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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4편 6절-55편 2절.
54편 6절-7절: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대저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
55편.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1절-2절: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
54편.
6절: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낙헌제는 기쁨으로 드리는 제사인데, 낙헌제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아가는 게 기쁘기 때문이다. 자기가 주님의 마음과 정신, 주님의 속성을 닮아가니 기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을 닮으면 마음 속에서 기쁨이 나온다. 쉬운 예를 들면 장사가 잘 되면 자동적으로 기뻐지느냐, 슬퍼지느냐? 기뻐진다. 반대로 장사가 안 되면 자동적으로 슬퍼진다. 그런 것처럼 주님을 만나서 주님의 정신과 주님의 마음이 나에게로 옮아오면 나는 자동적으로 기쁘다.
주님은 항상 하늘의 기쁨으로 산다. 이 기쁨이 성도인 나에게로 옮아오면, 즉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성경을 바로 배우고 깨닫고 말씀을 따라 살면 예수님의 기쁨, 예수님의 이해타산,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소원 목적이 나에게 옮아온다. 이게 주님을 닮는 거고, 이렇게 되면 기뻐진다. 이 기쁨으로 자원하여 하나님께 올리는 제사가 낙헌제다.
예수를 믿던 안 믿던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 것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쓸 것을 이 세상에 미리 다 준비해 놨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공기를 마시며 살았고, 양식을 먹으며 살았고,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오늘날까지 살아나온 세월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체험이 되어 사람이 만들어지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알게 되고, 확신이 되니 마음 속에 기쁨이 충만해진다. 이렇게 되어서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가 낙헌제다. 기쁨으로 드려지는 제사가 낙헌제다.
예수 믿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깨달아진 것, 사람이 되어진 것, 어리석은 것이 깨달아져서 영리하게 된 것 등등이 없으면 낙헌제가 안 나온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으면 하나님께 예배를 올리는 것이 귀찮기만 하고, 짐스럽기만 하고, 교회에 나가는 것이 힘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 안 나갈 수도 없다. 왜냐? 행여나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을까 싶어서. 이런 무거운 마음에서는 낙헌제를 드릴 수 없는 거다.
세상으로 속화된 많은 교인들은 하나님께 자기의 소원을 아뢰어서 그것을 들어주어야 만이 기분이 좋다. 이 기쁨으로 제사를 드리게 되면 남이 볼 때는 기뻐서 드리는 낙헌제인 줄로 알지만 이것은 낙헌제의 흉내만 내는 거다.
사건 환난과 어려운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며 이겼을 때 마음이 기쁜 거고, 지면 마음이 슬프다. 날마다의 사는 시간 속에서, 세월 속에서 생활을 하면서 슬픔도 딛고 일어서고, 고통도 딛고 일어서면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낙헌제를 드리는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주님의 이름이 선한 것을 어떻게 아느냐?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선하신 것이 자기 마음 속에 들어왔으니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렇구나’ 하고 체험적으로 아는 거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한 마디도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어떻게 알겠느냐?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겠느냐? 이러면 기도한다는 게 맨 자기의 소원을 들어달라는 것밖에 더 있겠느냐? 그러면 이것은 자기 욕심밖에 안 된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어려움만 알지 남의 어려움을 잘 못 본다. 이런 사람은 이기주의자다.
7절: ‘대저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진리성도 다윗을 원수 대적들의 유혹과 미혹과 환난 핍박에서 건져주었다. 건져주셨다고 하는 이것을 신앙정신 면으로 보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셔서 분별케 해 주셔야 만이 거짓된 가르침에 넘어가지 않는다. 거짓된 것에 넘어가지 않으면 거기에서 건짐을 받은 거다. 넘어가면 빠지는 거다.
악한 사람들의 말에 넘어가면 악한 사람들의 정신에 빠져서 악한 자들과 같이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말씀에서 깨달아지면 ‘이건 악한 것이다. 내가 안 가야 되겠다’ 이렇게 된다. 그런데 교인들 중에 악한 자들에게 빠지는 사람이 많다. 왜 속을까? 분별하는 지식이 없구나.
