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사설 제24권 / 경사문(經史門) / 영봉서원(迎鳳書院)
성주(星州)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창건할 때 처음에는 이문열 조년(李文烈 兆年)과 이문충 인복(李文忠 仁復)과 김한훤(金寒暄)을 모두 합향(合享)하려고 하였었다. 그러나 제생(諸生)들은 모두 한훤만 독향(獨享)으로 하려 하였고, 문충을 배향하려는 자는 10여 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또 문열을 함께 병향(幷享)하려고 하면 모든 선비는 들은 척도 안하면서 신을 신고 가 버렸다. 이는 대개 문열은 유상(遺像) 한 폭이 있었는데 손에 수주(數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퇴계(退溪)는 이르기를, “한 시대의 습속은 비록 어진 자로서도 면할 수 없으니, 그 화상을 없애 버리고 자그마한 결점을 가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여사(麗史)》에 상고해 보니, 두 이공(李公)은 모두 도학(道學)을 일컬을 만한 점이 없고, 그때 정충(貞忠)과 대절(大節)은 문열이 훨씬 나았다. 이 때문에 퇴계도 깊이 애석하게 여겼던 것이다.
문열은 충혜왕(忠惠王) 때에 벼슬하면서 죽음을 피하지 않고 과감스럽게 간하였으나 끝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벼슬을 내놓고 시골로 돌아와서 죽었으니, 시종이 한결같이 깨끗하고 분명한 인물이다. 문충은 공민왕(恭愍王) 때에 벼슬했는데 역시 강직하다는 칭찬이 있었다. 임종시에 그의 아우 인임(仁任)이 염불(念佛)을 조금 해보라고 권하자 공은 대답하기를, “내가 평생에 영불(佞佛)은 하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내 마음을 속이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거절하였다.
그는 일찍이 두 아우인 인임과 인민(仁敏)의 위인을 미워하여 이르기를 “ 나라를 망하게 하고 집안도 보전하지 못할 자는 반드시 두 아우일 것이다.”라고 했는데 나중에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대개 그때 풍속은 불교(佛敎)를 숭봉하지 않은 이가 없었기 때문에 문열 같은 어진 이로서도 면치 못했었다.
그런데 오직 문충만은 온 세상이 그르다 해도 혼자 꿋꿋하게 서서 제대로 행한 자라 할 수 있다. 그때 이단(異端)을 물리친 공은 이미 오도(吾道)에 대해 빛나게 되었으니, 죽어서 낙조(樂祖)로 된 것이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문열 같은 이에게 이르러서는 비록 기절은 추앙할 만하나 속습을 면치 못하고 이교(異敎)에 빠지게 되었으니, 자그마한 결점이 아니라 할 수 없다. 비록 가리고자 한들 제대로 되겠는가?
화상은 없앨 수 있다 할지라도 마음속에 지닌 것은 고칠 수 없는 것인데 덮어놓고 다 같이 일컫는다는 것은 또한 미안할 듯하다.
[주-D001] 영봉서원(迎鳳書院) : 1559년(명종14) 성주 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景麟)이 고을 사림과 함께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과 문충공(文忠公) 이인복(李仁復)을 위하여 연봉산(延鳳山 또는 영봉산(迎鳳山)) 밑에 세운 서원이다. 연봉서원(延鳳書院)이라고도 한다. 성주에 송나라 정이(程頤), 주희(朱熹)와 관계되는 이천(伊川)과 운곡(雲谷)이라는 지명이 있는 까닭에 1568년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이황에게 품의하여 서원의 명칭을 천곡(川谷)으로 바꾸었다. 임란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 정이(程頤)와 주희(朱熹) 두 선생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종향(從享)하였으며, 서원 건립의 계기였던 이조년과 이인복은 논란 끝에 서원 곁에 별도로 충현사(忠賢祠)를 지어 제향하게 되었다.[주-D002] 김한훤(金寒暄) : 조선 시대 연산(燕山) 때 김굉필(金宏弼)의 호. 자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
