서 참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가려내기 위해 그들에게 간사스러운 꼬임에서 풀려날 수 있는 특징을 주어 식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올바른 마음을 갖는 것 이상으로 필요한 구비 조건은 있을 수 없습니다.
2. 본문 2절은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입니다.
문자 그대로는 “나는 거의”는 ‘그리고 내가’로 직접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강조형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다윗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욕을 돌리게 하고 믿음을 짓누르게 하는 시험들은 비단 보통 사람,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도가 매우 미약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하는 자기에게까지도 그러한 시험들이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데 있습니다.
다윗은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을 본으로 보여줌으로써 보다 효과적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매우 조심하여 살펴보도록 자극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는 시험에 실제적으로 굴복하지 않았으면서도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또는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다” 고 말한 것은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능력 있는 팔이 붙들어 주지 않는다면 넘어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경고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3. 본문 3절은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입니다.
우매한 자를 부러워하였음이로다 - 칼빈 사역 ; ‘오만한 자’ 라는 말의 뜻은 ‘지조가 없는, 포악한, 경솔한, 거짓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Boothroyd 는 이 말을 ‘세속에 빠진 자’ , Fry 는 ‘허영심이 많은 자’ 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이 당했던 시험의 본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자기가 악한 자가 현재 처하고 있는 번영을 바라보고 간혹 그들을 행복한 사람으로 판단하여 그들의 처지를 부러워한 적도 있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정한 법칙에 따라 살지 않으려고 마음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싸우고 있을 때나 또 그렇게 행할지라도 형벌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고삐를 늦춰 담대하게 범죄를 저지르게 될 때에 우리는 분명히 심각하고도 위험한 시험 아래 놓여 있는 것입니다.
시실리(Sicily)의 폭군 젊은 디오니시우스(Dionysius)가 시라쿠스(Syracuse) 성전을 탈취한 후에 노략한 물건들을 싣고 득의 만만하여 항해하면서 지껄였던 농담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자기와 함께 있던 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 신을 모독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자비를 베푸는지를 보지 못하였는가?’ 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악한 자의 번영은 죄를 범하는 용기를 더해 줍니다.
잘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로 풍성하게 해주시는 것을 보고 그들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자이거나 은혜를 입은 자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들의 번영이 다윗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겠는가? 를 생각합니다.
또 한편 그로 하여금 그들과 더불어 동료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는 것으로 생각케 하여 거의 그들의 생활을 따를 뻔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봅니다.
다윗이 불의한 자들에게 ‘우매한 자’(칼빈 사역)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단순히 그들이 범한 죄가 무지나 실수로 인해 저질러진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지 않고 어리석게도 참된 지혜의 근본 요소가 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거역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가 교활하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규칙적이고 뼈대있게 살아야 한다는 올바른 판단의 근본 원리가 없다면 그들은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되는 이유는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바른 판단 원리를 확보한자는 동시에 동일하게 주의 은혜로 그 원리를 보존하고 그 원리를 따라 살려는 거룩한 고집도 받아서 사는 동안에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는 새로운 은혜의 복도 누리는 것입니다.
시73:4-9 저희는 죽는 때에도
제가 어렸을 때는 주로 시골생활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임종을 지켜볼 수 있는 일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첫 번째 임종하시는 분을 목격한 것은 친구의 아버님으로써 그분이 목사님이셨는데, 저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실 만큼 그분의 임종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저의 부친이셨는데, 투병생활부터 저의 작은형 장로님을 시험 들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 다음은 저의 교회의 초창기에 민정님 집사님이셨는데, 믿음은 날로 좋아지셨는데 역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낭만적이고 곱상한 모습으로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최근의 임종은 저의 장인 어르신이신 데 인간적으로는 호인이셨습니다.
산정현 교회에서 시무장로들이 꼴보기 싫으셔서 방배동 새순교회로 옮기셔서 신앙생활 하셨으니까 나름대로는 갱신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 어르신의 임종도 쉽지 않으셨습니다.
저의 아버님이나 장인 어른에게서 어려웠던 점은 생애 중에 가장 힘썼던 일로 돌아가고 저 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생활을 그럭저럭 하시는 분들은 아마도 임종시에 후손들로 하여금 꼭 시험에 들게 할 수 있으신 분들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1. 본문 4절은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입니다.
1) 다윗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는 수많은 시험들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악한 자들의 안락한 생활과 그들이 누리는 이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다윗께서는 그 악한 자들이 누리고 있는 훌륭한 건강 상태를 실례로 그들이 건강하며 무병 장수하는 것을 보며 놀란다고 말합니다.
다음에는 또 그들이 생의 종결부분에서도 오랜 질병으로 고생하다가 숨을 거두지도 않아서 마치 참된 신자와 같이 여겨질 때가 많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이 악한 자가 갑자기 또는 순간적으로 죽어서 방탕함에 대한 대가의 고통을 당장에만 겪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욥은 악한 자가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을 가리켜 사용하기를, 그들은 이 땅에서 사치스러운 향락을 마음껏 누린 후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욥21:13)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줄리어스 시이저(Julius Caesar)가 죽기 전 ‘갑자기 예기치 않게 죽는 것이 자기에게는 가장 행복한 죽음인 것같이 여겨진다’ 고 한 말과 관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입장을 취하면 다윗이 악한 자가 큰 고통이나 번민없이 쉽고도 평탄하게 죽어 가는 것을 불평한다는 것이 됩니다.
3) 그러나 이 두 문장을 서로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즉 ‘저희의 힘은 건강하다.’ 그래서 이러한 자들은 ‘죽은 때에도 고통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사형수들과 같이 죽음을 오래 끌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법관의 손 혹은 선고에 의해서 자기들이 받아야 할 죽음을 오래 끌지도 않고 수많은 선한 사람들의 경우와 같이 망설이거나 슬퍼하는 고통도 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잘 익은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음부에 떨어짐으로써 안락하고 순간적인 죽음을 즐기고 있다(욥5:26과 31:13 비교)고 했습니다.”
모든 옛날 번역에서 ‘고통’으로 번역된 것은 성경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은 사58:6에서 한 번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히브리 어법에서는 종종 “해산하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저희가 죽을 때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쉽게 죽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불꽃이 점차적으로, 그리고 명확하게 소멸되어 가는 아주 늙은 나이까지 사는 고통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어떤 ‘질병’을 가리킬 때도 이 말을 사용했는데, 칼빈도 뜻을 같이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18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인” 즉 악령으로 말미암아 쓰라린 질병을 앓고 있는 여자에게 “네가 네 병에서 놓였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고통에서 놓였다는 의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면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 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질병에서 치료되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눅13:11, 12, 16)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견해를 취하면 “저희는 죽을 때 심한 질병이 없다” 는 의미가 됩니다.
우리의 힘을 쇠약하게 만드는 많은 질병들은 죽음의 사신들이요, 우리의 생명이 짧고 덧없다는 사실을 경고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 귀절은 우리의 힘과 용기가 우리들로 하여금 방탕하고 반역을 일으키고 싶은 자극을 주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씌워 주신 멍에인 고통을 적절하게 대조시키는 말씀입니다.
