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생의 본래 성은 위(魏)씨이다. 거록(鉅鹿) 사람으로 팽성(彭城)에서 거주하였다. 집안은 대대로 벼슬한 문족이며, 아버지는 광척(廣戚) 수령이었다. 고을에서 선량한 사람이라 칭송했다.
도생은 어려서부터 빼어나게 훌륭하고, 총명하고 명철함이 신과 같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비범한 그릇임을 알고 사랑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그 후 사문 축법태(竺法汰)를 만나, 마침내 속가를 벗어나 불법에 귀의하였다. 법태에게 엎드려 가르침을 가슴에 담아 수업하였다.
이미 법문(法門)을 밟게 되자, 영준한 사고가 기발하였다. 문구의 뜻을 연구하고 음미하여, 곧 스스로 슬기로운 이해력을 열었다. 그런 까닭에 열다섯 살의 나이에 곧 강좌에 올랐다. 토하고 받아들이며 묻고 말하는 것이 주옥과 같이 맑았다. 비록 오랜 덕망이 있는 학승이나 당세의 명사라 하더라도, 모두 생각이 좌절되고 언변이 궁해져서 감히 대항하여 응수하지 못하였다.
나이가 구족계를 받을 시기에 이르자 비추어보는 안목이 날로 깊어졌다. 성품과 도량이 기민하고 삼가며, 정신과 기개가 맑고 꿋꿋하였다.
처음에는 여산(廬山)에 들어가 7년 동안 숨어살면서 자신이 일삼는 뜻을 구하였다. 항상 도에 들어가는 요체로써 슬기로운 이해력을 근본으로 삼았다. 그런 까닭에 수많은 경전을 우러러 숭상하고 잡론(雜論)을 참작하였다. 그러면서 만 리 먼 길이라도 법을 따라, 피곤함과 괴로움을 꺼려하지 않았다.
그 후 혜예(慧叡)ㆍ혜엄(慧嚴) 등과 함께 장안에 노닐었다. 구마라집을 따라 수업하니, 관중의 대중승려들이 모두 신과 같이 깨닫는다고 일컬었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청원사(靑園寺)에 머물렀다. 이 절은 진(晋)의 공사황후(恭思皇后) 저씨(褚氏)가 세운 절이다. 본래 푸른 나무를 심은 곳이기에 이것으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도생은 이미 당시의 불법의 장인이었으므로 초청되어 머물렀다. 전송(前宋)의 태조(太祖)와 문제(文帝)가 깊이 감탄과 존중을 더하였다.
그 후 태조황제가 법회를 마련하여, 황제가 친히 대중과 함께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식사를 하사하고 한참이 지나자, 대중들은 모두 이러다가 해가 저물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이때 황제가 말하였다.
“비로소 일중(日中)이 되었다.”
도생이 말하였다.
“밝은 해가 하늘에 빛나고 천자의 말씀이 비로소 일중이라 하시니, 어찌 일중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발우(鉢盂)를 취하여 음식을 먹었다. 이에 온 대중들이 모두 그를 따랐으며, 그가 황제의 속마음을 얻은 일에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왕홍(王弘)ㆍ범태(范泰)ㆍ안연지(顔延之)도 모두 그의 덕스런 풍모를 공경하여, 그를 좇아 그에게 도를 물었다.
도생은 이미 사유에 잠긴 지 오래되어 언어 밖의 진리를 철저히 깨달았다. 마침내 한숨을 쉬고 탄식하였다.
“무릇 형상으로써 생각을 다하지만 참뜻을 얻으면 형상은 잊는 것이다. 말로써 이치를 추구하지만 진리에 들어가면 말은 쉬는 것이다. 경전이 동쪽 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번역하는 사람이 거듭 막히고, 막힌 문구만을 많은 사람이 지키니, 원만한 참뜻은 보기 드물다. 만약 그물을 잊어버리고 고기를 취할 수 있다면, 비로소 더불어 도를 말할 만하다.
이에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교열하고, 인과(因果)를 연구하고 사유하였다. 비로소 선(善)은 응보를 받지 않고, 몰록 깨우치면 성불한다는 설을 건립하였다.”
또한 『이제론(二諦論)』ㆍ『불성당유론(佛性當有論)』ㆍ『법신무색론(法身無色論)』ㆍ『불무정토론(佛無淨土論)』ㆍ『응유연론(應有緣論)』 등을 지었다. 예전 학설을 그물 속에 가두어 버리는 오묘하게 깊은 취지가 있었다.
그러나 문구만을 고집하는 무리들 사이에는 혐오와 질투심이 많이 생겨나, 주거나 빼앗는 소리가 다투어 일어났다.
또한 여섯 권으로 된 『니원경(泥洹經)』이 이보다 앞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도생은 경의 이치를 해부하고 분석하여, 훤하게 깊고 미묘한 진리 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곧 일천제(一闡提)도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설을 세웠다.
당시 『열반경』의 대본(大本)은 아직 중국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외롭게 선발로 밝힌 혼자만의 견해는 대중들의 마음에 거슬렸다. 이에 구학(舊學)들은 그의 말이 삿된 주장이라고 비난하며 분개함이 매우 심하였다. 마침내 대중들에게 사실을 밝히고, 그를 승단에서 쫓아내었다.