ⓒ 한국고전번역원 | 김철희 (역) | 1977
星湖先生僿說卷之二十四 / 經史門 / 迎鳯書院
星州迎鳯書院之剏也始欲以李文烈兆年李文忠仁復金寒暄合享諸生欲獨享寒暄者皆是欲配文忠者十餘人若欲並祀文烈則諸生舉納履而去盖文烈有遺像一幅手執數珠故也退溪以為一時習尚雖賢者未能免俗除畫像掩小疵未為不可余考麗史二李皆未有道學之可稱而其貞忠大莭文烈為優此退溪所以深惜之文烈仕忠恵朝敢言不避死及不用致仕歸鄕而卒始終光明人也文忠仕扵恭愍亦有剛直聲臨没其弟仁任勸之念佛公曰吾平生不侫佛不可自欺而為之也甞惡兩弟仁任仁敏之為人曰敗國亾宗者必二弟也後果如其言盖當時之俗莫不崇奉佛敎雖文烈之賢亦不免焉惟文忠者殆所謂舉世非之而特立獨行其攘斥異端之功已是吾道之光死為樂祖不亦宜乎至如文烈雖氣莭可仰不能免俗受變扵異教不可謂小疵雖欲掩得乎畫像可除而所存不可易昧然混稱抑恐未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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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溪集 外集 卷六 / 詩 / 贈迎鳳書院 鴨脚亭諸賢
文杏陰濃翠幄成,溪風吹散讀書聲。
歸來只怕黃昏近,辜負方塘霽月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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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溪集 內集 卷四 / 雜著 / 與迎鳳書院諸生書
千年荒草,得聞絃歌之聲。仁父樂育之誠,已爲可敬。而諸賢講論絶學,精思超詣。想群居切磋,多所啓發,喜幸喜幸。
蹇拙作吏無成,只此差强振發昏憒,爲益大矣。幸相責厲,不卒爲小人之歸也。
聖門路陌,不在高遠。養之於燕閒靜一之中;明之於學問思辨之際,內外交修,勿忘勿助,循此而進,高可爲聖賢,下不失爲吉人善士,所患用心之不力耳。諸賢想已神會,不待云云。
溪源灑落,林亭爽塏,樂玩其中,亦爲高明之一益。望須及時征邁,以副遠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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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溪集 內集 卷四 / 雜著 / 與迎鳳諸賢書
高閣風亭,蕭散絶塵,想炎熇遁迹,不扇而淸,群居輔仁,爲益必深。且得子强講論有緖,信從者多,必獲心悅之效。
良公務拘纏,病懶相仍,未得連日聞講評之樂,只自欣慕而已。第念諸賢已脫俗見,方篤爲己之功,此在古人亦不昜得也。
然君子之學,必要其成,聖賢之敎,自有成法,欲但爲淸修善士而已,則猶或可也,如欲循聖賢塗轍,做人底樣子,則入道門庭先後次第,不可亂也。
必須先讀《小學》,以立根基於彝倫日用之常、節次容止之則。一一講而明之,使踐履堅定,而涵養純熟。至於《大學》之成功,特出其精彩而已,誠不可凌躐而進也。主敬之功貫動靜、合內外,若可以補欠缺。而於人倫常行節目,初未嘗講究,則已無本領之可據,而終無以爲致知力行之地。雖欲收其放心而養其德性,不亦難乎?
故程夫子云:“灑掃應對,便是形而上者。” 朱夫子晩年亦云:“近方從事《小學》,以補前日粗疏脫略之咎。” 蓋聖賢日用,常在卑近。易於近者,非務本者。所以古人到老,覺悟亦消,先定脚跟,然後循序漸進,蓋爲是也。
諸君今已蹉過,不及追悔,只用旬月之功,玩心其中。固肥膚筋骸之束;養良知良能之本,以爲培根達支之具,則補塡之功,亦不恨其晩也。諸君少日,雖已讀過,必未會用力之地,及今更加理會,稽古人立敎之本,而參諸《近思錄》,以愽其義理之趣,則學之本末,庶乎其兼擧矣。
且《心經》一部,雖若散漫,而附註先儒格言,專以治心爲主,主敬窮理之要,殆無餘蘊,而尤痛著於心術隱微之際,所謂“一病一藥”者,亦不可以不之講也。
於此三書,兼做鑽硏之功,然後會其極於四書,不紊其先後之序,則思辨之功,逈異於記誦之時。而表裏精粗、全體大用,可以粲然明白而一以貫之,他日事業,亦不過擧此而措之耳。正如榟匠輪輿,必以規矩,雖巧拙有異,而皆可爲適用之器,豈可謂高遠而不可行哉?
