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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이 지났으나 6·25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한국전쟁은 남북관계는 물론 미-중 관계를 포함한 지금의 국제질서를 낳은 핵심 사건이자, 전후 한국 사회가 감당해야 했던 갈등과 질곡의 의식체계 그 자체였다. <한겨레>는 6·25 70돌을 맞아, 한국전쟁 연구에서 출발해 지금의 한국 사회가 마주해야 할 다양한 담론과 성찰을 제시해온 박명림 교수의 기고를 세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한국전쟁은 현대 세계와 한반도의 향방을 결정한 초대형 사건이었다. 70주년 오늘의 관점에서 보건대 그것은 확고부동한 ‘세계형성적’ 사건이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아직 유동적이었던 세계질서는 이 전쟁을 계기로 비로소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확실하게 정렬되었다. 막 싹트던 냉전질서는 이 전쟁을 계기로 비로소 전세계적 차원에서 고착되었다. 그리고 한반도는 아직도 냉전의 최후 잔기로 남아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9년 6월30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군사분계선 북측 지역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 군사분계선을 넘어 오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아메리카 대륙의 동쪽 끝 미국 케이프 코드로부터 지구를 완전히 한바퀴 돌아 유럽의 서쪽 끝 벨파스트에 이르기까지 한국전 참전 기념물과 명부는 온 세계를 아우른다. 두 발로 직접 곳곳을 들러 옷깃을 여미며 확인한 바다. 미국 역사에서도 한국전쟁은 당시까지 참전한 단일국가 전쟁으로서는 최대 희생을 치른 전쟁이었다. 더 큰 희생 규모는 자기들 남북전쟁과 1차대전과 2차대전뿐이었다. 현대 중국 역사에서도 한국전쟁은 외국 전쟁에서 중국인들이 단연 최대로 희생된 전쟁이었다. 5대양 6대주에 한국전쟁의 흔적과 상흔이 없는 곳은 없다. 한국전쟁은 세계인들의 목숨과 함께 세계질서를 정초한 세계전쟁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어떤 성격과 측면이 이 전쟁으로 하여금 세계생명에 바탕해 ‘세계건설적인 동시에 세계파괴적인’ 세계형성 역할을 수행하게 하였는가? 그것은 이 전쟁이 세계내전-세계시민전쟁이라는 단순하고도 명백한 사실 자체로부터 나왔다. 특히 이 전쟁은 세계시민전쟁의 전형이자 정점이었다. 당시 한반도는 한국민들과 세계인들이 인종과 민족, 피부와 국적을 초월하여 자신과 세계의 체제와 이념, 역사와 문명을 판가름 짓는 세계내전-세계시민전쟁의 최전방 무대이자 전역(戰域)이었다.
세계시민으로서 한국인과 세계인들의 분리할 수 없는 공통과제, 즉 자유냐 공산이냐,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의 건곤일척의 그 세계내전적 성격이 이곳에서 한국과 세계인들의 비극과 희생을 전세계적 규모와 차원으로 밀어올린 요체였다. 세계혁명과 세계내전 초기의 프랑스와 러시아처럼 당시는 한국이 곧 세계였고 세계가 곧 한국이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단순한 내전이나 국제전이 아니었다. 계급전쟁과 대리전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한 해석은 학문적 이론적 오류임은 물론, 한국인들과 세계인들의 희생에 대한 모독인 동시에, 무엇보다 이후 한반도 평화과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 지적 실천적 장애였다.
이 전쟁의 실질적인 도래는 소련-중국-북한 사이의 세계공산주의 진영의 국제 합의로부터였다. 전쟁을 제안하고 시작한 김일성의 극단적 몽매는 그가 국제 지형과 전략을 읽지 못하는 아주 작은 군부대의 지도자 출신이었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1950년 북한공산군의 38선 월경은 국제 공산주의진영의 비밀스러운 전략·논의·연대·결정의 산물이었다. 전쟁의 기원 역시 미국과 소련의 38선 분할에 대한 국제 결정이었다. 전쟁의 방어와 저지 또한 미국 주도하에 국제기구 유엔의 결정과 참전으로부터 가능하였다. 합의된 세계분할선의 침범에 대한 세계대응이었다. 전쟁에 사용된 온갖 무기는 모두 외부세계로부터 온 것이며, 전쟁의 표면 이유처럼 보였던 헛된 이념 역시 그러하였다.