세상에 살다보면 마음이 좋아서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지만 분별력이 없어서 여기 속고 저기 속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속여먹는 사람은 자기에게 속는 사람을 보고 ‘네 마음이 참 좋다’ 라고 하면서 속여먹는다.
사람은 지식이 있고 지혜가 있어야 한다. 5, 60년 세상경험을 했으면 세상에서 단 물 쓴 물을 다 먹어봤을 것이니 사람이 어떻다는 것을 다 알지 않겠느냐? 그런데 왜 속는 거냐? 간단히 말하면 몰라서 그런 거다. 모르면 어리석어지고, 어리석어지면 남에게 이용물밖에 안 된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교인들이 성경을 바로 깨닫지 못해서 이상한 곳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 집이 둘러엎어지고 결국은 가정이 깨져버린다.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말씀을 바로 듣고 바로 깨달아야 한다. 교회를 수 년 수십 년을 다녔어도 못 깨달았다면 미련한 사람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이치적으로 생각을 해야지 교회에 와서 손뼉만 치고, 춤만 추고, 웃기는 얘기에 세월 가는 줄 모르는 식으로 믿으면 안 된다.
예수를 믿는다면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이 뜻을 따라 믿어야지 비진리적이며 육적인 사람의 일반적인 감정에 넘어가면 안 된다. 말씀을 깨달았다고 할 때 자기의 감정과 느낌으로 아는 것을 깨달은 것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다. 자기 감정으로 되면 자칫 잘못하면 큰 실수를 하게 된다.
‘듣기는 속히 하며’ 라는 말씀은 일반적인 면에서는 말할 필요가 없는 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저게 하나님의 말씀이냐, 아니면 세상을 자랑하는 거냐?’ 이걸 분별하는 귀를 빨리 가지라는 거다. 그리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남의 말을 들을 때 듣자마다 곧바로 비판을 하려고 하지 말고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러면 그 말을 잘 판단을 해서 내 속에서 정립을 한 후에 대답을 하라는 거다. 자기 감정을 못 다스리면 실수가 많다.
주님의 이름으로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경험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확신케 해 주시는 걸 말한다. 판단과 평가를 정확하게 내리게 해서 영적인 면에 손해를 보지 않게 해 주시는 걸 말한다. 믿음에 손해를 보지 않게 해 주시는 걸 말한다. 그 다음에 좁은 길 생명 길을 가는 진리성도들의 도움도 하나님의 도움이다. 이것이 다 주님의 이름으로 된 거다. 깨닫게 해 주는 것, 분별케 해 주는 것, 그 다음에 진리성도의 도움, 즉 권고 권면 이런 게 다 주님의 이름으로 되는 거다.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나로 목도케 하셨나이다.’ 원수가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는 것을 두 눈으로 보게 했다는 거다. 진리 성도들에게 환난과 핍박을 주고 영적 구원운동을 훼방하고 방해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응하시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주셨다는 거다. 혼자에게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공개적으로 보여줬다는 거다. 이렇게 의인은 건지시고 악인을 심판해버리는 것이 주님의 선하신 뜻이다.
진리성도 다윗은 자신이 원수를 갚을 수도 있지만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죄 없이 쫓겨 다니면서도 선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믿었다. 하나님의 처분을 바랐던 거다. 주님의 명예와 주님의 권위성과 주님의 심판을 믿은 다윗이었다. 이런 다윗이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감찰하셨음을 또 한 번 실감을 하게 되었다는 거다.