然爲士者或以高談性命,反爲擧業之累,至有群怪指目,此則鄙夫之陋見也。心地虛明,善應萬變,則從此流出。亦何適而不可通哉?否者,程朱先生妙年取第,豈皆屈首學爲時文哉?所患者,學之未至耳。必欲去此而業彼,則其志秪在利祿而已。朝家亦何用夫能言之鸚鵡哉?況二者之業,亦有日月之分數,則亦無害於所急也。然比古人藏器待聘者,其輕重取舍,必有在矣。願諸君勉之。
顧以冷淡生活,爲辛苦工夫。非好學之篤,眞如芻豢之悅口,則亦未必久於其道也。譬如上山,各自努力,豈待他人之誘,而亦豈他人之所能助也?言之者輕,未足取信,荷諸君不外,敢布區區,不審高明以爲如何?幸須切磋進修,以當大受,時及緖餘,以撥蒙吝。暇日溪堂,承顔面質,亦所勤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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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溪集 外集 卷九 / 附錄 / 行狀
至於星州,號稱難治,而公則不自以爲難,其興學一事,視前之兩邑,用力尤爲深至。先是盧牧使 慶麟,建迎鳳書院于古碧珍之墟,公因而增飾致美,又重修文廟,恢拓舊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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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先生文集卷之四十二 / 記 / 迎鳳書院記 後改川谷
昔在三代之隆。敎法極備。家有塾。黨有庠。州有序。國有學。蓋無適而非學也。降及後世。敎壞而學崩。則國學鄕校。僅有文具。而家塾黨庠之制寥寥焉。至使篤志願學之士。抱墳策而無所於歸。此書院之所由以起也。夫書院之與家塾黨庠。制雖不同。義則同歸。其有關於風化也甚大。故知道之士。願治之主。莫不於是而拳拳焉。所以中國書院。鼎盛於近古。我東書院。亦昉於今日。皆所以廣敎思敦化原也。而其有廟以祀先賢者。則其於崇道作人之方。尤爲備也。嘉靖三十有四年。象山盧侯慶麟出牧于星。治績甚著。而尤以作人材興敎化爲急務。且以本州居一道之中。山川秀美。異材之出。前後相望焉。其尤者有若李文烈公兆年。當亂世事昏主。能奮忠竭誠。犯顔諫諍。不憚逆鱗之禍。及其終不可回。則飄然脫屣。匹馬還鄕。以全臣節。有若李文忠公仁復。體質弘重。文學高古。名聞中華。其遭亂則建討賊之義。於逆髡則有先見之明。而又能善處於二傲弟之間。皆有補於名敎。其在隣邦而往來。有若金先生宏弼。身任道學之倡。爲近世儒宗。則寔有功於斯文。慨然欲於其境內。依山林卽閒曠。建置館宇。以祀以養。庶可以作新乎多士。闡揚乎聖化矣。歲戊午八月。侯卽釋奠于先聖先師。州之文士咸萃焉。齊行合辭。以書院爲請。侯於是嘉與僉同。乃相厥宜。得地於古碧珍國之墟迎鳳山之趾。伊水經其南。雲谷在其東。其中窈而深。廓而有容。乃因故廢佛寺之基。滌祓而新之。經始於是秋。至明年己未而功告訖。凡爲屋五十餘間。正堂曰誠正。東齋曰克復。西齋曰敬義。又有高明之樓。風詠之壇。而總名之曰迎鳳書院。乃於院東。立祠廟若干楹。以奉三賢之祀。乃定祭式。乃簿物品。庖廩門墻。旣備旣鞏。土田臧獲。旣優旣充。旣又貿書千餘卷以藏之。立爲學規。督率有方。章甫雲集。濟濟乎洋洋乎厥有其緖焉。嗚呼。侯於是擧。可謂任之勇而力之勤。慮事周而及物遠矣。雖然。上國之於書院。必擇儒先之知道者。爲之山長。主盟以倡率。故道術不分。而學者知所趨矣。若吾東方。則院敎新興。而此典未講。儻或入院之士。爲學之方。不幸而不出於古人爲己之學。而惟科目譁競之事。是尙是務。則雖日從事於書林藝苑之中。而求邇聖賢之門墻。比如適越而北轅。反之於心而無得。揆之於事而太乖。豈不可畏之甚耶。嗟乎。擇里擇術。孔孟之深戒。爲今之士。科擧之習。雖不能全廢。其視聖賢爲己之學。正心修身之道。則內外本末輕重緩急之序。判然如霄壤之不侔矣。學者誠能審擇於此。而勇決其取舍。以其孶孶嚮道之誠。易其汲汲馳外之心。本之於性分。而求之於方冊。則凡古昔聖賢一言一行。皆可師法。而況於此邦三賢忠義之實。道德之光。無異於親炙之者乎。夫忠義道德。本非二致。而道德爲之本焉。則服小學以培根本。遵大學以立規模。力持誠敬而發揮六經。以期至於聖賢之域。此金先生爲學之大略也。爲仁由己。有爲若是。眞知而不眩於空言。實踐而不騖於他歧。睹諸扁而如臨履。瞻祠宇而想函丈。麗澤相資。仞山莫虧。則高者可入室而升堂。下者猶不失爲吉人脩士。處則正家而表俗。出則匡國而濟時。斯無負立院養士之本意矣。若昧於一念之差。而終歸於千里之繆。讀書。惟記誦之是力。綴文。惟剽竊之爲工。薾然終日。役心於利之一字。則其終身所役者。亦不過此一字而已矣。夫人之責重於士者如何。而士所以自處者如此。寧不爲吾徒之羞病。而俗人之口實也耶。敢請院之諸生。毋自滅裂。而各奮其志。思盡力於此學之名實。則於聖賢之遺敎。國家之迪材。盧侯之所望。其庶幾乎。若其羣居游息之樂。則各在其人之自知。固不待滉言。然而樓之高明。可以體子思鳶魚之妙。壇之風詠。可以追曾點鳳凰之象。亦在夫學問之功。深造而自得之耳。不然。欲想像揣摩於顧眄之際而知之。則亦終於不可得而已。學者其無以爲易而忽之哉。嘉靖庚申七月下澣。眞城李滉。記。