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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천사를 만났다고요?
꿈에도 그리워하던 희망공동체에서 꿈같은 5박 6일의 일정을 보냈다.
그러나 동북인도 일정을 위해 오후에 하이데라바드공항에 도착하여야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짐을 꾸리고 언제 올지 기약을 하지 못하고 땀과 눈물을 쏟아 부은 공동체를 떠나려니 마음이 짜하게 아파왔다. 마치 가난한 어미가 자식을 버려두고 도시로 돈벌이를 떠나는심정이었다. 울컥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사랑스러운 공부방 학생들, 귀여운 어린이집 아동들, 점심식사를 나누는 존귀한 어르신들, 가난하고 외로운 와이에스나가르 주민들 그리고 간절히 열망하며 기도하는 난댤노회의 교회와 교우들을 생각하였다. 모든 분들을 마음껏 축복하며 특별히 다이어시스의 비숍과 임원들 그리고 우리 희망공동체의 목회자와 직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길 기원하였다.
떠나기 전, 남은 시간을 잘 활용해서 1,2층 건물을 다 살피며 사진을 찍고 리모델링할 구상을 하였다. 이어서 직원 미팅을 하려고 사무실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사무실과 로비는 일찍 온 아이들과 나를 만나려고 온 여러 사람들로 소란하고 북적거렸다.
공부방 학생이 생일이라며 케이크를 들고 와서 축도를 청하였다.
공부방 담임교사의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찾아오셨다.
공부방 졸업생 두 자매와 그 동생이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공부방 졸업생 중에 취업한 학생이 동생과 함께 선물을 들고 찾아왔다.
9월에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동시에 잃은 고아, 자에쉬가 멀리서 찾아왔다.
쌀람마가 건축 중에 있는 자기 집을 방문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칸따 목사님이 집에 와서 아픈 모친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였다.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바쁘다고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일일이 인사하며 기도하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갑자기 현관이 떠들썩해지더니 십여 분의 어르신들이 몰려오셨다. 환송식을 하기로 했다며 각자 선물과 꽃다발과 숄을 들고 오셨다. 어르신들을 설득해서 환송식을 점심 식사 후로 돌리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소음으로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선생님, 저 방금 출발했어요. 저 꼭 보고 가셔야 되요.”
“누구신가요?”
“옛날에 한국에서 만났잖아요.”
5,6년 전에 한국에서 만난 인도 목사라고 하는데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는 나의 확답을 받으려고 대답을 재촉하였다.
“선생님, 1시간 반 후에 도착인데 꼭 만나고 가야 되요. 그냥 가면 안되요.”
“누구신데요? 어디서 오시는데요?”
“한국에서 천사처럼 저를 도와주셨잖아요. 운전 중이니 전화를 끊겠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사람이었다. 그는 끝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아내와 교회 장로님과 함께 인사를 드리러 온다고만 밝혔다.
집을 방문하는 것은 다음에 와서 하기로 양해를 구하고 막 쉬려고 하는 참에 낯이 익숙한 그러나 처음 보는 분이 사무실로 성큼 들어오며 자신을 소개하였다.
“스와룹 전도사입니다.”
“반갑습니다. 아까 전화를 주신 분이시지요?”
“전화 걸지 않고 바로 왔습니다.”
“그래요. 그렇군요. 무슨 일로 오셨는가요?”
“선생님, 저는 선생님께서 주시는 장학금으로 신학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렇군요. 얼굴이 좀 낯이 익었다고 생각했어요.”
“선생님, 작년에 저의 온 가족이 코로나에 걸렸을 때도 치료비를 보내주신 덕분에 온 가족이 치료를 받고 다 나았습니다. 오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제야 찾아뵙습니다.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목회자가 되어서 보답하겠습니다.”
처음에는 낯이 익어서 한국에 와서 도움을 받은 그 사람으로 감을 잡고 대하였는데 그는 한국에 온 적이 없는 우리의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었다. 학생 카드에서 본 사진으로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신학을 하게 된 사연, 그의 신앙의 히스토리를 들려주었다. 현재 그는 제2 주교좌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며 목회자 훈련을 받는 중이며 주변의 목회자들에게 전설처럼 내 이야기를 들어서 꼭 만나보고 싶었다고 하였다. 한참 그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칸따목사님의 안내를 받으며 세 사람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하얀 목회자 유니폼을 중년의 목회자가 반색하며 나를 포옹하였다.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아서 어정쩡하게 인사를 받았지만 전화로 자신들의 방문을 알렸던 분들이 틀림없었다.