자기가 믿음으로 살면서 시련 연단 혹은 시험 유혹이 올 때 먼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어떤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를 훑어보고, 그 다음에 자기에게 시련을 주는 타인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섰는지도 봐야 한다. 이 때 하나님을 기준으로 세워놓지 않고 개인 대 개인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자칫 잘못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반대편에 설 수도 있다. 자기 감정으로 해 놓으면 하나님의 반대편에 설 수도 있다. 이러면 하나님께서 상대편에 서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우상을 섬기니까 하나님께서 이방군인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복하게 하고 잡아가게 했다. 이러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 편이 된 거냐? 이방편이 돼버렸다. 이런 장면이 생긴다.
55편.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1절: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귀를 기울이는 것은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귀를 기울인다. 그 다음에 사랑하기 때문에 귀를 기울인다. 아무 마음도 없이 귀를 기울이지는 않는다.
‘내가 간구할 때에 숨지 마소서.’ 숨바꼭질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숨는 거냐? 어느 때 숨느냐? 엄마가 시장에 가는데 어린아이가 따라가려고 울고불고 하면 엄마가 얼른 숨어버린다. 왜 숨는 거냐? ‘나 찾아봐라’ 하며 숨바꼭질을 하자고 숨는 거냐? 꼴도 보기 싫다는 거다. 시장에 데리고 가면 ‘이것 사 달라. 저것 사 달라’ 하며 떼를 쓰니 어떻게 데리고 다니겠느냐?
왜 숨느냐? 관심이 없다는 거다. 왜 숨느냐?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거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가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숨지 말고 자기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서 들으시고 검토해 보시고 꼭 들어달라는 거다. 자기의 기도를 조사를 해보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면 들어달라는 거다.
우리교인들도 이런 기도를 하느냐? 궁극교회 교인들은 이런 기도를 하라. ‘하나님 아버지, 내가 기도를 할 테니 들어보시고 당신의 마음에 맞는 기도라면 들어주시고, 안 맞는 기도이거든 들어주지 마십시오’ 라고 기도를 하라. 그런데 보통 보면 기도를 하면서 무조건 자기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한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거다. 기도도 성경의 뜻에 맞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 한다. 무슨 말이냐?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것을 구해야지 안 주시려는 것을 구하면 못 받는다.
학생이 엄마가 돈만 주면 학교는 안 가고 오락실에 가서 날려버린다면 이 아이가 엄마에게 돈을 달라고 하면 엄마가 그 돈을 줘야 하느냐, 안 줘야 하느냐? 안 줘야 한다. 그 대신 뭘 줘야 하느냐? 그 아이가 구하지 않는 뭘 줘야 하느냐? 매를 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무슨 뜻으로 기도할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나의 마음도 굽어보신다. 내가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도 알고 계신다. 그리고 내가 무슨 기도를 할 것이라는 것도 아신다.
우리가 다윗의 인격이 믿어진다면 지금 다윗이 내 앞에 있다면 이 다윗을 자기의 친구나 오빠나 신랑이나 스승으로 삼겠느냐, 아니면 사울 왕처럼 다윗을 보기만 하면 잡아 죽이려고 하겠느냐? 다윗과 사귀고 싶어 하고 다윗의 정신을 본받고 싶어 하는 것이 정상이다. 다윗은 하나님과 잘 통한다. 그래서 아닌 말로 자기가 하나님께 기도하려는 것을 이 다윗에게 부탁을 하고 싶다.
교인들이 목사님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일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나에게 기도를 부탁한다면 내가 그 사람의 신앙이 어떤지를 알고 기도를 해 주겠느냐? 그 사람의 속마음이 어떤지 알고 기도를 해 주겠느냐? 세상에 속화된 교인이 세상에 속화된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하면 세상축복을 해 달라고 기도를 할 거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목사가 아니라 목사 할아버지가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신다. 이런 기도를 하다가는 오히려 하나님께 얻어맞는다. 그러나 우리가 다윗을 볼 때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합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 들어간다.
세상 속화된 교인이 목사님께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면 그의 소원대로 기도해서는 안 되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소원 목적에 맞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는 있다. 상대방이 영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지, 육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지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기도를 하겠느냐? 이럴 때는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 수밖에 없는 거다.