2차대전서 농락당한 스탈린은 한국을 방혈전략 도구로 삼아 미국·중국이 3년 맞붙는 동안세계공산진영·동유럽 일거 장악, 제국과 제국 틈새 한국 더이상 방혈전략에 말려선 안돼
국제시야와 지혜가 절실한 이유
전쟁의 주요 결정과 양상은 워싱턴-도쿄-서울, 그리고 모스크바-베이징-평양의 세계 정치·군사지도자들에 의해 밀접히 연동된 채 좌우되었다. 전쟁 종결을 위한 전략숙의와 협상도 그러하였다. 따라서 이 전쟁의 마감을 위한 협상 또한 세계협상, 특히 세계진영협상이었다. 정전 역시 워싱턴-서유럽-도쿄-서울 대 모스크바-베이징-동유럽-평양 두 진영의 국제 합의였다. 정전협정문은, 유엔은 말할 필요도 없이 중국 또한 사상 처음으로 외국에서의 전면 전쟁에 서명한 국제 합의 문건이었다.
독일과 일본 전체주의에 함께 맞서 싸운 연합국 미국·영국과 소련·중국은 이 전쟁에서는 적으로 만났고, 반대로 일본과 독일은 이 전쟁을 계기로 미·영의 동맹국가로서 국제사회에 복귀하였다는 극적인 역전관계야말로, 이 사태가 세계사의 물줄기를 어떻게 돌려놓았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동양과 서양의 기록된 역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적과 동지를 이토록 완전히 뒤집어놓아 세계질서 자체를 재편한 전쟁은 정녕 드물다.
하여 전후 한반도 정전체제는 동아시아와 한반도에서의 세계냉전과 세계안전을 담보하는 역내 국제체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남북관계와 정전체제 해체 및 비핵평화가 분리된 것은 후자가 국제 문제였기 때문이다. 물론 휴전선은,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는 유일한 세계이념분할선이다. 냉전시대 세계 자본주의는 베를린 장벽과 휴전선 장벽 밖이었고, 사회주의는 휴전선과 베를린의 장벽 안쪽이었기 때문이다. 둘은 유럽과 동아시아를 가르는 분할선이었다. 결정적인 차이는 전자가 2차대전의 산물이었음에 반해 후자는 한국전쟁의 결과였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반도 평화를 어떻게 정초할 것인가? 인류에게는 오래된 고통완화법과 질병치료법이 있다. 고정농양(固定膿瘍)과 방혈(放血)이다. 역설이다. 몸이 아플 때 치료를 위해 특정 부위로 고름을 몰아놓고 뽑아내거나, 신체의 어느 곳에선가 의도적으로 피를 흘리도록/뽑아내도록 하여 생명을 살려내는 치료법이다. 이들은 ‘방혈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대국과 제국들이 국제 전략으로 사용한 전례가 많다. 물론 약소국들에 대한 희생양 전략도 같다. 그럴 때 전체 몸과 세계, 또는 적어도 자기들의 고통과 희생은 완화된다. 한국인들의 국제 시야와 지혜가 절실한 이유다.
2차대전 동안 처칠은, 히틀러와 스탈린이 서로 죽도록 싸우도록 원대한 방혈 전략을 썼다. 루스벨트와 트루먼도 같았다. 대성공이었다. 철저히 농락당한 스탈린은 승전국인지 패전국인지 모를 정도로 피해가 컸다. 전후 스탈린은 서방에 대한 복수를 꿈꿨다. 즉 한국전쟁은 2차대전의 뒤집힌 연장전이자 사실상의 3차대전이었다. 그는 한국을 제한된 방혈 대상으로 선택하여, 김일성의 전쟁 의지를 교묘히 활용하고, 주저하는 마오쩌둥의 동의를 끝내 견인하며, 미국의 참전을 유엔에서 절묘하게 저지하지 않고, 중국의 개입을 종용하는 동시에 소련 공군 지원을 거절하여, 그러고는 전쟁의 조기 종식조차 반대하며 미국과 중국을 맞붙여놓아 동아시아에 3년이나 묶어둘 수 있었다.
