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제14회 / 이명자)
“소포결혼이란
말이다, 재민아.” 어머니는
내가 궁금해하던, 정말 내가 맨정신으로 궁금해했을까..... 그건
아니다. 소포결혼이란 생소한 말이 내 머릿속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포결혼; ‘당신은 내가 당신의 구세주란 걸 항상 염두에 두라고.’ ‘.....’ ‘왜 대답이 없어.’ ‘,,,,,’ ‘내
말이 틀렸다면 이의를 제기해 보란 말이야. 나이 들어 시들어 가던 당신이 내 사진 한 장에 그만 현혹되어 만사 제치고 태평양을 건너왔잖아.’
‘.....’ ‘그래도 소포결혼에 성공한 사람은 당신뿐일 거야. 그만큼 내가 훌륭하다는 증거고.’ ‘.....’
그 어느 날 무엇인가에 기분이 좋았던 아버지는 대답 없는 어머니를 붙들고 이런 말을 했다. 어머니는
대답 대신 입가에 야릇한 실 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내 기억의 창고에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소포결혼’ 이란 낱말이 들어가 한자리를 차지해버렸던 것이다. “네
어머니, 그게 뭐예요? “사진만을
보고서 하는 결혼이란다. 그런 결혼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모를 것이다. 고약하고 수치스럽고
억지가 가득 담긴, 그것도 결혼이라니 말이다. 나는.....” “잠깐
어머니. 사진 한 장을 보고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어요? 서로
조금도 알지도 못한 상태잖아요. 그런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할
수 있어요?” 나는
어머니를 저지하고 물었다.
우리 어머니가 그런 결혼을 했을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서로가 사랑해서 결혼한
사이처럼 아버지에게 다소곳하고 아버지의 친지들에게 다정다감했다. ‘재민 엄마처럼 집안 살림 알뜰하고
남편을 하늘같이 떠받들면 얼마나 좋아,’ 내놓고 부러워하는 아버지 쪽 친지 아저씨의 목소리를 나는 똑똑히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뭐가 부족해 나의 어머니가 생각하는 고약하고 수치스럽고 억지가 담긴 소포결혼이란
것을 했을까. “그런
결혼을 내가 했단다.”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왜 철렁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는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결혼은? 사랑이
무르익어야 하지 않나? “놀라지
마라.” 어머니는
내가 놀랐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가
왜 그런 말도 되지 않는 결혼을 했어요?” 묻고
말았다. 어머니가 엄청 손해를 봤다는 생각이 내 머리꼭지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왜 나의 어머니가 소포결혼 따위를 하여 아버지의
언어폭력에 시달리는가 말이지.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말도 못 할 수치스러운 언어폭력에 시달린다고
믿고 있었다. 어머니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짙은 그늘을 나는 간혹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나에게는
뭐 하나 특출난 것이 없단다. 집안에서도 미운 오리 새끼처럼 겉돌았지. 형제들은 모두 키도 크고 잘났어. 나만 난쟁이처럼 키도 작고 눈도
작고 코도 작고, 너무나 억울했지. 나는 자존심이 상해 미운
짓만 했었다. 그런 판국에 너의 이모나 외삼촌은 내 결혼을 무작정 반대했어. 뭐가 부족해 그따위 사진 한 장 보고 머나먼 타국으로 가서까지 결혼을 하느냐고 말이야. 난 그들의 마음을 왜곡했어. 그 시절에는 외국에 나가는 것이 아주
특별한 것처럼 보였었거든. 그 벌을 받는 거야.” 해는
중천에 떠서 정오를 알리고 있었다. 나도 가만히 앉아서 어머니의 말을 이해해보느라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머리를 아무리 굴려보아도 어머니의 결혼을 반대한 그들의 말을 어머니가 새겨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뿐이었다. 나도 아버지에게 주눅 들고 변명 한마디 못하고
아버지 곁에만 있어도 두려움증이 일어나는데 어머니인들 아니 그러겠는가. 나는 어머니가 몹시 가여웠다. 어머니, 조금만 참으세요. 재민이가
있잖아요, 라고 위로 하려는 찰나에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머뭇머뭇거리면서
내가 세월이 흘러도 지금껏 잊어버릴 수 없는 뜨악한 장면 하나를 어머니가 말해주었다. 말하는 내내 어머니의
입술이 실룩 실룩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아내로 맞는 첫날밤에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본 첫날밤에 대야에 물을 받아와 아버지의 발을 씻기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요?” 내 입에서
