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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는 이야기 스크랩 "난,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인 줄 알았어!"
권종상 추천 0 조회 22 12.04.18 12:10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이른바 '총선 후유증'이 얼굴엔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최근 성당의 지인들, 그리고 라우트의 손님들은 제 얼굴을 보면서 야위었다고 합니다. 아마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을테지요. 그러나 그 이후에 나온 데이터들을 들여다보면서, 그래도 우리에게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자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보일스톤 애비뉴 조지앤 아주머니가 사시는 아파트에 우편물을 배달하고 있는데, 마침 조지앤 아주머니께서 고풍스런 벽시계에 태엽을 감아주러 로비에 내려오셨습니다.

 

"점심 때 들를거지?"

"네."

"쿠키 구워놓을께."

"네."

"조셉?"

"네?"

"너 요즘 얼굴이 무척 '불행해' 보여. 무슨 일 있는거야?"

 

그 말을 듣는데 괜히, 툭,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우편함 앞의 선반에 떨어집니다. 그러더니 투둑, 툭, 눈앞이 뿌옇게 흐려집니다. 그냥 그동안 모였던 그 답답함 같은 것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금세 얼굴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자 아주머니가 오히려 당황하셔서 저를 안아주셨습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이따가, 점심 먹을 때 말씀드릴께요."

 

겹벚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목련은 어느새 피었다간 지고, 피었던 동백들도 하나둘씩 떨어져 땅 위를 굴러다니고 있는 캐피틀 힐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봄의 나른함과 한바탕 울고 나서의 나른함이 섞여 조금은 버티기 힘들었던 오전 시간이 흐르고,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쿠키를 구워 놓은 아주머니네 집 오븐에 아내가 싸준 샌드위치를 넣어 데우고, 매니저인 릭도 조지앤 아주머니 집으로 올라오고, 늘 그렇듯 셋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었습니다.

 

"무슨 일이었어? 오늘 아침에?"

 

저는 그냥 아무 설명 없이 노트북을 꺼내 LA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의 정봉주 관련 기사, 그리고 최근의 언론파업 관련 기사 등을 찾아 보여드렸습니다. 그리고 사찰 문제에 관해 워터게이트 사건과 연결지어 보도한 뉴욕타임즈 기사 등도 찾아 보여드렸습니다. 아주머니는 기사들을 읽어보시더니 몇 번을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그리고 그 큰 눈을 더 커다랗게 뜨시면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조셉... 난 말야,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 인 줄 알았어."

 

저는 이 말 속에 참 많은 것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다른 설명할 것도 없이, 미국의 언론들이 쓴 기사들로만 봐도 '일반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는, 이념적인 편향이 전혀 없는 사람들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정부가 들어오기전까지는 민주주의 국가였어요. 그래서 나는 '제네럴 일렉션'이 끝나고 나면 한국이 이 정부 들어오기 전처럼 될 수 있을거란 희망을 가졌거든요. 근데 이번 선거에서 이기질 못했어요. 감춰진 진실들이 너무 많아서, 그걸 밝히기 위해서도 이번 선거에서 이겼어야 했거든요."

 

듣고만 있던 릭이 제 등을 토닥여 줬습니다. "잇 윌 비 올 롸잇, 맨!"

 

"아냐, 아냐. 솔직히 힘들어."

"아니, 괜찮을 걸. 니가 이렇게 힘들어 하는 거, 니가 그 나라를 사랑하니까 그런 거 아냐?"

전 그의 눈을 봤습니다. 따뜻한 웃음이 있는 그의 갈색 눈동자와, 저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조지앤 아주머니의 푸른 눈동자... 그들이 옆에 있어 주는 것이 참 고마웠습니다.

 

"고마워..."

 

점심시간이 끝나고 조지앤 아주머니의 아파트를 나섰습니다. 문득 광주 생각이 났습니다. 한국에서 80년 광주 5.18 항쟁이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은 것은 사건 발생 시점에서 15년이 지난 1995년 국회에서였습니다. 그리고 과거 군부독재 정권 아래서 일어난 이른바 '동백림 사건'이라던지, 혹은 '미국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라던지 하는 것들도, 그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겨우 사건의 진실에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세력은 물론이고, 그 당의 대표로 다음 대권의 주자로 나서는 사람은 바로 그런 과거의 유산을 한 몸에 물려받은 사람입니다. 언젠가는 그 사건들의 진실들은 모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들의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선거 하나는 '떠나간 버스'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대선이 남아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들을 있는 실체 그대로 밝히고 진실을 어둠 속에서 끌어내고, 정권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짓밟는 일들이 다시 생기지 않게 하려면, 우리의 선택 의지는 더욱 확실하고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정권을 선택하는 것'보다는 '진실과 감동을 선택하는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받았던 상처를 잊을 수 있는 그런 따뜻함이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다시한번, 다시한번 힘을 내 주십시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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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4.18 12:53

    첫댓글 정말 공감가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지금 한국은 민주주의를 잊었습니다. 지난 정권 10년 동안 민주화가 어느정도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이렇게 역행할 수 있음도 알았지요. 제가 2007년에 학생들 수업 교재 만들며 민주화 담론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는가'라는,,,, 학생들에게 던진 질문이었지만 당시에도 회의적이었습니다. 왜냐면 우리 사회를 안고가야할 학생들의 의식이 전혀 민주화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교사인 제 입장에서는 민주주의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 못하는 현실도 참 안타깝습니다.

  • 작성자 12.04.18 13:02

    우리가 교육을 바꿔야 할 이유가 참 많습니다만... 아무튼 교육 안에 녹아 있는 일제 시대의 잔재를 치우는데만도 꽤 시간이 더 걸려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찔할 때도 많습니다. 일단 정치의 민주화가 선행되어 교육과 언론의 민주화를 함께 이뤄내야 하고, 여기에 더해서 사법개혁도 함께 이뤄져야 하겠죠.

  • 12.04.18 23:13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막상 민주화 10년 동안에도 사학법 개정 실패에서 알 수 있듯이 교육계 수꼴들의 저항은 정말 만만치 않습니다. 국영수 위주의 입시 교육에 몰아치는 점도 우민화 교육 그대로지요. 갈수록 학생들이 공부 이외에는 다른 그무엇도 못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입학사정관제니 수시모집이니 하지만 실제 속을 들여다보면 학생들을 오로지 대입에 억매이게 하고 있죠. 저 자신도 오래 동안의 관행에서 벗어나기 정말 힘들거든요 ㅠㅠ

  • 작성자 12.04.19 01:02

    아... 정말 대입시 위주의 교육이 완전히 바뀌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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