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의 국왕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에서 국왕은 ‘하늘의 명[天命]을 받은 초월적 존재’로 여겨졌다.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에서 국왕은 ‘하늘의 명[天命]을 받은 초월적 존재’로 정의되었다. 국왕은 즉위부터 사후에 이르기까지 각종 상징물 속에 둘러 싸여 의례를 행하면서 지존의 권위와 위엄을 표현하였으며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였다.
2. 조선의 왕조
조선은 조선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이후 519년조선은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이후 519년 동안 27명의 국왕이 왕위를 승계하여 지속된 왕조이다. 고려 말기인 14세기 후반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이민족을 격퇴하고 전공을 세운 이성계는 고려 사회를 개혁하려는 신진사대부 세력을 결집하여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1394년 개성에서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국가 통치이념으로 성리학을 표방하였다.
신성한 왕의 공간
궁궐의 정전(正殿)은 국가의 중요의식을 행한 장소로 궁궐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전각이다. 정전 중앙에 놓인 어좌를 중심으로 어좌를 감싸듯 펼쳐진 곡병(曲屛)을 함께 두고 뒤편으로는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도를 설치하여 신성과 위엄을 강조하였다. 어좌는 전면에 구름 속을 나는 용 문양을 금으로 그려 놓고, 모서리에는 황금색 용머리 조각을 장식하여 최고 지존의 자리다운 위엄과 격식을 갖추었으며 왕의 권위와 위엄을 극대화하기 위해 당가(唐家)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당가의 상부는 보개(寶蓋)를 덮고, 천장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한 쌍의 용이나 봉황을 조각해 넣었다.
왕권의 상징물, 어보
어보는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예물로 일반적으로는 왕의 인장을 뜻하나 왕비, 왕세자 등의 의례용 인장까지 통칭한다. 왕실 인사를 책봉하거나 덕을 길며 특별한 이름을 올리는 의식을 할 때 지위와 이름을 어보에 새겼다.
현종세자자 책봉 옥인
1651년 제 18대 왕이 되는 현종(1659-1674)을 왕세자로 책봉하면서 만든 어보다. 인면(印面)에는 '왕세자지인(王世子之印)'이라고 새겼으며, 재질은 옥(玉)이고 손잡이는 거북모양이며 색이 바랜 붉은 매듭 끈이 달렸다.
왕세자 죽책(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1651년 현종(1659-1674)을 왕세자로 책봉하면서 만든 죽책(竹冊)으로 환수된 현종 어보와 함께 제작되었다.
정조 왕세손 책봉 옥인·죽책·죽책함
정조가 1759(영조35년)년에 왕세손으로 책봉되면서 받은 옥인과 죽책이다.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가 왕비로 책봉될 때 만든 금보, 금보를 싼 보자기와 금보를 넣은 함, 그 함을 보관한 상자 등으로 구성된 포장 물품이다. 어보는 주인공 생전에는 기거하는 전각에 보관하다가 주인공이 승하하면 주인공이 받은 모든 어보와 어책이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하였다.
왕세자입학도첩
효명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할 때 의식을 기록한 화첩으로, 성균관 입학은 왕세자가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임을 알리는 상징적이고 국가적인 행사였다.
【성군을 향한 평생 교육】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면 서연(書筵)이라는 교육제도를 통해 본격적으로 제왕 교육을 받았는데, 이는 세자시강원(춘방)이 전담하였다. 교육은 장차 지도자가 갖추어야할 바른 역사관, 넓은 식견 등 뛰어난 역량을 키우는데 주력하였다.
국왕의 면복
왕위에 오르는 방식은 양위(讓位)사위(嗣位), 반정(反正)으로 구분되는데, 일반적으로 왕위 계승 방식은 사위였기 때문에 즉위식은 국상(國喪)의 한 과정이었다. 새로운 왕은 입고 있던 상복(喪服)을 잠시 벗고 대례복인 면복(冕服)을 입고 즉위식을 거행했다.
【왕의 초상, 어진】
왕의 초상화인 어진은 선대왕들을 추모하는 동시에, 그들의 보살핌을 받아 왕실이 번창하고 나라 전체가 번성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그렸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대부터 순종 대까지 꾸준히 어진을 제작하여 진전(進展)에 봉안하였다.
어진은 당대 최고의 궁중화원들이 국왕 생전에 그 모습을 직접그리거나 돌아가신 뒤에 그리기도 하였으며, 어진이 낡아 훼손되거나 새로 지은 진전에 어진을 모실 때에는 이미 있던 원본을 따라 그리기도 하였다.
태조 어진
함경도 영흥 준원전에 봉안되어 있었던 조선 태조 이성계 초상을 사진을 바탕으로 추정 복원하여 그린 초상이다.