2. 본문 5절은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입니다.
1) 여기서 다윗께서는 악한 자가 유쾌한 휴식을 즐기고 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특별한 권한을 행사하여 온 인류가 일반적으로 당하는 슬픔을 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2) 그러나 그들 역시 좋은 일뿐만 아니라 고난을 당하는 일에도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종종 심판을 내리고 계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연관시키려는 특별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항상 그들 중에 얼마를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여서 본문에 묘사된 것처럼 재난이 없는 상태에서 사는 특권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게 하실 뿐입니다.
3) 성경이 사람의 일생은 수고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 우리는 이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요, 조건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가도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이 스스로 사치스러운 향락에 도취되어 매우 안일한 생활을 즐기면서 사는 것을 볼 때에 흔들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치 자기들은 다른 모든 세상 사람들 중에서 쾌락을 누리도록 높임을 받은 자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별도로 자기들을 위한 향락의 처소가 있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생애 가운데 이런 사람들의 소행을 우리가 바라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대부분의 신앙인들도 쓰라린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3. 본문 6절은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그러므로 교만이 저희를 목걸이처럼 두르고 - 칼빈 사역)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입니다.
이 말씀은 앞에서 말한 불평보다 그 정도가 더 심각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비록 자신의 자비와 인자함을 악용하고 있는 악한 자들을 수치스럽게 그리고 사악하게 간주하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의 배은망덕함과 반역을 참으신다고 하는 말씀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다윗께서는 몸에 걸치는 옷과 차림새를 비유로 해서 이러한 자들은 자기들의 악한 행위에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칼빈이 ‘목걸이 같이 그들을 두르고 있다’(칼빈 사역)고 번역한 קןש(아나크)란 동사는 “목걸이”란 의미를 가진 명사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은 마치 금목걸이로 우아하게 몸을 치장하듯이 자기들의 뻔뻔스러움과 광기를 찬양하여 방탕한 생활로 자기들의 옷을 삼고 또 이 생활이 매우 품위 있고 찬양할 만한 생활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위대한 사람을 장식하기 위해서 목에 두르는 화려한 것이나 목걸이를 은유적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잠1:9, 아4:9과 비교).
‘교만을 목걸이로 삼은’에서 형통한 처지에 있는 악한 자들은 장식품으로 금목걸이나 황금 깃을 목에 두르고 이것에서 자기들의 어떤 장엄한 품위를 찾습니다(사3:16).
이 말은 그러한 자들 중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직분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금목걸이는 치안관(治安官)이나 세상의 권세 잡은 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확신하기는 다윗은 목 혹은 머리를 말한 후에, 이제는 사람의 모든 맵시를 한마디로 함축하여 말씀합니다.
이 말이 나타내고 있는 뜻은 악한 자들은 자기들의 번영한 것 때문에 매우 눈이 어두워져서 점점 더 교만해지고 방자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강포로 저희가 옷을 입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번영하고 교만하며 악한 자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압제합니다.
자기들의 강포한 행동을 매우 빈번하게 행하되 공개적으로 행합니다.
또 모든 사람들을 자기들의 등에 걸친 옷과 같이 여기며, 흔히 그들이 입은 옷은 강탈하거나 억압하여 빼앗은 것들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들을 강포로 옷을 입었다고 한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입니다(사59:6).
시인은 순서상 매우 적절하게 “교만”을 먼저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강포”를 말하여 서로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이 사방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빼앗고 강탈하며 수많은 잔악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아무도 자기와 견줄 만한 사람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자기를 위해서 태어난 자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강포의 근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강포의 모체는 교만입니다.
4. 본문 7절은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입니다.
1) 다윗은 악한 자들이 그런 강포와 잔인성을 터뜨리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들은 너무 먹고 살이 쪄서 눈이 얼굴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할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살이 찌개 되면 눈이 얼굴에서 볼록 튀어나오게 됩니다.
다윗이 이 말을 육체적인 용모를 말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이 그들의 소유가 넉넉한 것 때문에 교만해진 것을 은유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한 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번영한 것으로 인해서 스스로 몹시 배가 부르고 도취되어 후에는 교만으로 부풀어올라 거의 터질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2) 본문의 마지막 문장도 역시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나며’라고 번역한 רבע(아바르) 동사를 ‘고삐가 풀린 오만’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악한 자들은 일상적인 범주에 머무르는데 만족하지 않고 구름 너머의 생소하고 엉뚱한 것들을 찾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온 세계를 소유할 수 있을까? 를 생각합니다.
실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주시기를 바랄 것입니다. 요컨대 그들은 전혀 만족할 줄 모르고 미친 듯이 한없는 욕망을 좇아 하늘과 땅의 경계를 넘는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생각들은 어떤 법으로 규제를 당하거나 어떤 경계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설명하는 것은 확실히 일리가 있습니다.
3) 그러나 또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그들이 지나치게 만족을 누렸던 형통과 번영은 그들이 생각 속에서 그려낸 것들을 기대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잠을 자고 있는 동안 ‘행운의 여신이 그물을 던져 대신 고기를 잡아 주는 것처럼 소망했던 이상의 많은 것을 얻게 되는 자들을 이따금 볼 수 있다’는 말 그대로 입니다.
‘행운의 여신이 고기를 대신 잡아 준다’는 말은, 만년의 데미테리우스가 재간도 없고 주의심도 없는 데다 위대한 통찰력도 없는 처지에 수 없이 많은 성읍을 차지하고 있었던 상황을 재치 있게 묘사한 말이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살찜”이라는 말을 앞에서 말한 뜻으로 새긴다면, 이 귀절은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에게 항상 그들이 바라거나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모든 좋은 것들로 풍성하게 쌓아주시고 채워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5. 본문 8절은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입니다.
1) “저희는 능욕하며”라는 말씀에서 능욕으로 번역된 동사 וקימי(야미쿠)는 악한 자들이 자기들도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한없이 방탕한 생활에 빠져 모든 염치와 정직을 발로 짓밟음으로써 자기들의 사악함을 숨기려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들의 부정함을 거만하게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악한 자들이 바라던 대로 만사가 형통하게 되면 모든 염치를 내동댕이쳐 버리고 말기 때문에 죄를 범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 때에 번민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들의 타락을 자랑스럽게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을 실제로 보고 있습니다.
손쉬운 예로 강도들을 들 수 있지만, 그들도 스스로 두려움을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거인들이 있습니다.
차라리 사람이 아닌 괴물이라고 해야 할 자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은 어떤 법률의 속박에서도 제외된 자라 생각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들에게 있어서는 나약한 것이란 생각할 수도 없다고 뽐냅니다.
또한 자기들이 가진 그 격렬함도 물거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할 줄 모릅니다.
이로써 자기들에게는 선과 악의 분별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와 고통 당하는 자들은 악한 자들의 이런 무자비함을 볼 때에, 몹시 근심하여 부들부들 떨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보게 될 때에 녹아지고 분해가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다음은 “악하게 압제하며 거만히 말하며”라는 말씀을 상고합니다.