애써 옛 기억을 더듬었지만 그의 이름도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신이 나서 연신 자기 아내와 교회 장로님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준비해온 꽃다발과 숄을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의 아내는 내 옷과 남편의 옷 그리고 우리 자녀들의 옷까지 자기가 직접 골랐다며 한 보따리를 선물로 주었다. 동행한 장로는 감사의 인사를 하면서 사과와 과일을 주며 다음에는 교회로 모시겠다고 하였다.
그 분들의 정성과 감사가 보통이 아니어서 마치 내가 그분들을 속이고 있는 느낌이 들을 정도였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나를 한국에서 만난 천사, 사랑을 가르쳐 준 분이라고 소개하였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한국에서 돌아 온 후에 많이 달라졌다며 나에게 남편을 잘 지도해주어서 고맙다고 하였다. 남편이 겸손해졌고 잘 섬기고 나누며 사람들을 잘 이해하고 지도해서 교회에 은혜가 충만하다고 하였다. 전에는 혼자 외출을 하거나 심방을 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자기를 대동하지 않고 외출과 심방을 하며 시장을 돌고 이웃들을 잘 만난다고 하였다. 전에는 권위적이어서 남의 말을 듣지 않았는데 지금은 자기 이야기도 귀를 기울여 주고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잘 들어준다고 하였다.
교회 장로는 목사님이 한국에 다녀 온 후에 겸손해지고 이해를 잘하고 잘 배려하고 양보를 해서 교회가 평안하고 성도들의 관계가 좋아져서 참으로 신앙생활이 즐겁다고 하였다. 그는 목사님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어떤 분인지 보고 싶었다고 하였다.
그의 아내도 남편이 설교할 때나 성경공부를 가르치면서 사랑에 대한 메시지를 전할 때는 꼭 나의 사례를 든다고 하였다.
그는 거듭 나를 만나서 사랑과 겸손을 배웠다고 치하하였다.
하나님께서 성숙되지 못한 자신을 불쌍히 여겨 한국에서 천사를 만나게 하여 변화시켜서 써주신다고 하였다.
세 분이 번갈아 가며 나로 인하여 자신이 변했다고, 남편이 변했다고, 목사님이 변했다고 말하는데 나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어디서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때서야 그가 학생들의 인솔교사로 김천에 왔었고 그 때 나를 따라서 3박4일 동안 전주에 머물렀던 이야기를 하였다.
아뿔싸!
그였다. 그!
생떼쟁이! 겁쟁이! 고집쟁이! 울먹쟁이!
그는 당시 학생 여러 명을 인솔하고 김천에 왔다.
그는 혼자 있는 것을 무서워하고 혼자는 밖에 나가지 못하는 심약한 사람이었다.
학생들은 교환프로그램대로 학교에 가서 한국체험을 하는데 그를 위해서는 프로그램이 준비되지 않았으므로 혼자 시간을 보내며 방을 지켰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면서 그는 노회가 자기를 무시해서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화가 났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자기의 불편한 마음을 알리지도 못하였다. 마음에 불편과 불평이 가득한 그는 학생들을 두고 혼자 먼저 귀국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사실을 아내에게만 알리고 비행기 티켓을 바꾸려고 하였다.
당시 나는 중국에서 일시 나왔다가 우리 난댤학생들이 김천에 교환프로그램으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격려차 방문하였다. 학생들을 학교에서 만나고 난 뒤에 임마누엘 목사님 소식을 듣고 숙소로 찾아갔더니 그가 뿔이 날 대로 나서 가겠다고 가방을 꾸리고 있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황금보다 귀한 시간을 방을 지키며 시간을 죽이는 것이 너무 아깝고 싫다고 하였다.