영조 어진
조선 21대 왕 영조의 어진으로 1900년에 차용신과 조석진 등이 제작한 초상이다.
순종 어진
조선 27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인 순종의 어진으로 1928년에 이당 김은호가 그린 순종 어진의 소실된 부분을 복원하고 유물에 남아 있는 부분과 관련된 자료를 토대로 원본과 최대한 가깝게 제작하였다.
어필각석
에 새긴 임금님의 글씨로 가운데 용(龍)은 숙종대왕의 어필, 맨 아래 위선(爲善)은 "착한 일을 하라."는 영조의 어필 각석이다.
정조의 화성 행차를 기록한 그림
1795년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화성에 행차하였다. 당시의 행차 모습과 주요 행사 장면을 기록한 그림이 바로 화성능행도이다. 정조의 화성 행차에는 부모님에 대한 효심과 함께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의지가 담겨있었다. 정조는 한양 밖 행차를 통해 주변 지역의 사정을 직접 살피는 한편 화성 지역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특별 과거 시험과 노인잔치를 열었다. 또 많은 수의 군인들을 행차에 대동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방위 태세를 점검하였다. 이처럼 큰 규모의 행차를 위해 한강에는 배를 연결해 만든 다리가 놓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주요 장면들이 여덟 폭의 그림으로 기록되어 화성능행도 병풍이 만들어졌다. 그림의 구체적인 내용은 ①공자 사당 참배, ②과거 시험 합격자 시상, ③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 ④노인잔치, ⑤야간 군사 훈련, ⑥활쏘기와 불꽃놀이, ⑦한양으로 돌아오는 행렬, ⑧한강 배다리를 건너는 행렬 등이다. 화성능행도는 장대했던 정조의 행차 모습과 당시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한편 그 행차가 뜻하는 정조의 애민 정신과 통치 철학을 오롯이 담고 있다.
화성성묘전배도(華城城廟展排圖)
1795년(정조 19) 윤2월 11일 정조가 화성에서 첫 번째 공식 행사로 거행했던 공자의 위패를 모신 수원향교 대성전에 성묘(聖廟) 참배의 장면을 그린 그림.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傍圖)
1795년(정조 19) 윤2월 11일 화성에서 문무 양과에 걸친 과거 시험을 본 뒤 낙남헌에서 그 합격자를 발표하고 시상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1795년 윤2월 13일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 거행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그린 그림.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
윤 2월 14일 정조가 낙남헌에서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등 능행에 수행한 노대신(老大臣) 15명과 수원부에 사는 노인 등 총 384명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이다.
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
윤 2월 12일 밤 정조가 화성의 서장대에 갑옷을 입고 행차하여 군사 조련을 실시하는 장면이다.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윤 2월 14일 오후 정조가 화성행궁 안의 득중정(得中亭)에서 신하들과 함께 활쏘기를 한 다음 저녁에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장면이다.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
윤 2월 15일 화성행궁을 출발하여 서울로 올라오면서 시흥행궁(始興行宮) 앞에 다다른 장대한 행렬 장면이다.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
윤 2월 16일 노량진에 설치된 배다리로 한강을 건너 창덕궁으로 돌아가는 어가행렬을 묘사한 것이다.
효정왕후 『국장도감』의궤
1903년 11월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의 국장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로 국장의 진행과정과 재정의 출납, 인력의 동원과 사용한 제기 및 의장(擬裝)까지 다양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철인왕후 『국장도감』의궤
철종비 철인왕후의 국장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로 『국장도감』에서 간행하였다. 철인왕후가 승하한 1878(고종15년)년 5월부터 국장이 끝난 9월까지의 진행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국조보감 편찬과정을 기록한 의궤
현종과 철종의 『국조보감』 편찬에 관한 전 과정을 기록한 의궤다. 1908년 7월에 진종, 헌종, 철종에 대한 황제 추봉을 마치고 헌종과 철종의 국조보감 『국조보감』을 편찬하였다. 이 의궤는 국한문 혼용체로 표기하였다.
숙종임금 국조보감
조선시대 역대 왕의 통치행위 중 후대 왕들이 본받을 만한 훌륭한 업적을 모아 편찬한 책으로 선왕이 승하한 뒤 후계왕이 사적을 정리하여 편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史庫) 중 경북봉화의 태백산 사고에 걸려 있었던 현판이다.
성종실록
규장각 현판
창덕궁의 규장각에 걸렸던 현판으로 숙종의 어필이다. 규장각은 갑술년(숙종20) 종부사 내에 지었다가 1776년(정조 즉위)에 창덕궁 대조전 북쪽으로 옮겨 지었으며, 열성조의 어진(御眞)·어필(御筆)과 왕실 선보(璿譜)·보책(寶冊)·인장(印章) 등을 보관하였다.