만일 예수님께 세상소원 목적을 둔 기도를 부탁한다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느냐? 예수님께서 그런 기도를 하시겠느냐? 예수님께서 하늘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 성도들로 세상부자가 되게 해 주려고 오신 거냐? 아니다. 그러니 이치가 안 맞지 않느냐?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이치고 뭐고는 없고, 안 찾고 모른 채 무조건 자기 기도를 들어주고 부자만 되게 해 주면 된다는 식이다.
자기나 자기 집 식구가, 더 나아가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쏙 빼닮는 것이 좋으냐, 하나님을 닮는 것은 내버리고 속마음이 마귀처럼 되어있어도 죽을 때까지 풍부하게 먹고 마실 수 있는 세상부자가 되는 게 좋으냐? 참 사람이 되는 것에는 모든 게 다 들어있다. 참 사람은 안 된 채 부자가 된다면 그걸 몇 날이나 붙잡고 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그 날 밤이라도 자기의 목숨을 데려가면 그걸로 끝나는 거다. 그러니 참으로 미련하다. 마지막 시대에 세상주의로 예수 믿는 사람이 많다고 했는데 이건 정말 미련한 거다. 욕심만 가득 찼고 목구멍에 똥만 찬 거다.
내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가 되면 내 앞에서 주님이 숨으실 이유가 없는 거고, 응답을 안 해 줄 이유가 없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과의 의사단일로 되어야, 즉 우리 주님과 자기 마음이 대립이 안 되도록 주님의 마음을 잘 배우고 깨달아서 자기도 주님의 그 마음을 가져야 만이 주님과 잘 통하게 되는 거다. 내가 주님과 마음이 안 통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뭘 주시겠으며, 나는 뭘 받겠느냐?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는 게 있다고 한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다른 것은 덤으로 주신다’ 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 앞에 바로 살면 봐주는 게 있다는 거다. 그러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있는 것도 다 빼앗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예수님과 친근해야지 세상과 친근하면 뭐가 되겠느냐?
2절: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 내게 굽히라는 게 다윗에게 하나님이 절을 해 달라는 거냐? 다윗 자기를 내려 봐 달라는 거냐? 왜냐? 다윗 자기 마음이 편치 못하다는 거다. 왜냐? 근심 걱정을 하고 탄식을 하느라고. 그러면 무슨 근심 걱정이고 무슨 탄식이냐? 영의 일이 안 되어서 탄식일까, 육신의 일이 안 되어서 탄식일까? 영의 일이다. 그러니 이런 다윗의 기도를 안 들어주려야 안 들어줄 수 없는 거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에 사는 우리 기독자들 모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모두는 자기가 어느 면에 대한 탄식이나 근심 걱정이 많은지 생각을 해 봐라. 누구의 일에 근심 걱정 탄식이 많은지 생각을 해 봐라. 그 마음을 굽어보시고 기도를 들어주실 거다. 자기가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이 주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이 사람에게는 먹을 것 입을 것이 다 나오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게 사는 거다. 그런가 하면 예수를 믿어도 찌꺼기로 믿는 사람은 자기의 세상 것은 다 챙겨놓고 하나님을 찾는다. 사실 이것마저 없는 사람도 있다.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는 게 아니다.
그러면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고 자기 집 식구들은 굶고 있는 사람이 있고, 믿음의 지혜를 써서 식구들의 건강도 살피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어느 쪽이 주님을 위한 삶이냐? 몸을 건강하게 잘 가꾸어야 주님께 수종들 수 있고 은혜를 받을 수 있으니 이걸 염려 걱정을 해서 자기와 가족들의 몸을 잘 관리한다면 이건 누구를 위해 사는 거냐?
‘내가 근심으로 편치 못하며 탄식하오니.’ 오늘날 자기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근심 걱정이 영에 속한 것인지, 육에 속한 것인지? 이걸 잘 살피고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기도를 해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