도생은 대중 가운데서 얼굴빛을 바로하고 서원하였다.
“만약 내가 말한 것이 경의 논리에 어긋난다면, 청컨대 현재 이 몸에서 곧 문둥병이 나타나게 하소서. 만약 실상과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면, 원컨대 목숨을 버리는 날 사자좌(師子座)에 앉게 하소서.”
말을 마치자 옷을 털고 일어나, 떠돌아다녔다.
처음에 오(吳)의 호구산(虎丘山)으로 들어갔다. 열흘 사이에 배우는 무리가 수백 명이었다. 그 해 여름에 청원사의 불전에 우레가 진동하면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였다. 서쪽 벽에 빛나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로 인하여 절 이름을 용광사(龍光寺)로 고쳤다.
당시 사람들이 탄식하였다.
“용이 이미 떠났으니, 도생도 반드시 떠날 것이다.”
갑자기 여산으로 자취를 옮겨 바위 산 깊숙이 그림자를 숨기니, 산중의 대중 승려들이 모두 공경하고 승복하였다.
그 후 『열반경』의 대본이 남쪽 서울에 도착하였다. 과연 “천제(闡提: 성불할 성품이 없는 사람)에게도 모두 불성이 있다”고 설하여서, 전에 그가 말한 내용과 약속을 맞춘 것처럼 딱 들어맞았다.
도생은 이 경을 얻자 곧 이 경을 강설하였다. 전송의 원가(元嘉) 11년(434) 11월 경자(庚子)일에 여산정사에서 법좌에 올랐다. 정신과 얼굴빛은 밝게 열리고, 덕스런 음성은 빼어나게 나왔다. 여러 번 논의하면서 이치를 궁구함에 오묘함을 다하니, 보고 듣는 대중들이 깨닫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법석이 곧 끝나려 할 즈음에 털이개[拂子]가 어지럽게 흔들리면서 땅에 떨어졌다. 얼굴을 바로 세우고 단정히 앉아, 책상에 기대어 돌아가셨다. 얼굴빛은 달라지지 않은 채 마치 선정에 들어간 듯하였다. 이에 도인과 속인들이 놀라고 감탄하였다.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슬피 울었다.
이에 서울에 있는 모든 승려들이 마음속으로 스스로의 병폐를 부끄러워하면서, 추모하여 믿고 복종하였다. 그의 신같이 내다보는 지극함이 상서롭게 증명됨이 이와 같았다. 이어 여산의 언덕에 묻었다.
과거 도생은 혜예(慧叡)ㆍ혜엄(慧嚴)ㆍ혜관(慧觀)과 동학으로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평하였다.
“도생과 혜예는 천진함이 나타나고, 혜엄과 혜관은 깊은 흐름을 얻고, 혜의(慧義)는 교만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구연(寇淵)은 조용히 지켰다.”
도생과 혜예만이 천진하다는 지목을 받을 만큼 여러 사람 가운데 우뚝 빼어났다.
과거 관중(關中)에서 승조(僧肇)가 비로소 『유마경』을 주석하였다. 이때 세상에서는 모두 이를 음미하였다. 도생은 다시 깊은 뜻을 발굴하여 새롭고 다른 내용을 드러내었다. 여러 경전의 의소(義疏)도 지었다. 세상에서 모두 보물로 삼았다.
왕징(王徵)은 도생을 곽림종(郭林宗)에 비유하였다. 그를 위해 전기를 써서 그가 남긴 덕을 밝혔다.
당시 사람들은 도생이 추리한 ‘천제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대하여 근거가 있다고 여겼으며, ‘돈오(頓悟)하면 과보를 받지 않는다’는 등등의 주장도 역시 법의 문장으로 삼았다.
전송의 태조가 언젠가 도생의 돈오의 의미를 진술하였다. 사문 승필(僧弼) 등이 모두 거세게 비난하자 황제가 말하였다.
“만약 저 세상으로 간 사람(도생)을 다시 일어나게 한다면, 어찌 여러분에게 굴복당하겠는가?”
∙보림(寶林)
그 후 용광사 사문 보림이 처음에는 장안을 거쳐 수학하였다. 그러다가 후에 도생의 여러 논리를 이어받았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그윽함에 노니는 도생’이라는 유현생(遊玄生)으로 불렀다. 『열반기(涅槃記)』ㆍ『이종론(異宗論)』ㆍ「격마문(檄魔文)」 등을 지었다.
∙법보(法寶)ㆍ혜생(慧生)
보림의 제자인 법보도 역시 배움이 내외의 경전을 겸한 사람이다. 『금강후심론(金剛後心論)』 등을 지어 역시 도생의 논리를 이어받았다. 근대에는 또 석혜생(釋慧生)이 역시 용광사에 머물렀다. 푸성귀를 먹으며 많은 경전에 빼어나고, 아울러 초서와 예서(隸書)에 솜씨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같은 절에서 업을 이어받았다 하여, 그들을 대소이생(大小二生:道生ㆍ慧生)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