자기는 한국에 올 때 한국의 교회들을 방문하여 목회자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둘째는 한국교회 문화와 프로그램을 체험하고 셋째는 한국교회 예배와 기도, 지역사회 활동 등을 배우고자 왔는데 환영식 이후에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였고 방만 지키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노회도 학교도 자기를 위한 프로그램은 전혀 준비하지 않았고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자기가 무시당하고 소홀이 취급당하면서 끝까지 있어야할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일단 학생들의 인솔자로 온 그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 아파하며 사과를 하였다. 그리고 우리 한국 목회자들이 영어가 약해서 1:1로 외국 목회자를 자유롭게 만나지 못하니 영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목회자가 있는 교회로 연결시켜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 였다. 다 귀찮고 싫어졌다며 돌아가겠다며 티켓을 바꾸어 달라고 하였다. 적당히 위로하고 적당히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면 될 줄 알았는데 그는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를 일찍이 돌려보낼 수도 없다.
노회와 노회 간의 신뢰 문제도 있고 돌아가는 학생들을 인솔하는 문제도 있고 한국에 와서 상처만 받고 돌아갈 경우에 장차에 듣게 될 많은 이야기들이 난무할 터였다.
나는 상처받은 그를 위해서, 양쪽 노회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 학생들이 안전하게 귀국하도록 돕기 위해서 묘안을 짜내야 하였다. 그리고 예정된 나의 스케쥴을 다 취소하고 그를 전주로 초청해서 3박 4일의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3박4일 전주 프로그램 안을 제시하였다. 나의 제안을 받은 그의 기세가 눅어지고 그의 마음이 평정을 회복하였을 때 프로그램 주관자인 학교에 양해를 구하고 그를 데리고 전주로 내려 왔다.
전주에서 한옥마을 강암서예관을 바라보며 좌측 골목 끝에 있는 “휴(休)”에 숙소를 정하였다. 숙소를 정한 후에 함께 식사를 하고 아침식사 대용식을 사서 주고 돌아 나오는데 그가 까무러치듯이 놀라며 나를 따라 나왔다. 무서워서 혼자 못 자니 옆방에서 자라고 간청하였다. 순간 너무 난감해서 밀린 일을 처리하고 내일 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가야한다고 설명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울먹이며 한사코 나를 말렸다.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냐며 가지 말라 고 붙잡았다. 죽을 수도 있고 아플 수도 있고 나쁜 사람들이 들어와 자기를 해칠 수도 있다며
가지 말라 고 애원하였다. 순간 보통 일이 아님을 알고 주인을 불러서 그를 돌보아달라고 거듭 부탁하였다. 밤에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안전을 확인할 것이라고 말을 해주고 문제가 생기면 벽을 두드리라고 하였다. 그래도 그는 따라오면서 불안하고 죽을 것 같다며 떼를 썼다.
불안하고 두려우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밤 새워 기도하라고 하고 안절부절하는 그를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에 그는 아이가 어머니를 반기듯이 나를 반겼다. 간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였으나 아프지 않았고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하여 둘째 날에 어느 목사님 취임식에 참여를 해서 한국교회의 취임예식을 참관하였다.
그리고 시골교회에 가서 어린이집을 방문하였다. 그 후에 담임 목회자의 하루 일정과 1년 목회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새벽기도회, 금요기도회, 수요기도회와 지역사회에 교회 개방과 지역사회 활동에 교회가 참여하는 일 등에 대하여 일문일답으로 함께 나누었다.
식사는 많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뷔페식당에 가서 자유롭게 편히 먹고 마실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시골교회 목사님의 친절과 겸손한 응대 그리고 유머로 그의 마음속에 앙금처럼 괴어있던 불평과 불만이 사라져서 우리의 일정은 서로를 배우며 탐구하며 보람찬 시간이 되었다.
그 다음 교회에서는 설교 작성, 심방, 기도, 구역 관리 등에 대하여 일문일답을 하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목회자라는 동질성을 확인하며 서로를 격려하며 축복하기에 이르렀다.
저녁에 숙소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데 그가 또 불안을 호소하며 옆방에서 자라고 간청하였다. 나는 다시 주인을 불러서 그의 안전을 부탁하고 돌아서 나왔다. 그가 따라 나오면서 자기가 죽거나 아프거나 위험한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하며 가지 마라 고 애원하였다.
나는 주님께 사랑하는 종의 안전과 생명을 맡깁니다 라고 기도하고 그의 손을 뿌리치고 나왔다.