미중균형과 한미동맹비핵화와 일본평화헌법 유지는한반도 평화의 국제적 요건…‘완전한’ 핵폐기와 체제보장은 정전체제와 북핵체제라는두 안보체제를 넘는 지름길이다
동지를 활용해 적을 제압하고 적을 이용해 동지를 견제하는 처칠의 환생, 즉 처탈린(Churtalin)이었다. 그러는 동안 소련은 북침으로 위장한 사전 세계전략에 바탕해, 이를테면 “오늘은 조선(북한)! 내일은 독일(동독)!”이라는 간단명료한 ‘미제와 남한의 침략’ 구호를 조작하여 세계 공산진영과 동유럽을 일거에 장악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전쟁과는 정반대의 전략인 ‘스탈린노트’를 통한, 독일 문제의 전략적 균형도 달성하였다. 스탈린의 방혈 전략에 대한 증거는 넘쳐난다. 즉 그는 전혀 오판하지 않았다. 그의 죽음과 함께 한국전쟁이 종식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한국은 대륙과 해양, 제국과 제국, 이념과 이념, 문명과 문명 사이의 전형적인 경계국가·교량국가다. 따라서 세계안정과 균형의 시기엔 세계에서 가장 오래 평화로웠던 반면 세계대결과 질서재편기에는 가장 피해가 컸다. 당대의 시기별 구실 역시 가교역할과 분열역할로 완전히 갈렸다. 이순신·유성룡·이승만·안중근·신채호가 통찰하였듯 한국에서 100년, 200년, 300년 태평성대와 장기 평화는 일반이었다. 그러나 일단 도래한 전란은 대비극을 수반하였다. 제국들한테 경계국가는 늘 상대진영으로 넘어가거나 상대진영을 막기 위한 방혈 대상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7년전쟁(1592~98), 청일전쟁(1894~95), 식민침략과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전쟁 모두 예외가 없었다. 한국이 고정농양과 방혈 전략에 절대 말려들어선 안 되는 이유다.
그러나 경계의 침범은 또한 침략국가의 붕괴를 초래한다. 경계국가 한국이 고구려·백제·신라·고려·조선을 포함해 모두 인근 제국들보다 훨씬 더 장기 생존한 연유다. 수나라로부터 시작해 도요토미 히데요시, 명나라, 청나라, 군국 일본, 스탈린… 모두 한반도 침략이나 전면 연루 이후 끝내 멸망·조종하였다. 이는 역사의 숨은 비밀이 아니라 안전판으로서의 경계국가가 균형 파괴자에게는 독침으로 작용하는 법칙의 반영이다. 생존을 위해 결정적 한 방을 갖는 고슴도치나 분산균형(hedging) 전략이라는 말이 모두 경계라는 같은 말에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게다가 이 말은 본래 피난처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경계국가 한반도 평화의 국제적 필수요건은 간단하다. 미-중 균형과 한-미 동맹, 일본 평화헌법 유지, 그리고 남북 비핵평화공존이다. 미-중이 대규모로 직접 충돌한 것은 한국전쟁이 유일하였다. 중국이 대국으로 부상한 결정적 계기 역시 한국전쟁이었다. 미국과 중국은, 소련 및 군국일본과 달리 모두 연성제국이기 때문에 직접 전쟁 충돌의 위험은 없다. 특히 미·소 양강 시기 동안에 빈발했던 아태지역 전쟁이 미-중 국교 정상화 이후에는 전무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한반도 평화의 기회공간이다. 한-미 동맹은 자체가 한국전쟁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지역 다자안보기구가 없는 상태에서 중국·러시아·일본·북한을 동시에 역내 안보균형으로 이끄는 균형추가 아닐 수 없다.
독일의 분할에 해당하는 국제평화조치로서의 일본의 평화헌법에 대한 개정은 안 된다. 반드시 국제 동의를 받아야 한다. 만약 개정할 경우 한국은 전쟁 가능 국가 일본과 핵 국가 북한 사이에 위치하게 된다. 누천년 동안 선조들이 우려했던 이른바 복배수적(腹背受敵) 상황이다.
비핵평화와 국제 보장은 한반도 평화체제로 가는 제일 요건이다. 북한의 핵 국가로의 공식 등장은 한반도 평화엔 재앙이다. 북한은 반드시 핵을 폐기해야 한다. ‘완전한 핵 폐기’와 ‘완전한 체제 보장’의 교환을 통한 평화체제 구축이 해답이다. 즉 국제적으로 한반도 장기 분단과 비핵평화의 요건은 같다. 완전한 체제 보장은 정전체제와 북핵체제라는 두개의 한반도 안보체제를 동시에 뛰어넘는 지름길이다. 특히 북-미 수교는 필수다.
미국은 한-중·한-소 수교,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제네바 기본합의, 6자회담의 9·19 공동선언 등 북-미 수교의 절호의 기회를 계속 놓쳐왔음을 명심해야 한다. 북-미 수교는 미국을 위해서도 유익하다. 과거 적과의 수교는 언제나 미국 외교의 득책이었다. 1933년 소련과의 수교는 반나치·반파쇼 전쟁 수행을, 전후 구적국 독일·일본과의 수교는 반소전선 구축을, 중국과의 수교는 소련 포위와 냉전 해체를, 베트남과의 수교는 중국 견제를 가능하게 하였다. 모두 적대 직후 또는 한 세대 이내의 수교였다. 전후 북-미 적대는 길어도 너무 길다. 핵 폐기-체제 보장-북-미 수교-평화체제를 교환하는, 한반도 항구 평화를 위한 전력투구가 절실하다. 사력을 다하자. 분단공존이 70년, 아니 170년을 더 가더라도 꼭 그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