칼빈은 이 부분을 ‘저희가 높은데서 말하며’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표현은 그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의 머리에다 거만과 욕설을 퍼붓는다는 의미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업신여겨서 그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거만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나타낸 말입니다.
라틴어로 despicere라 했고 헬라어로는 καταβλεπειυ(카타블레페인), 즉 ‘내려다보다’ 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이처럼 그들을 높은데서 말하는 자들이라고 소개한 까닭이 있습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생각지 않고 스스로 특별한 계급이 있는 자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스스로를 작은 신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희가 높은 데서 말하며’ 란 의미는 이렇습니다.
“저희는 마치 하늘에 있는 자처럼 여겨서 다른 모든 피조물이나 심지어는 하나님보다도 높은 자로 자처하고 자기들의 말은 신의 명령과도 같이 조금도 의심이나 주저함이 없이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와 산헤린 그리고 느부갓네살이 출5:2, 사36:20, 단3:15에서 이와 같은 말을 했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이나 헬라 사람들은 교만에 도취되어 있는 사람의 모습을 묘사할 때 ‘내려다보다’ 는 의미를 가진 말을 사용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6. 본문 9절은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입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거만한 말을 한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들은 어떠한 세력도 자기들을 넘어뜨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자기들이 하늘과 땅을 지배한다고 스스로에게 아첨합니다.
혹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경고하자하면 그들은 단호하게 이 벽을 부셔 버립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사람들이 가진 힘의 사분의 일 만큼도 크게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거만하고 자만한 말을 막아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라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 우리가 그들의 허망한 생각이 얼마나 크고도 한이 없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에는 시인이 가르쳐 주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실제적인 사실로 볼 수 있다고 인정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헛된 방식으로 권위를 입은 자들에 대하여 비교적 냉소적 일 수 있다면, 그것은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과 행하실 일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들과 그리고 그들의 종국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서 살으셨던 신앙의 선진들이 그러하셨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을 참으로 알아모신 이런 거룩한 인식에 근거를 둔 생활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시73:10-14 그러므로 그 백성이
수요일 저녁 집회마다 참석하는 우리 집 외동딸 아이를 보면서 생각 되는게 하나 있습니다. 아직 우리 아이는 피아노 반주하는 것 그 이상의 관심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우리교회에서 대표 기도하는 분들의 상당수도 그러리라 짐작이 됩니다.
제가 신학대학 2년을 마치면서 방위병 소집을 받았는데 14개월을 고향에서 복무하면서 고향교회에서 아이들을 위한 설교 봉사를 맡았습니다. 주로 토요일에 공동묘지에서 설교 연습을 하였습니다. 그때 그런 얄팍한 정신을 어느 정도 경험하였습니다.
목사후보생들 중에 자기 설교에는 관심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설교에는 관심이 없는 분도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신문을 펼치고 앉아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노회에 가보면 이런 현상은 더 심각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 가보면 더욱 더 심화되어 있는 경우를 봅니다. 그래서 저는 혹시 설교하는 분이 성경해석과 그 중심내용이 정당하지 않을 때에는 대부분 미리 준비해 둔 가장 좋은 재료를 몇 줄 읽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 설교하고 있는 그 본문을 나름대로 해석해가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득해 갑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하나님께서 그 시간에 제게 주실 은혜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때로는 그 분의 설교를 뒤집어서 묵상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입는 방식을 취해 나아갑니다.
이런 경우는 비교적 애를 많이 써서 얻은 고급스런 방식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 나름대로 가장 거룩하고 복된 방식으로 어느 때, 어떤 장소,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든지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귀하게 누리는 가장 복된 형식을 취하십시요.
1. 본문 10절은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입니다.
1)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시험을 당하여 파선을 당하고 삼킴을 당하게 까지 된다는 뜻입니다.
(1) 첫째로 선지자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백성들’ 은 엄밀하게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아닙니다.
옛 교회 안에서 이스라엘 사람인 양 위선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어리석게도 악한 자를 부러워하며 곁길로 나아갑니다.
그들은 악한 자들을 따르면서 하나님과 그분을 섬기는 일에 작별을 고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께서는 그들이 멸망당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2) 둘째로 이 귀절은 어떤 부정한 일을 범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유혹들로 인해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여 곁길로 나아가고 있는 많은 택함을 받은 자손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악을 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옳은 길에 견고하게 서서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멸망 받을 무리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결심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러한 부당한 것들에 유혹을 당하여 그들을 부러워하고 본받으려 하는 자를 동시에 가리킵니다.
(3) 셋째로 칼빈께서 ‘그 백성’ 은 참된 신자를 가리킨다고 한 것은 육체적이고 위선적인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귀절이 현세의 불공평한 처지로 자주 죄를 범하며 살고 있는 하나님의 신실한 자들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저런 문제에 관해서 불평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모든 참된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하는 견해에는 반대합니다.
그들이 11절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 말을 할 정도로 참된 신자들이 모든 진리와 법도에서 멀리 떠났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이나 예레미야는 악한 자가 형통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는 형편을 하나님의 섭리의 정당함과 선하심을 조화시키기에 곤란을 느끼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늘 그러한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시38편, 렘12장).
2)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는 앞 절에서 밝힌 말씀에 대한 이유를 말씀합니다.
그들은 참된 종교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에서 이익을 찾지 못하면 원통함과 슬픔으로 고통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물로 가득 차다’ 라는 표현은 가장 쓰라린 고통을 마시고 가히 측량할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을 비유로 말씀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겉으로 보기에 모든 것들이 풍성하고 형통하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고도 생각됩니다.
2. 본문 11절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입니다.
1) 다윗은 앞 절에서 말했던 것을 더 설명합니다.
신실한 자가 악한 자들이 잠깐 동안 형통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눈이 부셔서 악한 생각에 빠졌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1) 그는 우리에게 그들이 하나님에게 지식이 있는가 하는 의심을 갖기 시작한다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속에는 이러한 정신 착란이 너무 흔하게 널려 있습니다.
(2) 실로 이교도 시인 오비드(Ovid)는 “나는 신이 없다고 생각을 하는 시험에 빠진다” 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시인들은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속에 일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말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보통으로 시인이 솔직하게 고백한 것이 인류가 생각하여 하는 말과 동일한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떤 역경에 처하게 되면 곧 모든 하나님의 지식을 잊어버린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것을 의심합니다. 그분의 활동을 의심합니다.
그러한 사실이 부정되지 않을 때에 대개는 하나님과 논쟁을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꾸짖는 자리에까지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사단의 사주를 받아서 편당을 만들고 무리 지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반역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2) 물론 불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호하시고 관할하시는 것을 부인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우연하게 일어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일은 인류 중 불신의 무리에게는 너무도 흔한 일 입니다.
(1) 다윗은 참 신자들까지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망설인다고 말씀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직분을 수행하기를 쉬시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즉시 행하실 수가 없다고 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 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 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렘12:1)라고 한 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귀절에서 거룩한 자들도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는 시험에 빠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한 의심이 그들의 마음 매우 깊은 곳에까지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처음부터 그와 상반되는 것을 주장하여 자기 자신에게 굴레를 씌웁니다.