규장각은 1977년(정조 즉위년)에 창설된 왕실 도서관 겸 학술연구기관이다. 본래는 숙종 대 어진(御眞)·어필(御筆)을 봉안하던 작은 건물이었으나, 정조 대에 창덕궁 후원의 2층 누각에 자리하면서 역대 주요 도서를 보관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중심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국내외의 방대한 도서를 수집,정리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인재들과 수많은 도서들을 간행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규장각으로 하여금 과거시험을 주관하게 하거나 승정원 등에서 담당하던 근시(近侍)의 의무도 맡기는 등 기능을 확대시켰다.
동궐도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을 그린 궁궐 그림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해 있어 '동궐'이라 불렀다.
경회루 연못 출토 청동용 靑銅龍
19세기1997년 경복궁 경회루 연못의 준설 작업 도중에 출토되었다. 『경회루전도』에 따르면 경복궁 중건 당시에 화재 방지를 위하여 청동으로 만든 용 두 마리를 연못에 넣었다고 한다
창덕궁 연경당에 걸렷던 주련
주련은 서로 짝이 되는 글귀를 판자에 쓰거나 새겨 건축물의 기둥에 붙인 것으로 건축물을 꾸미는 장식적인 요소로 좋은 글귀와 글씨를 감상하는 대상이기도 하였다.
청기와 용머리 토수
청기와 용머리 토수는 궁궐의 일부 전각에서만 사용된 것으로 왕의 권력과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 장식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토수는 목조 건물의 지붕 추녀 끝에 끼워 비바람에 목재가 썩는 것을 막기 위한 기와의 특수부재이다. 청기와는 점토에 염초(焰硝)를 섞어 형태를 빚어 구은 후 유약을 씌어 푸른색이 나도록 한번 더 구운 기와이다. 기와를 단단하게 하는 염초는 화약재료로 값이 비싸고 구하기 어려우며 제조공정이 까다로웠다. 고급 기와인 만큼 사용처는 매우 한정되었다. 조선시대 임금이 조회를 하던 정전(正殿)과 일상 업무를 보던 편전(便殿) 등이 청기와 건물이었다.
이 청기와 토수는 편전인 창덕궁 선정전에서 수습되었다. 선정전은 현재 유일하게 남은 궁궐의 청기와 건물로, 19세기 초 도화서 화원이 그린 <동궐도>에서 푸른 지붕의 선정전(宣政殿)을 볼 수 있다.
서시춘방관 현판
영조가 세자시강원의 관원들에게 전하기 위해 쓴 시를 쓴 현판이다. 사도세자에 대한 각별한 마음과 왕세자를 바르게 보필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명종친림서총대시 문무도
명종이 창덕궁 서총대(춘당대)에 친림하여 문무시험을 거행한 것을 기념해 그린 그림이다.
왕실용 가구는 일반 사가의 가구에 비해 크기가 크고 가구 표면을 붉은 색으로 칠한 것이 많다. 붉은 주칠은 투명한 옻칠에 수은 성분의 붉은 가루를 섞어 만든 것으로 일반 사가에서는 사을 을 금할 정도로 귀하게 여겼다.
조선왕실의 복식
20세기 초곤룡포는 1444년(세종 26)부터 조선 말기까지 왕이 평상시 집무할 때 착용하였던 의복이다. 곤룡포를 입을 때는 허리에 옥대를 두르고 가죽에 옻칠을 하여 만든 검은색 익선관을 썼으며 목이 긴 신발인 목화를 신었다. 곤룡포는 영친왕이 착용하였던 것이다.
흉배
조선시대에 왕족과 백관이 입는 상복(常服)의 가슴과 등에 가식(加飾)하던 사각형의 장식품. | 내용 흉배는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것으로, 그 문양에 따라 품계를 나타내었는데, 특히 왕족이 사용하는 것은 보(補)라 하였다.
영친왕비 적의
적의는 조선시대 최고 신분의 여성을 위한 복식으로, 조선 말기까지 궁중 대례복으로 사용되었다. 친애親愛와 해로偕老를 상징하는 꿩무늬를 직조하고 앞뒤에는 금실로 수놓은 용무늬 보를 덧붙였다. 이 적의는 1922년 영친왕비가 순종을 알현할 때 착용했던 것이다.
백옥 봉황꽂이
백옥 떨비녀
영친왕비 백옥국화 앞꽂이
장식비녀
쌍가락지(밀화, 자마노, 호박)
영친왕비 대삼작노리개
산호 · 쌍나비 · 불수를 주제로 만든 노리개 세 개를 하나로 꿰어 옷 위에 착용하는 장신구이다. 대삼작노리개는 궁중에서 왕비의 대례복에 착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