다음날 주일이었다. 인도에서 올 때 준비해온 설교를 신나게 하였고 나는 통역을 적절하게 하였다. 오전 오후 두 차례 설교를 하고 한국교회의 융숭한 대접을 받은 그는 만족하였고 무엇에나 귀를 기울이고 살피며 열심히 적었다. 그는 한국교회의 영적 역동성에 감동을 받았고 친절한 한국교우들의 태도에 코끝이 시큰해졌다고 하였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한옥마을에 들려서 관광을 하였다. 경기전과 전동성당과 그 일대를 구경하고 쇼핑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나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온 것 같다고 하였다. 그는 나를 사랑의 사람, 천사 같은 사람으로 느꼈다며 많이 배웠다고 참으로 감사하다고 거듭거듭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그 날 밤에도 자기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가지 말라 고 애원하였다. 나는 어제, 그제 무사하였으니 오늘도 무사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악한 것들이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을 하고 나왔다.
4일째 되는 날은 김천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었다.
그는 전에 없이 명랑하였다. 그는 아침 일어나서 주변을 산책하며 구경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자기가 겁이 많아서 혼자 잠을 자지 못하는데 처음으로 혼자 자보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놀랐으며 자신이 며칠 사이에 달라진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주역에 가서 기차표를 사서 주니 혼자는 죽어도 안가겠다고 우겼다. 가다가 사고가 날 수도 있고,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며 김천까지 동행해 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특별히 오송에서 내려서 경부선으로 바꾸어 탈 때 자기가 잘못 타서 행방불명이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아우성이었다. 김천구미에서 내렸는데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알 것이냐고 하소연하였다. 그는 진짜 불안에 떨고 있었다. 아무리 안전하다고 설명해고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주님께 그의 생명과 안전을 부탁드리는 기도를 하고 그에게 A 4 용지 2장을 주었다.
1장은 전주에서 옆 자리 사람에게 보여주라고 하였다.
“ 안녕하세요.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이분은 오송에서 내려서 김천구미에 가는 ktx 기차를 타야합니다. 오송 전에 이분에게
내려야 된다고 말 좀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만약에 문제가 생기면 아래 번호로 연락 주세요.”
나머지 1장은 오송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역무원에게 보여주라고 하였다.
“ 안녕하세요. 도움을 부탁드립니다.
이분은 김천구미에 가는 ktx 기차를 타야합니다. 부디 이 분을 경부선 ktx를 타는 플래트 폼으로 안내 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만약에 문제가 생기면 아래 번호로 연락 주세요.”
혼자는 가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버티는 그를 어르고 달래서 기차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옆 사람에게 부탁을 하였다.
그를 보내고 돌아오면서 김천 학교 프로그램 담당직원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미리 가서 대기하고 있다가 모시고 숙소로 돌아가라고.
그리고 김천구미에 도착할 즈음에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감격에 벅찬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무 일없이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저 혼자 여행을 하기는 처음입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앞으로 혼자 여행하여도 무사하고 안전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목사님의 이름대로 목사님과 동행하며 지켜주십니다.”
“예, 주님께서 저를 지켜주십니다. 감사합니다.”
그 후, 그는 학생들을 인솔하고 인도로 돌아갔다.
그가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 뒤로 6년 동안 한 번도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물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6년 사이에 한국에서 경험을 거울삼아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였다고 하였다.
나를 타겟으로 삼아 치열하게 노력하였고 지금도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나를 사랑의 본보기로 삼았다고 하였다.
그가 인도 교우들에게 사랑의 사람이라고, 천사라고 예화로 사용하는 내가 3박 4일 동안 해준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단순한 것이었다.
그가 한국에 와서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고 상처 받은 것을 인정해주고 이해하며 그를 존중해준 것이다. 3박 4일 동안 단 한번도 구박하거나, 비난하거나, 야단치거나, 놀리거나, 비웃거나, 무시하거나 질타하거나 인격적으로 모독하지 않았다. 묵묵히 그의 말을 다 들어주었다. 그러나 YES와 NO는 분명히 하였고 NO일 때는 설명을 하며 이해와 양해를 부탁하였다.
아무 것도 아닌 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비밀한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하며 사용하심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2022. 12. 6.화요일 새벽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