그러나 이들이 의심하는 영 때문에 생기는 질문을 즉시 간파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면 어찌하여 세상에 만연되어 있는 큰 혼란을 치료하여 주시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피할 정도로 항상 사단의 올무를 신속히 간파하는 것은 아닙니다.
(2)악한 자가 하나님을 거역해 지껄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는데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① 어떤 사람들은 드러내 놓고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돌보시지 않고 모든 것들이 우연에 의해서 다스려진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② 또 다른 사람들은 비록 남 앞에서는 잠잠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거스려 지껄이는 일을 그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불의 하다거나 게으르다고 비난합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고 경건한 자들을 무시합니다.
만사를 혼란 속에 몰아넣어 파멸에 이르게 하는 자도 있습니다.
(3)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이러한 악하고 혐오할 만한 생각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까지 들어오기 이전에 하나님의 가슴에다 자기들의 짐을 벗어버립니다.
그리고 자기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으므로 알 수가 없는 은밀한 하나님의 판단만을 따르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이 귀절의 의미는 첫째로는 악한 자가 세상이 무질서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때 에 자기들이 운명이나 우연이라고 부르는 맹목적인 통치만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그때에 참 신자들까지도 동요되어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이들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손으로 보호함을 받아 굳게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넷째로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그러한 깊은 바다 속에 완전히 빠지는 일은 결단코 없다는 뜻입니다.
3. 본문 12-14절은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입니다.
이 귀절은 자기를 거의 혼란에 빠뜨리던 자들의 성격을 생생한 현장 사진처럼 표현합니다. 다윗께서는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고 말씀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지금 안일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쾌락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세와 영향력을 증가시키고 있습니다.
그것 뿐 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만사 형통을 누립니다.
그것도 불과 며칠동안이 아닙니다. 매우 오랜 세월동안을 즐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영원토록 행복을 누리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그들의 악이 파렴치하고 냄새나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보이는 사람들이 그러한 자유를 누리며 제멋대로 행합니다.
과연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습니까?
과연 그렇다고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까?
다윗은 악한 자의 형통이 견고하고 오래도록 계속되는 것을 지금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끝까지 바라보는 의인들의 인내가 너무 길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러한 현실을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다윗은 악한자가 그토록 하나님의 자비하신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 면전에 나아가 자신의 처지를 낮추어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하늘의 주께서 베푸신 은혜를 인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는 중에 그의 양심은 자신이 자기 몫의 인생 여정을 비교적 신실하고 올바르게 걸어 왔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는 남달리 흔치 않은 매우 심각한 정도의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이를 행하기 위하여 힘쓰고 또 다시 애를 씀으로서 얻는 유익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종일 재앙을 당하며”라고 한 것은 해가 자주 떠오르듯이, 그때 그때마다 여러 가지 모양의 고통이 자기에게 예비 되어 있어 자기의 환난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진실로 나는 공연히 순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을 지켜 보존하려고 수고함으로써 끊임없는 환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거듭 체험하게 되나이다. 날이 샐 때에 마치 사람이 나를 만나기 위해서 나의 방문턱을 지키고 있는 것 같이 환란이 나를 향하여 있는 것을 보나이다. 이러한 처지는 하나님 앞에서 순결에 대한 보상이 없음을 드러내게 되나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예배하는 자들에게 보다더 긍휼을 베푸실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자들이 구별되는 참된 거룩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마음의 순결입니다.
둘째로는 외부로 나타나는 행위의 의로움입니다.
다윗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보여준 실례를 통해서 이 두 가지를 함께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시다. 또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따라서 이 같은 것을 힘써서 배우도록 합시다. 먼저 우리는 마음의 순결로 시작하십시다.
이 일을 하나님께 요청하고 힘써 나아가 보십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 행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증명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이 땅 위에 사는 우리들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나야 할 결과물들이요, 거룩한 열매들입니다.
시73:15-17 내가 만일 말을 해야 한다면
종교 개혁 시대에 첨예하게 주장되었던 것 중에 하나가 의지의 변화였습니다.
사람의 의지에서 중요한 게 “지향성”입니다. 사람의 생각에도 지향성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드러나는 것이 말입니다. 그리고 말도 의지적인 지향성을 갖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말을 하고 그 말에 매인바 되어서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이고 사람을 만나고 또 말하고 그 말에 의해서 다른 행동으로 옮겨가는 것을 반복합니다.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의지에 자신을 종속시키는 문제가 있는데 하나님의 의지를 벗어나면 그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갑니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 곧 하나님의 뜻을 넘어서지 않는 방식을 칼빈은 아마도 “적정과 절도의 원리”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방식을 그렇게 표현하였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말이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범위를 이탈할 때 세상은 그것을 못보고 지나갈지라도 그것이 죄입니다.
오늘은 다윗이 이 문제를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는가를 살펴보십시다.
1. 본문 15절은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내가 말을 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 칼빈 사역)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유혹을 받았던 생각들이 죄악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제하면서 마음속에 그러한 문제에 대해 의심을 가져오게 했던 자신의 변덕스러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한 말은 이러한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말을 해야 한다면 이렇게 말하리라’ 그리고 우리말에는 빠져 있는데 ‘볼지어다!’ 라는 말이 있고, 그 다음에 ‘주의 아들들의 시대여 내가 범죄 하였도다’ 라는 말씀입니다(칼빈 사역).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매우 좋은 의미를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단순하게 설명합니다.
‘만일 내가 그러한 악한 생각과 의심에 동조했다면 나는 궤휼을 행하였을 것이나이다.
볼지어다! 의인들은 아직도 땅 위에 남아 있고, 주께서는 주를 위하여 각 시대에 몇몇 사람들을 남겨 두셨나이다’ 라는 말씀으로 풀어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의미를 더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서 어떤 보충 설명도 추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풀어 가면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만간 그 마음이 돌같이 굳어질 때까지 자기들의 부정한 생각에 고삐를 풀어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든 생각을 벗어버립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와 함께 구원의 소망까지 내던져 버리게 됩니다.
이런 과정이 말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이런 상태가 되어 가는 동안에도 다윗께서는 결코 멸망 속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제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넘어서지 않을려고 하나님의 의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굴레 씌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다’ 라는 말은 ‘지금까지 생각해 오던 것을 말하는 것’ 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만일 자기가 이와 같은 문제가 확실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마음에 정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넘어서는 범죄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는 매우 흉악한 죄악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전에 자기 자신 속에 의심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한스럽게 여겨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자기가 말한 두 가지 마음의 상태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세상에 자기 백성들을 남기신다는 것입니다.
또 그들이 남아 있는가를 살펴보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볼지어다” 를 반복하고 있는 것도 대조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입니다.
12절에서는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볼지어다! 주의 자녀들의 시대여’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하나님의 이적으로 인해서 교회가 그토록 맹렬한 사단의 공격과 수많은 무리의 대적들에게 위협을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안전하게 보존되는 것을 확실하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2. 본문 16-17절은 “(16)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17)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입니다.