대번에 의문의 총알이 튀어나갔다. 왜요, 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따발총이었다. 땅, 땅, 땅 땅. 쉬지 않고 쏘아대는 따발총 말이지. 내가 어머니의 그 장면에 대해 묻고 싶은 질문이 망라해 있었다는 뜻이다.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요, 하고 묻는 말이기도 했다. 아니다. 나는 그렇게 영민한 데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따발총에
비유한 것은 훗날의 일이었고, 그때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나는, 어머니는 내가 아직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다 자란 처지가 아니라는 걸 모르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어떤 빌미를 심어주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최악의 요구를 받게 된 것일까? 빌미라면? 에-이 첫날밤부터 빌미라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튼 심히 미심쩍었다. 한동안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어머니가 말했다. “너까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말아라.” 나의
표정이 못마땅했는지 미간을 찡그린 채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아버지가
이상한걸요 뭐.” “그렇지? 너의 생각에도 네 아버지가 이상하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대번에 떨려 나왔다. 이상도 해라. 저렇게 복받친
감정을 어머니는 어떻게 품에 품고 살았을까? 나는 나대로 이유가 어디에 있었든 간에 두 팔 멀쩡한 사람이
이성이 흐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남에게 발을 씻기게 할 수 있는가, 라고 그 첫날밤을 기하여 나의
아버지가 된 사람이, 미심쩍을 뿐이었다. 아니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가 그때 손발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불편했었나. “어머니, 아버지는 어땠어요?” “언제? 그 날 말이니?” “그래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만난 날 말에요.” “비행장에서
나를 맞는 첫날 너의 아버지의 인상은 키도 크고 체격도 우람하고 나 하나 책임지는데 완벽해 보였다. 서먹서먹한
내게 어찌나 자상한지 꼭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만
최면에 걸리고 말았던 거야.” “그랬는데
아버지가 왜 그런.....” 왜 그런
이상한 요구를 어머니에게 했을까요, 하고 묻고 싶었다. 묻지
못하고 벽시계를 우연찮게 올려다보았다. 시침은 한시가 지나 두시 가까이에 가 있었다. 나는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아버지는 내가 일분이라도 늦으면 잔소리가
심했다. 시간 간수를 못 하는 사람은 삶의 간수도 못 하여 밑바닥 삶을 살게 된다고 했다. 늦은 일 이 분을 가지고 밑바닥 인생 어떻고 하는 아버지가 나는 오히려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한두 시간도 아니고 그까짓 일 이 분 시계마다 일 이 분씩 틀릴 수 있는 건 만천하가 다 긍정하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아주 정상적인 것을 가지고 말이지. 하여튼 간에 어머니의 인생에 끼어든 그 날 나는 이해되지도
않는 말을 너무나 많이 들어서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어머니는
서둘러 나가는 나에게 미련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나를 배웅했다.
내가 어머니 과거의 일들을 애타게 짚어보았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아버지가 어머니 때문에
그 좋아하는 황금을 마다하고 가게 문을 닫고 어머니를 찾아 헤맸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어머니는
그렇게 싱겁게 항복을 해버렸으면서 나를 붙잡고 무엇을 호소할 작정이었는지.....
잔소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
가르침을 너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거냐? 그렇게 해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가겠느냐. 한 시간씩이나 늦으면 너는 십 년을 빈둥거리게 된다. 그래서야 어떻게
일류를 향해 나가겠느냐.” 이번의
잔소리는 너무나 거창하여 나를 향한 잔소리 같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만 하루도 되기 전에 어머니를 찾았지만, 길고 짧은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니의 반란이 가지고 온 후유증을 아버지는 어떤 방식으로든 삭혀버려야 했을 테니까. 죄 없는 내가 걸려든다는 것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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