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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8일(대림절 첫 번째 주일)
마태복음 25:1~13
깨어 기다리라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when?
오늘은 교회력으로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성탄절 전 4주간 동안, 아기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을 기다리고, 이 땅에 다시 오실 일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대림절의 주제는 ‘기다림’입니다. 교회는 이 기간 동안 회개와 절제, 기다림을 상징하는 보라색을 주로 사용합니다. 또 대림절 기간 동안 네 개의 초를 장식해서, 매주 하나의 촛불씩 불을 밝히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대림절 첫 주에 보라색 초에 불을 밝히고, 매주 좀 더 연한 색깔의 초에 불을 밝힌 후에, 마지막 주에는 흰색의 초에 불을 밝힙니다. 교회는 매주 초에 불을 밝히며 성탄절을 기다렸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었던 마태복음 25장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열 처녀 비유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는 노아의 비유, 도둑의 비유, 지혜 있는 종과 미련한 종의 비유,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들은 우리들이 종말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마태복음 24장부터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오셨을 때에 제자들은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의 자존심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건물에 정신이 팔려 있던 제자들에게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
이러한 예수님의 선언을 들었던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과연 성전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모세와 다윗과 솔로몬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이야기들이 선포되던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신앙의 자존심과 같은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곳은 몰라도, 하나님의 임재와 돌보심이 머무는 성전만큼은 절대로 무너질 수도 없고, 무너져서도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이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마태복음 23장 37절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이고 돌로 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던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마 23:3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와 감람산에 오르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조용히 와서 물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 24:3).”
제자들의 질문에는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일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과연 세상 끝에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펴보고 있는 열 처녀 비유는 이 중 두 번째 질문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이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습니다(1절). 이 열 명의 처녀들은 신랑 일행을 안내하는 신부의 들러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열 처녀들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2절). 미련한 자들은 손에 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3절). 반면에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4절).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열 처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신랑이 훨씬 더디 온 것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던 열 처녀들은 피곤에 지쳐 모두 졸며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생리현상으로서의 잠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잠도 자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은 그 반대의 이야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잘못된 종말의식에 빠져 마치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것처럼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24:4)”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미혹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라며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인데, 이 모든 것은 재난의 끝이 아니라 재난의 시작일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아이를 출산해 보신 여성분들은 큰 산통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통이 있다고 해서 곧바로 아이가 출산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산통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일이 수도 없이 반복하고 나서야 어느 한 순간에 아이가 태어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곳곳에 기근이 일어나거나 지진이 일어난다고 해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곧바로 오실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단지 재난의 시작일 뿐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오시는 때와 징조는 주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는 여러 개의 징조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는 이러한 징조들은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관한 징조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관련된 징조들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4절에서 예수님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고 예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관련해서는 분명한 징조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해서는 징조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끝에 일어날 주님의 재림의 때와 징조를 알 수 없습니다.
what?
열 처녀들이 모두 피곤에 지쳐 잠을 자고 있던 사이, 드디어 신랑이 혼인 잔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열 처녀들은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는 소리를 듣고, 모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들은 황급히 일어나 부랴부랴 준비해 주었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련한 자들의 등불에 기름이 부족하여 불이 꺼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다급한 나머지 슬기 있는 자들에게 기름을 좀 나눠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슬기 있는 자들은 그 부탁을 거절했습니다. 슬기 있는 자들은 기름을 둘 다 나눠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니 차라리 기름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말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던 처녀들은 기름을 구하기 위해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고, 미리 여분의 기름을 준비해 두었던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문은 닫히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기름을 구한 처녀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이미 잔칫집 문이 닫힌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주여, 주여 우리에게 문을 열어 주소서.”라고 간청하였지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는 신랑의 음성을 듣고 말았습니다. 이 비유는 “깨어 있으라.”는 경고로 끝을 맺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과 두 가지 교훈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무엇에 비유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무엇에 비유하셨습니까?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1-2절).”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열 처녀들의 모습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누가 미련한 자이고, 누가 슬기 있는 자입니까? 열 사람 모두 손에 등을 들고 있기에 누가 미련한 자인지, 누가 슬기 있는 자인지 그 형식상 모습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3~4절에 그 기준이 나옵니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슬기 있는 자들은 등과 함께 그릇에 여분의 기름을 담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보이지 않던 부분에서는 큰 차이가 났던 것입니다. 등만 들고 있으면 무엇 합니까? 등과 함께 여분의 기름을 준비해야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겉모습만 가지고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겉모습이 그럴싸해 보일지 몰라도, 예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우리를 다르게 평가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교회에 다니고, 주일성수를 하고, 십일조 생활을 하고, 직분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슬기 있는 처녀들이 눈에 띠지 않는 기름을 준비했듯이, 여러분들도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우수개소리로 ‘아내 치맛자락이라도 붙잡고 천국에 간다.’고 이야기합니다만, 영적인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다급한 나머지 기름을 나눠달라고 요청하자 슬기로운 처녀들이 이를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영적인 현실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다른 사람의 믿음을 빌려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두 번째로, 왜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나누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해보면,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사용하는 것이 더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들과 기름을 나누지 않은 처녀들이 이기적이고 매몰차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이 아닌가? 혼자만 잔칫집에 들어가려고 상대방의 딱한 처지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과연 사랑인가?”라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슬기로운 처녀들의 행동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들은 자신들의 본분에 합당한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들은 신부의 들러리로서 신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자신이 들러리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알았고, 자신들의 삶의 자리를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또한 슬기로운 처녀들은 혹시 당할지도 모를 일을 염두 해두고 미리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들이 준비한 기름은 다른 사람과 나누어 쓰려고 준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기름은 오직 각자의 등불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만 사용되어져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름이 유한한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유한한 자원을 소중히 여겨 그 목적에 부합하게 사용할 때 놀라운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기름은 다른 사람과 나누어 쓰려고 준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름은 오직 등불을 밝히기 위해 주인으로부터 받은 선물일 뿐이었습니다. 슬기 있는 처녀들이 미리 준비했던 기름은 자신들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삶의 우선순위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소중한 기름을 낭비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젊음과 건강을 주셨고, 아울러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들은 결코 낭비되어서는 안 되며, 그분의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how?
성경을 뒤로 한 장 넘겨서,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던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들고 나와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제자들이 분개하며 이 여인에게 다음과 같은 비난의 말을 했습니다.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마 26:8).”
화가 난 제자들은 이 여인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머리에 비싼 향유를 부었던 이 여인의 행동은 오늘날로 따지면 뇌물청탁을 금지한 김영란 법을 어긴 일처럼 보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행동이 좋은 일이라고 평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제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 26:12).”
예수님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축복된 일입니까? 자신의 소중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했던 이 여인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여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입니다.
노아는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갈 때, 방주를 지으면서 주님 만날 날을 준비하였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그 집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줌으로써 주인과 만날 날을 준비했습니다. 슬기 있는 다섯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함으로 신랑과 만날 날을 준비하였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았던 자들도 자신들이 받았던 것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으로 이득을 남겨 주인과의 만남을 준비하였습니다. 주님께 칭찬받았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받았던 것이 무엇이던 간에,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잘 활용하여 주님을 만날 날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깨어 있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언제 주님을 만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기름으로 여러분의 등불을 밝히십시오. 여러분이 주님께 받은 기름이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재정입니까? 재능입니까? 아니면 시간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여러분이 주님께 받은 기름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것을 결코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