1) 다윗께서는 이미 자기 자신이 죄를 범했다고 정죄 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하나님 면전으로 가져가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 베푸시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까지는 아직도 자기 마음을 어지럽게 하였던 의심들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사방에서 이 문제로 말미암아 영향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것을 해결해 보기 위해서 자신의 전력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도 심각한 무질서와 혼란 가운데서 세상을 계속해서 통치하고 계시는가를 깨달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더우기 그는 자기 자신을 들어 이야기함으로써 사람들이 단순히 자기의 이해력만을 의지하게 되면 그에 따르는 분명한 결과로 고민 속에 빠지게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확하고 확고한 결론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다윗께서는 분명히 인간의 이성과 ‘하나님의 성소’ 를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인간들의 모든 지식과 지혜는 헛되고 환상적인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모든 인간의 참 지혜는 오직 하나님 말씀의 교훈에 유순하고도 묵묵히 복종하는 것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시인 다윗은 지금 고의적으로 소경이 되어 스스로 잘못에 빠지는 불신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간격을 철폐시키려고 공격을 취하기 위해서 어떤 꾸밈이나 핑계삼기를 심히 좋아하는 불신자를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께서는 지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고도 겸손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조그만 자(尺)를 가지고 하나님의 높으신 판단을 주의 깊게 살피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어느 정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의 뜻을 이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목적을 이루는데 자신이 실패했다고 고백합니다.
‘곤란’ 이라는 말은 여기서 ‘무익한’ 혹은 ‘놓쳐 버린 헛수고’ 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윗이 했던 것처럼, 자기의 자연적인 사고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판단을 시험해 보려고 기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결국 고통스럽고 무익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보다 높이 일어나 하늘로부터 조명 받기를 구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2) 어떤 사람들, 심지어는 히브리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성소”라는 말씀을 의인과 천사들이 거하는 하늘의 저택이라고 생각합니다.
(1) 우리가 “하나님의 성소” 를 의인과 천사들이 거하는 하늘의 저택이라고 일단 생각해 보십시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말씀의 뜻은 ‘이것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나이다. 이는 사람이란 이 세상 에서 잠깐동안 누릴 번영을 창조하지도 못하고 쾌락을 누리지도 못하며 다만 이 땅에서 있 는 처지는 나그네의 처지이고, 이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는 동안 사람들이 바라야 할 것 은 하늘을 향하는 것이라는 점을 내가 깨닫기까지 그리하였나이다’ 가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고 다만 자기들의 마 음을 땅 위로 높이려고만 한다는 것을 이의 없이 인정합니다.
(2) 그러나 “성소” 란 말을 “천국에 대한 교훈을 가리킨다” 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단순하 고도 자연스러운 해석입니다.
율법책에 기록되어 있는 성소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곳,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이 선 포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것을 유익한 교훈으로 주기 위해서 매우 적합한 말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배움터로 나아옴’ 을 “성소에 들어감” 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나의 선생이 되시기까지, 그리고 내가 세상을 통치 하심에 대하여 그 말씀 외에 다른 방도로는 그 문제에 대해서 달리 무엇도 깨닫거나 이해 할 수도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될 때까지 나는 이 모든 일에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서부터 지혜를 얻지 않고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합당한 생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을 순종으로 받아들이 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가 지혜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다윗은 “성소”라는 말로 하나님께서 옛날 자기 백성들에게 정해 주신 형식상의 교훈 방법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말씀을 따름으로써만 성령의 은밀하신 조명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3) 악한 자의 “결국”이란 모든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세상에서 떠나는 것, 혹 은 현상의 생명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1) 여기서 “결국” 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후 심판을 통해서 흔히 하나님은 주무시고 계시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실 은 악한 자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내리시기를 다만 편리한 시간까지 지연하고 있었던 것뿐 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이 말씀은 더욱 긴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악한 자들의 경우에 대해서 배우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만 그들은 잠깐 동안 번영을 누린 이후에 갑자기 썩어지고 만다는 것과 또 비 록 그들이 죽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형통함을 즐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저희의 생명은 허무 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만사가 허무할 뿐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모든 악한 자들이 비참하게 패망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① 그러므로 우리가 악한 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보응이 임하는 것을 보게 될 때에는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② 반대로 설사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어떤 형벌이 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더라 도 저희가 형벌을 모면했다거나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인정하심을 받은 자라는 생각은 피 해야 할 것입니다.
③ 이럴 경우 우리는 최후, 혹은 마지막 날이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임을 우리 스스로 알 아서 판단하기를 그쳐야 할 것입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자 할 때에 옳게 말하기를 바란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① 우리는 먼저 주의 은혜를 입어 그분의 보좌 앞에 가까이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 을 열어 주시도록 구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명확하고 통찰력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어처구니없는 바 보이기 때문입니다.
② 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모든 존경심을 가지고 이 말씀에 부여되어 있는 권리 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③ 마지막으로 주의 크신 은혜를 힘입어서 주의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활이 감사로 사는 생활이요, 다만 그분의 높으심과 거룩하심에 “찬송하리로다”라 고 말하며 살 수 밖에 없는 복 있는 생활입니다.
그런 뜻에서 다윗은 우리를 대표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내게 복이라” 고 하였 습니다.
시73:18-20 주께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새롭게 해주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배할 때마다 새로움을 주십니다.
찬송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헌상 할 때마다, 설교를 경청할 때마다 새 마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늘상 새로움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늘 성소에 들어가서 그분의 은혜와 신령한 복을 맛들여 사는 자들에게 주시는 신령한 행복입니다.
1. 본문 18절은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입니다.
1) 다윗은 이제 마음의 갈등을 벗어버립니다. 그리고 새 사람이 되어 말씀합니다.
다윗은 지금 매우 침착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말씀합니다.
마치 망대에 오른 사람처럼 이전에 자기에게 감추어졌던 문제들에 대해서 명확하고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말씀합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옛 교회 시대에 이러한 곳에 오르신 분은 하박국 선지자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자기 모습의 실예를 통해서 근심 중에서 구원을 받은 우리를 상대해서 말씀을 주실 때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합2:1)라는 말로 그 실상을 묘사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겸비한 자태입니다. 이것은 가장 거룩한 방식으로 자기를 세우고 지킴이요, 다른 사람을 세우고 지키는 일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일로부터 또 다른 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얻는 유익이 얼마나 많은가를 보여줍니다.
‘나는 주께서 어떻게 주의 섭리로 나아가시는가를 보나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비록 악한 자들이 잠간 동안은 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서 있는 것은 미끄러운 곳에 얹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머지않아 파멸에 떨어지고 맙니다.
2) 이 귀절에 나오는 동사는 둘 다 모두 과거형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나오는 동사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는 현재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잠시 동안 저희를 높은 곳으로 들어 올리사 저희가 떨어질 때에 더 많은 괴로움을 당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한 자들은 물론 의인들에게 있어서 더 많은 것처럼 나타나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넘어지고 불확실하고 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참된 신자들은 하늘, 곧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의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들의 경우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저희의 안식처에 근거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저희가 처한 형편이 연약하고 불확실하게도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끄러운 곳에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참된 신자들은 비록 비틀거리거나 넘어지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저희를 그의 손으로 받쳐서 서도록 해 주십니다.
그리고 저희가 비틀거리면 저희에게 힘을 주십니다. 저희가 넘어지면 일으켜 주십니다.
주께서는 바른 방향도 보여주십니다. 그 길을 함께 해 주십니다.
4) 다윗은 악한 자의 처지가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본문의 표현대로 저희의 미끄러질 듯한 처지는 자기 자신의 능력과 위대함을 만족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또 그 때문에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입니다.
저희는 마치 한가하게 얼음 위를 걸어가는 사람과 똑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얼빠진 가상(假想) 속에서 스스로 거꾸로 처박혀 떨어질 준비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5) 우리는 우리의 상상의 세계에 운명이 가는 길 위에 있는 마차의 수레바퀴를 그려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것들을 혼란 속에 휩쓸어 넣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선지자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진리를 받아서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거룩한 사람들에게 알려진 바가 된 진리를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을 주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밀하신 섭리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실하게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2. 본문 19절은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입니다.
1) 이 시인이 말하는 감탄사는 앞 절에서 말씀했던 것을 더욱 확실하게 증거 해 줍니다.
악한 자들의 형통을 생각하는 것이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마비시킵니다.
또 악한 자들의 형통이 악한 자의 마음을 어리석게 만들어 버립니다.
같은 방식으로 저희 악인들의 갑작스럽고도 예기치 못했던 멸망은 우리를 효과적으로 일깨워줍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이 같이 당연한 사실을 마치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에 관한 경우처럼 되돌려서 묻는(설의법) 형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날마다 이러한 방법으로 역사 하시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눈을 뜨기만 하면 우리가 놀랄만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실로 우리가 멀리서부터 하나님의 심판대가 매일 점점 가까이 오는 것을 믿음으로 본다면 우리가 믿기에 이상하거나 곤란한 일은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놀라움을 가지게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바로 그분과 그분의 일을 너무나도 느릿느릿하게 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조심성 없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갖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2) “저희가 ...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라는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흔치 않은 방법으로 저희를 위협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방법이 매우 생소하여 저희가 당황하여 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는, 저희가 무모하게도 자기들이 가장 완전하게 안전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위험들을 멸시하고 또 죽으리라고 한 언약을 업신여기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손을 드시지 않고도 오직 그 기운의 두려움만 가지고 자기 원수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허무하게 만드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멸망이 갑작스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마치 유리 그릇이 산산조각 나서 다시 붙이거나 재사용 하기가 불가능한 것같이 완전한 파멸을 의미합니다.
그 모습은 또 바다에 내던져진 맷돌과도 같아서 결코 다시는 떠오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놀람으로’ 이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는 그들에게 무서운 심판이 임하였다는 뜻입니다.
또 그들이 일시적인 평온을 누릴 때에도 그들의 마음과 양심에는 남모르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뜻입니다.
임종시에나 심판 때에 그들에게 분명히 무시무시한 선고가 내려질 것이라는 뜻입니다(욥27:20).
우리는 앞에서 다윗이 저희가 스스로 건방지게 되어 “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시12:4)와 같이 뽐내는 말을 했다고 소개하는 것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가 첫 번째 해석을 취하고 싶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 느리다고 생각하는 것을 파악하신다면 악한 자들에게 매우 가혹한 종류의 심판을 가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진노하심에 대한 특별한 표지(標識)를 깨닫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이 떨도록 하시사 우리의 이해의 둔한 것을 고치십니다.
3. 본문 20절은 “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마치 사람이 깬 후의 꿈과 같도 다 - 칼빈 사역)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 하시리이다” 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일상적으로 있는 일을 비유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1) 이러한 비유는 성문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도 교회의 원수들에 대해서 “....모든 자는 꿈같이, 밤의 환상같이 되리니”(사29:7)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귀절은 매우 적절한 비유입니다.
악한 자들의 형통을 그처럼 매우 신기한 것으로 여긴 것은 우리의 마음이 깊은 잠에 빠진 까닭입니다.
우리가 악한 자들의 행복과 그들의 처지를 부러워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잠이 들었을 때, 꿈 속에서 꿈꾸는 상상적인 천국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을 받은 사람은 악한 자들이 누리는 영광을 매우 하찮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서 눈이 어두워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오히려 자신들의 놀라움이 고조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휘황찬란하고 매력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다른 빛으로부터 이러한 감정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깨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바라보는 모든 것들은 순전히 헛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말씀합니다.
그 자신도 이제 자기의 마음을 바른 길로 돌이켜 전에 가졌던 생각들은 단지 꿈이요, 헛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며’ 혹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미천한 것이라고 말하실 것’ 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선지자는 지금 사람의 눈을 부시게 만드는 허영이나 외면적인 것을 순간적으로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라고 비웃고 있습니다.
2) 우리는 이와 같은 표현을 시편 39편 6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허깨비 같은 사람들이 헛된 일에 부요 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기 의지를 고정시키고 사는 사람에 비견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진실로 각 사람이 정함이 없는 물같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삶 전체가 마치 실체가 아닌 거울에 비치는 영상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귀절에서 “형상”이란 말은 일반적인 의미인 ‘모습’ 혹은 ‘외모’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우리가 생각으로 만들어 낸 공허한 환상에 불과한 것들을 참되며 실체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될 때에 우리가 빠져들고 있는 잘못을 간접적으로 꾸짖고 있습니다.
דיעב(바이르)란 말은 “성 안에서”란 뜻입니다.
그러나 이 뜻은 문자 그대로 여러 가지 현명한 생각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깬 후에는” 에서 이 말은 ‘깰 때에’ 라고 번역됩니다.
즉 우리가 이러한 꿈들을 꾼 이후에는 지나쳐 버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혼란 속에 빠졌던 것들을 어느 정도 질서를 회복시키실 때뿐만 아니라 어두움이 쫓겨날 때에도 우리의 마음을 친절하신 빛으로 기쁘게 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소원하는 대로 세상을 매우 정당하게 볼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항상 소망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기를 최후 심판의 날까지 지연시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택하신 자들을 위해서는 또 다른 조치를 취하십니다.
자기의 손을 펴사 악한 자를 벌하실 때마다 어두움이 너무 짙어서 우리가 잠에 빠져들어 우둔한 생각을 좋아하지 않도록 조치하십니다.
마치 동녘의 태양 광선을 보듯이 볼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주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내세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게 해 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참으로 그렇게 해 주십니다.
시73:21-24 내 마음이 산란하며
사람들이 뜻하지 않게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 고생이 심합니다.
그 같은 고난의 세월 속에서 육신도 고난을 감내해야 되고 마음의 고생도 있어서 그 세월을 견뎌내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어 산다는 것, 그 자체가 고난의 연속입니다.
우리의 선진이신 다윗께서도 그와 같은 현실을 살 깊이 체험하고 그 과정을 우리를 위하여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1. 본문 21절은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앞서 한 말이 마음속에 불의한 부러움과 경쟁 의식을 가지고 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감히 불만과 불평을 하나님께 늘어놓은 것이라는 점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돌이켜 이것을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노를 ‘누룩’ 에다가 비교합니다.
우리 성경에 “산란하다” 는 이 동사의 의미를 누룩으로 말미암아 반죽이 부풀어 오르듯 ‘내 마음이 시어졌다’ 혹은 ‘부풀었다’ 는 의미가 더 정확합니다.
플라우투스(Plautus)는 분노로 불붙어 있는 여인을 가리켜 말하기를 완전히 누룩 속에 빠진 여자라고 했습니다.
하반절의 말씀에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라는 말씀을 심장을 뜻하는 말로 사용하는 이유는 육체에서 인간의 욕망이 심장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러한 번민과 고통스러운 생각들로 인하여 자기가 찔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이미 앞에서 그가 어떻게 이러한 괴로움을 당하였던가를 언급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리고 운명의 변덕스러움을 바라보고 웃기만 할 뿐 큰 동요를 당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재판장이 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참된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 확신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기들의 나아가는 길에서 자기들의 바람과는 상반된 고난을 더욱 많이 당하게 됩니다.
2. 본문 22절은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실제로 행한 것처럼 날카롭게 자신을 꾸짖기 시작합니다.
첫째는 자기를 어리석다고 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자신을 무지하다고 말씀합니다.
셋째는 자신이 짐승을 닮았다고 말씀합니다.
만약 다윗이 자기의 무지함을 아는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다면 ‘이러한 무지의 악이나 과오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하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가 어리석게도 그 무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우매함을 더욱 강조하기 위하여 자신을 하등 동물에다 비교시킵니다.
이렇게 비유한 것은 자신의 무지와 부패와 연약성, 곧 무능을 함께 폭로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말의 핵심은 자기가 말한 사악한 마음은 무지와 실수에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건전한 판단력과 이해력을 잃지 않고 있는 한 이러한 실수들에 대한 비난을 전적으로 자기에게 전가시켜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일상적인 방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짐승과 같은 우매한 상태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분명한 진리라고 말했듯이 사람은 결단코 하나님 바로 그분과 그분의 성품과 그 성품으로 행하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공정하게 자기 자신의 실패를 책망하여 자신이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짐승과 같은 지경에 떨어졌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을 관할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불만을 느낄 때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이해력이 곁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주와 함께’(칼빈 사역; 주의 앞에-한글 개역) 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ךטע(이마크)는 ‘주의 앞에’ 와 대조하기 위해서 이 곳에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여, 나는 이 세상에서 탁월한 판단력과 이해력을 부여받았다고 보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하늘 지혜와 견주어 볼 때에는 보잘 것 없는 짐승 중의 하나와 같나이다’ 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용한 이 전치사는 가장 적합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우매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자신의 실재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게 되면, 모든 사람이 스스로 아첨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렇게 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소경들의 무리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한쪽 눈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소경들보다는 자기가 더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설혹 그렇지는 않다면 적어도 그 지혜에 있어서 다른 소경들이 어떤 점으로는 자신보다 우월하지는 못하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기뻐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과 하나님을 비교해 볼 때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속히 잠에 빠지게 만드는 이 만연된 실수를 둘 자리를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3. 본문 23절은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입니다.
1) 지금까지와는 달리 다윗께서는 자기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자기가 멸망에 떨어지게 될 대단히 큰 위험에 처해 있었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아주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그가 말하는 크신 은총은 조금 전에 말한 대로 판단력을 잃어버리고 마치 짐승과 같이 되어 혼란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을 더욱 강렬하게 드러내 주었습니다.
그가 감히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을 때 마땅히 하나님에게 쫓겨나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2)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할 때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임재 하심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이해력과 사상이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멍에를 사람들에게 씌우사 사람들이 곁길로 나아가려 할 때에 그들을 제어(制御)하셔서 완전히 하나님을 배반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살펴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는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은밀한 혹은 감추인 은혜로 계속해서 그와 함께 하시는 만큼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기의 택한 백성들과 가까이 계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때때로 자기에게 등을 돌린다고 할지라도 한결같이 그들을 향해서 아버지와 같은 눈으로 보살펴 주십니다.
3) 다윗이 하나님을 향해서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라고 말한 것은 자기가 버림받은 자들이 스스로 빠져드는 깊은 수렁에서부터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으로 건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 다윗께서는 자신이 드러내놓고 하나님을 욕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신 것이나 더욱 무감각해져서 실수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해주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펼치사 자기를 붙잡으시고 자기로 하여금 멸망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이 사실에서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를 떠나서 방황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계속 관찰하시는 눈으로 우리를 보살피시고 그의 손을 펼치사 우리를 자기에게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교훈으로 인해서 더 태만해져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경험은 우리가 졸음에 빠지고, 또 무분별에 빠져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그를 떠나 배회하며 방황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에게 가까이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5) 하나님께서 ‘우리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라고 표현에서 우리는 비유의 위력을 특별히 주의합니다. 그분의 힘은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쉽게 우리가 버림을 받거나 하나님의 능력의 후원이나 지지를 받지 못하지는 않을까 하는 유혹을 허락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장 쓰라린 고통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는 이유는 오직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의 능력을 우리 속에 분명하고 뚜렷하게 나타내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자주 우리가 연약해질 때 그 능력을 완전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만일 무지하여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붙잡아 주십니다.
우리가 두려워 떨 때에도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떨어질 때에 우리를 들어올려 주시기에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4. 본문 24절은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입니다.
1)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미래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기에 다윗께서는 하나님의 인도 하심으로 인해서 이제 옳은 길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도하사 하늘의 하나님의 영광스러우신 곳에까지 이르게 될 것을 스스로 확신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바라봅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후에 자기가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과 위로를 찬양했습니다.
2)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계속해서 자기에게 미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집니다.
무엇보다 먼저 ‘교훈으로 인도를 받는 일’이 중요합니다.
어리석은 자나 지각이 없는 자들도 그들이 하는 일에서 매우 성공적인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수와 잘못들을 치료하사 우리가 잘못했던 것들을 행복과 번영으로 변화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일상적이고도 더욱 풍성한 복을 베풀어 주시는 방법은 그들에게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히 교훈과 판단의 영으로 다스려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 해야 합니다. 감히 자기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고 어떤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특별히 하나님께만 유일하게 속한 것을 월권(越權)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각으로 인해서 혼란과 수치 속에 빠지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약 다윗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인도자가 되어 주시기를 필요로 했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얼마나 더 필요하겠습니까?
“교훈으로”란 말에 “영광”을 추가한 것은 영생은 제한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이 땅에서 볼 수 있는 처음 시작에서부터 하늘에서 실현되어질 것을 바라는, 즉 마지막에 이르는 우리 행복의 전 과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공로 없이 은혜로 주시는 영생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졌다는 입장에서 볼 때 이 낮은 곳, 즉 현재의 생활 속에서도 그러한 행복의 맛을 볼 수 있도록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축복들을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시73:25-27 하늘에서는, 땅에서는
저는 최근에 의심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것은 성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음성과 그분의 일에 대해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그리스도인들로 자처하는 자들에 대한 의심이 더 많아졌습니다.
저 인사가 신앙생활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참으로 하나님이 내신 규범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있는지, 참으로 따르고 있는지에 관해서 입니다.
저 인사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하고 있을까?
하나님께서 친히 알리신 알림장에서 그분에 관하여 알고 믿는지 입니다.
교회 직분자들에게는 의심이 더 가고, 목사나 신학교 교수들은 의심이 더 가곤 합니다.
다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교회가 지상에 존속하기 위하여 역사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여전한 방식으로 지도자를 내시고 또 주의 백성을 모아 주신다는 확신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옛 교회로부터 하나님의 사람들, 곧 지도자들이나 일반 백성들이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오늘은 다윗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1. 본문 25절은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입니다.
제가 성경학교 때에 배웠던 노랫말 하나를 들어 보시겠습니까?
처음이 “하늘과 땅 사이” 입니다
1) 다윗께서는 하나님의 성소에서 얻은 유익이 얼마나 많은지를 더욱 자세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은 대적하였습니다.
그가 의문과 확신을 함께 연결한 표현법은 히브리어에서는 매우 흔한 방법이요, 그 의미는 매우 분명합니다.
2) 다윗께서는 하늘이나 땅에서 하나님 한 분밖에는 아무도 사모할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흔히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다른 모든 것도 흥미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영광을 다시 우리에게서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관심을 다른 것으로 옮겨가는 대신 오직 하나님만을 붙들고 그분에게서만 만족을 누린다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모독합니다.
이런 행위는 모든 세대에 걸쳐 가장 널리 행해져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매우 만연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애정을 오직 하나님께만 고정시키고 있는 사람의 수효가 너무도 적습니다.
또 한편 사랑의 대상으로 하나님과 다른 많은 것들을 경쟁시키는 것은 미신적인 행위입니다
교황주의자들은 말로서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과는 무관한 온갖 것들로부터 도움을 얻기를 끊임없이 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최상의 교만으로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과 함부로 연결시킵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 어떤 것을 사모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교훈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3) “하늘과 땅”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시합니다.
하나님 밖에는 하늘에서 찾을 자가 없다는 말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늘에 가득 차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헛된 신들을 배격하고 부인합니다.
또 하나님밖에 땅에서 사모할 자가 없다고 증언함으로써 거의 모든 세상이 도취되어 있는 헛된 것과 환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 사단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 가지 않고 스스로 헛된 신들을 날조해 내는 자들은 스스로의 의식에 속아 자신의 기술이나 힘이나 교만을 확신하게 되어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는 특권을 탈취하게 되든지 아니면 스스로 속임수에 가득 찬 꾐에 빠져 인간의 호의(好意)나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신뢰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똑바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여러 갈래의 곁길로 방황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교만과 자만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바르게 하여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4)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라는 말씀에서 특별히 가르치려는 요지(要旨)가 있습니다. ‘나는 주께서 스스로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스스로 족하신 분이요, 참으로 족하신 중에 족하신 분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리하여 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소망하여 내 마음이 이리저리 흩어져 다닐 필요가 없는 줄 아옵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아들이도록 베풀어주시는 복이 그 얼마나 중요로운 것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2. 본문 26절은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입니다.
1) 여기서 다윗께서는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다”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라는 곧이어 나오는 말씀은 특별히 해석할 필요성을 보여줍니다.
곧 다윗은 자신에게서 느꼈던 “쇠잔” 과 하나님의 채워 주심을 받아 얻은 ‘힘’을 서로 대조시켜 말씀합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떠난다면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하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들의 결과는 허무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에는 능력으로 충만하게 채움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입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입니다.
사람은 아무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부터 떨어져 나갈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사람마다 스스로 연약함을 느끼게 되고 자기의 능력에 절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부족하다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모든 사람들이 고백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을 도우신다는 것이요, 우리가 살아날 적당한 방도를 찾지 못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셔야 한다는 사실이요, 그렇게 하시는 것이 전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3) 그러나 다윗께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고백은 이보다 훨씬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시라’ 는 매우 적합한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사용된 개인의 분깃은 모든 사람이 누리게 될 처지나 복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방식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분깃으로 표현한 이유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유복하게 함에 있어서 능력 있는 분이요, 하나님께만 우리의 완전한 행복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복의 전부는 그분 자신이라는 말도 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마음을 돌려 다른 어떤것을 바라보게 된다면 다윗이 시편 16편 4절에서 보다 중요한 비유를 보여준 것처럼 감사할 줄 모르고 오히려 불평을 하게 됩니다. “마음”이라는 말속에서 시인은 온 영혼을 함축시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은 쇠잔하나”라고 한 말은 영혼의 본질이나 실존의 실패를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비로써 베풀어주신 모든 능력과 그 능력의 사용이 단지 그가 기뻐하기를 보류하고 쇠퇴함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본문 27절은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입니다.
여기서 다윗께서는 오직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그 즉시로 그는 분명히 가장 무서운 멸망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모두가 갖가지 것들을 향해 자기들의 소망을 흩어 나누게 됩니다. 그래서 ‘음녀 같이 다니며’ 란 말씀은 중요한 뜻을 갖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계속 복종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갈라놓은 가장 추악한 우상 숭배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보다 쉽게 이해하려면 믿음과 하나님을 찾음과 마음의 순결함과 말씀에 순종함으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 마음의 영적인 정절을 정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복종시켜 생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모든 선한 것들의 유일하신 창조자로 생각하며 사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을 받으며, 언제나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서 살아야 합니다.
자기의 모든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낯선 사람에게 몸을 파는 음녀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을 통해서 주신 이 말씀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모든 배교자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4. 본문 28절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나로서는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좋도다-칼빈 사역)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 하리이다” 입니다.
1) 다윗께서는 여기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상태에서 항상 변화하는 세상의 잘못된 것과 환상들을 쫓아 방황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은 결단코 항상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상태를 유지하겠다고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은 자기들의 완악한 감정을 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세상의 헛된 것들을 쫓아가는 일을 끊어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나로서는’(칼빈 사역) 끝까지 굳게 서서 하나님과 은밀한 교통을 유지해 나아가기로 결심했노라고 말합니다.
2) 우리의 선지자 다윗은 하반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올바른 방법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확고하게 믿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는 우리가 견실함과 안전함을 계속해서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닫기 전에는 그분의 오른손, 곧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3) 이 귀절을 주의해서 살펴보면, 우리는 온 세상이 다 불신앙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악한 자들과 짝하여 저희가 하는 대로 따라 행하여 악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진리로 받습니다.
물론 다른 것들을 향하는 마음을 돌려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확고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4) 마지막으로 다윗은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해서 헌신할 것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자기 백성들의 소망을 결코 실망시키는 일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 결단코 부족함이 없도록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